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경옥
가을이 가고 나면 빠르게 어둠이 질펀하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마음이 널브러져 있는데 순식간에 번지는 어둠 때문에 경계를 분간하기 힘들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어둡고 스산하다고 밑줄 긋는다 경계가 명확하면 부담스러운 온도가 가끔 유발되기도 하지만 경계가 명확하지 못할 때 혼란은 검은 늪처럼 끈적하다 제발 경계가 희미해야 최선인 것처럼 다가오지 마라 웃음도 마루도 악수도 마구 흐르고 넘쳐야 마땅하다는 듯 잡다한 일상마저 나누려는 관계들이 서툴게 탄 밍밍한 차 맛처럼 지루하다 열정이나 정열 이런 게 부족한 단순한 부류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걸리긴 해도 뭐든 간단 명료한 게 좋다 불꽃 튈 것 같은 사랑은 이제 영화 속에서나 음미하는 것으로, 자애의 편린을 봉투에 밀봉해 서랍 속에 넣어 둔다 하나가 되기 위해 깎고 자르고 맞추기보다는 너는 너 나는 나로 서로를 지키며 경계에 꽃을 피우리
가을이 가고 나면 급하게 어둠이 번진다고 해서 오후 여섯 시가 사라지진 않는다 화분 속이나 엽서 위에도 여전히 오후 여섯 시는 존재한다 주방의 밥솥이나 접시 위에도 젖거나 튀겨진 여섯 시가 있다 환했던 여섯 시와 어두워진 여섯 시는 경계가 없어진 게 아니라 여전히 명확하게 식탁 위에 자분자분 차려진다 여름이어도 겨울이어도 오후 여섯 시에 전화벨은 울린다
첫댓글 그렇군요.
사라지지 않는 오후 여섯시.
멋진글에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