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지나간 이야기라서. 터놓고 이야기할수가 있어서 말하는데
여기에 대한 어떤 개인감정이 없습니다
제가 성서형제회에 들어왔을때 서울당산동과 전주여러팀과
수원의 몇팀. 그리고 안산원곡동팀 있었습니다
전주교구나 광주교구에 비해 수원교구나 서울교구는 큰 교구에 속하지만 양교구간의 성향은
아주 달랐지요 수도권교구는 다소 보수적인 교구라 여겼지요
예수그리스도수녀원이 화성에 있을때에는 안산서 그곳에 가기위한 버스를 한번 타고
갔었지요 지금 고인이 된 스테파노는 안산에서 다른본당에 있으면서. 성서형제회를 하지
않는 몇몇형제와. 수녀원을 돕는 일을 하였지요. 수도원의 수도관이 고장나거나 바닥재를 깔거나 여러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해서 가서 돕기도 하였지요
그래서인지 수녀원에서 모임도 하고 수녀원에서 준비한 식사도
제공받고 수녀원에서 1박2일의 피정을 가졌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그곳은 수련원이었지요
저는 그곳에 계시는 수녀님들이 성서형제회 수련회나 묵상회 그리고 봉사자양성을 위해 여러
역할을 하면 여러모로 수녀원이나 성서형제회도움이 될것이라 여겨서. 스테파노와 다니면서
이런일에 대한 대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성서형제회월례모임에는 저혼자 다니고 수녀원을 돕는일은
직장에서 휴가를 내면서까지. 나서는 일이었지요. 스테파노는
가정적으로 아픔이 있었지요 아들이 정신이 좀모자라서 늘걱정꺼리였지요.
그러나 스테파노는 심성이 약하고 착한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가정을 위해 현명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이런저런 애기를 했어요 한때 같은구역에 살면서. 자주 만나기도하였고 이런저런 문제로
논쟁도 하였던것 같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생각에. 앞서 그의 입장에 서서 잘 배려해 줄걸하는 후회가. 많이 생깁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차량등록소에서 사무실내근무만 편안하게하다가 2년간 공원청소일을 하게되었지요
공원여러곳을 걸어다니면서 청소를 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다니면서 하는 일이 육체적으로 어려웠지요
저는 그때 기능직으로 근무하는 스테파노가 나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않았다고 생각하면서 홀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 내었습니다
안산시청내에는 천주교친교모임이 있었고 공무원교우들이 주로 참여했지만
몇몇분이 저를 초대해주셨지요
매달 시청에서 모임을 갖고 회의도하고 경기도공무원피정에도
참여하였지요 스테파노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덕분에 시청내
교우들도 많이 알게 되었지요
저는 우리주변에 특히 교우로서 같이 모임도하지만 정작 그들의 어려움을 잘 모를때가 있었어요
저는 안산에 살면서 시청산하기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적은월급을 받아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요
이를 알아챈 전주공동체에서는 여러 소소한것을 시키면서 돈을 쥐어주셨지요 몇분의 봉사자는
지방에서 올라갈때도.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셨지요 저는 그때 받은 돈을 쌈지돈으로 따로
모아두고 살고 있습니다
서울 난곡에서 도시빈민운동을 하는 젊은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것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가난한사람들은 여러곳에서 중복해서 도움을 받기에 실제로는 덜 어려움이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어려움을 표현하지못한이들의 어려움이 더 심하다고 합니다
저도 한동안 이런사람을 알지못했습니다
며칠전 고등학교학급모임이 대전에서 있었습니다 2018년 대구에 내려와서 친구들 모임에 참석했지만
회비도 내지 못해 그 어려움을 그들이 알았는지 요번모임에는 부담감을 갖지말고
참석하라고했지만 아버지 병간호를 핑개로. 거절하다가 가게되었는데
끝날무렵에 나몰래 친구들이 돈을 거두워서 금일봉을 나에게주는
것이었지요. 그들은 대부분 현역에서 은퇴하는 처지인데
말이지요 내가 이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것은 아나윔정신이고 서로의 사정을
잘알고 위로하면 어떨까하는 생각해봅니다
지난날. 월례회의에 참석하고 오해를 받아서 점심식사도 못하고 돌아내려오기도하고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기도하고 저도 그런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진정한 형제애로
만난다면 우리는 상대가 한일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하느님사랑
그리고 이웃사랑이 우선되어야 한다는것을 잊지말아야 할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