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오월 - 바보
그날은 경남 기장에서 전국 동기회가 있는 날이어서 동기 넷이서 한 차로 남해고속도로를 가고 있었다. 가다가 우리는 그 소식을 들었으며 상대차선의 눈을 찌르는 불빛의 차량행렬을 본 것은 진영휴게소쯤이었다.
그것은 연속무늬의 벽지를 바른 벽장 속에 숨기고 달빛에 비춰보던 무지의 달항아리가 쩍하고 갈라지는 그런 파열이었다.
그 저녁 광안대교가 보이는 횟집에서 모두 모여 소주를 마시는데 일단의 사람들이 배를 나누어 타고 바다에 나가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아, 오늘 나는 저며 낸 물고기의 살점을 씹고 저들은 폭죽을 쏘아대는구나!
그리고도 그 폭죽이 겁이 나서 닭이 병아리 때의 기억에 쫓기듯 미루고 미루며 김해에는 가지 못하였다.
강산은 십년에 바뀌는 십년력(十年曆)이다. 기다렸다가 십년이 되는 날 한 장을 뜯어내듯 변한다.
그 십년이 되는 지난 해 울산 소재 신문사의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축하도 받고 꽃다발 꽃바구니도 여럿 받아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왜 그곳이 생각났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면 이승보다 저승에 가깝듯이 삶은 늘 가까운 곳에 더 가깝지 않던가?
문득 차에 실린 신춘문예 꽃바구니 하나에서 주신 분을 떼어내고 거기 꽃자리에 놓았다. 내 것이 제일 컸다. 여기에 온 모두가 바보인데 어느 바보가 그 꽃바구니가 신춘문예의 재활용 꽃이라는 것을 알겠는가? 고인께서는 아실 것이지만 눈 감아 주실 것이다. 차마 그 앞 커피가계에서 파는 국화 한 송이를 그 자리에 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곳 경비를 서는 아직 소년기가 가시지 않은 경찰아저씨는, ‘신기하다 세상에 저런 바보가 아직 남았다니’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하면 원래의 그것이기 아주 어렵다.
재가해서 그 집 아들을 낳은 여자처럼 한 번 변한 것이 또 변하기 쉬운 때문이다.
현명한 자는 살면서 자신을 숨기고 변하지 않는다. 나는 현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명하지 못하지 말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서서 온몸의 가시를 떨고 서있던 나를 숨겼다.
오늘 그 ‘검은 오월’에 남편과 함께 아들의 손을 잡고 가서 방명록에 ‘사랑해요’를 적은 어떤 바보의 아들에게 바보의 축복을 기원한다.
이상한 일이다.
오늘날 글을 쓰는 사람에 내가 사랑하는 가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한다’고 말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직 남았다니.
나는 오소리가 꼬리를 제 그림자 속에 우겨넣고 몸을 낮추듯 내 무늬가 있는 긴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넣고 살았었다.
나는 한 때 어떤 문학사에 관련을 가져본 적이 있다. 사는 곳이 달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당시 그 문학사의 이사장은 어느 사찰의 주지였다. 그의 글은 늘 중생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는 ‘우리 민족은 쥐새끼 근성이 있어서 아무개 같은 독재가 필요한 민족’이라고 했다. 국정농단 촛불 집회 때는 ‘천안문 사태 때 등소평이 탱크로 쓰레기 삼천 명을 깔아뭉개 역사를 바로 세웠다고 했다. 우리 대통령도 그녀의 아버지처럼 지금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광화문 광장에 탱크를 보내 한 삼백 명 깔아죽이면 쥐새끼 같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저 김 아무개나 노 아무개의 빨갱이 졸개들에게서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이것뿐이다’라고 악을 써댔다.
자신을 비하하고 그 전체를 비하하여 스스로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얼마나 무서운가? 그것은 광기였다.
그리하여 그곳을 아주 떠났었다.
옳은 자와 사악한 자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힘이 센 자가 이긴다.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힘이 부족하여 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삶이, 정신이, 인간의 가치가 과연 이긴 자의 것인가?
아닐 것이다, 단연코 그렇지 않다.
싸움에서 이기는 그것이 무엇에 이어지는 줄 알기에 이기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는 어떤 이도 있는 것이다.
그 질 줄 안다는 것이
이미 강산이 한 번 변했는데도 아직 바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다.
PS: 보내주신 양효숙 수필집 ‘뾰족구두를 벗은 초록 여우’를 읽다가 한 대목이 생각나 또 우기(雨期)의 속을 들킵니다.
첫댓글 오늘의 현실이 다시금 미어집니다.
우기니까요.
제 수필집 읽으시다가 한 대목이 생각나 우기의 속을 들키셨다는 김길전 선생님의 마음이 생각이 아닌 느낌으로 먼저 다가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
@김길전 선생님도 건필, 건행 하십시오^^
아.......
어.......
여전히 활발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