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들이 꾸는 꿈
종교는 마땅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꾼다고 하겠지만 불쌍한 인생들은 무슨 꿈을 꿀까? 불쌍한 인생들에게까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라한다면 어려운 일이다. 대중은 손에 잡히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거짓된 성직자들은 민중들을 향하여 말한다. “구체적인 꿈을 꾸라”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라고”
불쌍한 인생들 개개인에게 어떠한 목적을 강요하는 것은 거짓이다. “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진정 예수가 오신 뜻을 모르는 이들은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 예수께서 그 소리를 들으면 크게 화내실 말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는데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면 예수께서는 목숨을 거두러 오신 분이란 말인가? 이익사회, 세상사회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해서 죽는다. 목자가 양을 잡아 먹는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반대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죽는다. 제자를 위해서 선생이 죽는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죽는다. 세상을 위해서 예수께서 죽는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밀양 천황산 석굴 속에서 허준은 스승의 유해를 만난다.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 주었다. 스승의 유언대로 허준은 스승의 유해를 3일 동안 해부해봄으로 비로소 사람을 알게 되었다. 스승의 유해를 매장하면서 허준은 울부짖는다.
“천지신명과 스승님은 제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이 허준이 베풀어 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또 이 허준이 의원이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를 구하는데 게을리 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이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으오리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참 스승은 제자에게 모든 것을 준다. 역시 참 제자는 스승에게서 받은 은혜는 스승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갚는다. .... 예수께 목숨을 바치지 마라,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는 예수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갚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가짜다. 사람은 때로는 너무 어리석다. “돈 바쳐라”그러면 “저건 가짜다” 하고 돌아서지만 “목숨을 바쳐라” 그러면 “저것이야말로 진짜다” 하고는 환장하고 달려드는 경우가 있다. 종교가 신도들을 향해서 목숨을 바치라 한다. 국가가 국민을 향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 그 때 벅찬 감동으로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이들이 있다. 거짓이다. 속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 조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면 거짓이다.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니 삶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종교도 진리도 사람이 사람답게 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때로 사람은 사람답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지만 그것은 온전히 자발적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어야지 강요되거나 조작되거나 유도되거나 할 때 그것은 거짓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 하셨다. 예수를 위해 살지 말고 너희 자신들을 위해 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요구하시지 않는 목숨을 누가 감히 요구하는가? 틀림없이 거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