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송영숙
나비 한 마리 배롱나무 맨다리에
배롱나무 바보라고 쓴다
배롱나무 몸 비틀며 간지럽다고 웃는다
배롱나무의 웃음은 슬픔
나비는 말을 안 한다
나비는 욕을 모른다
나비만 아는 배롱나무의 언어
나비야 나비야 내친김에
곁눈 짓 그만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사연이나 길게 적어봐
배롱나무 간지러워 미쳐서 돌아가시게
----송영숙 시집 {남자들이여 출산하라}(근간)
순수예술은 자연과 사물을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상업예술은 예술을 빙자하여 돈벌이에 그 목적을 두는 예술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고대사회의 예술작품마저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는 사회이며, 따지고 보면 오늘날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대중예술)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모든 예술을 상업예술로 만들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가 무너진 이 순간에도 상업예술이 침투할 수 없는 공간이 있으니, 그것은 동화의 세계와 일 자체가 기쁨이 되는 창작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송영숙 시인의 [근황]은 동화 속의 자연, 아니, 자연 속의 동화를 순수미로 표현해낸 대단히 아름답고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비 한 마리 배롱나무 맨다리/ 배롱나무 바보라고” 쓰면, “배롱나무 몸 비틀며 간지럽다고” 웃는다. 나비 한 마리가 ‘배롱나무 바보’라는 말과 글자를 알 리도 없고, 배롱나무가 나비 한 마리의 유혹적인 희롱의 몸짓에서 ‘배롱나무 바보’라는 말과 글자를 읽을 리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송영숙 시인이 나비 한 마리와 배롱나무를 인간화시키고, 그들의 몸짓과 수작을 동화(자연)의 세계로 창출해낸 것이다.
나비 한 마리와 배롱나무는 인간의 언어도 모르고 경제학의 잣대로 모르니, 그만큼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지만, 그러나 ‘배롱나무 바보’라는 나비 한 마리의 유혹적인 희롱에 배롱나무는 마냥 즐겁고 기쁘게 웃을 수가 없다. 배롱나무의 웃음은 그만큼 쓸쓸하고 허탈한 슬픔이지만, 그러나 나비는 말도 안 하고 욕도 모른다. 나비 한 마리의 유혹적인 희롱은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의 언어가 되고, 나비 한 마리의 희롱에 배롱나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비야 나비야 내친김에/ 곁눈 짓 그만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사연이나 길게 적어봐// 배롱나무 간지러워 미쳐서 돌아가시게”라고----. ‘배롱나무 바보’는 반어이고, ‘배롱나무 바보’는 배롱나무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나비의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사랑의 밀어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나비 한 마리와 배롱나무는 이처럼 전희前戱를 즐긴 것이고, 그 다음에, “배롱나무 간지러워 미쳐서 돌아가시게”는 성교의 절정, 즉, 대단원의 클라이막스를 뜻한다. 나비 한 마리는 수컷이 되고, 배롱나무는 암컷이 된다. 자연의 성교는 종과 종의 경계를 넘어선 성교이며,
티비에서 다섯 아이 엄마가 웃는다
아이 다섯의 아빠가 각각으로 다섯이란다
한 대 맞은 듯 몽롱하다
저쯤은 되어야 감히 사랑했다고
그때그때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저 젊은 엄마와
아이 다섯과
남편 다섯이
다 같이 소풍 가면 일처다부
거룩하여라 펄럭이는 치맛자락이여
울려라 둥둥둥 천둥 같이 북을 때려라
갈기를 나부끼며 우뚝 선
저 여전사의 졸개가 되고 싶어
등채를 쥐고 맨 앞에 서고 싶어
상모를 돌리며 날장구를 치고 싶어
----[저쯤은 되어야] 전문
라는, 다섯 아이의 아빠가 다 다른, 다섯 아이의 엄마의 웃음처럼, 더없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순수예술, 즉,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이다. 이 지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은 선악을 넘어선 사랑이며, 경제학의 법칙도 모르는 자연의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섯 아이의 아빠가 다 다른 것이 그 어떤 문제가 되고, 나비와 벌떼들이 그 어떤 풀과 나무와 꽃밭에서 혼음을 하거나 이종교배를 한들 도대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도덕이란, 성 윤리란 더럽고 추한 사랑, 즉,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기초가 되고, 선악을 넘어선 동화(자연) 속의 사랑이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사랑, 즉, 이룰 수 있는 사랑의 기초가 된다. 사랑은 종교도 모르고, 사랑은 국경도 모른다. 사랑은 이념도 모르고, 사랑은 도덕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