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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도.,큰코끼리바위.
역사가 햇빛을 받으면 신화가 되고
역사가 달빛에 묻히면 전설이 된다.
후삼국시대 초, 궁예(弓裔)의 장수였던.,왕건(王建)
나주 일대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군에게
크게 이긴 싸움으로서 금성(錦城)이 전라남도 나주의
옛 이름인 데에서 ‘나주싸움’이라고도 하는.,금성전투.
'금성전투'에서 승리한.,왕건.
고려를 창업하는 발판이 된다.
...................금성(나주)전투..................
발생 : 903년(제1차), 910년(제2차), 914년(제3차) |
종결 ; 903년(제1차), 910년(제2차), 914년(제3차)
관련장소 : 나주(羅州), 목포(영산포), 무안, 영암
- 관련인물 -
나주오씨(羅州吳氏),
장화왕후(莊和王后)
견훤은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를 차지해 후백제
궁예는 경기·황해·강원도 중부를 장악해 후고구려.
왕건은 궁예 부하로 들어가 중부공략에 공을 세웠다.
왕건은 선조 대대로 해상무역 종사,
부를 쌓아 상당한 세력을 키웠으며,
이 지방 일부 해상 세력과 궁예 휘하
왕건 세력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왕건의 세력은 나주 중심으로
서남해안 장악해, 후백제가 중국과
통하는 것을 방해하여 고립시키고
구백제 세력의 분열을 노렸다.
금성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지금 목포·무안에서 나주까지인데,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교전.
지금 나주시 금성산(錦城山)
산성 등이 당시의 격전지였다.
난공불락.,금성산성.
궁예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뒤에도
나주는 고려의 영역으로서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왕건이 서남해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 호족(豪族)집단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기 때문
.
나주는 영산강이 바다와 합류되는
해안지역으로 상대포·구진포·영산포를
비롯한 중요한 포구들이 존재하였다.
나주의 호족들은 해로와 수로가
만나는 요충지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 해상활동을 주도했다.
대표적 호족은
나주 오씨(吳氏),
영암 최씨(崔氏),
영광 전씨(前氏) 등.
오씨가문은
대대로 나주 목포(영산포)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나주오씨(羅州 吳氏).........................
전남 나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는 고려 중랑장(中郞將) 오언(吳偃)이다.
선대 중국인 오첨(吳瞻)이 지증왕 때 신라에 정착
고려 태조비 장화왕후 조부는 오부돈, 아버지 오다련.
관조 오숙규(吳淑珪)는 고려 중엽 진사를 지냈으며,
이후 4대의 세대(世代)가 밝혀지지 않아 중랑장 오언
(吳偃)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5세손 양평(襄平) 오자치(吳自治)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금성 오씨(錦城 吳氏)라
부르는 후손들도 있다.
...............................
.
나주 오씨는 세력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해상세력 출신이라는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 연결될 수 있었다.
고려 태조의 비이자 혜종 어머니
장화 왕후(莊和王后)의 출생지다.
영암 최씨 역시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해 호족으로 성장한 가문.
영암은 덕진포 항구를 가지고 있어
대중국교섭에 유리하였고, 이곳의
해상세력은 대외무역과 영산강 유역
토착사회 역내교역을 주도하면서 성장.
특히 영암 최씨의 대표적 인물인
최지몽(崔知夢)은 어려서부터 여러
경서를 섭렵하였으며 천문과 점복에도
정통한 인물이었다. 18세 때 왕건을 만나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였고,
왕건은 그를 전쟁에 나갈 때마다
좌우에 두는 등 신임이 각별했다.
영광 전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왕건이 후삼국 통일 후 개국공신
반열에 오른 종회(宗會)가 있다.
종회는 왕건이 서남해지역을 공략할 때
큰공을 세워 태조공신 운기장군이 되었다.
.........................................................
고려 말에 이르러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섬 주민들을 육지로 옮겨 살게 하는
공도화정책(空島化政策)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흑산도 주민들은 영산포 지역에,
장산도 주민들은 나주 남쪽에 옮겨 살게 되었다.
다른 섬의 주민들도 육지로 옮겨가
섬지방에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고려 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도서 지역.
조선시대 들어와서
해안지역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세종대 전후
주민들이 서서히 섬으로 이주.
대부분 섬은 나주목·
무안군·영광군·진도현
등의 월경지로 분속되어,
섬에서 독립된 행정치소는
조선 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들 섬에 대한
내수사·사복시·각아문·
각궁방에서의 토지 점탈.
섬에서의 거의 대부분 지역이
분할 소유되는 형편에이르렀다.
1729년(영조 5) 이들 섬을 통괄하는
행정치소의 설립이 이뤄지지 않았고,
각궁방 토지점탈은 오랜 토지분쟁 요인.
이밖에도 국영(國營) 국마장(國馬場)이
압해도·자은도·장산도 등지에 설치되었다.
1682년(숙종 8) 지도진을 두엇고,
1810년(순조 10) 임자진을 두었고,
흑산도 등지에도 진을 설치하였다.
한편, 1801년(순조 1)에 '신유사화'로
정약전(丁若銓)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18년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어류를 관찰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
2009.10.26 흑산도.,홍어 풍년
'홍어는 어디에서 살며
어디에서 많이 잡히고
무엇을 먹으면서 살까?'
..............연골어류(軟骨魚類)...........
상어·홍어·은상어·가오리 등이 연골어류.
'Selachii'라는 학명은 상어목에도 쓰인다.
갑판을 지닌 데본기(3억 5000만 년 전)의
판피어류가 사라지기 전에 판피어류들에서
'경골어류'와 '연골어류'가 나왔다고 한다.
대부분 연골어류가 바다로 들어갔으나
아직까지도 몇종의 담수산 상어가 있다.
그들은 식량원으로서는
중요하지 않으나, 연마성 비늘이
덮여 있는 거친 피부는 신발· 벨트·지갑
액세서리, 나무광택제 만드는 데도 쓰인다.
모든 상어는 육식성이며 약 27종(種)은
사람에게 위험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가장 난폭한 식인상어는 온대 차가운 물에서
발견되는 백상아리(Carcharodon carcharias).
대부분 상어와 가오리들은
21℃ 이상의 물에서 서식한다.
가장 큰 종들로는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는
고래상어, 돌묵상어가 있다.
먹이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는 상어들은
서로 공격을 하며, 귀상어류의 특이하게
생긴 머리를 보면 어느 종이나 즉시 피한다.
상어가 공격하게 만드는 첫번째 자극은
냄새이나, 시각에 의해서도 유인된다.
가오리류는 연체류나 갑각류 무척추동물과
다른 물고기들을 먹는 어류로, 주로 저서성.
회초리가오리(whip-tailed rays)는
그들의 커다란 가슴지느러미로 밑바닥의
모래나 진흙을 살랑거려 조개류 등을 파낸다.
홍어류는 밑바닥에 몸의 일부를 묻고 있다가
청어와 같은 먹이가 보이면 갑자기 나타난다.
전기가오리는 돔발상어류나 연어류와 같은
크고 활동적인 어류까지도 기절시키는
강력한 전기기관을 갖고 있다.
쥐가오리류는 수면 가까이 유영,
머리지느러미를 써서 작은 어류와
플랑크톤을 입 속으로 쓸어넣는다.
은상어도 저서성이며 밤에 먹이를 먹는데,
작은 어류와 무척추동물을 먹으며 살아간다.
상어·가오리·은상어 가운데 몇몇 종은
알을 낳지만 대부분 종들은 체내수정.
수컷은 지느러미발(clasper)이라는
교접기관을 써서 암컷의 몸 속으로
정자를 삽입, 암컷의 가슴지느러미를
물어 암컷을 단단히 붙든다.
홍어류를 제외한
상어류와 가오리류는
암컷의 체내에서 알이 부화된다.
이때
배가 형성되어
수란관 안에서
발생을 시작하기까지
알은 일시적으로
막에 싸여 있다.
몇 종에서는
양분 공급이 끊긴
배가 다른 난황이나
배를 먹어 치운다.
→ 가오리류, 상어
.........................
.
국내에서 홍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은
대청도 등 서해 5도 인근해역으로 나타났다.
홍어 본고장 신안 흑산도 일대 어획량을 제쳤다.
서해5도 인근 해역에서 홍어 188t이 잡혔다.
2013년 국내 전체 홍어 어획량(406t)의 46%.
※전남 전체 어획량 127t보다 61t(48%) 많다.
대청도 등 서해5도 해역은
1980년대 홍어 주산지였다.
‘삭힌 홍어’ 전남 음식문화에
가려 이름이 나지 않았을 뿐.
한때 서해5도
홍어잡이배가
80척이 넘었다.
잡은 홍어는 삭히지 않고 바로
회를 치거나 말린뒤 찜해 먹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홍어 씨가 말랐다.
남획,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까지.,가세.
홍어 살리기는 2007년부터.
국립수산과학원 중심으로
6~7월 산란기에는 아예
잡을 수 없게 했다.
어획 허용기간에도
길이 42㎝ 이하의 어린
홍어는 잡지 못하도록 했다.
대청도 심현주(51) 어촌계장
“이 일대에서 잡힌 홍어 상당수가
전라남도 지역으로도 팔려나간다”
홍어 애
.
겨울에 잡은 싱싱한 홍어애를
바로 꺼내서 기름소금에 조금씩
찍어먹으면, 입안에 고스름한 맛.
그야말로 애간장 녹이는 맛.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요즘도 흑산홍어를 주문할 때
애가 들어 있는지 꼭 확인한다.
칠레 등지 수입 홍어는
애가 상해버리기 때문에
생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
...........홍어 애..........
어류 간에 해당하는.,'애'
모든 생선에 다 들어 있다.
하지만 생으로 애를 먹는 것은 홍어, 간재미, 상어가 전부.
그중 최고로 치는 것이 겨울에 잡은 흑산도 홍어 배를 따면
연어색깔의 손바닥 크기만한 넓이에 길이 두뼘 정도 되는 애.
8kg이상 나가는 암컷 홍어의 애가 크고
수컷은 무게나 크기가 암컷에 비해 작다.
암컷에 비해 천대받는 애꿎은 운명.,숫홍어
숫홍어는 꼬리 양쪽에 2/3 쯤 되는
길이의 성기 2개가 돌출되어 있는데,
암컷에 비해 값이 적게나가고 어차피
숫홍어 성기는 못 먹는 부분이기 때문에
어부가 양쪽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 버린다.
그러면, 암컷과 잘 구분되질 않는다.
그래서 나온 말이 “만만한게 홍어×”.
................................................
.
“만만한게 홍어×”.
코와 입안을 톡쏘는 삭힌 홍어를
더 맛있어 하는 사람들이 많듯이
조금 삭힌 홍어애로 홍어애국을
끓여 먹으면 해장국으로 그만이다.
된장을 푼 다음
보리싹이 막 돋아나면
그걸 캐다가 함께 넣어
푹 끓여낸 홍어보리애국은
약간 텁텁하지만 구수한 맛.
.
홍어 애탕.
홍어 애 내장탕.
홍어삼합
........
홍어.
.........
.
몸길이 1.5m 남짓.,가오리과 바닷물고기.
마름모꼴로 가오리와 비슷하나 더 둥글다.
수심10-100m 내외 연안 갯벌 바닥에 서식.
무척추동물을 먹고 산다.
교미하여 수정하며 난생한다.
산란은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한다.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
제주도, 동해 등지에 서식.
일본, 동중국해, 오호츠크 해
전남 서해안 지방의 특산 요리였으나,
‘삼합’(홍어, 삶은 돼지고기, 묵힌 김치)
이란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회로 먹거나
국을 끓이거나 포를 뜨기도 한다.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썩힌 홍어를 즐겨 먹는데
지방에 따라 기호가 다르다" 는 기록이 나온다.
정약전과 옛사람들은 홍어를
음란함의 상징으로 기록했다.
...................................
"두 날개에 가느다란 가시들
그 가시를 박고 교미를 한다.
암컷이 낚시바늘을 물고 발버둥
수컷이 이에 붙어 교미를 하게 되면
암수 다 같이 끌려오는 경우가 있다.
암컷은 낚시에 걸려 죽고
수컷은 간음 때문에 죽는데
이는 음을 탐하는 자의 본보기"
........................................
.
「본초강목」에는 '태양어(邰陽魚)'
모양이 연잎을 닮았다하여 '하어(荷魚)'
생식이 괴이하다 하여 '해음어(海淫魚)'
홍어 꼬리 마디마디에는 독이 있는데
한방에서는 여자들의 뼈마디가 아프고
그 마디에서 소리나는 경우 6개월에서
1년 정도 장기복용하면 완치된다는데
신경통이나 류마티즘, 산후풍증에
지네를 먹는 것 같은 효과가 있다.
....희랍신화- 홍어꼬리 독...
마녀 키르케는 자기 눈앞에서
사랑의 작태를 하는 남자가 있으면
홍어 꼬리로 찔러 독살했다고 하며,
이익 「성호사설」에도 "홍어꼬리를
나무에 꽂아두면 그 나무가 절로 시든다".
.......................................................
.
홍어는 연골어류인 만큼
뼈가 연해 버릴 것 없는데
이른 봄 보리 싹과 함께 홍어
내장을 넣어 끓인 '홍어 앳국'은
코끝을 쏘는 매운 맛과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인 남도의 별미로 꼽힌다.
홍어는 겨울에서
이른봄 산란기가
제철이다.
..........흑산도.........
우리나라 행정구역상
최서남단 해역에 위치.
목포에서 서남방 해상 92.7㎞
(동경 125도 26′, 북위 34도 41′).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다 해서 흑산도
섬의 면적은 19.7㎢, 해안선길이는 41.8㎞.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논농사 전무.
수산업과 관광산업에 의존
흑산도 예리항은 동지나해와
서남단 인근 어장의 전진기지로
중국어선들이 많이 입출항하고 있고
대규모 관광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최서남단 소흑산도(가거도)는
어업전진기지로 개발되고 있다.
대흑산도 중심으로.,인근 영산도,
다물도, 대둔도, 홍도 등 관광보고.
섬에 특유의 문화유적이 많으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해안따라 24km 일주도로가 닦여있다.
해상관광 하려면
예리항에서 출발
열목동굴 ~ 홍어마을 ~
범마을 ~ 칠성동굴 ~
돌고래바위 ~ 스님바위 ~
촛대바위 ~ 남근석 ~
거북이바위 등을 돌아보면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많은 인물들이
조선시대 유배생활을 하던 섬이기도 했다.
.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자 조선후기 문신
정약전 선생이 유배생활 15년 동안 근해에
물고기와 해산물 등 155종을 채집하여, 명칭,
형태,분포, 실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학자이며 의병장.,면암 최익현
"기봉강산 홍무일월" 친필은 흑산면
촌리에 있는 손바닥 바위에 새겨져 있다.
지장암 앞에는 후일 그의 문하생들이
면암 최익현 유헌비를 세워 선생의 고매한
애국정신과 후학양성을 위한 뜻을 후손에게 전달
한때 천연기념물 초령목(招靈木)은
가지를 꺾어 불전에 놓으면 귀신을
부른다는 나무인데 주위에는 상록수림과
성황당이 있으며,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진리 지석묘 군락지, 삼층석탑 및 석등과
사촌서당 같은 수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흑산도 인근 도서로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된 홍도,
.
영산팔경, 석주대
문바위 절경 영산도,
촛대바위와 현대화시범어촌마을의 다물도,
연중 바다낚시의 명소로 이름난 상·중·하태도,
중국 닭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최서남단섬.,가거도.
..................................................................
.
..............................
신안군 유물 유적 관광.
.................................
국가지정문화재(사적 1, 천연기념물 3),
도지정(유형문화재 1, 기념물 6, 무형문화재 2),
문화재자료 5점, 등록문화재 2점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
대흑산도 진리 해변에서
돌도끼와 토기가 포함된
조개더미가 발견되었다.
,
....고인돌.....,
대흑산도 진리,
장산도 대리,
압해도 대천리·
동서리 등지
압해도에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포함된 조개더미가 분포한다.
.........불교문화재.........
팔금도의 신안읍리3층석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대흑산도3층석탑, 장산도의 불상 등
....유교문화재...
흑산도., 신안향교,
지도읍.,지도향교 & 사우인
지도읍 태천리.,연계사(蓮溪祠),
임자면 이흑암리.,화산단(華山壇).
그밖에 지도읍 읍내리 선정비군(20기),
최익현이 새긴 지장암(指掌嵒)이 있다.
..산성..
흑산성지·
왕산성지·
안산성지·
송공리성지
..........사적...........
1976년 처음 발견되어
사적 제274호로 지정된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바다
송·원대 유물매장해역이 있다.
.................천연기념물.................
홍도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170호),
바다제비·슴새·칼새 번식지.,비금면 고서리
칠발도 해조류번식지(천연기념물 제332호),
흑산면 구굴도 해조류번식지(천연기념물 제341호).
전지역이 하나의 관광지이다.
........해수욕장......
임자도.,대광해수욕장,
암태도.,추포해수욕장,
비금도.,명사십리해수욕장,
도초면.,시목해수욕장,
대흑산도.,진리해수욕장 등.
..........영산도...........
대흑산도 동쪽의 섬으로
돛대바위·칠성동굴 등과 함께
영산8경을 이루는 비류폭포
주위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
가거도는
원시림과
흑비둘기가
유명하다.
...............홍도..............
맑은 물과 기암절벽이 장관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데,
남문·병풍바위·석화굴·돔바위 등
274종 각종식물, 다족류 등
남방계 동물 서식처.,관광지.
....................................
대흑산도 피바위·꼼돌바위,
문암산 일출·일몰도 장관이다.
해마다 관광객수가 증가하며,
관광객수 83만 5,002명(2006).
영산포선창
1977년까지 서남해에서 잡은
홍어를 실은 배가 드나들었으나
영산강 하구둑 건설로 뱃길이 끊겼다.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고, 예부터 이름난
인재가 많이 난 곳’이라고 적고 있다.
나주에는 옛부터
2가지 배가 있었다.
‘먹는 배’와 ‘타는 배’.
‘먹는 배’는 그 너른 들녘에서
고단한 노동을 달게 하던 ‘꿀배’.
여전히 입맛을 사로잡는 과일이다.
하얀 속살은
민족의 색깔이요,
고유 정서로 다가온다.
그런데 ‘타는 배’는
산업화·근대화라는
탐욕스런 가치를 만나
서럽게 퇴출되고 말았다.
영산강둑이 가로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그 배는 나주의 지평을 열어준 통로였다.
서남해를 호령하던 들판 가득했던 니주 쌀.
조선시대 나라의 국운을
쥐락펴락하던 나주의 권위도
뱃길을 빼놓고는 운위할 수 없다.
나주가 옛날 영화를 되찾기 위해
영산강 뱃길 열기 사업을 펴고 있다.
'목포~영산포 사이 70㎞ 조선시대 뱃길.
.
영산강.
나주.,영산강
조선시대 영산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는
흑산도 영산도 칠산도 등을 거쳐 영산포까지
홍어 소금 곡물 미역 등을 싣고 날랐다고 한다.
영산강(榮山江)의 강 명칭은 중류에 위치한
나주와 영산포에 의해 역사적으로 변화되었다.
나주는 통일신라 때 금성(錦城)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그당시에는 영산강을 금천(錦川), 금강(錦江)이라 했고
현재, 영산포 나루터는 그당시 금강진(錦江津)이라 했다.
고려시대 신안군 흑산면 영산도(永山島)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나주 남쪽의 강변에 마을을 개척한 후,
영산포(榮山浦)로 부르게 되었고, 조선 초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다.
과거, 영산강은 대조(大潮) 때
영산포에서 상류 25㎞되는 지점
(목포로부터 73㎞)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어 하천 수위가 상승하는
감조하천(感潮河川)이었다.
1981년 12월 영산강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조수가 차단되어,
현재는 감조 구간이 사라졌다.
조선시대 '목포 ~영산포' 48㎞.,황포돗배 뱃길.
전라남도 서남부인 나주, 무안, 영암, 해남 등과
신안군 다도해 여러 섬들과의 수운에 이용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영산포 조창(漕倉).
물자 수송의 중심지였으며,
전라도 남부 쌀은 이곳을 통해
영산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다른 지방으로 수송되었다.
.
영산강 유역은 선사인들의 거주지였다.
나주시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무문토기들.
또한 백제 시대의 옹관묘(甕棺墓) 군집들이
강 하류 나주시와 영암군에서 발견되고 있다.
강 유역의 기름지고 넓은 들판에서 나는
물산들과 바다에서 오는 물자들로 영산포는
'고려시대~일제강점기' 물자교역의 중심지였다.
.
.....................영산강(榮山江).......................
한강, 낙동강, 금강과 함께 우리나라 4대강에 속한다.
전남 담양군 용면 용연리 용추봉(龍湫峯, 560m).,발원.
광주, 나주, 영암 등 지나 영산강 하구둑에서 서해로 유입.
본류 총길이 약 150㎞,
유역 면적은 약 3,551㎢.
유역 면적이 전라남도 총면적의 29% 차지.
영산강은 섬진강보다 길이와 면적이 작지만,
유역이 우리나라 서남부의 핵심 지역을 포함.
그래서,
우리나라
4대 강으로
취급하는 것.
영산강은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나주시,
담양군, 장성군, 함평군,
화순군, 영암군 대부분 지역을
유역분지로 삼고 있으며, 전라남도
목포시와 무안군, 전라북도 정읍시의
일부 지역도 영산강 유역에 포함이 된다.
영산강 유역 내에는
영산강 본류를 포함하여,
황룡강, 지석천, 고막원천,
함평천 등 5개 국가하천 구간과
영산강 본류의 최상류, 황룡강 상류,
광주천 등 163개 지방하천 구간으로 구성.
유역 동서간 최대 60.6㎞,
남북간 최대길이는 89.9㎞,
유역의 평균폭은 26.7㎞으로,
남북으로 보다 긴 직사각형 형태.
유역 평균경사 19.5%로 비교적 완만.
영산강 유역은 노령산맥 남쪽.
전체적으로 북쪽과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세(地勢)인 편이다.
유역 북쪽 분수계에는
문수산(622m), 방장산(742m),
내장산(764m), 추월산(730m) 등의
400∼800m 범위의 봉우리들이 위치하며,
동쪽 분수계에는
무등산(1,187m), 안양산(853m),
천운산(602m), 두봉산(630m) 등이,
남쪽 분수계에는
봉미산(506m), 국사봉(613m),
월출산(809m) 등 기복이 큰
봉우리들이 분포하고 있다.
반면,
영산강 중․하류부
유역 중앙부와 서부에는
해발 200m 이하 구릉성 산지들.
이들 산지 사이를 곡류하며 흐르는
영산강은 충적평야인 나주평야를 형성.
영산강 지류
황룡강 하류부,
지석천 하류부,
문평천 하류부,
삼포강 하류부에는
구릉지 사이에 비교적 넓은
면적의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영산강 본류는 하류부까지
거의 구릉지 사이를 통과하여
대체로 좁은 하곡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영산강 본류의
하곡 양안에는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기 어려우며, 오히려 영산강
본류에 합류하는 지류 하천의 하류부가
비교적 넓은 충적지를 형성하기 좋은 조건.
영산강 유역 지질은
선캄브리아기 편마암,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 및 화산암,
중생대 백악기 불국사 화강암,
신생대 제4기 충적층
등으로 이뤄졌다.
그중 불국사 화강암은 유역분지 중앙부인
영산강 본류의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고
다른 암석에 비해 풍화 및 침식작용에 약해,
유역분지 중앙에 낮은 구릉지와 평탄지를 형성.
선캄브리아기 편마암과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 및
화산암은 유역분지 주변부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를 형성하고,
신생대 제4기 충적층은 영산강의
하류부 하곡에 분포하고 있다.
........................................
영산강 발원지.,용소폭포
영산강 발원지 용소
'우리나라(남한)에서
'4대 강'이라는 개념은
어느 강 순서로 말할까?
대부분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순으로 대답.
그러나, 유역면적과 수량, 강 길이 등을 다 따지면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순서가 맞을 것 같다.
영산강이 섬진강을 제치고
4대강으로서 분류되는 것은
강의 길이나 수량 때문이 아니라
영산강 유역에 사는 인구가 많아서다.
인구가 많은 강은 그만큼 상수원으로서 중요
4대강은 곧 그 유역 사람들의 식수원이기 때문.
그런데, 광주특별시 이남 영산강은
상수원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영산강 유역에서 가장 큰도시 광주는
대부분 영산강 물이 아니라 섬진강 수계인
동복호와 주암호에서 물을 끌어와 먹고 있다.
상수원 측면으로 영산강은
4대강 범주에서 벗어나는 셈.
담양 용소골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담양호를 지나
담양습지로 흘러들어 광주에서 장성과 무등산에서
내려온 황룡강, 극락강을 만나 물줄기가 도도해진다.
여기서부터 영산강은
호남평야와 나주평야 등의
넓은 들판을 구석구석 적시며
목포를 향해 구불구불 흘러 간다.
호남평야를 육자배기 진양조 가락처럼
비껴 흐르는 350리 영산강은 호남의 혈맥.
영산강 이름은 나주 '영산포'에서 유래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온 것이다.
그만큼 영산강은 이 일대 문화의 핵심이다.
공식적으로 영산강 발원지는 담양 용소.
그러나, 용소로 유입되는 계곡수는 그 윗쪽
여러 갈래 용소 물줄기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용이 승천하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해서
이름붙여진 용소(龍沼)가 있는 골짜기는
가마골이라 불리는데, 옛날부터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많다고 하여 '가마谷'이라 불려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마곡'이
'가마골'로 불려졌다고 한다.
용추사 계곡에 복원된.,가마터.
.
가마골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담양고을에 풍류를 좋아하는 한 부사가
부임하였는데, 가마골 풍경이 아름답다는 소문.
하여, 가마골 경치 구경을 위해 떠나기로 한
전날 밤, 잠을 자던 중 꿈에 백발선인이 나타나
"내일은 내가 승천하는 날이니 오지 말라."고 부탁.
그러나, 부사는 꿈속 백발선인 말을 저버리고
예정대로 가마골로 행차하였는데, 연못의 물이
끓어 오르고 한 황룡이 솟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황룡은 결국
승천하지 못하고
중도에 떨어져 죽었다.
그뒤 사람들은 용이 솟은 물을 '용소'
용이 피를 토하고 죽은 계곡을 '피잿골',
그 계곡에 가마터가 많다 하여.,'가마골'
가마골은 6.25 당시 빨치산 최후 항거지.
사령관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암벽 아래
당시 빨치산 노령병단소속 사령관 김병억이
은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흔적이 남아 있다.
가마골은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용소, 출렁다리, 사령관동굴, 용연폭포,
용추사 등을 잇는 산책로겸 산행코스 마련
한두 시간 정도의 멋진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주변이 수려한 장관을 이루고 있어
생태공원 내에는 야영장과 숙박시설.
..............찾아가는 길.................
88고속도로 순창IC- 순창고추장마을
직전 삼거리에서 우회전(강천산 방향)-
강천산입구 - 월정삼거리 좌회전(21번국도)-
오정자삼거리 좌회전(792번 지방도)- 용추교입구
가마골 이정표 우회전-가마골매표소
- 가마골생태공원 관리사무소 주차장
.................................................
전라남도 담양군·장성군·광주광역시·
나주시·함평군·무안군·영암군·목포시
등을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영산강.
총 길이 150㎢,
유역 면적 3,551㎢
또는
길이 138.75㎞,
유역면적 3,371㎢.
................
................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북쪽계곡에서 발원
장성호를 이룬 후 영산강하구둑
배수갑문을 통과해 서해로 흘러든다.
...........장성호(長城湖)...............
영산강 지류인 황룡강 상류.,인공호수.
장성호는 영산강유역 종합개발 일환으로
1976년 9월 장성읍 용강리에 높이 36m, 길이 603m.
장성댐 저수지(총저수용량 8,970만t, 유역 면적은 6.87㎢)
.
다목적 인공호이며
관개용수 4,800만t,
생활 및 공업용수
1,460만t을 공급.
장성댐 장성호 조성으로 1만 3900ha에 이르는
황룡강 유역 농지가 수리 안전농지로 바뀌었고,
연간 2만 4000t의 미곡 증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지정.,장성호
인접하는 내장산국립공원과 더불어
호남의 각광받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
.
장성호
장성호 수변길
장성호 수변길
영산강 옛이름.,금천·금강
나루터는 금강진이라 했다.
고려 때 신안 흑산면에 속한
영산도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마을을 개척했다 하여 영산포.
조선 초,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게 된다.
영산강하구둑의 완공으로
남해만· 영암만· 도포만 등의
바다는 영산강 유역으로 편입.
지면이 높은 갯벌은 농경지화
물은 바닷물에서 담수로 바뀐다.
.......나주 여행 일정............
2017년11월 6일 ~9 일( 3박 4일)
나주 해피니스 CC에서.,4회 골프.
8명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06시 출발.
녹우회(綠友會) 모임.
30여년 조경업계 지인들.
모처럼 함께 여행을 즐겼다.
평균연령이 70대 후반
68세부터 80대 초까지.,
68세인 필자가 막내둥이.
오전에 골프
오후에 관광
6일 - 영산포 홍어거리 & 나주시장
7일- 화순 국화축제 & 고인돌.
8일 - 운주사.
6일 4명이 1인당 3만원씩 거두어
택시 타고 돌아 나주시장.,곰탕 저녁.
7일 관광버스로 이동 화순국화축제 관람.
화순 고인돌과 운주사 관람은
예전에 몇차례 간적이 있어 생략.
화순은 광주특별시 베드 타운 같다.
광주, 화순, 나주.
3곳은 일일생활권이다.
'관혼상제 경조사'의 공통점은
손님 대접에 홍어가 빠지지 않는다.
...............................................
영산강 유역
생활권에서의
공통점.,홍어회.
'서울 ~전주~ 남원~담양~광주'
국도를 따라 여행을 즐기다 보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산실' 담양.
담양은 떡갈비가 유명.
조선시대 유교관념 선비는
음식 먹을 때도.,'체통을 중시'
"군갈비를 들고 뜯을 수는 없다."
하여, 갈비살 다져 구운.,'떡갈비.'
의관
담양호 곁
가사문학관
송순.,면앙집.
정철.,송강집.
담양권 가사 18편
가사 관련도서 4,500권.
유물 200여점, 목판 535점
등 가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주변에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송강정·
면앙정 등 호남시단
무대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한문이 주류던 때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중에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
전남 담양은
이서 「낙지가」,
송순 「면앙정가」,
정철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정식.,「축산별곡」,
남극엽.,「향음주례가」, 「충효가」,
유도관.,「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백발가·초당춘수곡 사친곡 원유가
정해정.,「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 미상.,「효자가」 등 18편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가사문학의 산실.
2016년 초여름., 담양호.
무등산 권역.,담양호
.................담양호........................
영산강유역종합개발 1단계사업 일환으로
영산강 최상류의 저수지는 1976년 9월 건설
높이 46m, 길이 306m의 코어형 필댐(fill dam)
.
자체유역면적 47.2㎢ + 인접 섬진강에서
유역 변경 방식으로 수량보충을 위해 설치한
취수보지점의 18.4㎢의 간접 유역을 합하여 65.6㎢.
만수 면적 4.1㎢, 총저수용량 6670만㎥로 풍수년과
갈수년 유량을 연간조절하여 6.245ha 농경지에 공급.
연간 1만t 미곡 증산과 댐 하류 담양읍 일원에
일당 3,000㎥의 상수도 용수 공급에 기여한다.
197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담양호는 여러개
깊은 계곡으로 이뤄진 가마골과 함께 관광명소.
...............................................................
담양 가마골
여행할때 일부로 국도로 다니면
담양을 지나.,광주에서 일박 한후에
나주 화순 담양 고창 등지를 가게 된다.
고속도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
그래서, 가급적 국도로 여행을 다닌다.
시간은 더 걸리지만, 볼거리는 더 많다.
1976년 영산강유역 개발목적.,댐 완공.
그때 형성된 인공호수,.담양호 & 나주호
전남 나주시 다도면 판촌리.,나주호.
높이 200∼300m의 야산으로 둘러싸인
대초천을 가로막아 농업용수를 개발해,
농지기반 조성, 농가소득 증대, 목적으로
건설된 나주댐에 의해 조성된., 인공호수.
...........나주호(羅州湖 : 면적112만 8000㎥)...........
길이는 496m, 높이는 31m, 유역면적은 1만 470㏊이고,
만수면적 780㏊, 저수량 9058만㎥, 몽리면적 1만 1200㏊.
나주호는 나주댐(일명 : 대초댐)에 의해 조성된 인공호수.
나주댐은 높이 200∼300m 야산으로 둘러싸인
대초천(大草川)을 가로막아 농업용수를 개발하여,
농지기반 조성, 농가 소득 증대 등의 목적으로 건설.
이 댐은
1973년 4월 착공
1976년 9월에 완공.
시멘트 1만 3746t, 철근 1,014t
등 총사업비 26억 2천만원 소요.
이 댐의 완성으로., 다도면 1/3인
260만평, 가옥 650호가 수몰되었다.
이 댐은 작물성장에 알맞은 온도의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수면에서 3m 이내 표면수 만을 취수할 수 있는 특수 취수탑.
물의 효율적 관리와 손실방지를 위하여 유량조절장치로 설치.
국내 최대 농업용 저수지.
이 호수에는 붕어·잉어·뱀장어·
날치 등 낚시터로도 각광받는다.
다도면 불회사(佛會寺),
암정리에 있는 운흥사(雲興寺),
화순군 도암면 운주사(運舟寺) 등의
사찰을 재보수하고 이 주변의 자연환경을
잘 가꾸면 좋은 관광지가 될 수 있는 입지조건.
................................................................
나주호
서울에서 광주로 가다보면
으례히 화순을 들르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곳 음식을 선호.
봄 여름 가을 겨울
4 계절 따라서.,별미.
서울에 비해 값싸고 푸짐.
봄.,화순삼합
여름.,화순삼합
가을.,토종닭 백숙
겨울.,화순 삼합
화순.,흑두부정식
화순.,'새조개 & 키조개' 샤브샤브
'새조개 & 키조개' 샤브샤브
40/50대 돈이 아까워
배불리 먹지를 못했지만
60대 후반부터 과식할까 걱정.
마음놓고 욕심껏 먹지를 못한다.
'화순은 왜 별미 음식이 많을까?'
'전통문화 수준이 높은 까닭은.,?'
화순에 갈 때마다 궁금한 수수께끼.
............화순.........
동쪽은 곡성군·순천시,
서쪽은 나주시,
남쪽은 보성군·장흥군,
북쪽은 광주광역시·담양군·
곡성군과 접하고 있다.
구석기시대 주거유적이 남면 사수리
대전마을 주암댐 수몰지구에서 발견.
.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유물·유적으로
1,180여 기의 고인돌과 도곡면 대곡리에서
세형동검·팔두령(八頭鈴)·동경(국보 제143호)
등 청동제품, 도암면 대초리에서 마제석촉이 출토.
군의 전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군은
이 지역에 일찌기 정치세력 출현을 대변.
고려 후기 운주사 불탑과 불상이 집중 건립.
1632년(인조 10)능성현이 인조의 모후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 관향이라
능주(綾州)로 개칭되고 목으로 승격되었다.
1655년(효종 6)동복현이 폐지
화순현에 예속 1664년(현종 5)
다시 분리. 이처럼 화순·동복·능주는
세 개의 행정단위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빈번하게 폐합·분치를 거듭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최경운·경장·경회
3형제와 자제 등 6명이 의병을 일으켰고
최경회는 진주성싸움에서 순국하였다.
의병을 일으킨 자리에 건립된 고사정(高士亭)
.
중종 때 능성과 동복으로 귀양온
조광조(趙光祖)와 최산두(崔山斗)
등에 의하여 성리학의 보급이 활발.
죽수서원, 도원서원(道源書院) 건립.
1895년(고종 32)나주부 화순군·
능주군·동복군으로 개편되었다가
능주군·동복군 폐지, 1896년 화순군.
1914년 능주·동복 지역 외에 남평군 저포면·
다소면 일부, 광주군 지한면 일부, 창평군 일부가
합쳐져 지금의 화순군과 거의 같은 영역을 갖추었다.
......................................................................
.
2017년 11월 7일 화순 국화축제
.......화순 적벽.........
전라남도 기념물 제60호.
'양쯔강 중류' 적벽 같아
붙여진 지명이 적벽이다.
.
동복천(同福川) 상류 창랑천(滄浪川) 유역과
무등산에서 발원한 영신천(靈神川)이 합류되어
태고의 크고 작은 수려한 절벽이 줄을 지어 있다.
동복댐 상류 장항리 이서적벽(二西赤壁)
보산리에 있는 적벽, 창랑리에 있는 적벽,
창랑리 물염마을에 있는 적벽 등이 유명하다.
이서적벽은 노루목적벽이라고도 하는데,
동복댐 건설로 수몰 전까지는 적벽의 대표.
물염적벽(勿染赤壁)은 노루목적벽에
미치지 못하나 언덕 위에는 물염(勿染)
송정순(宋庭筍)이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
뜻으로 세운 물염정(勿染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김병연(金炳淵, 김삿갓)이
최후를 마친 절경지로 유명.
보산적벽(寶山赤壁) 규모는
작으나 경치가 아름다운 곳.
.....................................
................화순 동복호.....................
광주광역시 상수도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1971년 높이 19.3m, 길이 133.8m의 댐을
동복면 고소치에 건설해 등장된 인공호.
상수도 용수 수요증가에 대처하여
1985년 7월 옛 동복댐에 높이 44.7m,
길이 188.1m의 국내 최초의 콘크리트
표면차수형석괴댐으로 개축되면서
지금의 동복호가 이루어졌다.
......................................
.
화순 동복호
광주보병학교 4개월 훈련과정에서
동복유격장 유격훈련 이수과정이
가장 힘들었던 추억으로 기억된다.
유격훈련을 수료 후
'레인져 마크'를 달고
주말 휴가에 광주 시내를
누비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광주...................
삼국시대 백제의 노지(奴只)였다가
후에 무진군(武珍郡)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892년 견훤이 이곳에서
후백제를 일으킨후 899년 전주로 이전.
940년 광주로 개칭하여 현재의 이름.
1259년 공신 김인준의 외향이라 하여
익주 승격, 1310년 화평부(和平府)로 강등.
1362년(공민왕 11) 제2대 혜종의 이름을 피하여
무진부(茂珍府)로 고쳤다가 1374년 광주목으로..
조선시대 광주목이 유지되었으나 여러번 현으로 강등.
1896년 13도제 실시로 전라남도 도청이 위치.
당시까지 전라도 남부지방의 중심지였던 나주를
대신하여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군 38개면이 15개면으로
1931년 광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35년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고,
광주군 나머지 지역이 광산군으로 개칭.
1949년 광주부가 시로 승격,
1973년 동구와 서구가 설치.
1980년에 북구가 신설되었다.
1986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
1994년 12월 광주직할시가
광주광역시로 개칭되었으며,
서구가., 서구와 남구로 분구.
광주광역시는
2007년 수출 100억 달러.
2014년에는 162억 달러를 달성
2011년 광주연구개발특구
최첨단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
자동차·광산업·가전산업·
그린에너지산업·금형산업
5대 산업을 중점으로 육성.
2011년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세계 속 인권도시로 자리매김했다.
.
일제강점기까지 광주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
.
1935년에는 4만 6,287명으로
나주·목포 도시에 비해 적었다.
1940년대 목포 인구를 앞질렀으며,
1955년 21만 4천명으로 목포인구 2배.
호남지역 대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 광주인구
114만 4,695명으로
6대도시 중 5위에 해당.
2016년 기준 인구는 147만 2,317명
가구수 58만 3,621가구, 가구당 2.52명
인구수는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대전 다음.
삼국시대 백제의 노지(奴只)였다가
후에 무진군(武珍郡)으로 바뀐 광주.
757년 무주도독부 1주, 15군, 40현 통괄.
940년 광주로 개칭하여
현재 이름을 갖게 된 것.
................................
화순.,동복유격장
인간이 가장
공포를 극복하기
힘든 높이 지상 10M.
물속으로 뛰어내려야 되는데
그곳에서 뛰어내리가가 무서워
죽을 힘을 다해 매달려서 버티며
끝까지 손놓치 않으려고들 발버둥.
웃지못할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
도피 및 탈출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千佛山)
운주사(雲柱寺)
.
'삼국시대 ~ 고려시대'
사찰은 정치세력의 거점
정치적 군사적으로 요충지.
단순히 종교적인 관점으로만 보면
역사적인 의문점들이 풀리지 않는다.
필자는 종교적 관점을 떠나 사찰을 본다.
.....운주사(雲柱寺).....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천불산(千佛山)
도선(道詵)이 창건 설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麻姑)할미가 세웠다는 설.
영암 출신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해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도력(道力)으로 조성하여 놓았단다.
이 전설을 뒷받침 하듯
절 인근 춘양면에 돛대봉.
돛을 달고 절에서 노젓는 형세.
운주사는 국내 여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덜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을
주불로 하여 집단적으로 여러 기 배치.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 라고들 부른다.
마치, 이웃 얼굴인듯 소박하고 친근.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기법은
국내에서 유형을 찾아 볼 수 없는 유형.
운주사 불상 만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각각 다른 모양으로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백제계 석탑을 닮은걸까?'
'감포 신라 석탑을 닮은걸까?'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 고급기술 필요.
그 석질로 만든 탑이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석공들 기술이 당대 최고 수준 아닐까?
......................................................
..............화순 고인돌.............
화순 고인돌군의 대표적인 특징은
좁은 지역에 596기가 밀집되어 있고,
춘양 대신리에 국내최대 상석 (280톤).
도곡 효산리.,최대 고인돌(100톤)
(길이 5.3m, 폭 3.6m, 두께 3.0m ).
2000년 12월 2일 유네스코에서 고창,
강화 고인돌과 함께 세계유산 997호로
등록되어 국제적인 관광지로 부상할 것.
....................................................
'고려때 '운주사' 와불(臥佛), 석탑 건립.
화순 고인돌의 정치집단은 어떠한 관계일까?'
시기적으로는 동떨어졌지만 뿌리는 하나 아닐까?
그 하나의 뿌리는 영산강 유역이 아닐까?
영산강 하구에서부터 상류에 이르기까지.,
영산강 하구는.,신안군 '1004 섬'들의 관문.
.
나주 지도.
오늘날, 고속도로의 역활을 했던
'삼국시대~조선시대' 항로와 뱃길.
'개성~나주' 뱃길은 얼마나 걸렸을까?
옛날에는 항구와 항구로 이어진
항로가 고속도로 역활을 했으리라.
항로 상에서 섬은 중간 기착지 역활.
뱃길에서 멀리 벗어난 섬은 오지.
오늘날, 고속도로가 대중화 되면서
섬들은 더욱 오지로 변해가는듯 하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우리나라는
섬이 살아나야 육지도 살지 않을까?'
미래 무한자원 가치로서
잠만 재우기는 아까운듯.
우선 삼국시대 뱃길부터
되살려 개발해야하지 않을까?
역사가 담긴.,세계적인 관광자원.
국내 조선업 활성화 계기가 되고
관광산업이 보다 활성화 되지 않을까?
크루즈 선상에서 보는 육지는 아름다울듯.
.
개성상인 왕건은
나주 해상 세력의
큰 도움을 받았기에
고려 창건 위업을 달성.
나주 해상세력은
고려왕조 470년 동안
개성 해상세력을 뒷받침.
고려왕조 버팀목 해상세력.
...................필자 主......................
서남해에는 옛부터 중국과 바닷길을 통해
사람과 물건이 오갔던 해상 거점이 있었다.
'당(唐)'자 들어가는 해안지역은
당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했던 항구들.
당항포(唐項浦), 당진(唐津), 당항진(唐項津)
왕건 집안도 통일신라 말기에
개성과 예성강을 통해 서해안의
물류거점을 장악했던 해상무역 집안.
서해안에는 왕건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해상 세력 집안이 있다.
남양 홍씨(南陽洪氏).
나주의 오씨(吳氏) 집안,
나씨(羅氏) 집안이 대표적.
이 집안들은 왕건 개성세력과
바닷길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왕건은 왜 나주부터 공격하였는가?
나주는 내륙이지만 영산강을 통해
지금의 전남 신안군 일대 수십여 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해상 도시였다.
당시에 해류와 바람을 제대로 타면
'나주~개성'은 배로 2~3일 만에 도착했다.
바다 고속도로였기에 개성 나주는 음식이 비슷.
나주의 오씨 집안 딸이 바로
왕건의 부인인 장화왕후 오씨 부인.
금성(錦城) 나씨 집안 시조인 나총례(羅聰禮)
왕건에게 적극 협력하여 나중에 '삼한 일등공신'.
남양만 해상무역권을 장악한 홍씨가문
홍유(洪儒)를 왕건의 부장으로 내어준다.
홍씨가 세거하던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南陽灣)
평택·수원 곡창지대와 직결되는 물류, 군사적 요충지.
화성시 서신면에는 삼국시대부터
수군 방어 기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 때문에 당항진
위치를 이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야산에다 석축을 쌓아 구축한
당성(唐城)도 서신면에 있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왜구들이
곡식을 탈취하려 수시로 침입한 곳.
왜구 방어를 위해 조선조에서는
영종포첨사(永宗浦僉使)가 있던
수군 진지가 해운산(海雲山)에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해상무역의 유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천년이 넘게 남양만 토박이 남양 홍씨
...................................................
장보고를 중심으로 서남해안에서
동아시아 해상무역 패권을 주도했던
나주세력이 훗날 왕건과 손을 잡은 것.
고려 제2대 왕을
배출한 나주세력.
고려시대 승승장구.
.
구 영산포역
.....................영산포역(榮山浦驛)......................
전라남도 나주시 영강동에 위치한 호남선의 역이었다.
호남선 복선 전철화에 따른 선로 이설로 인해 나주역과 통합.
폐지되었고, 현재 역 부지에 나주철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폐역 이전에는 나주역을 대신하여 나주시를 대표하는 역이었다.
새마을호를 포함한 모든 열차가 영산포역에 정차하였고
나주역에는 무궁화호 이하 열차의 선택정차가 이루어졌다.
기존에 비치되었던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는
폐역 이후 통합 나주역으로 이동되었다.
.....................................................
1917년 11월 7일에
나주 해피니스CC에서
일행 4명이 모범택시 호출.
.
'나주 토박이'를 자처하는
늙수구레한 택시 운전사는
자발적으로 관광 안내를 한다.
'전남 서해안 중심지'
"영산포를 아시나요?"
나주군에 속해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나주읍보다
유서깊은 곳이며, 그 옛날
영산강을 끼고도는., 호남의
대표적인 곡창지대가.,영산포.
"그럼, 금성시를 아시나요?"
"1981년 영산포읍과 나주읍이 통합
금성시(나주시)로 승격되어 지명에서
사라지다시피 하게 되었으며 그 유명했던
영산포역도 2001년 7월 10일 호남선 우회노선
신설로 나주역과 영산포역 중간에 통합신역사를
신설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읍니다."
.
"영산포역 2km전방에 구 다리를 건너면
홍어 등 목포 흑산도 수산물을 가득 실은
큰배들이 집결하는 영산포 선창이 나옵니다."
"특히,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를 실은 배가
영산포에 도달할 즈음에 가장 맛있는 홍어로
숙성되었다는 영산포 홍어 전설은.,600년 전통.
하지만, 1981년 목포 하구언 방파제 준공
영산강 뱃길이 끊기는 풍파를 겪게 됩니다.
한때, 영산포 선창엔 지나가는 개들도 지페를
물고 다녔다는 일화도.,이젠 지나간 옛 이야기."
.
.
영산포역에서 300M 남짓 도보거리에
옛 이름이 '율정'이란., '영산포 삼거리'
1801.11.5 다선 정약용과 정약전이 한양을 출발
그해 11. 21 유배길에 이곳에서 서로 헤어졌던 곳.
형 정약전은 흑산도., 동생 정약용은 강진으로.,이별.
그때 생전에 다시 못볼 것을 에상했던듯
이별을 아파하는 남긴 시(詩)가 전합니다,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이
파르라니 꺼지려고 하는구나.
잠자리에서 일어나
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이
참담해라."
- 율정의 이별.,정약용 -
결국,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지에서 운명
그후에,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나오지만
두 형제에게는 율정의 이별이 마지막만남이었다.
.
"나주 반남고분군을 아십니까?"
이번 나주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놀라운 사실이라서 충격.
그래서, 나주여행 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저기
옛 문헌들을 찾아보면서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나주 반남고분군에 얽힌
'베일 속 수수께끼' 역사.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가
이렇게도 방대한 것이었을까?'
반남고분군은 .,신미제국 유적지.
.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가야 정치집단이 제4국이라면
마한 신미제국은 제5국 아닐까?
.
나주 반남고분군
..................
나주 자미산성
(羅州 紫薇山城)
전남 기념물 제88호.
.................................
나주평야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있어서 사방으로의 시계가 좋다.
해발 94.5m 자미산은 구릉에 불과.
산정은 편평한 대지로 헬리포트 조성.
성벽은 본래 안쪽으로 호를 파고
내탁식(內托式)의 성벽을 만들었다
둘레 740m, 성문은 3개소 단절부가 있다.
지표에 문의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성안에는 건물터와 ‘용왕샘(龍王泉)’.
성내에서는 백제토기편과
고려 및 조선시대 유물 수습.
조선시대까지도 산성으로 기능.
전해오는 얘기로는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이
접전을 벌였던 곳으로, 견훤은
자미산성에 성을 쌓고, 왕건은
약 4km 떨어진 영암 신북면
갈마산에 주둔하고 싸워
견훤이 패하였다고 하며,
삼별초(三別抄)의 군사가
주둔하였다고도 한다.
산성의
주변에는
대안리고분군·
덕산리고분군·
신촌리고분군
등 대규모 고분군
이들 고분군 집단들이
산성 축조 가능성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백제시대 대표적인
테뫼식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
지금 성벽이 토석 혼축한 양상을 보인다.
.............................................
나주 반남 고분군(羅州潘南古墳群)
고분군, 유적건조물(사적 제513호)
..............................................
121,397㎡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103,
신촌리 산41, 덕산리 473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신촌리·덕산리 일대의 구릉에
분포하고 있는 삼국시대 무덤떼
고대 마한왕조
古都.,나주평야.
.
................나주 반남 고분군................
자마산성이 입지해 있는 해발 98.7m∼95.7m
2봉우리가 말안장처럼 생긴 자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14기 덕산리 고분군, 북동쪽 신촌리에 7기.
서쪽능선에 12기 대안리 고분군으로 형성되어 있다.
신촌리 고분군이 지역적으로 넓게 산재하고 있다.
이들 고분 평면은 원형, 방형, 장방형, 사다리꼴 등
고분의 주변으로는 주구(周溝)를 만든 예가 많다.
1분구에 여러 주검을 옹에 넣어서
매장한 다장묘(多葬墓)로 삼국시대
장법에서는 매우 이질적 현상을 보인다.
백제영역화 전단계에 지역마다 존재하였던
지역세력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
특히 문헌자료가 빈약한 삼국시대 백제의
지방지배방식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이다.
........................................................
나주 자미산성 7건물터
...............반남.,대형옹관고분...................
반남 고분군에는 대형옹관고분 수십기가 분포.
대형옹관고분이란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 속에
시신을 안치한 큰 옹(甕: 항아리)을 매장하는 방식.
이 고분양식은
고구려 적석총,
백제 석실분,
신라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구별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
독특한 고분양식이다.
대형옹관고분은 A.D 3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유행.
3세기경에는 옹관절반을 지하에 묻는 반지하식.
4세기 중반부터는 지상식으로 발전하며 이 때에는
분구의 규모가 훨씬 대형화되어 그 규모가 40~50m.
대형옹관고분은 나주 반남 일대는 물론,
영암, 함평, 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형성.
이 지역 고대세력의 묘제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옹관고분의 밀집도로 보아
이곳 반남 지역이 고대 지배세력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옹관고분의 출토 유물은
영산강유역 계통 유물이 주를 이루나
후기에는 백제계, 일본계의 유물이
섞이게되며 가야계 특징도 일부 보인다.
당시 사회가 백제,
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산강 고대 수로 조건을 이용한
해상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대변한다.
한편, 5세기 말경에는 대형옹관고분 쇠퇴
횡혈식석실분, 전방후원형고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석실은
토착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 지역의 고대세력이 능동적으로
횡혈식석실분을 채용하면서
사회발전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지방관제에
본격적으로 편입하게 한다.
...................................
1917년 12월 생소한 왜인들이 나타난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다니이 일행.
수십기 고분 발굴조사 후 마차 11대분 유물을
싣고 간후에 단 한장짜리 보고서를 발표했을 뿐.
이들 고분은 발굴된 유물과
장례(葬禮) 방식 등으로 보아
아마도 왜인(倭人)으로 보인다.
금동관, 금동신발, 대도(大刀)
도자(刀子). 도끼 창 화살 톱
귀고리 곡옥(曲玉) 관옥(冠玉)
다면옥(多面玉) 작은구슬. 등.
1938년 일제는 다시 한번 조사단을 파견.
반남고분군은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망신창이가 되었고, 대형옹관 2기만 수습했을뿐.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 중
우리나라 고분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반남 대형 옹관묘.
........한반도 고분의 시대별 매장방식...........
우리나라 고분은 시대별 `매장 방식’이 다르다.
마한은 `말발굽형’으로 무덤 주위에 도랑을 팠다.
지금 같은 봉분이 아닌 평장(平葬)에서.,'경계 표시’
.
도가사상이 주류를 이룬 삼국시대 말기에
시신의 머리 방향이 북쪽을 향하도록 했다.
산의 경사면 방향으로 설치된 삼국시대 고분은
지석묘가 수평으로 된 청동기시대와 차별을 이룬다.
통일신라 석실묘는 출입구 역할을 하는 통로.
즉 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놓는 방식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밀어넣는 방식으로 설치했다.
용두동 일대에 큰 돌이 없었음에도 불구
인근에서 돌들을 가져와 묘를 만들 정도로
'백제~통일신라' 시대 석실묘가 장례문화 대세.
'고려 ~조선'시대 고분들은 현재
민묘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
.
영산강 유역.,고대사회.
마한(馬韓)의 문화.,나주 반남고분군.
마한은 삼한(三韓) 가운데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걸쳐 있었고, 54개 소국 연맹체 국가.
후에 백제에 병합되었다.
마한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뤘다.
기원전 2세기 초 기자조선 '준왕'이
연나라 위만(衛滿)의 기습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목지국(目支國)
[익산 또는 천안 등]에 세운 나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마한은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서기 9년에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사서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사서와 심지어 『삼국사기』에도
마한의 존재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통설에 의하면, 마한의 잔존 세력은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서남해 연안에서
마한 아닌 고대국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
...................................
'신미제국(新彌諸國)' 또는
이칭.,'침미다례(忱彌多禮)'
......................................
『진서(晋書)』 장화 열전(張華列傳)에는
3세기 말 신미국을 중심으로 한 20여 개의
마한 소국들이 독자적인 조직체를 형성하여
진(晉)나라와 10여 차례 통교한 기록이 있다.
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왜는 369년 백제군과 연합하여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침미다례를 정복하였다.
위의 기사를 근거로 백제 근초고왕
(近肖古王)[?~375]때 영암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서남부지역 잔존 마한이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대형 옹관 고분 존재 등을
고고학으로 해석하여 6세기 초까지
영산강 유역에 마한이 존재하였다는
소수 견해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백제는 근초고왕때
372년 1월동진에 조공,
6월 방문해 낙랑태수가 된다.
( 근초고왕 재위기간 : 346~375 )
10년후 382년 9월 삼한
(마한, 진한, 변한) 대표
5국이 모여 동진을 방문
하고 특산품을 받친다.
12월에는 마한의 11국이
신미제국에 모여서
동진으로 출발한다.
주기만 한것이 아니라
답례품도 받아온다.
서진 동진 시기에
20회 조공무역 기록을
중국사서에 남긴 삼한
(마한, 진한, 변한) 외교기록
고구려, 백제보다 월등하게 많다.
고구려, 백제는
동진 시기에만
기록이 있을뿐.
(백제 4회, 고구려 3회)
.............................
.........................................
乃出華為持節、都督幽州諸軍事、
領護烏桓校尉、安北將軍。
撫納新舊,戎夏懷之。
東夷馬韓、新彌諸國
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
曆世未附者二十餘國,
並遣使朝獻。- 진서 장화열전 張華
장화를 '지절 도독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안북장군'으로
임명(AD282)하였다. 이에 장화는
유주의 신구세력들과 오랑캐들을 품었다.
동이 마한에 신미제국'(新彌諸國)이 있어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띠 삼아 유주에서
4천여리나 떨어져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내부하지않은
나라가 20 여국이었는데 함께
사절을 보내어 조공 하였다.
.....................................
3세기 후반 영산강유역의 마한사회 모습은
{진서(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오는
'신미제국(新彌諸國)'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기사는 동이 마한의 신미제국 20여국이
282년 처음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친 내용.
여기서 '동이 마한의 신미제국 20여국'은
마한지역 안의 신미국(新彌國)을 중심으로
20여국이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서남 해안을 끼고 노령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전남지방, 영산강유역 마한연맹왕국을 가리킨 것.
이러한 마한사회에서는
토성 안에 거주하는 지배세력이
주변 평야지대 농경민을 통치하였으며
사후 거대한 옹관고분 피장자가 되었던 사회.
4세기 전 사실을 기술한.,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의 마한 기록에
"마한사람들은 우마를 탈 줄 몰랐으며
우마는 모두 장례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우마에 대한 마한사람들의 이러한 관념은
대백제(對百濟) 전투에 열세에 놓이게 된 것.
백제 기병은 영산강유역과 같은 평야지대에서
마한의 보병보다 기동성이 높았을 것이며 무력
사용면에도 그 효과가 뛰어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마한은
한강유역에서 성장한
기마민족 백제에 의해 점차
잠식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는
온조왕 26년(AD 7년) 마한을 기습 점령했다.
곧 이어 마한 읍성들의 반란이 상당기간 지속.
결국 이를 진압했고
이로써 마한은 완전히
멸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온조왕대의 마한이란
마한 왕도에 해당하는 중심지역을 의미한다.
맹주적 지위에 있던 마한의 중심적인 국읍이
백제에 병합된 이후에도 잔여세력은 반백제적
토착세력으로서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 소국을
형성하여 상당 기간 존속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는 마한의 잔존 토착세력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지역과 시기에 따라
여러 형태 정치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제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직접 작용하는 지역도 있고,
백제에 복속된 후 상당 기간
토착세력을 통한 간접통치가
행해진 지역이 함께 있었을 것.
이와 같이 마한지역 토착세력들은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백제에 통합된듯.
이는 마한 토착세력의
백제에로의 통합과정이
간단하지 않았음을 대변.
백제의 왕도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영산강유역은
가장 나중에 백제에 편입되었을 것.
..................
..................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도 철기문화의 보급에 따라
지석묘사회 이래 발전시켜온 농업생산력과 인구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로 정치적 결집력을 키워 마침내
지역적인 정치적 연맹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특성 연맹체사회를 반영하는
문화적 상징물이 옹관묘와 옹관고분이다.
옹관묘는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발견된
서력기원 전후 1m 안팎 소형 옹관 53기.
이것은 소아를 위한 집단적 옹관묘지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 옹관묘는 이후에 영산강유역에서
대형 옹관고분이 유행한 단서를 제공.
옹관묘사회를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한 마한.
삼국지』동이전 한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 백성은 움집에 살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를 가꿀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하였다.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
.... 모두 50여국이 있었다. 큰 나라는 만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만여 호 정도다.
3세기경의 마한사회는
50여 소국으로 나뉘어
총 10만여 호를 이루었는데,
각각 신지(臣智), 읍차(邑借)가
다스렸다. 또한 성곽은 없고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사는 백성들은
농경생활을 하며 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마한의 신앙의례 역시 『삼국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고
술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은 (중국의) 탁무(鐸舞) 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전반부의 내용은
선사시대 이래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이며,
후반부의 내용은 제천의식에
관한 것으로 별읍에서 행해진
제천의식은 아직 군장의 절대적인
권력이 확립되지 못한 사회에서
이루어진 사회통합의 한 수단이었다.
마한사회는
3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대한 고분이 축조되는 등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였다.
대형 고분의 축조 작업은
막대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절대권력이 확립되지 않고서는 불가능.
또한 영산강유역의 고분의 특성 중 하나는
하나의 고분 안에 여러 사람들을 매장했다는 점.
이는 다른 사회에 비해 공동체 의식이
보다 강했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3세기 이후
경기지역의 마한세력은
점차 한강유역에서 새로
일어난 백제에 병합되어 갔다.
4-5세기에 걸쳐
영산강유역에 자리잡은
마한에서는 성곽이 축조되고
거대한 고분을 조성되며 금동관이
옹관고분에 부장되는 등의 사회발전.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해
660년 신라에게 멸망하기까지
삼국시대 678년간 존속한 나라.
부여계 이주민이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로
마한지역을 통합하며 성장했다.
그들은 도읍을
지금의 공주인 ‘옹진’에서
현 부여인 ‘사비’로 옮기면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강 유역에 도읍한 한성기
(기원전 18~기원후 475년)를 통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의 기틀이
다지는 한편, 웅진기(475~538년)는
중국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문화강국으로 발전했다.
또한 사비기(537~668년)는
참신한 조형 감각과 세련된
공예기술을 발달시켜 문화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이러한 백제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은
다시 일본 ‘왜’에 전달돼 아스카 문화를 형성.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현시대 새로 발견된
‘영산강 유역의 무덤’을 통해 볼 수 있다.
독널무덤은 세계 각지에 널리 사용.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나타난다.
백제가
한서에 도읍할 무렵
이미 영산강 유역에서
큰 독널무덤이 유행했다.
이 독널은 높게 쌓은 흙 속에 주검을 묻는데,
쌓은 흙의 형태는 긴 사다리모양, 네모모양,
긴네모모양, 원모양 등이다.
일종의 무덤 박물관
이라 할 만큼 다양하다.
또한 독널무덤에는
주로 칼, 화살촉, 창 등의
무기와 단지, 구멍단지, 접시
등의 토기가 발견된다.
이 외에 금동관, 금동신,
목걸이 등의 화려한 꾸미개와
봉황 등을 장식한 화려한 고리자루
칼이 함께 출토된다. 이는 독널무덤이
영산강 유역을 지배한 실력자의
무덤이란 추정을 가능케 한다.
영산강 유역은 한반도 서남쪽에 위치.
백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무덤에는
그 남다른 양상이
엿보인다.
백제가 한강 유역에 자리 잡고
마한을 잠식해 나가는 과정에서
맨 마지막까지 남았던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 최후 보루를 쌓았다.
이들이 바로
마한인이다.
때문에 이 지역은
백제문화 중앙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마한 전통이
많이 엿보인다.
현재 백제문화를 살펴보면,
문화 자체가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나
가야와는 달리 백제가 지배문화와
기층문화로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기층문화는 마한의 전통문화고,
지배문화는 이주민이 들어와
형성한 상층문화다. 이러한 구조는
기층문화를 토대로 하지 않았기에
상당히 취약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후 마한을 아우른
백제문화는 매우
개방적으로 발전한다.
영산강 유역의 무덤을 보면
가야나 신라, 고구려 고분처럼
동굴이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주나 부여에 있는 무덤보다
훨씬 대규모며, 대단위 왕릉보다
봉토 규모 역시 훨씬 크다. 백제의 국위가
그만큼 신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무덤을 ‘고분’이라 부르지 않고
‘옹관묘(甕棺墓)’라 불렀다. 특히 봉토가
크기 때문에 ‘대형 옹관묘’라고 불렀다.
하지만 현재 발굴을 계속하면서
‘옹관고분’이란 용어로 개칭됐다.
이 옹관고분은 마한 지역에서
기원 전후부터 만들어진
주구묘가 그 시조다.
주구묘는 네모지게 도랑을 파서 돌린 것이다.
도랑을 파면서 나온 흙으로 봉토를 쌓았다.
처음 주구묘가 만들어진 삼한의 경우
진한, 변한, 마한으로 분화하며 모두
내용면에 남다른 차이를 보였다.
특히 가야나 신라는
마한의 묘지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 단적인 예로
진한과 변한의 묘지는 지하로
깊숙이 들어가며 2m 아래에
목관을 안치한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백제문화는 마한의 풍습을 따라
매장시설이 거의 없고, 지면에 있거나
지상(地上)에 목관을 두었다.
또한 이미
진한과 변한에서는
무덤을 만들 때 유물을
비교적 많이 집어넣는데 비해
가야나 신라에서 보이는 후장습속이
백제나 마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간혹 화려한
미신제가 나오기는 하나
보편적으로 그러한 관례도 없다.
다만 마한의 주구묘는
예외 없이 구술이
대량 출토된다.
주거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구슬이다.
이러한 주구묘는 영산강 유역에서
독특한 대형 옹관으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목관(木棺)이다가
후에 옹관(甕棺)으로 바뀌었다.
옹관의 역사는 길다.
쓰임은
신석기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마한에 와서 비로소 주검을 넣는
정식 무덤이 되었다. 때문에 옹관묘는
마한이 지배하던 영산강 지역 외에는 없다.
현재 마한의 옹관묘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신천리 금동관도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그 규모가 매우 컸기에 일제 강점기 때는
2차례에 걸쳐 일본인이 직접 발굴할 정도였다
영산강 유역의 무덤은 주구묘 지상식 목관에서
후에 옹관을 쓰는 대형 고분(봉토)으로 발전한다.
그 과정에서 마한이 백제지방 통합과정 중 흡수되지만
그 양상은 여전히 고수한다. 특히 전남 나주 복암리는
‘아파트 고분’이라 하여 한 마운드에
굉장히 많은 매장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고분은 토관도, 목관도, 석곽도, 옹관도, 측실도
외에 42개의 다양한 매장이 한 봉토 안에 꽉 들어있다.
또한 나주 반남면 신촌리 고분은
복암리와 같은 중층으로 12개의
옹관이 묻혀 있다. 옹관고분은 대부분
모두 물을 채울 수 있는 도랑으로 둘러있다.
심지어는 깊게 둘러진 경우도 있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 고분은 그 외
더욱 발단된 장고형(전방후원형)으로
되어 있어 그 마운드가 일본 ‘전방고분’과
비슷하나 더욱 발달된 형태다.
일본 쪽으로 가면
이러한 옹관고분에
도랑이 많이 돌려져 있고,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는 단적으로 나주 신촌리 고분과
일본 고분은, 한반도 내 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들의 고분시대를 열었음을 말하는 단적 증거다.
그러나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경주, 김해, 평양지역을 시찰하고 난 후
나주 관남쪽 고분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만한 유적자료를 찾기 위해서다.
이는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역시 옹관고분이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보이는 곳은
우리나라 영산강 유역이다. 현대에 와서
활발한 옹관고분이 발굴이 이뤄진 것은
1945년 전남 영암군 내동 초분골에서다.
이곳 주민은 집을 짓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초분골 고분’을 발견하고 조사를 의뢰했다.
한국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던 때라 발굴 주도권은
국립박물관에서 대학 연구단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80년대는 아예
대학이 발굴을
주도해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다시 광주에 국립박물관이 세워지고,
초분골 고분과 함께 영산강 옹관고분
발굴이 시작돼 그 실체를 밝히게 되었다.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영산강 옹관고분은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호형고분’ 형이란 것.
시기가 지나면서 바닥이
평저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
그 외에 옹관고분 양끝에 돌기가 있어
원삼국시대 토기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우문시대 토기가 평저형태인데,
이곳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 역시
평저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다는 것이다.
................
................
1981년 전남 영암군 만수리 부근에서
발굴한 고분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옹관고분.
진흙을 뜯어보니 그 안에 인골도 들어 있었다.
.
발굴 연구단은 인골을 수습해 두개골을 열고
나이 약 25세, 신장 156cm 정도 되는 여자임을
밝혀냈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키 소유자였다.
.
옹관을 이룬 토기의 성질은
부식되지 않아 오래도록 보관이
가능했고, 밀폐 또한 확실해 주검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옹관묘의
모양은 계란처럼 생겨 부활과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3.5m의 크기로 가족이 함께
들어갔을 것이라 추정됐다.
한 공간에 묻혀 있다는 것은
공동체적 유대감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계급이 발전하며 리더가 지도자로,
다시 지배자로, 그리고 왕으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 하층민과 확연히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공동묘지 형태로
대형 옹관에 같이
들어가는 사회적 면을
보인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러한 옹관고분은 대체로 강물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에 위치한다.
해남, 무안, 함평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옹관이 출토될 때 도랑을 살펴보면,
수차례 걸쳐 제사 지낸 흔적이 엿보인다.
물론
봉토에 대한 제사는
신라나 가야고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옹관고분에서는
하나의 토기가 깨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제사를 지낸 후 그것을
깨뜨려 흩뿌린 흔적이다.
영산강 유역 쪽 옹관고분에서
보이는 독특한 문화양상이다.
그러나 그 시대 옹관을 어떻게 구워
유통시켰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
옹관을 구웠던 생산 유적지가
밝혀지지 않은 까닭이다.
분명한 것은
옹관 표면에 새겨진
톱날 같은 문양은
태양을 상징하며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옹관의 위쪽
머리 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는데,
이는 불길이
가장 적게
닿은 곳이다.
옹관은 보통
약 900℃ 정도 내외에서 구워내는데,
한쪽 경도가 높고 다른 한쪽 경도는 낮다.
이는 불이 많이 닿은 쪽은 경도가 높고
불이 닿지 않은 쪽은 경도가 낮다는 것이다.
불길이 많이 닿은 부분이 훨씬 단단하다.
1980년 영남대 강인구 교수가
일본 전방고분과 같은 키월판 고분이
우리나라 압록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에
많이 산재해 있음을 학계에 보고했다.
또한
1985년 이른 봄
전남 해남 ‘땅끝마을’
약 8km 지점의 남창
이라는 곳에서
키월판 고분을
발굴했다.
이는
대형고분으로
실측한 결과 일본과
같은 크기와 모양이었다.
이런 내용이
일본에 알려지자
그들은 매우 부러워했다.
이후 전라남도 함평에서
그보다 더 발전한 ‘장고형
(전방후원형) 고분’ 2구를 발견.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장고형 고분을 발견하면 가장
놀라워하는 쪽은 역시 일본이다.
그들은 ‘장고형(전방후원형) 고분’이
천황의 명으로 인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영산강 유역뿐만 아니라
광주 월계동 등에서 더욱 발전한
다음 단계 고분이 수십 건 발견된다.
생(生)과 사(死)를
향한 인간의 사유가
백제시대 얼마나 발달한
선진문화를 이룩했는지
충분히 보여주는 유적이다.
전남일대 부족국가 연맹체.,신미제국
백제가 웅진에 천도 후 6세기까지 존재.
나주, 해남 등지 고분군 발굴유물들을 보면
국제무역으로 상당히 돈을 많이 번듯 추정된다.
가야계토기,
신라식토기,
백제식 토기,
중국 동전 등
없는 게 없다.
신미제국은
중계무역으로
돈을 벌여들인듯.
아울러, 지금처럼
염전을 운영하여
소금도 팔았을듯.
토착계 무덤
옹관묘가 특징
'당시 예닐곱명은
'들어갈 크기의 항아리'
옹관을 어떻게 만든 것일까?'
2016.12.23
영산강 자전거도로
나주시 영산포 쾌속 유람선.
...............'나주'의 연혁.............
백제시대에는 발라군이라 칭했으며,
660년(신라 무열왕 7)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이 대방주를 설치하면서 속현으로 세운
죽군현·포현현이 이 지역에 위치했던듯 하다.
통일신라시대 686년(신문왕 6) 통의군
757년(경덕왕 16)에는 금산군으로 개칭.
고려초 940년(태조 23) 나주라 칭했으며,
983년(성종 2)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 파견.
996년(성종 15년) 나주진해군절도사로 바뀌어
해양도 소속, 1018년(현종 9) 다시 목으로 환원.
전라도 남부 계수관으로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때 무안·담양·남평·낙안·곡성 등 5군이
속군으로, 철야·회진·반남·안로·복룡·원율·
여황·창평·장산·진원·화순 등 11현이 속현.
1310년(충선왕 2) 지주사(知州事)로 강등
1356년(공민왕 5)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 이갱생을 해쳤다 하여 금성현으로 강등.
1654년(효종 5)에 다시 복구되었으며, 현종 때와
영조 때에도 비슷한 이유로 잠시 강등되었다가 복구.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나주부가 되어
나주군 등 16개군을 관할했으며, 이듬해에
도제 실시로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
이때 관찰부가 광주에 설치됨으로써
전남 행정중심지가 광주로 넘어갔고,
목포의 성장으로 나주의 기능이 약화.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나주·나신·양지·왕곡·
세지·반남·공산·동강·다시·문평·삼도·평동·노안·
남평·다도·봉황·금천·산포·본량면 등 19개면을 관할.
1929년 나주면 + 나신면 = 나주면,
1931년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14년 상곡면과, 수운과 육운이 교차하여
시장으로 유명한 영산포를 포함하고 있던
지량면을 합하여 만든 양지면은 영산면으로
개칭했다가 1927년 영산포읍으로 승격했다.
광주의 도시발달에 따라 위성도시화 하자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
1985년 나주시로 개칭.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농촌지역이던 나주군을 통합해 나주시가 되었다
.................................................................
나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장이 선 고장.
조선 세종 때, 지금 5일장이라 부르는 장시가
나주에서부터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산포를 통해 호남의 각종 집산물들이
나주 장터로 몰려들었고, 물건들과 함께
사람들도 늘 북적였다고 하는데 장터에는
값싸고 양많은 서민음식이 인기를 끌기 마련.
하지만 나주 장터에서는
순대국이나 해장국 대신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곰탕을 많이 팔았다 한다.
주변에 넓은 곡창지대가 있는
호남 벼농사 중심지이다가 보니
곰탕 재료로 쓰이는 소가 흔했고,
장터 근처에 관아가 있어 여유있는
벼슬아치들이 곰탕을 즐겨 찾았단다.
사골을 우려낸 것이 곰국이고,
여기에 밥을 말아 내오면 곰탕.
살림살이 어려운 시기에도 고기나
소의 내장 등을 듬뿍 담아서 내주는
장터 인심은 나주곰탕 인기로 이어졌다.
이는 나주 5일장을 찾은 장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나주곰탕은 전라도의 곰탕을 대표하는 이름.
지금은 나주가 아니더라도 나주곰탕 ‘브랜드’를
내걸고 장사하는 식당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음식은 ‘원조집’에서 먹어야.,제 맛.
지금도 옛날의 맛을 이어오고 있는 나주곰탕.
그맛 때문에 먼길을 마다 않고 나주를 찾는다.
나주곰탕은
사골과 고기로 만
오로지 맛을 내는데,
핵심은 ‘맑은 국물’이다.
사골을 푹 고아 뽀얗게 우러난 국물에
양지, 사태, 목살 등을 넣고, 다시 끓이면
국물이 점차 맑아지면서 맛이 한결 깊어진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흑산도에서부터 나주까지
홍어를 실은 배들이 닿았다.
덕분에 삭힌 홍어의
본고장이 된., 나주 장터에는
홍어를 취급하는 어물전이 많았다.
근래 들어
어물전은 쇠퇴했지만
지금도 ‘홍어의 거리’에는
홍어전문식당들이 남아있어
나주 홍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봄이면 벚꽃 눈처럼 휘날리는
'벚꽃길'로 유명한 사찰.,다보사
661년(문무왕 1)원효(元曉) 창건
.
일제가 불교를 탄압할 때에도
스님들은 이곳 다보사 사찰에서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갔다고 한다.
나주시 경현동 629
다보사 입구 금강문,
높이 11.5m의 탱화,
대웅전의 꽃살문
등도 볼 만하다.
전라도 최대의 도시였던.,나주
그당시 다보사는 융성했으리라.
조선시대 나주 영산포가 번성할때
신안군 배들은 영산포로 몰려들었다.
당시 목포는 무안현에 속한.,작은 포구.
1897년 목포진 개항으로
전남 최대 항구가 된.,목포.
..........................목포.............................
백제 물아혜군이 757년(신라 경덕왕 16) 무안군.
944년(고려 혜종 1) 물량군, 991년(성종 10) 무안군.
1018년(현종 9) 나주의 속군, 1172년(명종 2)에 독립.
.
1391년(공양왕 3) 왜구침입 극심
성산극포권농방어사를 설치했다.
1397년(조선 태조 6) 전라 4진 중 하나
목포진이 설치되었으며 첨절제사 파견.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무안현,
1896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이 되었다.
1897년 목포진 개항으로 전남 최대 항구.
삼학도는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으나
유달산과 함께 목포사람들의 꿈과 미래.
낭군을 망망대해로 보낸 아낙들의 외로움.
고깃배를 기다리는 상인들의 희망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건너는
망자들의 한이 녹아있는 곳이었다.
1872년 ‘무안목포진’에 표기.
삼학도가 처음 지도에 그려졌다.
1502년 목포진에 땔감 제공한 삼학도
1895년 일본인에게 불법판매된 사건.
일본인 삽곡용랑은 삼학도를 매입했다.
개항 2년전 (개항: 1897년 )인데, 개항 후
밝혀져 처벌하고 환수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1910년 국권침탈이 되면서
삼학도, 고하도는 일본인 땅이 된다.
‘삼학도 토지암매사건’
일본인이 목포 토지를
침탈한 대표적인 사례.
옛날에 유달산 젊은 장수가 무술을 연마.
그 늠름한 기개에 반해 마을의 세 처녀가
수시로 드나들어 공부를 소홀히 하게된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젊은 무사는
세 처녀를 부른다.
"나 역시 그대들을 사랑하나,
공부가 끝날 때까지 이곳을 떠나
다른 섬에서 기다려 주오"하고 청했다.
그 말대로 기다리던 세 처녀는
무사를 기다리다 그리움에 사무쳐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었으나 세 마리
학으로 환생해서 유달산 주위를 돌며
구슬피 울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모르는 무사는 세마리 학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 쏘아 화살들이 명중,
3마리 학들은
유달산 앞바다에
모두 떨어져 죽는다.
그후 학이 떨어진 자리에
세 개의 섬이 솟아났으니
사람들은 세 마리 학섬이라
하여, "삼학도"라고 불렀단다.
........................................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영산포에 도달한., 뱃사람들은
나주 다보사를 한번쯤 들렀으리라.
고려를 창건한.,태조 왕건.
그 뒷배경이 된 나주 해상세력.
고려(918~1392)는 474년 동안 존속.
왕씨(王氏)가 34대에 걸쳐 집권한 왕조
..........다보사(多寶寺).............
661년(문무왕 1)원효(元曉)가 창건.
1184년(명종 14)지눌(知訥)이 중건,
1568년(선조 1)서산(西山)이 중창.
1878∼1881년 대웅전·영산전·
명부전·칠성각 등 중수
절의 뒷산에는
왕건이 견훤과 싸우기 위해
쌓은 금성산성지(錦城山城址)가 있다.
..................................................
.
2016.03.14 하얀집 나주곰탕
........나주시(羅州市 : 608.32㎢).....
동쪽은 화순군, 서쪽은 무안군·함평군,
남쪽은 영암군, 북쪽은 광주광역시와 접.
동경 126°33'∼126°54', 북위 34°53'∼36°03'
인구 9만 8182명(2015년)
행정구역은 1개 읍, 12개 면,
7개 행정동(34개 법정동),
446개 행정리(154개 법정리)
시청은 전남 나주시 송월동.
남동부에 용제산(龍帝山, 323m)·
덕룡산(德龍山, 376m) 등이 있고,
북서부에
옥산(玉山, 334m)·
금성산(錦城山, 450m)·
신걸산(信傑山, 368m) 등.
높이 약 400m 내외의 이들 산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
구릉지는 과수원, 나주평야는 전라남도 곡창지대.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 산포들이 넓게 분포
'남평읍 ~ 화순군 능주'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
길이 4km 유역의 남평평야. 화순평야는 미곡산지.
.
나주시의 북동쪽에서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남류하다가 다시 지석강(砥石江)과 합류
지석강 지류를 막아
건설한 나주댐이 영산강
유역의 넓은 나주평야를 관개.
이 댐은 작물성장에 맞은 온도의 물공급을 위해
수면에서 3m 이내의 표면수 만을 취수할 수 있는
특수 취수탑과, 물의 효율적 관리와 손실을 방지
유량조절장치를 설치한 국내 최대의 관개용수 댐.
나주댐에 의해 조성된 호수
붕어· 잉어· 뱀장어· 날치 등
담수어족이 많아.,인기 낚시터.
영산강은 시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면서 시를 양분한다.
영산강 하류는 너비가 좁은 관계로
낮은 지대는 상습적인 수해지역이다.
나주시는 이들 하천 유역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지대가 발달되고
땅이 기름져 예로부터 농경이 발달하였다.
영산강의 지류인 문평천 유역과
이 하천이 합류한 영산강 북안에
다시 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 평야는
크게 나주평야
일부라 할 수 있으며,
총면적은 1,400ha에 이른다.
문평천을 가로막아 만든 백룡제라는
저수지가 관개용수로 이용되며,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이 평야의 특색이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나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3.8℃이며,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8℃이다. 연강수량은 1,491㎜로
하절기인 6·7·8·9월에 70∼80% 이상이 내린다.
서리는 11월 초순부터 내려
이듬해 4월 초순에 끝난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유물이 일부지역에서 발견.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보산동을 비롯
남평읍·세지면·다도면·다시면·문평면·왕곡면 등 거의 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과 그 아래에서
출토된 간돌검·돌도끼·돌창류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문활동이
이뤄졌을 것.
특히, 마한의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접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유적으로는
반남면 대안리·흥덕리·
신촌리 일대와 다시면
회진마을 일대에 집중된
독무덤 존재들이 주목된다.
독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비교적 강대한
정치권력체가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백제시대
발라군(發羅郡)·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미동부리현(未冬富利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설치한
대방주의 6현 가운데 죽군현(竹軍縣) 등
4현이 나주지역에 있었다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이 대방주는 6년 만에 폐지되었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통의군을 금산군
(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
(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뒤에는
한때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때
이 지역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협력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940년(태조 23)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종래 전라도 남부의 수부였던
광주(무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하여,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996년(성종 15)
나주진해군절도사
(羅州鎭海軍節度使)라 하여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을 피해
왕이 잠시 피란을 와서 10여 일을
머물다가 환도한 일이 있었다.
1018년에 다시 목(牧)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무안·남평·담양·낙안·곡성
5군을 속군으로 거느렸는데,
여기에 현웅현이 남평으로
고쳐져 예속되었다.
또, 철야·회진·반남·안로·복룡·
원율·여황·창평·장산·진원·화순의
11현이 속현으로 예속되었다.
이 속군·현들은 1172년(명종 2) 이후
점차 독립하거나 다른 지방에 이속되는
등의 변동이 있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에 의해 공략받기도 하였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
1356년(공민왕 5) 목으로 복구.
조선시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 중심지였다.
1457년(세조 2)
진관체제에 따라
거진(巨鎭)이 설치
목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로도 선비들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金千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강상지변(綱常之變)이 일어나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복구.
그후로도
현종 때와 영조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벽보가
관아 앞에 내걸리는 사건이 발생해
또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하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 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뀌어, 광주가 전라남도 관찰부가 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구실을
광주에 양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영역의 축소도 이루어져
오산면은 광주로, 대화면은 장성으로,
금마·원정·비음·종남면은 영암으로,
삼향면은 무안으로,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은 함평으로 각기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그 동안 별도로 존속해 왔던
남평군을 없애 남평면으로 하고
그 예하에 있던 여러 면들을 합병
함평에 이속했던 적량·장본·
여황면 지역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영역을 갖게 되었다.
1927년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1949년에
삼도면·본량면·평동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부터 다도면 일대에
나주 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라 하고
나주군에서 분리, 승격.
1986년 1월 1일에 금성시를
다시 나주시라 개칭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해
나주시와 나주군이 새로운
나주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
남평면이 읍으로 승격,
1996년 2월 10일삼도동 일부가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개 읍 12개 면 6개 동으로 편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동강면 장동리, 공산면 봉룡리,
산포면 신도리 등 20곳에서 뗀석기 발견.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다시면 가흥리 늪지대에서
벼화분이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지석묘만 알려져 있다.
지석묘는 150곳에 1,200기가 분포하고 있다.
그 중 왕곡면 나주신포리지석묘군를 비롯해
다도면 판촌리·마산리 지석묘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북방식 지석묘인
다시면의 신풍리지석묘에서는
석검과 채문토기가 발견되었다.
입석은
세지면 오봉리·벽산리,
남평읍 동사리·교촌리
것이 대표적이다.
고분으로는
다도면 마산리에서
토광묘와 옹관묘가
조사되었다.
거대한 봉분을 한 고총 고분으로는
반남면에 나주신촌리고분군(사적 제77호)·
나주대안리고분군(사적 제76호)·
나주덕산리고분군(사적 제78호)
등의 옹관고분군이 있다.
석실고분으로는
다시면에 복암리고분군
(전라남도 기념물 제136호),
세지면의 나주송제리고분
(전라남도 기념물 제156호),
반남면에 나주흥덕리석실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등.
이 밖에도 동강면·공산면·왕곡면 등
영산강 하류지역에 많은 고분들이 산재.
옹관고분에서는
금동관· 금동시발·
환두대도 등 신분을 상징하는
금속유물과 많은 토기가 발견,
복암리석실분에서는
금동신발과 관이 출토.
...............................
나주 영산포 홍어거리 ~ 흑산군도 영산도.
.
.
.......................영산강........................
한강, 낙동강, 금강과 함께., 우리나라 4대강.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연리용추봉(560m)에서
발원하여 광주광역시, 나주시, 영암군 등을 지나
영산강 하구둑에서 서해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길이 150㎞, 유역면적 3,551㎢.
전라남도 총면적의 29%를 차지.
섬진강보다 길이와 면적이 작지만,
영산강 유역이 우리나라 서남부의
핵심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4대강으로 취급한다.
영산강의 명칭은 중류에 위치한
나주와 영산포에 의해 역사적 변화.
나주는 통일신라 때 금성(錦城)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영산강을
금천(錦川), 금강(錦江)이라 했고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이라 했다.
고려시대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
영산도 섬주민들이 왜구를 피해서
나주 남쪽의 강변에 마을을 개척한 후,
그곳을 영산포(榮山浦)로 부르게 되었고,
조선시대 초기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다.
.................................................
.....................흑산군도.............
흑산군도(黑山群島)는 전남 목포에서
남서쪽 약 90km 해상에 있는 군도이다.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68개 섬으로 형성.
면적 50여 km2
가거도에는 639m,
대흑산도 378m,
홍도 368m
산이 솟아 평야는 거의 없고,
농산물 생산량은 2개월 자급량.
포경의 중심지이고 전갱이·고등어·
조기·상어·갈치·홍어 등이 풍부하다.
어업가구는
총가구의 80%
진도와는 대조적.
흑산도 중심지 흑산항은 천연적 양항으로서
어업기지, 인근 항해선박 보급 휴식처 대피항.
또 통신 연락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이 항구 근방
예리(曳里)에는 3~10월까지 파시(波市)를 이룬다.
부근 홍도(매가도)는 제2의 해금강
기암괴석, 노송이 우거져 경승지대.
................................................
.....영산도(2.25㎢)....
전남 신안군 흑산면 속.
동경 125°28′, 북위 34°38′.
목포에서., 서쪽으로 84㎞,
진도에서.,서북쪽으로 60.4㎞
해안선 길이 7.9㎞.
대흑산도·가거도·대둔도(大屯島)·
다물도(多物島)·대장도(大長島)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영산화가 많이 핀다.'고 하여
영산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질은 대부분 규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동쪽 해안은 단조롭고 급경사면을 이루는 반면에,
북서쪽 해안은 완만한 경사에 갑과 만이 형성되어 있다.
대부분 암석해안을 이루어 해식애(海蝕崖) 발달.
1월 평균 2℃, 8월 평균기온 26℃, 연강수량1,112㎜.
2009년 기준으로 인구는 103명(남 56명, 여 47명) 거주.
세대수 59세대이며 취락은
북서 해안 만입부(灣入部)에
집중해 있고 토지이용 현황은
밭 0.11㎢, 임야 2.04㎢로 산지.
농산물은 콩·고구마·보리·채소 등.
난류 제주해류가 통과하는 인근해역은
난류어족을 비롯한 각종 어족이 풍부하다.
어획물 -잡어·장어·전복·농어 등
전복· 홍합· 다시마 양식도 한다.
당산창송(堂山蒼松)·
기봉조휘(箕峰朝輝)·
비류폭포(飛流瀑布) 등
영산팔경(永山八景) 유명.
가장 대표적인 제7경
석주대문(石柱大門)이다.
청나라와 교역을 할 때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면 이 대문안으로 대피하였다.
흑산도 도선이 운항, 흑산초등학교 영산분교장.
...............................................................
고려 말, 몽고와 왜구가 해안가를 자주 침입해오자,
'해도입보론(海島入保論)'과 '해도개발론(海島開發論)'
고려 조정은 대비책으로 2가지 대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는 적이 침입해 오는 길목에 위치한 섬에
군사와 주민들을 들여보내서 이들로 하여금
섬을 방비하도록 하여 섬을 개발하자는 제안.
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진도, 장산도, 압해도, 흑산도 등
서남해 치소를 모두 내륙으로 이동.
섬 주민들도 강제로 육지로 내보냈다.
섬을 비우는 정책.,공도정책(空島政策).
그 무렵에 영산도 주민들은
영산강 뱃길을 거슬러 올라와
영산포 일대 나주에 정착했을듯.
영산도.
영산강,
영산포
3 지명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듯 하다.
그당시, 신안군 대부분의 섬주민들은
공도정책으로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향을 모두 다 등지지 못했으리라.
그들에게 고향은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기에 영산강을 따라서
'영산도 ~ 영산포' 뱃길을 오고가며
계절따라 섬과 뭍에서 번갈아 살았을듯.
황금어장 시기에는 섬에서
농번기 일손 바쁠땐 뭍에서
양쪽에 생활근거를 두었을듯.
그후 뭍에 아예 정착한 섬주민도 있었고
다시 섬으로 되돌아간 주민도 있었으리라.
신안군 섬주민들도 이 상황은 비슷했으리라.
조선시대에도 연이어진
해금정책 그리고 공도정책.
그때마다 이 같은 상황이 반복.
.
........영산강 하구둑.......
전라남도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읍을 연결하여.
영산강과 황해를 막는 하굿둑.
영산강하구언은 길이 4,350m, 최대높이 20m.
토석제(土石提)방식으로, 배후 호수인 영산호는
저수량 2억 5000만톤이며 영산강은 조석 영향차가
너무 커 나주 부근까지 미쳐 연안 농경지에 하천 범람,
농토 침식 등의 피해를 주기 때문에 건설한 하굿둑이다.
영산강유역 개발 사업 1단계 장성,
담양,나주, 광주호의 완공에 이어,
제2단계 핵심사업으로 1978년 착공,
1981년에 완공되었다.
영산강하굿둑이 건설된 이후에
가장 큰 이점은 농토확대와 더이상
하천이 범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포시와 영암군이 도로로 연결.
교통편리 및 수자원 확보도 대폭 증가했다.
그러나, 영산강 수질은 꾸준히 심각하게 악화.
영산호 수위는 토사가 쌓여 점점 올라간다.
또한 강폭이 줄고 하구에 펼쳐진 갯벌이 감소.
낙후된 영산강하굿둑 구조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또한 영암군 삼호읍에
대불국가산업단지가 있고
'신안~부산' 국도 제2호선이
지나가는 구간이기 때문에 하루
평균 5만대이상 지나는 중요한 길목.
하지만 출·퇴근시간에는
엄청난 차량들로 인해 매우
혼잡하고 밀리는 현상이 벌어져
평소 2,3분만에 통과하는 거리를
교통체증으로 20/40분 이상 걸린다.
그래서 목포시는 우회도로인
목포대교 건설로 교통량을 줄였고,
서해안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를
연결하는 국도 제2호선 무영로가
교통량을 분산하고 있다.
영산강하굿둑 건설 이후
한때는 관광객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상태이다.
영산강하굿둑 위에서
영암군에서 목포시 방향으로
풍경과 야경은 볼만한 장소로 각광.
...............................................
영산강
나주 영산포 홍어거리
나주 동양척식 주식회사.,엣 건물.
............동양척식 주식회사............
동양 척식은 한국인을 아프게 한 이름.
일제강점기 한국경제와 농민착취에 앞장.
한국, 만주, 동남아시아에까지., 검은 손길.
1911년 봄, 전라도 나주군 왕곡면.,한 할머니는
자기네 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일본인이 헌병과 순사까지 대동하여 논두렁에 팻말.
“남의 논에서 무엇을 하는 게요?”
“보면 모르겠소? 여기는 동양 척식 땅.”
“누, 누구 땅이라고?
여긴 내 땅이오. 내 땅!”
할머니는 팻말을 뽑으려 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떠밀리고 말았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였기에
남의 논에 팻말을 박고 주인 행세를 하려든걸까?
1908년 12월, 일본인을 한국에 이민시키는 회사로 설립.
서울에 본사를 두고, 부산, 대구, 목포, 사리원, 평양 등
9도시에 지점을 세우고, 한국 경제발전을 위한다고 주장.
“일본은 한국경제 발전을 도울 책임이 있기 때문에
회사를 세워 자원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려 합니다.
경험이 많고 부지런한 일본 농부를 한국에 이민시켜
농업기술을 전수, 한국인에게 돈도 빌려 주겠습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이 같은 구실로
대한제국 정부 소유의 토지를 받아 냈고,
일본 정부에서는 해마다 사업비를 받았다.
동양척식 주식회사는 한일 정부가
함께 사업비용을 댄 특수 회사였다.
그런데 자원개발 산업을 일으킨다던 회사는
헌병들을 앞세워 헐값에 땅을 사들이기 바빴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차지하려고 농민협박, 농사 방해.
특히 날씨가 따뜻하고 농사가 잘 되는
남쪽 지방에 눈독을 들여 살기 좋은 곳에
일본인을 이민시키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왜 자국민을
조선 땅에 이민
시키려 했던걸까?
당시 일본은 근대화를 거치며
여러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산업이 발전하자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렸지만, 집이나 식량이
부족해 일본에서 고통겪고 있었다.
품삯도 적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일본은 일본인을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보내려했지만 두 나라 모두 거절.
그래서 남아메리카 브라질, 페루 농업 이민.
한국으로도 눈돌렸는데 자국민을 이민시키면
가난한 도시민 문제도 해결되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를 대비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앞세운 것.
그러나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땅 주인이 되며 사정이 달라졌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계약 기간만
농사짓게 했고, 소작인이 마음에 안들면
계약을 깨거나 다시 계약을 맺지 않았던 것.
소작료도 껑충 뛰었다.
더욱이 땅 주인이 내야 할
세금, 비료 값, 씨앗 값까지
모두 소작인에게 떠넘겼던 것.
이것을 내지 못하면
동양 척식은 농민의 집을
쓸어 가다시피 빼앗았던 것.
볏짚이든 물동이든 이불이든
그릇이든 가리지 않고 가져갔다.
"모두 다 가져가거라.
숟가락조차 필요없다.”
먹을 게 없으니
숟가락마저 필요
없다는 울부짖음.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한국 농민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 주었다.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빌린 돈보다 훨씬 값나가는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점령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본격적으로
일본 이민자를 모집하며 한국으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늘면서 한국인은
농사를 지을 곳이 없어 살 곳을 찾아
한국농민은 간도, 만주로 떠나야 했다.
농민대부분 추운 겨울에 만주로 떠났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살림살이를 정리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추운 겨울에, 가난한
농민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야 했던 것.
짐이라야 이불 보따리 하나,
옷가지 몇 개, 숟가락이 전부.
남편이 단출한 이삿짐을 등에 지고,
아내가 아이를 업으면 이사 준비 끝.
“일본 사람은 쌀밥 먹으러 한국에 오는데
우리는 잡곡밥 먹자고 만주로 떠나는구나!”
사람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향을 등졌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시인 이상화는
국경을 넘는 이들을
보면서 이런 시를 썼다.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겨가도다.
을사조약 이후에 조국을 떠난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를 찾았다.
한국인 마을에다 학교를 세웠고,
군대를 키워 일본군 전투에서 승리.
그러나 등 떠밀려 쫓겨나다시피 한
농민들에게 만주나 간도는 척박한 땅.
농사를 지을 땅도, 잠을 잘 집도 없어서
간신히 바람만 막은 곳에서 생활했던 것.
그래도 황무지를 부지런히 가꾸면
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 호미질,
곡괭이질을 멈추지 않았던 한국인마을.
1930년대 들어 만주이주 한국인들이 늘었다.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고
이민자를 모집해 한국 사람을 단체로 이민시켰다.
“한국처럼 땅이 좁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가난을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광활한 만주는
무엇이든 풍족. 한국인마을에 집까지 지어 놓았으니
이민을 신청하십시오. 농기구나 씨앗도 모두 줍니다.”
일본은 만주만 가면
저절로 부자가 될 것처럼
떠벌렸고 한국 사람은 그 말에
속아 이민 길에 올랐지요. 그러나
만주는 일본이 말한 모습과는 정반대.
척박한 땅에
다 쓰러져가는
움막이 전부였다.
한국인 마을은 독립운동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공격 못할 테니까.
마을 주민들은 낮에는 거친 땅을 일구고
밤이면 흙성을 쌓거나 구덩이를 파는 일.
이무렵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만주까지 진출.
그래서 중국의 황폐한 땅을 값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거나 힘들여 농사를 지어 놓으면
이자와 세금으로 다 뜯어다 한국 농민들은
만주에서도 (주)동양척식 횡포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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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영산포 동양척식 주식회사.,문서고.
전남 나주.,영산포구 마을.
2013.09.14 나주 풍류락도 영산가람길
전라남도 담양군·장성군·광주광역시·
나주시·함평군·무안군·영암군·목포시
등을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영산강.
길이 138.75㎞,
유역면적 3,371㎢.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屛風山 : 822m)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장성호를 이룬 후,
황룡강(黃龍江)이라 불리다가 장성읍
북서쪽에서 월계천(月桂川)을 합류.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서 평림천(平林川)을,
송대동 부근에서 극락강을,
나주시 금천면 북쪽에서
지석천(드들강)을 합해
남서쪽으로 흐른다.
이어 나주시와 함평군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영산호를 지나 영산강하구둑의
배수갑문을 통과해 서해로 흘러든다.
..............
..............
전라남도 담양군·장성군·광주광역시·
나주시·함평군·무안군·영암군·목포시
등을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영산강.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
장성호를 이룬 후, 배수갑문을 통과해 서해로 유입.
영산강 옛이름은 금천· 금강, 나루터는 금강진
영산강하구둑의 완공으로 남해만·영암만·도포만
등의 바다는 영산강 유역으로 편입, 지면이 높은
갯벌은 농경지화 , 물은 바닷물에서 담수로 바뀌었다.
........................영산강.........................
통일신라 때 나주 옛이름이 금성(錦城)이었기에
금천(錦川)·금강(錦江),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
고려 때 신안군 흑산면 영산도(永山島)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마을을 개척해 영산포(榮山浦).
조선초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었다.
영산강 유역의 충적평야는 화강암지역으로
저평한 구릉지를 이루고 토양배수가 불량한 편.
상당히 비옥하여 평야의 대부분이 논으로 이용된다.
주요평야는 나주시 일대의 나주평야,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 일대의 서석평야,
함평군 학교면 일대의 학교평야 등이며,
영산강 유역에 펼쳐진 전남평야 핵심부.
유역 내에서는 쌀이 주로 나며,
나주 배·복숭아·포도, 나주·송정 채소,
학교의 양파· 마늘 재배가 유명하다.
영산강 유역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지고
바다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 영암, 나주 일대에서, 백제 고분군이
영암군 시종면과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서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이 강은 나주까지 조수가 밀려오는
감조하천(感潮河川)으로 바닷물 피해가 많았고,
홍수의 위험성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1976년에 나주댐·담양댐·장성댐이 완공,
1981년 12월에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면
나불리 사이에 영산강하구둑이 완공됨으로써
이 일대는 가뭄과 홍수, 염해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영산강하구둑의 완공으로
남해만·영암만·도포만 등의 바다는
영산강 유역으로 편입되었고,
지면이 높은 갯벌은 농경지화되었으며,
물은 바닷물에서 담수로 바뀌었다
(영산강지구농업종합개발사업).
그리고
바다로 흘러들었던 하천
삼포강(三浦江 : 23.5㎞)·
영암천(靈巖川 : 14㎞)·
도갑천(道岬川 : 18㎞)
등의 하천이 모두
영산강의 한 지류.
예로부터 수운이 발달해
목포-영산강(나주시 영산동)
간에 배가 왕래했으나 1977년 10월
마지막 배가 떠남으로써 수운기능 중단.
영산포는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이 지역 경제의 중심지역으로 부상해
목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급성장했다.
8·15해방 후에도 수운이 이루어져
20~30t급 어선이 20~40척 정박 가능.
1970년대 상류의 댐 건설 후
하상의 변동과 수량의 감소 및
영산강하구둑의 건설로 하류부의
수위가 낮아져 얕은 여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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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3
1970년대까지 돛단배 증기선 북적이던 영산포.
영산포 홍어는 굽이굽이 영산강 뱃길따라 올라와
닻을 내리면 잡힌 홍어가 먼 뱃길을 올라오는 사이에
자연발효되어 독특하고 절묘한 맛을 내는 웰빙 식품이다.
옛 영산포구가 있던 자리에 40여 곳
홍어음식점과 도매상이 들어서 있다.
홍어거리에 들어서면 홍어 냄새가 진동.
고려 말, 흑산도를 비롯한 전라도
도서지역에는 왜구 침입이 잦았다.
늘 생명의 위협을 받던 섬주민들이
강을 따라 뭍으로 거슬러 올라왔는데,
그곳이 바로 나주의 영산포였다고 한다.
특히, 흑산도 주변의 영산도에서 피신을 왔던
사람들이 많아 마을 이름이 영산포가 되었단다.
이들은 육지로 왔어도 어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흑산도 인근에서 고기를 잡아 배에 싣고 돌아왔는데,
더운 날이면 다른 생선은 썩어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홍어 만은 삭힌 후에 먹어도 아무런 탈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삭힌 홍어는
영산포 특산물이 된 것.
조선후기 학자 정약전 '자산어보'에는
“나주인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데,
탁주 안주로 곁들여 먹는다.”라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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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6
영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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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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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 관광지 100선’ 중 1위에 선정.
거친 파도와 바람이 빚어낸.,환상의 섬.
연평균 2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
섬 주위에 펼쳐진 크고 작은 무인도.
깎아지른 절벽들, 형언할 수 없는 절경.
눈시리도록 푸른 바다, 울창한 숲의 조화.
물이 맑고 투명해 바람이 없는 날
바닷속 10㎞가 넘게 들여다보인다.
바다밑 경관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유람선 선상에서 바라보는 남문바위 등
홍도 10경은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선상에서 즐기는 회 맛 또한 일품이다.
홍도에 가서 유람선을 타지 않는다면
영화관에서 영화 보지 않은 것과 같다.
유람선 투어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다.
홍도로 가는 길목에 흑산도는
가수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그리고 ‘흑산홍어’로 유명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생태적으로도 청정지역이다.
정약전 유적지, 철새전시관,
상라봉굽이길, 명품마을 영산도,
장도습지 등이 있다
................
‘느림의 행복’
슬로시티 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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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2위에 올랐고, 2015년에도
선정되는 등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증도 해송숲을 따라 걸으며
우전해변 바다 냄새에 취하고,
다양한 수생생물이 서식하는
광활한 갯벌에 또 한 번 취한다.
462만㎡(약 140만평) 규모.
단일 염전으론 국내 최대 규모
태평염전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
옛날 방식 그대로 천일염을 만든다.
파란 하늘이빚어내는 반짝이는 소금.
자연의 경이로움에 또 한 번 놀란다.
‘모든 생물은
생명이 시작된
바다를 기억한다’
발생학적 논거에서 시작되는
소금박물관 여행도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경제사,
기술사, 사회사는 물론 예술과
신화를 넘나들며 인류와 함께한
소금의 역사를 재밌게 보여준다.
천일염을 배우고,
만들어 보는 과정을 통해
자연환경과 먹거리의 중요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외에도
염생식물원 갯벌생태 전시관 등 다양한 체험
...........
다도해
한눈에 보는
바다정원 송공산.
.......................
송공산 분재공원은
다도해가 한눈에 보이는
송공산 남쪽 기슭 10㏊ 부지
분재원, 쇼나조각,
미니 수목원,화목원,
산림욕장, 미술관 등.
바쁜 현대인들이 자연 속
분재와 미술작품을 보면서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찾도록
조성한 자연 친화적인 분재공원.
분재원에는 소나무, 주목, 소사나무,
모과나무, 먼나무, 팽나무, 금솔, 금송,
피라칸사 등 1000여점의 분재와 신안 출신
우암 박용규 화백의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
12㎞ 백사장을 걸으며
추억 쌓는 대광해수욕장
.................................
임자도 서쪽에 위치한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은 해수욕장.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백사장.
길이 12㎞에 달하며 폭은 300m가 넘는다.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걸어서 1시간 20분.
1990년 국민관광지 지정.
완만한 경사와 따뜻한 수온,
광활한 백사장에 넓은 야영장.
천연 잔디, 운동장, 체육시설,
샤워장, 숙박시설 등 편의시설.
가족 단위의 피서객은 물론
학생들 수련회 및 운동선수들
전지훈련장으로도 인기다.
모래 해변에서 즐기는
승마체험은 색다른 체험.
매년 4월이면 국내 최대규모
튤립단지에서 ‘튤립축제’ 개최.
비금도
기사 이세돌
기념관 생가· 명사십리
비금도는 조훈현에 이어
한국바둑을 이끌어가는
천재기사 이세돌 출생지.
하의도
6칸 초가집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
하의도는 제15대 대통령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후광 김대중 거목 고장.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하의면
후광리 원후광마을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 출생.
김대중 전 대통령 호.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
생가는 1999년 종친들이
복원해 신안군에 기증했다.
복원된 생가는 6칸 초가집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기에
과거로 돌아간 느낌도 준다.
생가의 앞쪽에는 하의면의
전통적인 염전 체험장이 있어
탐방로와 소금전시관도 갈수 있다.
.......영산도(永山島)....
1650년경 최씨가 첫 입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전남 신안군 흑산면 영산리.
'영산화가 많이
핀다.' 하여
영산도.
동경 125°28′, 북위 34°38′
목포에서 서쪽으로 84㎞,
진도에서 서북쪽으로 60.4㎞
면적 2.25㎢
해안선 7.9㎞.
대흑산도·가거도·대둔도(大屯島)·
다물도(多物島)·대장도(大長島)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지질은 대부분 규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동쪽 해안은 단조롭고 급경사 사면인 반면,
북서쪽 해안은 완만한 경사에.,갑. 만 형성.
대부분 암석해안.,해식애(海蝕崖) 발달.
1월 평균기온 2℃,
8월 평균기온 26℃,
연강수량.,1,112㎜.
2009년 기준., 59세대
인구 103명(남 56, 여 47)
취락 : 북서해안 만입부 집중.
논은 없고 밭 0.11㎢, 임야 2.04㎢.
농산물은 콩·고구마·보리·채소 등
제주해류 난류 통과하는 인근해역은
난류어족을 비롯한 각종 어족이 풍부하다.
어획물 - 잡어·장어·전복·농어
전복·홍합·다시마 양식도 한다.
당산창송(堂山蒼松)·
기봉조휘(箕峰朝輝)·
비류폭포(飛流瀑布) 등
영산팔경(永山八景)이 유명.
가장 대표적인 제7경은
석주대문(石柱大門)이다.
청나라와 교역때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면 이 대문 안으로 대피.
교통은 흑산도에서 도선이 운항.
교육기관 흑산초등학교 영산분교장.
만입구에 선착장이 있다.
정기여객선이 격일제로 운항.
.....................................
.
장도 & 영산도
영산도.,해당화(영산화) 벽화.
"영산화"는 '해당화'의 속칭이다.
도시인은 "산유화"라고들 부른다.
영산도에서부터
영산강변을 따라서
영산포까지 피는 꽃.
그래서
"영산화"라
불리는걸까?
'영산화'
사실 상으로
그 이름이 없다.
영산화가 해당화이고
해당화가 곧 영산화이다.
이름없는 꽃으로 동질성 추구.
이는 곧 '메나리토리'
동일 생활권역을 의미.
즉, '영산도~ 나주 영산포'
'메나리토리 생활권역'이다.
영산도(永山島)
영산강(榮山江)
영산포(榮山浦)
.
그러나,
한자 지명은
각각 다르게.,표기.
고려왕조 최후의 보루라서
조선 초, 탄압받았던 것일까?
.
옛날 우리 선조들의 노동요 '메나리
가사에 '해당화'라는 용어가 들어있다.
김매기노래로는 〈미나리〉라고도 한다.
매우 구슬프고 처량한 느낌을 주는 민요,
경상도의 「얼사영」, 충청도의 「산유화」,
전라도 '산야', 강원도 강릉 '오독떼기'와 비슷.
산유화(山有花)를 풀어서
'뫼놀이', 메나리, 메나리토리
“어뒤후후야
시내심곡 가리갈
가마구야 잔솔밭을
넘어 굵은 솔밭으로
넘어가는구나 허허후후야.”
이 민요가 불리는 지역., 메나리토리권.
대표적인 노동요로 〈정자〉·〈메나리〉
·〈산유화가〉·〈어산요〉·〈아라리〉
·〈목도소리〉·〈노 젓는 소리〉 등
메나리조가 사용되는.,판소리 대목으로는
강산제 심청가 중 심봉사가 황성 맹인잔치에 가며
부르는 길소리와 심청 어머니의 상여가 나가는 대목.
상여소리 등이며, 그밖의 민요 가운데 〈쾌지나칭칭나네〉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한오백년〉 등이 있다.
영산강은 담양군 용면(龍面) 용추봉(龍湫峰:560 m)에서
발원하여 담양 ·광주 ·나주 ·영암 등지를 지나 황해로 유입.
영산강은 남서류하여 광주천(光州川:11.8 km) ·
황룡강(黃龍江:45 km) 지석천(砥石川:34.5 km) ·
고막원천(古幕院川:21.4 km) 함평천(咸平川:15 km)
등 지류와 합류하여 영산강 하구둑 거쳐 황해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