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라는 영화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재위 1908~1912>를 통하여 대 중국의 허망한 패배와 몰락, 그리고 청조의 멸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불행한 선통제 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았던 황제가 선통제의 큰아버지인, 바로 앞 황제 광서제<1875~1908>였는데 그의 사인은 최근 황제의 독살로 밝혀질 정도로 비운의 황제였습니다.
광서제 32년에 쓴 친필 글씨 한폭을 구입했습니다.
저는 이 글씨에서 잠룡의 의지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글씨에서 간절한 염원을 읽었습니다. 저는 이 글씨에서 꿈을 이루고 싶은 황제의 말못할 천금의 침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청황제 광서제의 <光緖之寶>라는 글자가 새겨진 옥새입니다. 이 도장 하나에 중국천하의 운명이 좌우되었던 옥새입니다. 수 억만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도장입니다.
11대 광서제 (재위 1874~1908)
권력 앞에 모성마저 버린 비정한 서태후는 온갖 구박을 하던 외동아들 동치제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임신한 며느리까지 자살하게 한 후 다음 황제로 서태후의 남편인 함풍제의 동생과 서태후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광서제를 골랐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으며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네 살이었다. 여러명의 황족이 있었지만 네 살의 광서제를 황제로 고른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계속 중국을 다스리겠다는 것이었다. 광서제는 비정한 서태후때문에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자랐고 황후의 간택에도 마음에 둔 여자가 있었지만 결국 서태후가 골라준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았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고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지만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로 서태후에게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 받았으니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것은 이미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수렴이라는 발을 드리우건 걷어버리건 아무런 의미가 없이 실질적인 황제는 광서제가 아닌 서태후였기 때문이었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조카와 결혼했으며 그녀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으나 서태후는 둘 사이를 늘 감시했기때문에 겉으로는 그녀에게 잘대해줘야만 했다. 황후는 서태후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도 빈곤하게 살아 자금성에서 극히 비참한 삶을 살았다. 광서제 27년 8국 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했을때 황후는 광서제와 서태후를 모시고 서안으로 도주했다가 1년만에 자금성으로 돌아왔으며 광서제 사후 3살의 황제 선통제(푸이)때 수렴청정을 하다가 선통제 3년 그녀가 황제의 퇴위조서를 반포했다.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중국의 황제 광서제는 어느듯 성인이되어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고 싶었다. 서태후의 전횡으로 국력은 껍데기만 남아가는 것을 광서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일전쟁을 통해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날려고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던 그는 일본과의 승리를 확신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했고 더구나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하면 광서제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도 있었다. 서태후는 전쟁 중에 군비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 데 썼던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청나라는 세계 만방에 자신들의 국력이 형편없음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러써 세계 열강의 압박은 점점 심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국민 의식이 지식층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서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광서제는 지식층의 새로운 분위기에 적극 동조해 그들의 의견을 수용해 캉유웨이,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변법자강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게되자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척 할 뿐 머리속으로는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 어디일까 머리를 굴려 결국 서태후를 선택해 서태후의 애인 영록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발했다. 서태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렸고 그를 도왔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몇명은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광서제의 개혁은 너무나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이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서 서태후의 독무대가 다시 차려졌다.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다.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한끼에 128가지나 되는 한끼의 식사는 100만 냥이 넘었으니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으며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고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고 비취 식탁과 비취 식기들로 음식을 먹었고 비취 악기로 연주했다. 탈모에 유난히 신경을 써 시녀들이 머리를 빗다가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빠지면 그 시녀를 바로 처형했으며 이화원의 한 정원에 이쁘고 젊은 남자애들을 모아놓고 향락을 즐겼다.
광서제는 무술변법의 실패 이 후 노예와 다름 없이 10년 동안 구금생활을 해 오다가 1908년 11월 14일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바로 이튿날, 병상에서 위독했던 서태후도 세상을 떠나고, 서태후의 유조에 의해 불과 3살의 어린 선통제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 글씨는 말미에 주가보가 설명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볼 때 광서제가 유폐생활을 하고 있을때 아마도 어느 대신<주가보>에게 써 준 것 같습니다.
마치 삼국지에서 후한 헌제가 동승에게 옥대를 하사하면서 조조를 제거하라고 밀지를 내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글입니다. 유폐된 상태에서 숨쉬는 것 외에는 어느 것 하나 마음데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글을 신하에게 써 주는 황제의 답답한 심중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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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무릉도원/imrdowon 원문보기 글쓴이: 도원장
첫댓글 유폐된 황제(광서제)의 답답한 심정에...
신하에게 충성을 바라는 마음으로 <忠>을 손수 써서 신하에게 건냈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