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壽有孫 曰(채수유손 왈) 無逸(무일)인데
(채수는 할아버지의 이름. 孫은 손자 손. 무일無逸은 손자의 이름, 일逸은 달아나다, 없어지다, 편안하다, 게으르다 등 여러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중 어떤 뜻으로 손자의 이름을 짓겠습니까?)
= 채수에게 손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무일이라고 불렀다.
*年재五六歲(연재오륙세)에
(재는 실사絲의 왼쪽 부분과, 참소할 참讒의 오른쪽 부분을 합친 무지 복잡한 글자입니다. '겨우'라는 뜻입니다. 숫자가 나란히 나올 때는 앞 뒤 상황을 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팔二八 청춘은 곱하여 16세지만, 여기서 오륙五六은 그냥 대여섯일 뿐입니다. 歲는 해 세)
= 나이가 겨우 대여섯 살이었을 때
*壽夜抱無逸而臥(수야포무일이와)하여
(夜는 밤 야, 抱는 안을 포, 臥는 누울 와)
= 할아버지 채수가 밤에 손자 무일이를 안고 누워서
*先作一句詩 曰(선작일구시 왈)
(先은 먼저 선, 作은 지을 작, 句는 구절 구, 시는 시 시)
= 먼저 한 구절의 시를 지었는데,
*孫子夜夜讀書不(손자야야독서불)이라 하고
(讀은 읽을 독, 書는 책 서. 원래 부독서不讀書라고 해야 어법 상으로는 맞겠지만 시이기 때문에 순서에 변화를)
= "손자는 밤마다 책을 읽지 않는구나" 라고 하고는
*使無逸對之(사무일대지)한대 對曰(대왈)
(使는 '~로 하여금 ~하게 하다'라는 뜻의 사, 對는 대답할 대. 여기서는 댓구를 붙인다는 뜻.)
= 무일이로 하여금 거기에 댓구를 붙이게 하니, 무일이 댓구를 붙이기를
*祖父朝朝藥酒猛(조부조조약주맹)이라 하더라.
(祖는 할아비 조, 朝는 아침 조, 藥은 약 약, 酒는 술 주, 猛은 사납다. 윗 구절과 정확한 댓구입니다. 손자는:조부는, 밤마다:아침마다, 독서를:약주를, 않는다:심하게 한다)
=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약주를 심하게 드시는구나" 라고 하였다.
손자를 몹시도 귀여워 했길래 밤에도 안고 누웠겠죠. 그렇지만 마냥 귀여워 할 수만은 없어서 공부 좀 하라고 은근한 압력을 넣었습니다. '손자야, 이제는 책 좀 읽거라.' 이때 대뜸 튀어나온 손자놈의 절묘한 대꾸, '할아버지, 약주좀 그만 잡수세요.' 할아버지는 맹랑한 손자놈에게 넌지시 공부하라고 압력을 넣다가 그만 본전도 못건졌습니다. 그래도 어쩌면, "허허 그놈이 이젠 댓구를 제법 잘 붙이는구만."하고 흐뭇해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시에서 뜻과 구조에 맞게 댓구를 붙인다는 건 대단히 고급스러운 지적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걸로 과거시험도 보았을 테구요.
아,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壽 又於雪中(수 우어설중)에
(又는 또 우, 於는 어조사 어, ~에서, 雪은 눈 설)
= 채수가 또 한번은 눈길 속에서
*負無逸而行(부무일이행)할새
(負는 질 부, 싸움에 지는 것도 부, 승부勝負는 이기고 짐, 등에 지는 것도 부, 부담負擔.)
= 무일이를 등에 업고 가다가,
*作一句 曰(작일구 왈)
= 시 한 구절을 지었으니,
*犬走梅花落(견주매화락)이라 하니
(犬은 개 견, 走는 달릴 주, 落은 떨어질 락)
= "개가 달리니 매화가 떨어진다."(? 개가 매화나무 밑으로 달려갔나요? 왜 꽃잎이......)
*語卒(어졸)에 無逸(무일)이 對曰(대왈)
(卒은 졸병일 때도 졸이지만, 마친다는 뜻도 있습니다.)
=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무일이가 댓구를 붙이기를,
*鷄行竹葉成(계행죽엽성)이라 하다.
(鷄는 닭 계, 竹은 대나무 죽, 葉은 이파리 엽, 成은 이룰 성, 개:닭, 달리다:가다, 매화 꽃잎:대나무 잎, 떨어진다:이루어진다 처럼 앞 구절과 역시 하나 하나 정확한 댓구를 이룹니다. 한시에서의 댓구는 이렇게 문장의 구조도 대응이 되고, 대를 이루는 글자끼리도 대응이 되는 것입니다.)
= "닭이 걸어가니 대나무 잎이 만들어진다" 라고 하였다.
근데........ 이게 뭐야? 뭐가 어쨌다는 거야?
개가 달려가느라고 매화가 떨어진 건 이해가 간다지만,
닭이 걸어가는데 왜 대나무 잎이 만들어져?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당최......
정말이십니까? 정말로 모르시겠어요?
하지만 이런 걸 설명드리는 게 혹 실례가 되지는 않을지....
매화 꽃잎은 눈 위에 찍힌 개 발자국이며,
아하, 그러면 대나무 잎은 역시 눈 위에 찍힌 닭의 발자국?
무일이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참으로 멋진 비유이며 뛰어난 댓구입니다.
아니 어른이 이렇게 썼다 할지라도 역시 멋진 비유며 뛰어난 댓구였을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또는 해설을 보고 난 뒤라도 느낌이 팍 오지 않는다면 그건
본인의 문학적 상상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껄껄껄 웃으셔야죠. "허허 그놈 참......"
아, 이렇게 댓구 잘 붙이던 무일이는 그래서 나중에 자라서 어떻게 되었냐구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뒷 얘기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잘되었겠죠 뭐.
혹, 말대꾸 또박또박 하다가 어디서 무슨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구요.
아니 근데 꼭 나중에 뭐가 되어야만 한답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안되나요?
※ 사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중 채수는 1449(세종 31)-1515(중종 10) 년간에 살았으며, 채무일은 1496(연산군 2)-1556(명종 11) 년간에 살았던 조선시대 문신으로, 두 분 다 여러 높은 벼슬을 역임하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