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가 17,26-37)
I tell you, on that night there will be two people in one bed;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And there will be two women grinding meal together;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말씀의 초대
지혜롭지 못한 이들은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빠져 피조물을 신으로 섬긴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은 피조물을 통하여 그것을 창조하신 분을 알아보고, 그분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닫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재림의 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이다. 세상의 것들을 전부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날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말씀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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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많은 신자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하여 무서워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러하지만,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 온갖 재앙이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는 이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시한부 종말론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재림에 관한 묘사는 사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적인 묘사라고 한다면, 각 복음서에서 전하는 재림에 관한 기록과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재림에 관한 기록,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재림에 관한 기록이 모두 한결같은 순서로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각각의 묘사가 다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종말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당시의 문학적인 표현을 이용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더욱 근본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이 세상은 언젠가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시점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세상의 마지막은 모든 사람에게 불안감과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끝날 때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살리시고자 다시 이 세상에 오십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끝난다 하더라도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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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TV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어느 유명 인사가 난치병에 걸렸다가 살아나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화려한 삶, 모든 이가 부러워하던 당시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세월과 병의 고통으로 늙고 지친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다 돌아온 그의 정신은 오히려 진실하고 맑아 보였습니다. 사회자가 그에게 병이 들기 전과 후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병을 앓으면서 깨달은 것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 결국 죽음 앞에서 살아온 순간을 돌아볼 때 가장 소중한 것은 ‘내려놓음’, ‘나눔’, ‘섬김’이라고 생각한다. …….” 왜 이런 것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로 다가오는지요? 더 먹지 못한 것, 더 누리고 더 가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것이 아니라 나누고 사랑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마치 천 년도 더 살 것처럼 온갖 탐욕과 집착에 젖어 있을 때는 몰랐던 인생의 진정한 숨은 가치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하는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각자가 가진 직업과 신분 안에, 사건과 만남 안에, 자기만의 고유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를 놓치고 살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게 되지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은 죽음 저 너머의 세계도 낯설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날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어도,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같은 옷을 입고 살아도, 또는 같은 일을 하며 살아도, 구원받을 사람과 그러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어떤 신분인지 무엇을 하고 사는지에 달려 있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며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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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의 홍수’는 창세기 7장에 나옵니다. 불신으로 얼룩진 세상을 주님께서 홍수로 쓸어버리신 사건입니다. ‘소돔’에 내린 불과 유황 역시 주님의 ‘정화 작업’이었습니다. 죄악의 상징이었던 도시를 태워 버리고, 의인 ‘롯’만이 구원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능력’을 뛰어넘은 사건들이었습니다. 미구의 종말 역시 인간의 상상력 밖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무관하게 찾아옵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재산과 물질은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우 종말은 개인의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저축한 돈이며 부동산이 무슨 소용이 있을는지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계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은 호기심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저세상’의 삶이 결정됩니다. ‘이승’의 인연과 체험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저세상을 살아갈 기초와 바탕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심판’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종말의 준비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낙엽 지는 계절에 ‘현실의 삶’을 한 번 더 돌아보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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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오늘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비장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곧 올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에서도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종말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오는 것일까요? 몰래 와서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덮치기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종말은 마지막이면서 시작입니다. 이 세상의 끝이면서 저세상의 출발입니다. 한 해가 끝나면 새해가 시작되듯, 종말 역시 하나의 과정이지 그 자체로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해마다 12월 31일은 묘한 느낌을 줍니다. 지나온 해는 아쉽지만 보내야 하고, 새해는 호기심으로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그러한 12월 31일과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이 세상은 분명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세상이 시작됩니다. 종말은 이를 구분 짓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저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이 세상 삶의 축적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지요? 그 모든 것은 저세상 삶의 바탕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심판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중요한 종말을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준비 없이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처럼 비장한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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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람들은 ‘웰빙’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 속에서의 웰빙은 물론 죽음도 잘 준비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깨어 기다리는 죽음과 종말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가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깨어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소돔의 시민들처럼 그날그날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바라는 우리는 방주를 준비한 노아처럼 늘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
-안승태신부-
사람은 누구나 매 순간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긴급하다고 생각하는 것,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판단 기준은 조금씩 다릅니다.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노아와 롯 때를 예로 들어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평소 그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는 임종 때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떤 이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취하고, 또 다른 이는 지니고 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놓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람에 따라 가치기준이 다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해 생물학적이고 이기적인 목숨에 대한 집착은 놓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많은 은총은 우리가 세상의 많은 집착과 사욕에서 자유로워질 때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하는 생명력이 될 것입니다.
때를 아는 것
-이대훈-
때를 아는 것은 어려운 그만큼 또 중요한 일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크로노스라는 시간과 카이로스라는 시간이 있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처럼 계속 이어지는 시간인데 비해 카이로스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때를 안다는 것은 몇 시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을 안다는 것이다. 곧 현재 이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언제 일어나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이 언제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징표가 나타나는 곳이 ‘시체가 있는 곳’이라면? 왜 하필 시체가 있는 곳일까? 삶과 죽음은 언뜻 보면 크로노스처럼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예사롭지 않은 삶과 죽음 때문에 이 크로노스의 평탄함은 깨지기도 한다. 지구 생태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멀지 않아 제6차 대멸종의 때가 오리라고 예상한다. 지금까지 지구 역사에서 5번에 걸쳐 큰 멸종의 시기가 있었고 이제 그 여섯 번째 멸종의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지구온난화, 생태계의 축소와 파괴 등을 그 징표로 꼽고 있다. 실제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1년에 한 개 종 정도 멸종되던 생태계가 지금은 한 시간에 한 종씩 멸종되고 있다. 지구의 별다른 변동 없이 이렇게 급격하게 멸종 상황에 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원인은 현대 인류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라는 삶의 방식에 있다. 이처럼 대멸종의 원인이 인류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노아 때의 카이로스와 현대 인류에게 다가오는 카이로스는 얼마나 다를까?
그날에
-김찬선신부-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저희 수도회는 11월 첫 월요일에 위령의 날 행사를 가집니다. 천안에 있는 저희 수도회 묘지에서 위령미사를 드린 다음 먼저 가신 형제들을 기립니다. 돌아가신 몇 형제의 있었던 일이나 훌륭했던 점을 마음에 새기는데 한 선배 형제의 죽음의 장면이 아름답기가 선홍색이었습니다.
여러분 선홍색鮮紅色을 아십니까? 아니 선홍색의 느낌을 아십니까? 모르시면 지금 단풍나뭇잎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공해에 찌들어 말라비틀어진 잎 말고요. 좋은 공기, 좋은 햇빛을 받은 단풍나뭇잎은 칙칙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붉으면서도 선명하니 떨어질 때가 더 아름답습니다.
아무튼 그 형제님은 정말 큰 일도 많이 하고 살기를 잘 살았지만 그보다는 죽기를 잘 죽어 더 아름다웠습니다. 오죽했으면 임종을 지킨 형제들이 그 형제님이 돌아가시자 멋진 죽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성당 종을 치고 모두 순 잔을 채워 축배를 다 마셨겠습니까?
천 상병 시인은 죽음을 귀천으로 노래하였지요. 이 세상 삶은 소풍이라고 하였고요. 그렇습니다. 죽음은 파멸, 멸망이 아니라 이 세상 소풍 왔다가 돌아감입니다. 하늘로 떠나가는 것이라면 룻의 아내처럼 혹 미련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니 소풍도 즐겁고 돌아가는 것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헤어짐이 아니라 재회입니다. 거기 가면 다시 만날 분이 있습니다. 나를 너무도 반겨 줄 분, 나를 꼭 안아 줄 분. 그 날은 멸망의 날이 아니라 그분을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저의 형제님은 그날 그렇게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형제님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며 천 상병 시인의 귀천을 다시 읊조려 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소풍 끝내는 날 가서 행복하였더라고 말하리라.”
종말 준비
-안문기 신부-
창세기에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가 불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족들이 모두 달아나는데 롯의 아내가 달아나다가 불타는 도시를 돌아다봅니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을 거역하여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으로 변했습니다(19,20). 예수님께서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라고 하시며 경고를 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유황불에 타는 마을, 그 속에 온갖 세상사가 다 들어 있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온갖 죄악과 부정부패를 일삼았습니다. 결국 일상생활 속에 최후가 있다는 뜻입니다. 롯의 아내처럼 그날이 오면 미련을 갖지 말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날’ ‘하느님의 날’ ‘종말 심판의 날’은 다 같은 날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바로 ‘사람의 아들의 날’입니다. 그날은 갑자기 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늘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결국 그날이 오면 가진 것을 모두 두고 가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일상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 김수만 신부-
노벨은 33세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노벨은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 기자가 소식을 잘못 듣고, 노벨의 사망기사를 실었던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다이너마이트의 왕,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라는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노벨은 생각했습니다. ‘오늘이라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노벨은 마음속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모은 전 재산을 이제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 것을 다 내놓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너무나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잘못 이해하면 어떤 공포감과 위화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어떤 공포감이나 위화감을 심어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어느 누구한테나 예외 없이 닥치게 되는데,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자연의 이치처럼 심판 또한 하느님의 뜻과 이치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날과 그때는 이 세상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관심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우리의 준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사랑을 잘 실천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껏 그 준비가 서툴렀다면, 지금 당장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그 준비의 첫 단추가 ‘하느님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제1독서 말씀이 마음을 건드립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이 파멸의 때에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은 파멸의 때를 얘기합니다. 파멸의 때는 꼭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파멸의 때. 이 파멸의 때에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세상에 있을 것인가, 방주에 있을 것인가? 이 파멸의 때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먹고 마시고 할 것인가, 굶고 기도할 것인가? 이 파멸의 때에 나는 누구와 함께 있을 것인가? 사람들과 같이 있을 것인가, 하느님과 함께 있을 것인가?
방주에서 단식기도하며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정답일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하고 싶고 정답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파멸의 때가 언제란 말인가? 그 어느 때가 아니고 지금이 아니던가?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 한 가운데서 사람들과 먹고 마셔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나는 이 파멸의 때에 세상 방주 안에서 먹는 단식기도를 하며 사람의 아들이요,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 떼가
-전삼용신부-
지난 여름방학 때 아일랜드에 있으면서 두 번 슬라이고란 곳에 갔었습니다. 그 동네는 바닷가에 위치해있습니다. 그 동네 사시는 분과 함께 우리는 바다낚시를 갔습니다. 팔뚝만한 돔들이 낚시를 던지자마자 계속 걸려 올라왔습니다.
물론 저는 낚시를 할 줄 모르고 잡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간 이유는 잡힌 고기를 그 자리에서 회쳐먹기 위해서입니다. 그 곳에 사시는 분은 능숙한 솜씨로 회를 뜨셨고 함께 간 신부님들과 함께 우리는 유럽에선 좀체 맛볼 수 없는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갓 잡아서 먹는 이 신선한 맛이란 횟집에서 먹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었습니다.
바닷가에 사시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생선은 신선하면 날것으로 먹고 신선도가 조금 떨어지면 굽고 더 안 좋은 것은 튀긴다는 것입니다. 그 분 말씀에 의하면 요리를 하는 이유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날것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그렇겠지만, 특별히 생선은 죽으면 더 빨리 썩고 냄새도 더 빨리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려서 운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꽁치는 특히 빨리 죽고 빨리 냄새가 나기 때문에 요즘은 마취하는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를 치고 남은 비늘과 껍질을 바다에 던졌더니 어디선가 갈매기 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상어는 피 냄새를 몇 킬로 멀리서도 맡을 수 있다고 하듯이 갈매기들은 생선의 냄새를 멀리서도 맡을 수 있는가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단순한 진리로 마지막 날이 어떻게 올 것인지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마지막 날이 노아의 홍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처럼 누구도 예상치 못한 때에 오리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다른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오늘 복음은 우선은 예루살렘의 폐망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고 동시에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선에겐 물이 생명이듯이 인간에겐 하느님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을 몰아낸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몰아내어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물고기가 물 밖에서 멀쩡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죽어서 냄새를 풍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나겠느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박해하여 죽이거나 모두 쫓아냅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을 버리고 혼자 살기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죽음이었고 그 썩는 냄새는 독수리들을 몰고 왔습니다.
로마군대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서기 70년에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썩는 냄새를 풍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비록 예루살렘에만 해당한다고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도 그럴 것이고 우리나라도 그럴 수 있고 우리 가정도 그럴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 한 사람도 주님과 떨어지면 썩는 냄새를 풍길 수 있습니다. 썩는 냄새는 자신을 멸망시킬 것들을 불러들입니다. 파리가 몰려있으면 거기엔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이에나가 몰려있으면 거기엔 무엇이 있겠습니까? 썩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들을 불러들이지 않기 위해서 싱싱한 물고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듯이 마지막 날엔 온 인류가 썩는 냄새를 풍길 것입니다. 그 때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혹 썩는 냄새가 무엇인지 궁금하십니까?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을 죽음이라 하시지 않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것이다.”, 혹은 “라자로가 자고 있으니 깨우러 가자.”라고 하시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를 아시지요? 하느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그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미움이 들어오고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무기력과 우울증만 심해지고 평화가 있어야 하는데 걱정과 두려움이 자라나고 절제를 하고 싶은데 절제가 안 되면 이미 나는 부패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 그 냄새를 맡고 더 안 좋은 것들이 나에게 달려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태워 향기를 냈습니다. 그래서 악취가 그리스도의 희생의 향기로 중화되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작은 향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작은 사랑의 희생은 죄의 악취를 중화시키는, 마치 썩어가는 물 위에 피는 연꽃처럼 하느님께 더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와 하이에나가 모이겠지만, 꽃이 있는 곳엔 꿀벌과 나비가 모일 것입니다.
<왕사고뭉치>
-양승국신부-
어린 시절 저는 왕사고뭉치였습니다. 요즘도 가끔씩 가족들이 모이면 제가 저질렀던 일들을 재미 삼아 돌이키며 저를 놀리곤 합니다. 꼬마 때부터 저는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그래서 깜짝 놀란 부모님으로부터 호되게 혼도 많이 났습니다.
한번은 제가 장독들이 줄줄이 놓여있는 장독대에서 사고를 쳤었지요.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이 장독 저 장독 무엇이 들었나 장독뚜껑을 열고 고개를 집어넣어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목(입구)이 좁은 한 장독 앞에선 저는 몹시 망설였습니다. 다른 장독들은 입구가 넓어서 고개를 집어넣는데 별 문제가 없었는데, 그 장독만은 입구가 유난히 좁아 머리가 잘 안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집어넣고보자며 겨우 겨우 머리를 우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리 용을 쓰고 발버둥을 쳐도 한번 들어간 머리는 다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갑자기 답답하고 무서워진 저는 있는 힘을 다해 SOS를 쳤습니다.
제가 살려달라고 외치느라 기진맥진해진 한참 후에야 가족들은 저를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라 달려오신 아버지는 식구들과 합심해서 제 머리를 빼내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께서는 망치로 조심스럽게 장독을 조금씩 깨트려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물론 안에 들어있던 간장도 다 버리게 되었고 멀쩡한 장독을 없애버린 대가로 저는 눈물이 쪽 빠질 정도로 야단을 맞았습니다.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회초리도 맞았습니다. 그리고 반성문을 열 장이나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아이를 위해 헌신합니다. 아이를 위해 인내합니다. 아이를 칭찬합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선물합니다.
그러나 때로 진정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위험한 짓을 할 때, 아이가 그릇된 길을 갈 때,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남의 물건을 훔칠 때, 타락의 길을 걸을 때, 다시 말해서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 절대로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것입니다. 아이가 개념 없이 빨간 신호등에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도 칠 것입니다.
상습적인 마약복용으로 제정신이 아닌 아들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직접 아들을 신고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미워서, 아들이 싫어서, 아들을 고생시키려고 아들을 신고한 것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오직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고를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벌어질 무서운 광경을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무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싹 쓸어갈 대홍수, 하늘로부터 내리 쏟아지는 불과 유황,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 와중에 누구는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며 기뻐 뛰노는가 하면 누구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묘사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지닌 예수님께서 어찌 이리도 험악한 말씀을 하시나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어찌 그리도 무섭고 강경한 표현을 쓰시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강경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길을 가로막고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위협도 하고 거짓말로 하고 과장된 말도 하고, 그것으로도 안 된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막을 것입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며 어떻게 해서든 죽음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을 되돌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 그토록 강경한 어조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하느님의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의지가 자리잡고 있음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구걸을 하던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로 옆자리에 또 다른 거지가 앉는 것이 아니겠어요? 문제는 그 거지의 깡통이었지요. 글쎄 그 거지는 깨끗하고 반짝이는 은색 깡통으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내가 그래도 거지 짠밥도 훨씬 많고 이 자리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자기보다 훨씬 더 멋진 깡통을 가지고 구걸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도 저렇게 멋진 깡통을 주십시오.”
구걸을 하기는 하지만 항상 겸손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예쁘게 보신 주님께서는 그에게 금으로 만든 깡통을 내려주셨습니다. 거지는 그 깡통을 보고는 너무나 행복했지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추운 겨울이 오자 그는 주님께 다시 기도를 드렸답니다.
“주님! 너무 날씨가 춥습니다. 제게 보온도시락을 주십시오.”
금으로 만든 깡통만 팔아도 보온도시락 수십 개는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얼마나 좋은 것을 가졌는지 모르기에, 자신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많은 은총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것에만 관심을 갖다보니 그 은총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시기 위해서 오늘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노아 때의 일, 롯 때의 일을 말씀해 주시면서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종말의 때를 깨닫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갑자기 찾아오는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마련해 놓으신 은총을 찾으면서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지도 않은 때에 갑자기 찾아올 종말이기에 항상 깨어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는 C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선택(Choice)하며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언젠가는 다시 아무것도 없이 떠나야 하는 인생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선택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많은 은총을 선택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힘든 삶을 선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앞선 그 거지처럼 말이지요.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의 선물을 찾아봅시다.
-김찬선신부- When the day comes. 그날이 오면.
그날은 그날이다. 다른 날이 아니다.
술 마시는 날은 술 마시는 날이다. 다른 날이 아니다.
장가드는 날은 장가드는 날이다. 다른 날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날이 오면 이전의 일들은 다 그만이고 이전의 인연들과도 작별이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날이 오면 우리의 하던 짓은 다 멈춰지고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이별이다.
그러니 뒤집어 얘기하면 우리가 지금 하는 짓을 그만 두고 같이 누어 자고 맷돌 돌리던 그 사람마저 내버려두고 냉정히 돌아설 때 사람의 아들은 온다.
빈곤과 빈부 격차
- 임영인 신부-
우리 사회의 빈곤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년 정부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빈곤 계층이 700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20대 80의 사회’가 의미하는 것처럼 빈곤 문제는 이제 빈부 격차 문제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88만 원 세대’라고 불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 결식아동과 노숙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해외 원조 명품’ 구입을 위한 해외 나들이가 늘어나고 ‘1억7천만 원짜리 벤츠’가 홈쇼핑에 등장합니다. 빈곤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70억 인구 중에 빈곤 상황에 처한 사람이 15억 명을 넘어선다고 합니다. 빈곤 문제는 소말리아·북한 등 절대적 빈곤 상태에 처한 나라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남미를 위시하여 아시아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을 보면 100명 중 20명이 영양부족이고, 1명은 빈사상태이고, 15명은 비만이라고 합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간다고 합니다. 비타민 A의 부족으로 3분에 1명씩 시력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세계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5천만 명이 만성 영양실조 상태라고 합니다. 반면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 사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곡물 값을 유지하기 위해 밀을 태우거나 바다에 버린답니다. 미국은 한 해 군사비로 5,287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이크업을 위해서 매년 180억 달러, 향수를 사기 위해 15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삶일까요?
새벽을 열며
어떤 가족이 성당에 가서 미사를 참석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먼저 아버지가 말씀하시지요.
“아니, 오늘 신부의 강론이 그게 뭐야? 참 내……. 묵상을 하기는 한 건지 그게 강론 맞아? 다른 성당에 가보면 신부들이 강론도 잘하더구먼. 우리 성당은 왜 이렇게 형편없는 신부만 오는 거야?”
이번에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강론은 그렇다고 쳐요. 성가대는 왜 이렇게 성가를 못 부르는거에요? 연습도 하지 않았나봐요. 목소리도 맞지 않고……. 실수도 많이 하고……. 영 분심이 생겨서 그 자리에 있지를 못하겠더군요.”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이 이렇게 말하더래요.
“아빠, 엄마! 그래도 천 원짜리 치고는 괜찮지 않아요?”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지만, 사실 자기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천 원 짜리 한 장뿐이라는 것을 꼬집어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해 봉헌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요?
어떤 분은 하느님께 헌 돈을 드릴 수가 없다면서 빳빳한 새 돈이 생길 때마다 따로 모아서 주일이면 그 돈을 봉헌한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어떤 분은 꼬깃꼬깃 접어서 마치 구걸하는 거지에게 돈을 주듯이 합니다. 그렇게 성의 없이 하느님 앞에 나오면서도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던지고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말씀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약간 으스스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한 말씀을 자주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두려워 떨면서 살라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하느님 무서운지를 알고 있으라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하느님 앞으로 나오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분명히 오기는 하지만, 언제 올지를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하느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종말에 관한 말씀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똑같이 전해집니다. 이제는 제발 죄로 기울어지지 말라고, 이제는 제발 사람들에 대한 판단과 미움은 그만하라고, 이제는 제발 하느님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이제는 제발 하느님께 몸과 마음으로 진실된 봉헌을 하라고…….
이런 모습이 종말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준비 상태는 과연 어떤가요? 아직 준비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준비하도록 하세요. 더 늦기 전에…….
주님께 봉헌할 것을 정성껏 준비하세요. 영적인 것이든, 물적인 것이든…….
빠다킹신부
종말론적 삶
-서현승 신부-
저와 함께 종신서원을 했던 수사님의 서원식 소감 한마디가 떠오릅니다. “수도생활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제 입에서 나오는 마지막 말이 예수 그리스도이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가 다 울컥했지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아직 한참 멀었다고 느껴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상 우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잊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소중하게 살아간다면 죽음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사는 셈입니다. 세상과 개인의 종말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모여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라며 죽은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참된 생명을 살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일상 속에서 인간의 욕심과 중상, 싸움만 있는 곳이 곧 멸망일 테고 하느님의 현존이 함께하시는 곳이 곧 구원일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심고, 팔고, 집 짓는 일상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이는 종말론적 삶의 자세를 갖고 사는 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동기를 순화해야
-이인옥-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항상 좋은 말만 하는 자매가 있었다. 분개할 일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남을 비판하는 소리도 결코 하지 않았다. 성격이 원만한 그 자매를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욕심 없고 너그러운 줄 알았던 자매가 누구보다 많은 야심과 경쟁심을 숨기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자매는 모든 사람에게 립 서비스를 하는, 실속 없는 일에는 결코 개입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분개할 일이 생기고 비판할 일이 있을 땐 은근히 남을 부추기고 자신은 물러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매의 이중적인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끼며 하나 둘 떠나갔다. 나아가려는 자는 물러서고, 올라가려는 자는 내려가야 한다는 노자의 가르침. 그런데 물러서는 척하고, 내려가는 척 보여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 자기의 이득을 노리는 것이 이른바 병법(兵法)이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러나 일시적으로 목숨을 내놓는 척 위선을 떨고, 겉으로만 자기 주장을 거두는 척 음흉스럽다면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까?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같으나 숨은 동기가 같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식별해 낼까? 우리는 시간이 걸려야 알아볼 테지만 주님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다 같이 좋은 일을 했는데도 누구는 데려가고 누구는 버려둘 수 있다. 다 같이 복음을 선포하고 봉사활동을 했는데도 어느 누구만 선택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말뿐만 아니라 숨은 동기까지 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 -김상균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다소 두려운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칠 그 날의 일들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 일들에만 빠져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면서 돈벌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심고 짓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닥친 심판날에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원히 살 것인 양 죽음 후의 삶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모으려하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인양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고...또, 노아시대 사람들처럼, 롯 시대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 일에만 신경쓰고, 세상 일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변화무상한 것들에서 벗어나서 저 멀리서 전체를 내려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과 그 세상 안에 있는 나와 타인들, 그리고 갖가지 것들을, 거리감을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누가 창조하시고 누가 지배하시는지, 나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앞으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나는 누구이고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또한 인간답게 사는 사람만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본질과 나의 본질을 보아야합니다. 세상의 본질과 나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세상과 내가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하느님에 의해 생겨나고, 또 하느님에 의해 모든 것이 결론지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의 삶의 방식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주인이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종과 같습니다. 준비하는 것이죠. 하느님과의 만남을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보여주는 허상에서 깨어나 참다운 진리와 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도 우리에게 닥칠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창조주 하느님을 느끼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 신부-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어서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창조된 피조물을 섬기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얼마나 더 훌륭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처럼 어리석은 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용서받지는 못한다. 세상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세상을 만드신 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풍의 계절인 가을에 온 산하가 붉고 노랗게 물들었다. 참 아름답다. 이처럼 아름다운 단풍을 구경하면서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다.’ 하고만 느낀다면 신앙인이라고 하기에 조금 아쉽다. 신앙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단풍을 만드신 하느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실까?’ 하고 느끼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세상을 통해서 드러난 겉모습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속을 보며,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한층 더 깊이 바라보며 관조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속에는 하느님의 손길과 사랑이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자연적 계시). 글씨를 보고 글씨를 쓴 사람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을 보여주는 책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세상이란 책을 통해서도 당신을 알고 체험하여 당신께 가까이 나오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의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겉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사람들이 겉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기에 자신의 원형이신 하느님을 희망하며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다. 하느님이 진. 선. 미의 근원이시기에 사람은 진. 선. 미를 찾고 추구한다. 사람들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에 감탄하는 까닭도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게 창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의 욕심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가려져 세상만 바라보고 세상 속에 담긴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세상을 가지려고만 하며, 삶에 얽매인다. 탐욕에 사로잡힌 결과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고자 해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루가 12,1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탐욕에 빠지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신 영혼을 깨끗이 간직하자. 또한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자.............◆
나의 어려움을 이웃의 어려움과 동일선상에서 보라
-최금자님 -
나는 작년 여름 누적된 피로 때문에 걸린 감기가 급성폐렴으로까지 발전하여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폐에 물이 차서 그것을 항생제로 말리느라 입원하는 내내 링거를 꽂고 있어야 했습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왼쪽 옆구리 통증이 너무 심하다고 하자 담당의사는 이 증상이 폐렴과는 무관하다며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여러 번 검사를 해봐도 옆구리 통증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담당의사는 혹시 뼈암이나 종양일지도 모른다며 종양 전문의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폐렴에서 종양이나 암 가능성까지 발전하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종양검사를 하는 동안 ‘암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나를 짓눌렀지만 내 문제에만 빠져 우울하게 지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동료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내 바로 옆에는 10년 가까이 의식불명인 부인을 간호하고 있는 우리 방 반장인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 오랜 세월 병간호를 하면서도 구김살이 없고 낙천적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른 환자들이 불편한 것, 필요한 것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보호자들이 자리를 비우면 잔심부름을 기꺼운 마음으로 하셨습니다. 창가 오른쪽 침대에는 대장암으로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항암치료로 인해 먹는 것마다 토해내는 그분의 말동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침대에 놓인 묵주를 보자 그분이 마치 내 가족처럼 살갑고 안타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라며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을 꼭 잡고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종양 전문의는 뼈검사 결과 다행히 암은 아니고 갈비뼈에 금이 가서 통증이 심했다는 소견을 내렸습니다. 입원한 열흘 동안 나는 살아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환자들과 가족들이 희망과 절망 사이를 넘나들며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신의 문제에만 연연하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며 동시에 이웃에게 개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나의 어려움을 이웃의 어려움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고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그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면
-장재봉 신부-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말 그대로 파격입니다. 누가 오늘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느님 사랑의 법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슴은 벅차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하느님의 거룩하심까지입니다. 이만큼 또렷하고 명료하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신뢰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 또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엄청나게 믿고 계시다는 더 큰 증거가 필요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사도 요한의 설명이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죽은 세상에서 연연하여 지지고 볶는 인생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건너 뛴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된다면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들려드릴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때문에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원수 사랑’도 그분의 도우심에 의탁하면 해결됩니다. 사랑하고 싶다면 우선 내 마음을 열어 놓으십시요. 그것이 사랑의 첫 단추입니다. 내가 가졌던 것은 이미 죽었으며 이제 내 안에는 그분의 자비와 은총만이 살아 계시니까요. ‘원수 사랑?’ 그것까지도 우리의 마음 문만 열면 문제 없는 일입니다.
순교자들의 꽃을 활짝 피워라
-임종심-
지난해 중림동성당 자체로 순교자 현양의 밤 행사가 있었다. 올해는 제1지구 차원의 행사로 중림동(약현)성당과 새남터성당에 안치된 성인 11위 유해를 꽃장식 차량에 모시고 한강성당에서 시작해 제1지구 15개 본당을 순회했다. 이 순회길에는 ‘순교 성인 모시고 기도하기’와 함께 ‘순교자들의 꽃을 활짝 피워라’는 슬로건하에 약현·새남터 등에서 순교한 64위를 상징하는 만장과 행사기 등을 들고 행렬했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순교자 현양의 밤 기념미사’는 천주교 최대 성인 탄생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9월 23일 중서울지역 염수정 주교 및 제1지구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1,5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봉헌되었다. 행사 규모에 걸맞게 3개 성당 연합성가대가 미사 전례의 웅장함을 더해주었다. 과거 우리의 순교선조들은 순교와 배교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 흔쾌히 순교를 택했다. 북소리에 맞춰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을 맞고 피흘리며 순교한 그 자리에 서서 그분들의 넋을 기리는 지금 하느님의 백성으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치신 순교선열들께 감사드린다. 순교선열들은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는 오늘의 말씀을 살아가신 분들이다. 순교의 피를 머금고 자란 이 땅의 400만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얼을 이어받아 인류 구원과 평화의 도구가 되어 주님을 증거하며, 우리 자신과 이웃에 당신이 주신 평화를 펴나가게 해주소서. 아멘.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양승국신부-
<끝기도를 바치며>
하루를 마감하는 밤 시간, 성직자들은 마무리 기도로 ‘성무일도’ 가운데 가장 마지막 기도인 ‘끝기도’를 바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본의 아니게 자주 빼먹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빼먹지 않겠다고 다시금 다짐해봅니다.
하루를 돌아보며 드리는 끝기도 내용 한 구절 한 구절은 얼마나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가슴 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님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수행생활에 투신하는 수도자들에게 있어 끝기도를 바치는 시간은 ‘작은 죽음’의 순간입니다. 끝기도를 바칠 때 마다 저희는 “또 하루가 저무는구나. 또 한 번 죽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경당을 빠져나와 침실로 올라가는 저희는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주님의 손에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일어날 광경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십니다. 말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가슴이 섬뜩해집니다. 엄청난 홍수가 들이닥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는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두 명 가운데 한명은 데려가시고 한명은 버려두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경은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펼쳐질 미래입니다. 잘 준비된 사람들에게 주어질 상급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팔팔하게’ ‘싱싱하게’ ‘새파랗게’ 살아있을 때부터 종말을 잘 준비한 사람들, 죽음을 당연한 인간의 현실로 여기고 기꺼이 긍정적으로 수용한 사람들, 평소부터 당당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연습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그 날은 얼마나 은혜로운 날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게 될 때 주어지는 은총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우리 인간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가식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위선적인 삶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하찮아보이던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다가오게 될 주님의 날, 갑자기 바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지불식간에 마주치게 될 마지막 날, 허둥대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무덤에서 편히 쉬신 아드님과 같이 우리도 편히 쉬게 되었으니, 내일도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하느님 나라의 표징
- 백광현 신부-
주검 위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죽음의 장소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 나라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곳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매일 자신을 죽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본성은 그렇지 않은데 하느님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죽이며 살아가는 사람들,모든 형태의 죄와 이기심에 죽고 강한 자기애의 애착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게 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윤지종 신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롯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흥청망청 먹고 즐겼고, 세상의 쾌락만 쫓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일에만 몰두하였고, 하느님을 저버렸습니다. 심판이 곧 있을 거라는 노아의 이야기를 비웃으며 무시했고, 회개하라는 주님의 천사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국 홍수와 불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롯만은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의롭게 살던 노아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만들어 심판을 면했고, 롯은 하느님의 천사들의 말씀대로 죄악의 도시 소돔 땅을 떠남으로써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이 두 사건을 예로 드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에 일어날 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 이 세상에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날은 동시에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저버리고 세상의 일에만 몰두해서 흥청망청 먹고 즐기며 쾌락만 쫓아 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은 곧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르며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날은 심판이 아닌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님이 오시는 날은 어떤 날입니까? 심판의 날입니까? 구원의 날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온갖 탐욕과 쾌락, 미움과 다툼이 있는 죽음의 땅 소돔에 머물러 있진 않습니까? 하느님을 망각하고 세상일에만 몰두하며 독수들이 모여드는 주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진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여러분은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탐욕과 쾌락에 빠져 있지 말고,
미워하며 싸우지 말고 하루빨리 주검만이 기다리고 있는 소돔 땅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세상일에만 몰두하면서 제 멋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끊임없이 회개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랑과 용서로써, 나눔과 절제로써 생명의 방주를 만들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우리에게 심판의 날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오시는 날 우리에게 시체 썩는 냄새가 나서 독수리가 모여들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주검의 소돔 땅을 떠나 생명의 방주로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기뻐 용약하며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검의 땅을 떠나 생명의 방주로 들어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롯의 아내처럼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지 맙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어도 모세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맙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시다. 그렇게 더 사랑하고 용서하며, 더 나누고 절제하는 일에 앞장섭시다. 주님께서는 오십니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미 심판과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회개,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영적인 죽음
-이찬홍 신부 -
복음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 시에 이루어지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곧, 재림 시에는 노아 때의 일과 롯의 시대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묻습니다.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라며 그 징조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몰려들 듯, 연기가 있어야 불꽃이 타오르듯, 천재지변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일에는 그 조짐, 징조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천재지변은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파키스탄의 지진은 분명,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 초래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을 때에, 능력을 뛰어넘어서 발생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아픔이요, 고통입니다.
그러나, 인재 곧 사람에 의한 결과로서 초래되는 재앙은 다릅니다.
재앙이 발생되기 전 분명히 그 조짐이 보입니다. 재앙을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다.
장마 때마다 제주 지역에는 물난리가 많이 발생됩니다.
많은 도로가 신설되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20년 전 제주시와 모슬포를 잇는 산업도로가 만들어질 때, 신평리 사람들은 불평이 많았습니다.
계획대로 도로가 신설되면 엄청난 물난리가 날 것임을 알았음에도 관에 가서 한마디 못하고 가슴만 태웠습니다.
고작,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기는 숨골이라, 여기에 길을 내불믄, 우리 동넨 물난리 납니다.’ 라고 말씀 들여 보았자, 허사였습니다.
무시무시한 군사 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로가 신설된 후, 예상한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알맞게 잘 말려 놓고 공판 날을 기다리며 창고에 쌓아둔 보리가 모두 물에 잠겨 썩어 버린 것입니다.
매년, 이런 모습이 되풀이 되다가 90년대에 이르러서야 하수도 시설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물난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산풍 백화점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산풍 백화점의 붕괴된 주 원인은 부실공사입니다.
‘부실’은 내용인 충실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부실공사는 필요한 자재가 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자재가 더 들어간 경우와는 다릅니다.
과다한 자재 사용 시에는 어떠한 조짐이 없다가 그냥 무너져 버리지만, 부실 공사는 자제 부족이기 때문에 붕괴되기 전에 건물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균열의 조짐이 보일 때, 미리 피하면 됩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에는 균열이 심하게 발생되었음에도 위험 방송을.. ‘건물이 붕괴될 것 같으니, 빨리 피하십시오.’ 라는 안내 방송은 끝내 나오지 않았답니다. 회사의 운영진들은 모두 다 피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결과물로 인한 재앙에는 내적, 외적인 조짐이 있습니다.
이제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질 것 같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고 했으니,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주님의 재림을 추측해 본다면... 세상의 종말은 언제 어떻게 시작될 것 같습니까?
옛 소련이 붕괴되기 전 미국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4차 세계대전이 곧 세상이 끝나는 날이라 했습니다.
요즘 환경론자들은 지구멸망은 ‘지구가 오염되어 환경이 바뀌어 버려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발생될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노아의 방주 때와 롯의 시대와 같은 상황, 결과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버리는 때와 상황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버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이웃의 따스한 배려와 도움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늘 근심, 불안, 미움, 분노 속에서 홀로 헤매게 괴로워하게 된다면, 노아 때와 롯의 시대와 같은 느낌, 감정을 체험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어떠한 희망과 평화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그 상황, 상태이기에 바로 노아의 때요, 롯의 시대와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음에도 그 자신이 늘 미움, 시기, 질투, 비난이 마음 안에 가득 차버리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상황은...아무런 희망과 구원이 없어 마치 지옥처럼 느껴지는 그런 결과는 천재지변처럼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재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자기 스스로 그렇게 초래되도록 만들어 놓고도 이를 알지 못하기에, 깨닫지 못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은 내적으로 병들어 가면서도... 영적인 죽음을 당하면서도 알지 못하기에 계속 자기 안으로 깊숙이 숨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멸망,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회개요, 하느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과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겸손되이 자신의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잃었던.. 손상되었던 영적인 생명을 늘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읽어보니, 좋은 책이 있어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바로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께서 쓰신 「용서하는 사랑, 용서받는 사랑」이란 책입니다. 물론, 짜짤하게 독후감은 없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삶
-이수철신부-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끊임없는 회개로 마음이 깨끗해 질 때,
늘 새 날에 새 환경, 새 사람입니다.
그 날이 그 날이, 그 환경이 그 환경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
늘 새 날, 새 환경, 새 사람입니다.
그러니 바꿀 것은 날이, 환경이, 사람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회개로 마음이 새로우면 모두가 새롭기 때문입니다.
특히 안주와 타성에 빠지기 쉬운 정주의 삶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회개의 삶은 육적 욕망의 삶에 거리를 두는 초연의 삶을 뜻합니다.
육적 욕망 따라 현실에 푹 젖어 살다보면 자기도 하느님도 잊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노아 때나 롯 때의 현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가 닥쳐 멸망했고,
롯 때 사람들 역시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다가
하늘에서 쏟아진 불과 유황에 멸망했다 합니다.
하늘의 영적 현실을 까맣게 잊고
땅의 육적 현실에 올 인(All in) 했던 결과입니다.
회개의 삶은 과거와의 결별을 뜻합니다.
뒤를 돌아보며 과거에 미련을 둔 삶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며 사는 미래지향적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인자의 날에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안에 있더라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말라 하시지 않습니까?
다음 한 구절이 이 모두를 요약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과거의 것들에 대한 미련으로 뒤돌아 봤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는 가련한 여인 롯의 아내였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이나,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외적으로야 똑같은 환경이지만 회개로 깨어있는 영혼은 구원 받을 것이고,
육적 욕망 따라 살면서 영혼을 전혀 돌보지 않은 자는
버림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천국을 사느냐 지옥을 사느냐는
회개의 선택에 달려있다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단연 회개의 삶에 초점이 있습니다.
회개로 깨끗해진 우리 마음 안에 깨끗한 형제애도 살아나
1독서의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면서 진리 안에 살아가게 됩니다.
매일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로 깨끗해진 우리 마음 안에 꽃처럼 피어나는 형제애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은 행복하여라.”(시편119,1ㄴ).
아멘.
同床異命
-강영구 신부-
잘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대에게
동상이몽(同床異夢)은 한 침대에서 잠을 자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다른 꿈을 꾸는 이유는 소망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명(同床異命)은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지만 서로의 운명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한자리에 있지만 운명이 갈리는 이유는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가슴 속에 하늘나라(天國)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맑고 밝고 가난한 가슴으로 사랑하며 삽니다. 그에게서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납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너를 나라고 생각하며 동체자비(同體慈悲)를 실천합니다. 누구든지 그를 만나는 사람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는 늘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지옥(地獄)을 담고 삽니다. 온갖 욕망의 쓰레기로 가슴을 가득 채우고 미움과 증오, 원망과 원한으로 부글거리는 가슴으로 살아갑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그는 늘 괴롭고, 증오와 원망의 칼날이 자신을 찌르고, 독선과 오만이 만나는 사람을 해칩니다. 그의 주변은 언제나 어둡고 살벌합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하늘나라를 누리는 사람도, 지옥으로 빠지는 사람도 제 발로 걸어갑니다. 당신의 운명은 당신이 결정합니다. 오늘도 하늘나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지금’그리고 ‘여기’에 종말이 있다.
-박상대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를 예수께 물었다.(20절) 그들은 구약을 통해 예고된 메시아가 올 때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로 믿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주님의 날이 요란하게 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와 계신데 어떤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볼 눈이 있는 사람만이 메시아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2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라는 질문에 ‘이미’, 그리고 ‘벌써’로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면,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곧 인자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와 있음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22-35절) 그런데 재림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재림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언급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날은 온다. 단지 그 날이 언제인지는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를 굳이 알고 싶으면 그 날에 일어날 일들을 보고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날짜’를 먼저 정하고 난 뒤에 그 날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이 방법이 인자의 재림에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날들을 결정하지만 재림의 시기는 하느님이 결정하신다. 인자의 재림은 곧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 종말의 날에 관하여 ‘언제, 어디서’보다는 ‘어떤 모양으로’ 그 날이 들이닥치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지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창세 6-7장)와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날들을 정하고 그 날들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집을 지었다. 그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다. 바로 그 날에 그 사람들은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일상(日常) 중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노아와 소돔의 교훈은 일상 속에 최후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최후의 날을 정할 수는 없지만 살아가는 날들 속에 그 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아무도 ‘지금, 그리고 여기’ 있으면서, 과거나 미래의 시점에 있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장소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날과 장소도 바로 지금과 여기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 완성도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가 되면 철저하게 혼자 서게 된다.(34-35절) 구원과 저주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구나 스스로가 져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여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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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