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발달장애 학생 코로나 매뉴얼 개발하기 워크샵,
노들 장애인 야학
함께 누려야 할 장소, 배제된 사람
이런 배경에서 재난이라는 소재로 일상의 불평등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이다. 아무도 남기지 않고 함께 대피하려면 우리 사회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개선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단순히 예술 프로젝트나 연구 프로젝트가 아니라 경쟁과 단일성에 점철된 도시의 삶을 성찰하는 프로젝트이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세 가지 기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재난 발생 전‧후 사회에 일어난 경험을 모으고 기록하며 이를 질적, 양적으로 분석하는 연구이다. 둘째,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재난에 대응하는 재난대비 워크숍 및 훈련을 개발한다. 셋째, 재난으로부터 공동체가 빠르고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한다. 위의 세 프로젝트는 모두 리슨투더시티가 제작 중인 웹사이트 ‘회복도시’에 수록될 예정이다. 우리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총 65명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모든 인터뷰가 값지고 의미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결론 중 하나는 결국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인식하는 교육, 즉 장애인이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며 사회적 자본을 만들 수 있는 ‘연결고리’였다.
리슨투더시티의 도시 비평 작업과 장애인의 재난 대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도시가 가진 고질적인 폭력성 문제는 결국 부동산 만능주의와 비장애인 남성 중심적 도시 계획이라는 문제로 귀결한다. 다양한 형태의 삶과 느린 속도를 거부하는 효율 중심의 도시 시스템에서 장애인은 남겨질 수밖에 없다. 도시의 문제와 자연의 문제는 공통의 공간 즉, 바다, 강, 산, 하늘, 공기, 물처럼 응당 누구나 함께 누려야 하는 공동의 자산이 사유화되는 데서 비롯된다(Harvey, 2007). 도시 공간도 수많은 사람의 삶과 역사가 만들어낸 공동의 자산이므로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누려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도시 공간은 끊임없이 사유화되고 사람들이 상상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할 장소가 단순히 부동산 가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어떤 의미도 없는 곳으로 전락했다. 도시 계획은 더 많은 아파트를 짓고, 더 빠른 도로를 신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이런 도시에서 경제 가치를 최대화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비효율적인 것, 낡은 것, 느린 것 그리고 다른 것은 배제의 대상이 된다.
2019년 재난대피워크샵 재난 대피,
노들장애인야학
2019년 재난대피워크샵 재난 시나리오 짜기,
연세대학교 장애인권위원회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교육
교육 시스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라면서 학교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본적이 거의 없다. 인구의 5%가 장애인이니까 초등학생 1,000명 중 50명 정도는 장애를 가진 아이여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초·중·고, 대학교를 진학하면서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개인차는 있겠지만, 시각장애, 청각장애, 지체장애, 발달장애, 정신장애 등 여러 형태의 장애를 가진 아동이나 청소년은 비장애 학생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입시 경쟁 사회에서 느린 아이를 위해 나의 자녀가 손해를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자신의 아이와 장애가 있는 아이가 한 학교에서 학습하는 것을 반대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다른 몸과 다른 속도를 다양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시에서 재난이 일어났을 때, 아무리 좋은 정책이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옆집에 사는 장애인을 방문해 함께 대피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터뷰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재난대비 선진국인 일본은 재난이 발생해도 모두가 잘 대피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장애인을 위한 재난 대비책이 없는 것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일본의 장애·비장애 분리 교육이었다. 일본은 초·중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분리 교육을 시행한다. 분리 교육 방침은 건물의 디자인도 바꾸었다. 장애 학생이 다니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건물에는 엘리베이터도 램프도 없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재난이 발생하면 초·중학교 운동장과 교실을 재난 대피소로 이용한다. 그런데 학교 건물 자체가 배리어프리(barrier free)가 아니기 때문에 장애인은 이 공간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일반 재난 대피소인 초등학교, 중학교는 장애인 비장애인 분리 교육으로 장애인이 없다는 가정하에 학교 건물이 만들어졌습니다. 계단이 많고 장애인 화장실도 없습니다. 장애인, 특히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은 화장실도 갈 수 없으니 그곳에서 대피 생활을 할 수 없지요. 물리적인 장벽이 많고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셈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편견 속에서 장애인이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애인은 일반 대피소를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 도시히로 히가시, 구마모토 가쿠엔대학 교수
사실 계단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장애에 대한 편견 조장이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어렸을 때부터 분리되다 보니, 장애는 ‘다른 것, 분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이 고정된다. 한편,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어떻게 소통할지에 대해 경험이 풍부하지 못하고 점점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된다. 결국 재난이 일어났을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떻게 대피할지 서로 난감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2016년 구마모토 지진, 2016년 경주 지진, 2017년 포항 지진의 공통점은 대피소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점이다. 페미니스트 운동가이자 장애 해방 활동가인 아사카 유호 씨는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 동료들을 응원하고자 오사카를 방문했는데, 대피소에 장애인을 위한 기본적 요소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장애 해방 활동가 하라다 씨는 2011년 동일본 재해 지역에 가서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을 찾아다녔지만 대피소에는 장애인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장애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부터가 큰 과제였다고 한다. 구마모토 지진 때도, 경주 지진, 포항 지진 때도 비슷한 일은 반복됐다. 장애인은 대피소에 없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누구나 와서 쓸 수 있는 대피소는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지만 아직 두 사회 모두 대피소의 장애인 접근성은 큰 문제를 해결한 뒤에나 처리해야 할 중요하지 않은 과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역과 이웃, 일상의 연결고리
또 다른 하나의 과제는 지역과의 관계이다. 구마모토의 장애인 상담소에서 만난 활동가 히라타 씨는 “결국 문제는 지역과의 연결고리”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만난 대부분의 인터뷰이가 재난이 발생하면 장애인 가까이 사는 누군가가 달려가서 구하지 않으면 생사조차 알기 어렵다며 많은 사례를 들려주었다. 포항 지진 때 대피하지 못했던 지체장애인 김○○ 씨의 가장 큰 우려도 자신이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는 공포였다. 실제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이웃과 관계가 전혀 없던 장애인의 경우 현재 생사 여부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웃이 서로 도와 재난에 대응하는 체계를 ‘공동체 기반 재난 관리’(Community Based Risk Management)라고 한다(Allen, 2006; Shaw et al., 2011). 하지만 공동체 개념이 사라진 서울 같은 도시에서 이런 이상적인 재난대비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만약 이웃이 구출하지 않는다면 지인이라도 와서 구출해 주어야 한다. 수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사회적 자본’이 두터운 사람이 재난에서도 대피 확률이 높다(Aldrich and Meyer, 2015; Bihari and Ryan, 2012; Hishida and Shaw, 2014). 그러나 장애인은 직장에 다니는 비율도, 대학 진학률도, 외출하는 빈도 자체가 비장애인보다 확연히 낮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망이 두터울 리가 없다. 즉, 우리가 외면해온 일상의 문제들-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같이 성장할 수 있는 사회 문화, 장애인의 학습권, 노동권, 이동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재난 시에 이 문제들은 몇 배로 크게 드러나게 된다. 장애 해방 활동가들이 한국의 수용시설 폐쇄 운동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세상은 느리게 바뀌었다.
2020년 한국 코로나 첫 사망자는 청도대남병원에서 나왔다. 60대 남성이었던 그는 30년 넘게 그 시설에 갇혀 있었으며 사망 당시 몸무게가 42kg밖에 되지 않았다. 청도대남병원 수용자의 대부분인 122명이 감염되었고 4월 12일까지 7명이 사망했다. 청도대남병원 사례는 사회와 격리되어 집단생활을 하는 수용시설이 얼마나 질병에 취약한지를 보여주었다(BBC News Korea, 2020). 그런데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이미 장애인이 감염병에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고 활동가들은 이에 대하여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소송까지 진행했지만 국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번에도 재난에서 장애인의 문제를 ‘나중에 처리해도 되는 문제’ 정도로 인식한다면 다음에 어떤 재난이 오더라도 피해의 양상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재난 시에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일상의 차별을 없애고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관계망을 두텁게 만드는 일은 뛰어난 한 두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상상해야만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