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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봄바람이 불고 있는 산 너머 남녘 땅, 올망 졸망한 다도해 섬들이 석류알 처럼
알알이 백힌 고흥 팔영산을 향해, 몸 속 가득히 요동치는 설에임을 그득 안고
첫 새보케 오리역으로 달려 본다. 명품
느림보 산악회 리무진을 기다리는, 강 대장님을 비롯한 여러 벗님들이 반가이 맞아 주신다.
한의학에선 문둥병이나 천형으로 불리우고 서양의학에선 노르웨이 출신 의사인 한센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 된 나병은 유전으로 발생하는 질환은 딱히 아니지만 의사들 말에
의하면 막연히 유전성이 있다고만 추론할 뿐 아직까지 정확한 감염 경로도 명확히 드러
난 건 아니라고 한다.
내 고향땅 안동에는 성좌원이라고 하는 나환자 집단 정착촌이 있는데 도시가 팽창되기
전에는 외곽의 한적한 야산 지대 였었지만 지금은 성좌원 주위로 무수한 아파트들이 쑥 쑥
들어 서고 있다. 오래 전 부터
안동시에선 이 성좌원을 이전할려고 여러 궁리를 했었지만 시 예산으로선 감당키 어려운
이전 비용 때문에 여태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고급스런 삼성 래미안 아파트가 들어 서면서 요 몇년 사이에 명품 동네로 탈바꿈한 용인시
동천동은 내가 살고 있는 성남 분당에서도 한 눈에 보이는데, 염광피부과라는 피부과 병원이
꽤나 유명한 곳이다.
동천동은 원래 나환자 정착촌 이였었다.
아마도 국유지였었던 이 땅에 자리를 잡은 한센인들은 자기네들이 결성한 조합에서 임의로
땅을 분할하여 등기와는 별도로 소유권을 행사하게 되자 이 땅에 무허가 슬래브 건물을
지어선 임대 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임차를 한 대부분의 영세 공장은 가구업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가구란 업종은
매출 규모에 비해 제품이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크므로 임대료가 비싸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환자촌은
무허가 건물이든 머든 찝쩍거리는 놈이 없는 치외 법권 지대이다. 세무쟁이든 구청주사든
한센인들에겐 찍소리를 못한다. 당시만 해도
동천동엔 자체 경비가 있었고 염광피부과는 이 나환자들이 공동 출자한 병원이므로
연말이면 결산을 하여 이익금을 분배하게 되는데 한센인들의 모임은 약간 특이한 점이
있다. 일반적인 모임은
불참을 하게 되면 벌금을 내는 경우가 있지만 한센인들은 모임에 참석을 하면 할 수록
많은 돈을 준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선
일단은 머리수가 많은 집단이 큰소리를 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안동에 있는 성좌원 입구에도 물론 병원이 있지만 동천동의 염광피부과도 유명세를
탄 것은 한국전쟁 이후 의약품이 귀하던 시절 나환자촌에서 나오는 약이 효과가
좋을 것이라는 기대와 시중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약품들을 구하기 편리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유명세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정확히 22년 전에, 경영을 맡았던 몇몇 사람들의 장난질로 부도가 난 가구회사의 재건을
의뢰 받은 난 흙먼지 풀 풀 풍기는 동천동을 단신으로 찾아 왔었다. 이 동네는
바닥에 내려 앉지 않고 공중에서 무리를 지어 왱왱 거리는 이상한 파리가 어찌도 많은지
처음에는 밥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었고 이 파리들은 에프 킬러 정도는 하루 쥔종일
뿌려야 겨우 죽을 정도로 독한 놈들 이였었다. 그 뿐이 아니다
부도 여파로 임대료가 상당히 연체된 창고 건물주는 나환자를 남편으로 두었던 정상인인
부인네인데 행동거지를 보면 정상은 분명 아니다. 창고 임대료를 내는
날이면 저 멀리에서 부터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 오고 이 소리를 들은 난 뒷문
으로 탈출을 하여선 어느 후미진 곳에서 바들 바들 떨면서 쮸구리고 앉아 죄 없는
짝붕알이나 쮸물떡 거리다간 해 그름 할 무렵에야 사무실로 내려 오곤 했었는데 부도 난
어음 쬬가리를 들고 찾아 오는 한센인들과 여타 빚쟁이 한테 시달리면서 급기야는 담배를
하루에 세갑이나 피우게 된다.
한마디로 담배를 부엌 강아지 좆 빨듯이 빨아 대었다.
죽을 고생을 하여 참으로 짧은 기간에 경기도 김포에 버젓한 공장을 마련하여 회사를
성공리에 이전을 완수하곤 연일 가구를 찍어 대면서 돈을 긁어 들일 일만 남았던 어느 날
재수가 없는 놈은 앞으로 엎어 져도 똥꾸녕에 돌멩이(돌삐)가 찡긴다고 하더니만 아니 아니
멍멍이 물건은 뒤로 털썩 주져 앉아도 앞으로 쑤욱 까져 나온다고 하더니만 재수가
없을려니 물주란 인간이 환장을 하여선 ...
각설하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에선 참으로 묘하게도 동천동 아파트들이
한 눈에 보인다. 볼 때 마다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할 따름이다.
이 무렵 우리 사무실 바로 앞에 있는 자그만 밥집 사장과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밥집
사장은 동천동 일대의 영세 공장 등등에 배달을 많이 하는 통에 동천동에 관해선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전라도 사람들을 개땅쇠라 부르는데 개땅쇠가 간척사업을 한 갯펄밭에서 소작을 하는
농부를 지칭하는 정도로만 알 뿐 정확한 내력을 잘 모르듯이 우리 경상도 사람들을 보리
문둥이라고 불렀던 건 경상도에선 서당에 다니는 아동을 높여 부르기 위해 글을 공부하는
아이라고 해서 문동 즉 글 문자 아이 동자로 늘상 불렀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밥집 사장의 말에 의하면 놀랍게도 나환자 중에선 경상도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이 밥집 사장은
나환자들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탓에 이 분들의 혼사에도 적극 참여를 하는데
전국적으로 결혼식을 따라 가 보면 양가 부모들이 반드시 한센인들 끼리만 혼사를 한다는
것이다. 자식들은 미감아라고 하여 출산과 동시에 격리를 하게 되어 한센병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집안 내력을 따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극성 덕분에 정상적인 집안과의
혼사는 어렵다고 한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묘하다. 원래가
공동묘지나 나환자촌은 후미진 외곽의 버려진 땅일 뿐이였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세상이 할라당 바뀐다. 안동에 있는 나환자촌인 성좌원도
성좌원이 이전을 하기만 하면 금싸라기땅이 될 터이고 용인시 동천동은 이미 명품
아파트촌이 형성되어 버렸다.
전남 고흥이라고 하면 5공 시절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역임하셨던 장 세동씨와 가난을
벗어 날려고 발버둥을 치던 시절 거구의 서양인들과 쬭바리 놈들을 박치기 한방으로
꺼꾸러 뜨려, 온 국민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불러 주었던 프로레슬러 김 일 챔프가 생각
나는데, 국위를 선양하였던 김 일 챔프가 박 정희 대통령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니 자신의 고향인 고흥땅에 전기를 넣어 달라고 하였다는 얘기를 보면
알 수가 있듯이 고흥땅은 남단의 낙후된 땅이였었고 한센인들의 거주지가 된 소록도는
거론할 필요가 없다. 허나
아름다운 고흥반도에 있는 팔영산에 전국에서 관광버스가 들이 댈 줄을 그 누가 알았
으리요. 기왕지사 얘기가 나온 김에
생거진천 사거용인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유래를 정확히 아는 이가 없다.
비옥한 농토에 자연재해가 거의 없었던 충청도 진천땅은 살기가 좋은 고장이고 산세가
수려한 용인땅은 음택 즉 묘지를 쓰기가 좋은 땅 정도가 정설이 아닌 가 싶은데 이 말의
어원을 찾기 위해서 얼마 전에는 학술 쎄미나도 열렸었는데 여러 썰레발이가 있었다.
고려말 조선초 문신 최 유경이란 분이 진천에서 살다가 죽어선 용인 기흥구 공세동에
묻히게 되면서... 어느 부인네가
용인땅에서 살다가 남편을 잃고 진천땅으로 재가를 하게 되면서...
진천군에서 홍보용으로 나온 이바구는 더 더욱 기가 막힌다.
진천땅에 살던 추 천석이란 사람이 죽었는데 죽을 팔자가 아니라서 마침 용인땅에 살던
동명이인인 또 다른 추 천석이란 사람이 죽게 되자 그 사람의 몸으로 들어 가서 ...
한마디로 첩년 사타구니에서 날개 치는 소리 처럼 들린다. 명색이
지방 자치단체란 곳에서 설화성 얘기를 홍보 자료로 배포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민망하다.
생거진천이라고는 하지만 진천 아파트 가격은 용인 동천동에 있는 삼성 래미안 아파트에
비하면 거의 개값 수준이다. 속물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사람 행세 하면서 살기는 용인이 헐 낫제.
앞서 거론한 전라도 개땅쇠나 경상도 보리 문둥이 처럼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 또한
명확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다. 어느 분의 약간은
특이한 주장이 있어 잠시 소개를 해서 올려 드리면
조선 시대의 왕릉은 한양에서 지금의 킬로수로 따지면 100리 이내에 쓰게 되어 있지만
정조 대왕은 100리가 넘는 수원의 화산에 약간의 무리를 하여 아버님인 사도 세자의
릉을 천장 즉 이장을 하고 화산에 살던 주민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 이주를 시키면서
정 약용으로 하여금 수원성을 축조케 되었고 후일 정조 대왕 본인도 아버님 릉 옆에
신후지지 즉 음택을 마련하여 지금의 융 건릉이 되었는데 왕릉이 새로 만들어 지거나
이장을 해 오게 되면 그 일대는 참으로 곤난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사람이
사는 민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묘지 마져 몽쨩 이장을 하게 되는데
통상 왕릉 한기가 이장을 해 오면 민초들의 묘지가 약 500기 정도 이장을 하게 된다고
한다. 주로 한양 인근에
조성되었던 왕릉이 처음으로 수원으로 이장을 해 오면서 난데없는 홍역을 치루었던 수원
사람들은 크나 큰 고민에 빠졌었었던 가 보다. 수원땅이 묫자리가 좋은 곳이라고 왕릉이
연일 내려 오게 되면 골치가 아풀 것은 자명한 사실인지라 수원 동남방에 위치한
용인땅이 묫자리 쓰기엔 최고의 땅이고 그 아래에 위치한 진천땅은 살기엔 더 없이 좋은
땅이란 소문을 내어 사람들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인데
하필이면 수원땅에서 소 왕갈비가 어째서리 그리도 유명한지도 알고 보면 참으로 잼 난다.
우선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게 된 설렁탕의 유래를 잠시 거론하면, 농업국가인
조선에선 봄철이 되면 임금께서 동대문 쪽으로 나아 가서 농사를 권선하는 선농단을
설치하곤 친히 농사를 짓는 친경을 하게 되는데 이런 행사를 보기 위해서 인근 주민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을 터이다.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는 소를 통째로 잡아 선 국을 끓였다고 한다. 선농제를 지낼 때
먹었던 탕이라고 하여 선농탕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어 버린 것인데 어떤 이들은
설렁탕은 곰탕 보다 짧은 시간에 대충 즉 설렁 설렁 끓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기는
한다. 여기서 문제는
조선 시대에는 농사를 지을 때 꼭히 필요한 소는 허가 없이는 절대로 도축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민초들이 선농제 외에 소고기 맛을 볼 수가 있는 경우가 한가지 더 있다.
왕릉을 축조하기 위해선 여러 달을 토목공사를 해야 되는데 이때는 특별한 날이라 하여
소를 도축하였었고 추측컨데 수원성을 쌓는 힘든 노역을 하면서도 소를 도축 했을 수도
있고 아버님 사도 세자의 릉에 능제를 지내기 위해 정조 대왕께선 자주 수원 화산땅으로
행차를 하셨는데 이때도 몰려 든 사람들을 위해 소를 도축했을 수도 있다.
수원 왕갈비 뿐만이 아니라 여타 소갈비들도 왕릉과는 틀림없는 상관 관계가 있다.
지금도 서울에선 홍릉 갈비나 태릉 갈비가 무척이나 유명하다.
우리가 사는 성남땅에 있는 남한 산성엘 올라 보면 여러 민속 음식과 함께 막걸리가 유명
하다. 남한 산성 뿐만이 아니다.
부산을 비롯한 여러 산성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특산품으로 막걸리가 등장을 한다. 왜 일까?
왕릉 조성을 할 적에 소를 도축하였던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면 틀림 없다.
산성을 쌓는 힘든 노역을 하기 전에 우선 식량 겸용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막걸리를
만드는 술도가 부터 맨 먼저 산성 밑에 설치를 하였다는 것이다.
가락국의 옛 터전인 김해 육군 공병학교에서 외출을 나와, 같은 내무반을 쓰는 동기 12놈과
함께 셔틀 봉고 타고 올라 간 부산의 어느 산성 막걸리 집에서 평상을 깔고, 통째로 잡은
염소 불고기에 산성 막걸리를 개구신이 되도록 퍼 마시며 목이 터져라 육자배기를 불렀던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립다.
흥이 올를대로 올른 우리들은 얼굴에 칼자국이 험살스러웠던 작부를 평상에 달랑 혼자
앉혀 두고 그 주위를 서로 서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면서 군가를 부르던 13놈이 교대
교대로 작부 저고리에 손을 쑤셔 넣곤 물렁 콩죽 같은 젖가슴을 사정없이 쮸물떡 거리던
그 쏠쏠했던 숫놈 재미가 차마 잊혀 질런지? 생각만 해도
지꿈도 목구녕에 생침이 고이면서 쪕쪕하는 소리와 함께 입맛이 다셔진다.
그윽한 바닷물에 석류알을 흩뿌려 놓은 듯한 다도해와 불끈 치솟아 올른 팔영산의 암릉
그리고 사명대사의 부도탑을 안고 있는 고찰 능가사의 여유로운 한가함에 흠뻑 젖어 본다.
저지대 산삐알(산비탈)엔 이미 화사한 진달래들이 조심 조심 얼굴을 내 밀고들 있다.
간단한 뒷풀이를 마친 우리들은 귀가길에 잠시 소록도를 방문했다.
마치 하와이를 연상시키는 아름드리 조경수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 내는 붉은
벽돌 건물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소록도에서 우리들은 잠시 이방인이 되어 본다.
마지막으로
모진 병마로 고통 받는 우리의 형제 자매 한센인들의 빠른 쾌차와 이 분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 하시는 수 많은 천사님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한센병을 앓으며 떨어져 나가는 손과 발가락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정처 없이 운수 행각을
하셨던 시인 한 하운님의 고향땅 봄 언덕과 인간사를 그리워 하셨던 애잔한 시 "보리 피리"
소리가 필 닐리리 거리며 시골 예배당의 종소리 처럼 아련하게 들리웁니다.
분당 탄천변의 히말라야 눈표범 돌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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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흥 팔영산은 바다와 암릉을 함께 어우르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아름다운 산행지입니다.
그 아름다운 산을 보고 나오는 길에 소록도를 보았습니다.
연육교가 놓인후로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지만
소록도는 관광의 목적외에 우리 역사의 가슴아픈 현장을 보고 느껴보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다지만 현재 소록도에 살고 있는 많은 한센인들이 일반인들을 바라보며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날들이 빨리 오기를 바랄뿐입니다.
동천동이 그런 곳이었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후기글들을 올려주시니
산행 참석못한 저로써는
몰랐던 내용들까지
쏙쏙~~머리에 담게함에
감사드립니다~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