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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성안의(成安義) 1561년(명종 16)∼1629년(인조 7). 의병장. 영주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참봉 적(績)의 아들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자(正字)로서 고향인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과 함께 거병하여 약 1,000여명을 거느리고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1597년 지평, 1598년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다시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가 되어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제세(濟世)의 재간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뒤 사친(事親)을 이유로 1600년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아가 4년간 선정을 베풀었다. 아버지의 병 때문에 창녕에 돌아갔는데 부모의 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복상을 마친 뒤 1607년 남원군수에 제수되고, 1612년(광해군 4)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처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사성(司成)이 되고, 다시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正)에 옮겼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국왕을 공주로 호행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제주목사를 제수받고, 1628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이조판서·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추증받고,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부용당선생일고(芙蓉堂先生逸稿)》가 있다.
*부용당 성안의에 대한 만사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성공(成公) 묘지명 갈암 이현일 찬 - |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贈資憲大夫吏曹判書成公墓誌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