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계간평 일상의 굴레와 그 너머 / 최준

[김명아]

∥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____

일상의 굴레와 그 너머
최  준

버릇처럼 무심히, 관성적으로 지나가는 내 삶의 하루는 어떤 의미일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몸이 처해 있는 시간과 공간은 생의 변곡점인 순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삶에 내재해 있는 쉼표도, 느낌표도, 물음표도 결국은 하나의 마침표를 향해 가는 도정 위에 놓여있다. 모든 생의 시작과 끝은 예외 없이 한 문장이다. 탄생과 죽음으로 끝나는.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단절을 경험한다.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단절은 나와 외부와의 불화를 조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과의 불편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자아란, 지나고 돌아보면 존재의 본원적인 가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실과 꿈―희망 사이를 방황하는 자아는 예나 지금이나 불만족인 현실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결핍의 주체인 동시에 현실을 꿈―희망으로 견인하려는 욕망의 실체이기도 하다.        
자아에게 일상은 반복과 새로움을 동반하는 운명적인 요소이며 선택의 요소이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먹고 잠자는 생명의 기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행해야만 하는 이와 같은 행위들은 숨쉬고 있는 존재들이 가진 공통의 운명이다. 일상의 시간들을 자아가 움직일 때, 그 의식은 저마다 다른 모양과 빛깔을 갖는다. 너와 내가 소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생물학적인 몸은 하나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지만 의식적인 마음은 저마다의 변별성을 지니고 이 세계를 무성한 나뭇잎으로 펄럭거린다.
하나의 자아에서 태어난 한 편의 시가 다른 자아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자아의 인식이 한결같다면 시는 그 존재 가치를 진즉에 잃어버리고 먼 우주로 날아가 암흑물질에 섞여들었을지도 모른다. 시를 쓰는 시인의 자아도 일상을 살지만 개별성의 영역 안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배타적인 요소도 더불어 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는 동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너와 내가 다름을 확인하는 아주 적절한 수단일 수 있다. 시로 다른 자아의 삶을, 그의 의식을 엿본다는 건 사회의 도덕률로부터 자유로운 한 자아의 아주 은밀한 즐거움이기도 하겠다.     

오후 한 시, 빵집에서 사온 갓 구워낸 모카빵을 먹을 때 그녀가 형용사임을 알았다 속은 말랑말랑하고 겉은 바삭바삭한 갓 구워낸 그 형용어를 거부할 수 없었다 부서질 듯 사각거리는 그녀의 긴 손톱을 음미할 때, 금방 내린 아메리카노 커피는 그녀를 맛보는 자극적인 부사가 되었다

모든 준비는 다 끝났다
무지개도 그려 넣었다
무화과 향수도 두서너 번 뿌렸다
아름다운 추상화가 그려진
피카소 호텔도 예약했다
 
그녀의 향기가 나를 지배한 날들
나도 그녀에게 충분히 지배당했었나?

오후 한 시는 형용사와 부사 사이에 걸려있고
그녀가 떠나면서 잠시 기대어 섰을 현관문이
입술을 조금 벌리고 있었을 뿐이다

<내 안에서 사라진 지난 계절을 찾습니다>
수원, 「고양이가 사라진 오후」 전문

“오후 한 시”가 “형용사와 부사 사이에 걸려”있다고 말하는 자아는 곧 ‘형상’과 ‘향기’를 보고 냄새 맡는 예민한 눈과 혀를 지닌 존재다. 그의 의식은 객관화된 인식이 아니라 내면화된 인식이다. 바깥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감각적 작용은 눈으로 인지하는 형상과 혀로 인지하는 맛일 테다. “오후 한 시”라는 시간적 설정은 점심식사 이후의 상황이다. 밖에서 안으로, 그리고 다시 밖으로 향하는 이 같은 여정은 몸의 이동인 동시에 의식의 움직임이다.
시의 화자는 안과 밖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니까 고양이는 화자의 의식의 대리물인 셈이다. “그녀”로 지칭되는 고양이는 화자의 의식이 선회하는 방향성을 암시한다. 화자가 점심으로 먹고 마신 “모카빵”과 “아메리카노 커피”는 외부의 것이고 고양이는 환치된 화자의 의식이다. 화자는 여전히 실내에 머물러 있지만 의식은 외출 중이다. “내 안에서 사라진 지난 계절”을 찾으러 “그녀가 떠나면서 잠시 기대어 섰을 현관문이/ 입술을 조금 벌리고” 있는 정황은 회귀를 전제한 시간을 암시한다. 일상에서의 일상적이지 않은 의식은 종종 상상을 동반한다. 이 불확정적이고 극히 개인적인 의식은 타자에게 전이되기가 불가능하다. 타자의 양해와 이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안에는 고양이가 산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당신이 혼자일 때면 바깥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식이다. 고양이가 사라진 오후 한 시의 당신을 상상한다.  

 24시간 편의점에서 1회용 커피를 마시다 내 입맛은 대단히 사치스럽다는 생각에 불현듯 주변에 아무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절규한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세상아 안녕 하고 자살할 것 같다 아니 그녀처럼 미묘하고 끔찍하게 제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유리잔처럼 깨뜨리지도 못하고 내게 주어진 시간 속 끼니를 하루하루 때우며 커피가 고플 땐 커피 초콜릿이 고플 땐 초콜릿 경계와 경계를 넘나들며 사과가 고플 땐 덜 익은 초록 사과 소주가 마시고 싶을 땐 맑고 투명한 소주를 최대한 우아하게 씹어 삼키며 새로운 색깔에 전율을 뒤섞어 가볍지 않은 생을 어떤 식으로든 끌고 나갈 것이다

자동차들이 내뿜는 미세먼지 속 텅 빈 거리를 편의점 의자에 앉아 천천히 바라보다 온몸을 격하게 비틀며 내 삶과 입맛은 너무 귀족적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이 시간들은 왜 주어진 걸까 반문하며 스파게티로 허술한 점심을 꾸역꾸역 목구멍 깊숙이 밀어넣다 헐가방매돼 굴러다니는 오래 전 펴낸 다섯 번째 시집을 펼쳐본 뒤 나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며 정오의 빛 아래 내 팔과 다리는 먼지를 닮았지만 나는 가장 슬픈 가슴을 지닌 위대한 사내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삶 같지 않은 풍경과 민낯을 이방인들에게 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 누구도 그 누구라고 해도 내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어, 없다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다 경고를 보내고 있는 듯 붉은 신호등 닮은 재게 몸을 움직이지 않는 황금색 망토를 걸친 생 앞에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턱을 괴고 사유하지 말자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먹고 자고 싸며 신음을 뭉개고 있다

단호하게 삶은 그렇다 엄청난 시간의 무게를 발아래 밟고

강만수, 「검푸른 비망록」 전문

내 삶을 적은 노트는 어떤 빛깔일까. 집이 아닌, 익명의 “이방인”들과 공유하는 “거리”에서의 모습은 어떠할까. 살기 위해 살아 있는 생에게 삶은 “사유하지 말자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먹고 자고 싸며 신음을 뭉개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살아 있으니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처럼 죽지도 못하고 “내게 주어진 시간 속 끼니를 하루하루 때우며” “가볍지 않는 생을 어떤 식으로든 끌고 나”가야 하는 “헐가방매”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의 자아가 느끼는 자신의 생에 대한 이러한 비극적인 인식은 탈피나 검열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솔직한 자기고백록과도 같다. 외부 세상에 대한 원망 대신에 “사유하지 말자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먹고 자고 싸며 신음을 뭉개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 절박함을 비단 시의 화자만 느끼는 것일까.
비극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삶에 섞여 있으므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일상에 대해 사유할 권리가 있다. “엄청난 시간의 무게를 발아래 밟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비극성은 때로 그러니까 살아야만 한다는 삶의 당위성을 지시한다.   

어제까지 알았는데 오늘 모른 척한다
모른 척해야 한다

모른 척 살아갈 날이 많기 때문에 모른 척이 더 편하다
아는 척하다보면 모른 척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아는 얼굴을 모른 척해야
내일도 아는 얼굴이 되고
모레도 아는 내가 된다

얼굴만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 모른 척해야 한다
마음 뒤편의 찍힌 착한 얼룩까지 모른 척해야 하는 것이다
얼룩들이 아무리 많아도
얼룩의 얼룩들이 합세해도 덮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모른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다만 당신 언저리를 서성거리던 늦가을의 소멸
빗물에 뭉개진 축축하고 웅크린 기억들
여전히 익숙한 낯선 뒷모습들
꽁꽁 언 바닥을 흔들어 깨우던 플라타너스 잎들의 싸늘한 시선…

내일은 모른 척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해림, 「모른 척하기」 전문

“모른 척한다”는 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외면이거나 부정이다. 이 역설은 곧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는 “모른 척”하는 게 현명하다는 삶에서의 경험적인 확인에 다름 아니다. 생각해보면 안다는 건 기실은 모른다는 것과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타자를 온전히 안다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저마다 삶의 와중에 새겨진 “얼룩”들은 모두가 숨기고 산다. 얼룩은 드러내고 싶은 게 아니라 숨기고 싶은 것.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래야 관계가 지속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에 의하면 내가 아는 것들을 다 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끝난다. “여전히 익숙한 낯선 모습들”을 서로에게서 확인하는 관계는 대상에 대한 인정과 용서 대신에 지속성을 담보한다.
이렇게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게 편한 삶인지, 아니면 불편한 삶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단지 대상에 대해서 오늘은 안다고 말하지만 “내일은 모른 척할 수 있”다는 건 외부 상황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변화일 수도 있겠다. 내가 바뀌면 모든 게 변한다. ‘망각’이 아니다. ‘짐짓’이다.
 
화장실 옆 테이프 가게에서
쿵쾅쿵쾅 멋들어지게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
사람들 귀청 때려대며 호객하고 있다
뽕짝 테이프와 CD 빼곡하게 꼽혀있는
진열장 벽면에 부착된 홍보물
최신 메들리 송대관 다방의 김양
다시 듣고 싶다 칠공팔공 발라드 베스트
DJ 처리와 함께 멋져 부러
명품 오리지널 가요 대잔치
김용임 장윤정 박현빈 박상철 유지나 베스트 외
십오인 결정판 별 잔치
야한 얘기 송해 송도 있고 거시기 품바도 있다
묻지마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린 한 떼의 사람들
몰려와 춤을 춘다
울긋불긋 단풍 든 얼굴들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다고
벌건 대낮부터 흥청대는
늙고 추레한 오후 새 떼 인생들

안원찬, 「천안 휴게소」 전문

삶에서의 경험을 시로 써낼 때, 풍자는 때로 아주 유효한 경우가 있다. 지나친 심각성으로 빠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면서 현실을 에둘러 비판하는 방식이다. 물론 한계도 잠복해 있다. 이는 전적으로 시인의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는데, 김지하의 「오적」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현실의식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다. 너무 나가면 도리어 공감해야 할 시적 위의를 상실하기도 하는 위험성이다.    
위 시의 화자는 고속도로 “천안 휴게소”에 들렀다. 나름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왜 들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화자는 휴게소 “화장실 옆 테이프 가게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을” 듣는다. “뽕짝”은 여정의 흥을 북돋아주기에 아주 적절한 리듬과 분위기를 싣고 있다. 그런데 “묻지마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린 한 떼의 사람들”이 그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춘다.” “벌건 대낮부터 흥청대는/ 늙고 추레한 오후 새 떼 인생들”이다. 그들은 나름의 “인생들”을 즐기는 중이겠지만 화자의 눈에는 “늙고 추레한” 모습이다.
그들의 생이 어떠한지는 모르지만 화자에게 한 컷의 사진으로 비친 “천안 휴게소”에서의 그들의 행태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진정한 삶은 그런 게 아니다. 노랫말처럼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는 게 삶이지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화자가 아닌 시인의 눈에 비친 휴게소의 풍경이다.   

허연 쌀알 하나
서쪽 하늘에 떠있는 저녁
한강변을 뛰다
길 한가운데에 멈춰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작은 여치 한 마리 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낯선 땅 위에 서 있는 낯선 가느다란 초록색 다리
스쳐 지나가는 이 바람은 또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여치의 생각을 똑같이 따라하고
스쳐지나 가려던 바람도 잠시 머뭇거렸다

며칠 뒤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여치는
짓이겨져 있었다
나비가 날던 곳
아이들이 뛰놀던 곳
여치를 짓누른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강건늘, 「우리를 스쳐간 것, 우리가 스쳐간 것」 전문

모든 존재는 소멸을 향해 행진한다. 예외가 없다. 삶과 죽음은 우리 생의 처음과 끝을 마무리하는 문장의 시작이자 끝이다. 생의 와중에 “스쳐 지나가는 이 바람은 또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지속되는, 풀길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잠시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느닷없이 죽음의 순간을 맞게 된다.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살다가 죽는다. 길 위에서 제가 가야 할 길을 고민하던 “여치”는 그게 곧 죽음의 길이었음을 죽음으로써 증명한다. 여치의 죽음을 확인하는 화자는 여치의 생이 곧 자신의 생과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화자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생을 살고 있다. 죽음이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가, 하는 의문 또한 죽지 않았으니 알 길이 없다. 
삶은 저마다의 것이지만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혼자를 확인하기도 하고 혼자 있음으로 우리를 확인하는 역설적인 시간도 갖는다. 겨울의 초입에서 세상이 뒤숭숭한데 이 땅의 시인들은 자신의 자아를 어떤 자리에다 세워두고 겨울을 지낼까. 그 의식의 촉수가 어디를 향해 있을까.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오면 그들이 겨우내 바라본 세상과 그들이 살아낸 일상의 나날들은 어떤 작품으로 읽혀질까.
좋은 시는 없다. 공감과 감상이 있을 뿐이다. 계몽의 시대를 지나왔으니 이제는 자아의 시대다. 시를 이해하고 시를 쓴 시인의 자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시는 자아의 자아 확인이기에 반타자이고 반사회적이며 반국가적이다.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 확인이자 자기 배반이다. 시가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아를 무시하고 우리를 앞세우는 세상에 항거하는 처절한 방식이다. 알고 보면 시인도 사회적인 개체이다. 시인들도 당신과 같은 일상을 산다. 그들의 말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지상에 새겨져 있다. 시를 읽을 때, 당신도 시인이다.

최준 / 1963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