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국교총주관 ‘존경하는 은사’ 수기 공모 최우수작
서운(瑞雲) 이미도 선생님을 기리며
- 동아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이동춘
1961년, 햇살이 따갑고 초목이 무성하던 함안 가야초등학교 6학년 3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화단 정리 작업을 하던 중 저는 실수하여 그만 맨드라미 한 송이의 목을 꺾었습니다. 선생님께 들킬까봐 얼른 흙을 돋우어 바로 세워 놓았는데, 공교롭게도 선생님의 발에 스쳐 넘어지면서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누구의 짓이냐고 하셨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하니까, 평소 장난기가 심하던 효제를 지목하시며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슴이 떨렸고 급기야는 목멘 소리로 “제가 그랬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는데, 선생님은 제 고백에는 아무 대꾸도 않으시고 “오늘 방과 후에는 남학생들은 모두 남아 저기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 있는 모든 잡초를 다 뽑도록 해라” 하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탱자나무 밑에는 시궁창이 있어 냄새가 지독했으나 저는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하여 발을 벗고 들어가 풀을 뽑았습니다. 훗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자네는 워낙 착해서 친구의 잘못을 뒤집어쓰려고 한 줄 알았다” 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과외가 없었기 때문에 정규 수업과 방과 후 한 두 시간 보충수업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강둑길과 산모퉁이를 도는 십 여리 길을 걸어서 다녔으므로 무덤이 있고 어두워진 산모퉁이가 어찌나도 무서웠던지. 여름방학이 되자 효제, 강숙, 영달이 그리고 저를 지목하여 매일 당신 집으로 부르셨습니다. 한 방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과외였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소리 죽여 가며 장난치고 놀다가 손에 침을 묻혀 문구멍을 내고 밖으로 내다 볼 때면 선생님은 닭장을 치거나 집안일을 하고 계셨고, 점심때 마다 사모님이 해 주시던 밥상엔 흰 쌀밥과 계란찜이 올라 무척 맛있게 먹었습니다. 공부 잘 하는 몇을 골라 마산에 있는 도시 중학교에 진학시키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중학 입시 날이 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전교 수석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셨기에 교장 선생님과 함께 내내 수험장에서 가슴 졸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는 엄청난 실수를 하여 상위권 정도로 합격했고, 다행히 우리 반 친구가 차석을 하여 선생님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맨드라미 목을 부러뜨리고도 정직하지 못하게 숨김으로써 선생님을 실망케 했고, 입시에 수석하지 못하여 또다시 실망케 해드린 점이 어린 마음에 너무 부끄러워 저는 그날부터 선생님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언 졸업 날이 되었습니다. 이것저것 많은 상을 받았는데 선생님과 헤어지는 순간 선생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으며 당신의 책상위에 놓여있던 쓰시던 헌 붓을 쥐어주셨습니다. 선물이었습니다. 아마도 공부 열심히 하여 당신의 뒤를 이으라는 무언의 당부이셨겠지요. 그 엄청난 선생님의 뜻을 모르고서 쓰던 붓을 주신다는 것에 철없이 서운해 했고, 평생 간직해야 할 것을 언제 어떻게 없앴는지 지금도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중학을 다닐 때, 주말이면 하숙하던 마산서 시골집에 갔습니다. 기차역에 내려 걸어가면 거의 매주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시는 선생님이 보였고, 그럴 때 마다 잽싸게 피신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자갈 깔린 신작로를 내려다보고 걸어가면서 예전에 선생님께서는 점심도시락을 늘 고아원 출신 승복이(가명)에게 주시고 밖에 나가시거나 화단정리나 환경미화를 하시던 것을 떠올리는데, 진짜 딸랑딸랑 도시락 통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고! 선생님이지 않겠습니까. 얼떨결에 “선생님!” 하니까 “오냐” 하시며 저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희가 커서 훌륭히 되는 것을 보는 것이 희망이다”고 하셨습니다. 감동스러워 눈물이 핑 돌며 “나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야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만, 가정형편상 결국 제대로 된 길을 가지 못 해 고민과 갈등 속에서 젊은 날을 보냈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일반대학교에 다니던 1975년 3월 7일, 우연히도 부산에 출장오신 선생님을 길에서 만나 뵙고 나서부터는 다시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교수가 되고 박사학위를 받던 날, 축하연에 선생님 부부를 모시고와서 제일 윗자리에 모시고 가장 먼저 축사를 부탁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무척이나 감개해 하시며, 두고두고 친구 분들께 자랑하셨다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1993년 2월, 선생님께서 정년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오지 말라 하셨지만 “그래도 가 봐야지” 싶어 근무하시던 마산 무학초등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주변에 폐해가 되는 퇴임식은 안 하시겠다는 말씀은 평소에도 하셨지만, 정말 선생님의 퇴임식은 현수막 하나 없이 교무실에서 거행되는데, 학교 선생님들과 각 반 반장과 부반장이 참석했고 외부 손님은 유일하게 저 뿐이었습니다. 울먹이며 송사를 하는 선생님과 학생대표를 보며 저의 가슴도 흠뻑 젖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손님 한 사람이 제자인 현직 교수라고 소개되자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며칠 후 동창들과 함께 선생님을 위한 조촐한 모임을 갖고 다음과 같은 글을 바쳐 올렸습니다.
사은의 글
송암 이미도 선생님께
선생님께서는 마치 바위 틈 속에 고고히 선
한 그루 소나무 같으셨기에 저희들은 감히 송암(松巖)선생님이라 불러 모실까 합니다.
43년간의 세월 속에 온갖 영욕 있었어도
늘 푸른 잎은 시들지 아니하셨고 비오고 바람 불어도 기울어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가뭄이 겹쳐도 목마르다 하지 아니하셨으며
함박눈 가지에 매달렸어도 무겁다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 받은 수많은 제자들은
저마다 하는 일이 다릅니다만
한 가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선생님의 그 가르침을 따르지 못해
늘 송구스러워 하는 점입니다.
오늘 선생님의 영광스런 정년을 맞아
저희들 제자일동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리며
삼가 사은의 글 바쳐 올립니다.
1993. 2. 28.
함안 가야초등학교 제37회 6학년 3반 제자일동
퇴임하시고 10년도 채 안되었을 때인 2001년 1월 말, 그러시던 선생님께서 병이 나시어 제가 근무하는 동아대학교 병원에 모셔와 수술도 받았으나 결국 그해 12월 5일 애석하게도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병실에 계실 때 저는 붓글씨로 ‘뿌리 깊은 나무는 ... ’으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를 써서 벽에 붙여드렸습니다. 기뻐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의 생전 모습을 뵌 것은 임종을 앞둔 이틀 전이었습니다. 힘없는 손으로 제 손을 잡으시며 신음하시듯 “바쁜데 뭘 하러 자꾸 오시는고? 고맙네 이 박사! 난 너무 아파서 빨리 갔으면 싶네. 내가 그렇게 모질게 살지 않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하셨습니다. 환자가 갖는 고통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여 드릴 말씀도 없고, 다만 그토록 올곧게 사셨던 분에게 신은 왜 이토록 심한 고통을 주시는지 생각하며 저는 입술만 깨물었습니다. 그 날이 제가 뵌 마지막 날이었고, 저는 선생님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드렸습니다.
늘 올곧음을 가르치셨고
몸소 실천하신 참교육자
서운(瑞雲) 이 미 도 선생님
여기 잠드시다.
2001.12.7.
불초 제자 이동춘
나름대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온 저의 교직생활도 이제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미흡했으나마 은사님의 길을 따랐기에 여한은 없지만, 제가 늘 아껴 쓰던 이 마지막 만년필을 넘겨주고 싶은 제자를 만나지 못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