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탕카멘의 저주
1. 소개
1922년 이집트에서 고대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팀이 하나둘씩 연이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매우 메이저한 도시전설.
여기서 핵심인물인 파라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61년부터 9년간 재위한 소년왕으로, 기록에 따르면 18세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미소년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재위 시기도 까마득하게 먼 편인데, 저 유명한 고대의 제왕 알렉산드로스 3세와 진시황이 태어나기 무려 1000년도 더 이전의 사람이다. 무덤이 밀폐된 것은 기원전 1323년으로, 당시 지중해 건너편에서는 한참 그리스 신화 찍던 시절이다.
요컨대 3300년이나 묵은 고대의 미라가 거의 모든 부장품들과 함께 온전하게 발견되었다는 것. 발굴 당시로서는 가히 고고학계의 쾌거라 아니할 수 없었다.
2. 저주에 대한 도시 전설의 내용
문제는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는 협박성 문구가 부장품에 상형문으로 기술되어 있었던 것. 물론 이런 류의 저주는 파라오의 무덤에 경고용으로 흔히 따라붙는 상투적 문구이긴 했지만[1], 이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의문사를 당하면서 정말로 문제가 심각해졌다.
저주의 첫 희생자는 발굴팀의 자금줄이자 유력자인 카나본 경. 그는 발굴을 참관한 직후 오래지 않아 돌연사로 생을 마감했다. 흔히 '파라오의 저주'라고들 한다. 발굴 당시 카나본 경은 모기에 물린 적이 있는데, 그 물린 곳이 심하게 부풀어 오를 정도였고 면도를 하다가 환부를 건드리는 바람에 덧나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발굴 당시에 파라오의 상징인 코브라가 나타나서 카나리아('카나본' 경의 이름과 유사함)를 잡아먹는 사건이 있었다고 하며, 카나본 경이 사망한 순간 카이로 전역에서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연이어 그의 애견도 숨졌고, 서서히 다른 팀원들도 하나 둘씩 사망했고, 심지어 단순히 가이드를 해준 사람마저도 급사했고…. 이집트엔 때 아닌 모래 폭풍이 나타났다. 몇 년이 지나자 투탕카멘의 묘를 발굴한 인부들은 투탕카멘의 저주로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에 파다하게 퍼졌다. 훗날 집계된 희생자 수(10년 이내에 자연사 외의 이유로 사망)는 21명.
3. 저주의 실상
무덤을 팠다고 저주하는 방법이 있었다면,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꾼들이 마을을 만들고 대대손손 살 수 있겠습니까?
일설에 따르면, 컴컴한 격실에 잠들어 있었던 고대의 곰팡이가 세상 공기를 만나면서, 맞닥뜨린 사람들을 감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도 하는데, 한동안 해답처럼 떠돌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추론일 뿐이다. 사람의 몸에 닿자 마자 생명에 위해를 끼칠 정도의 유독한 곰팡이는 실존하지 않는다. 독성 물질 전반으로 범위를 넓히면 보톨리누스 정도를 꼽을 수 있지만, 그 정도면 다 사망이다. 또는 열대 모기에 의한 전염병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기실은 발굴에 참가한 인부들이 연쇄적으로 죽은 것은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리고 뒤늦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주인을 따라 곧 죽었다던 카나본 경의 애견도 실은 훨씬 오래 살았고, 발굴 현장에서 코브라가 카나리아를 잡아먹었다는 것도 기자가 지어낸 이야기였다. 카이로에서의 정전 역시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는 1920년대다. 현대에도 개발도상국에서의 정전은 흔한 일인데 하물며 1920년대 카이로라면 더더욱 흔한 일이다. 또한 발굴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카나본 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천수를 누렸다.
특히 발굴을 몸소 진두 지휘했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17년이 지난 66살까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예언을 카터에게도 실현시키고 싶었는지, 이 저주 때문에 자신도 죽을까봐 두려워서 공포에 시달리다 늘그막에 미쳐 죽었다는 식으로 전하는 도시전설판도 있다고 한다. 예언이 틀리면 지어내면 되지 당연하지만 카터는 미치기는 커녕, 이 도시전설 자체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망자 관련자 수가 21명이라지만, 실제 관련자 1500명에 비하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가장 먼저 죽었다는 카나본 경은 발굴 당시 이미 건강이 매우 나빠서 오늘내일 하던 사람이었다. 그 증거로 1922년 11월, 이 무덤을 발견하고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카터가 특급 전보를 보냈을 때, 그는 '내가 몸이 아파서 마음은 급한데, 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답장 전보를 보냈다. 그래도 몇 해나 거액을 후원하며 애타게 찾던 파라오 무덤을 빨리 보고자 당시 교통으론 꽤 빠른 편인 3주만에 이집트로 갔고, 이때 안 그래도 아픈 몸이 더 타격을 받았다는 의견도 많다. 이렇듯 여러 가지 원인이 겹친 상황이었기에 사실 금세 숨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로부터 6달도 안 돼 세상을 떠났다.
카터는 후원자인 카나본 경과 같이 문을 열고 보길 바랐기에 그때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카나본의 부탁도 있었기 때문이며, 별로 이름도 없던 카터를 믿어주고, 5년이 넘게 막대한 발굴 관련 비용을 부담해준 카나본 경을 카터가 무시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투탕카멘의 무덤에 써 있던 문구는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가 아니라, 왕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는 자를 축복하리라는 식으로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되려 발굴자들에게 행운과 축복을 내려준 셈.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것은 칭찬을 받을만한 행동이었고, 이런 기준으로 봐도 발굴자들은 충분히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도굴꾼들은 죽은 양반들 관심없다. 이거에 관심 있을 뿐.
물론 침입자들에 대한 저주의 문구 자체는 완전한 창작은 아니고, 고왕국 시대에서 중왕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사용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저주의 문구는 투탕카멘의 시대에는 이미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흔히 '고대 이집트'라고 한 덩어리로 묶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고왕국이 시작된 시기에서 신왕국의 마지막까지만 계산하더라도 2천년이 넘는 기간으로, 시간만으로 따지면,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시기에서부터 서기 2014년까지의 기간보다 더 길다. 당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또한 저주의 문구 역시 흔히 말하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나 "죽음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리라"와 같은 근사한 표현은 아니고, "무슨무슨 병에 걸려서 고생하다가 죽을 것이며, 어떤 의사도 그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와 같은 직설적인 위협으로 되어 있었다.
카나본 경 본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주를 받은 듯이 운이 나쁘기는 했다. 19세기만 해도 이집트 측은 발굴 기술이 없다며, 유물을 찾아내면 절반은 그 발굴단의 조국으로 가져가게 했었다. 때론 더 많이 가져가는 것도 흔했다. 심지어 겨우 시계(!)와 교환으로 오벨리스크를 줄 정도로 이집트인들은 고대 이집트 유물을 우습게 봤기에, 19세기에 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되었다면, 거의 대부분의 유물들이 지금쯤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벨리스크가 겨우 시계 1개와 교환해서 와 있다. 참고로 이 시계는 20년도 안 가 고장났다. 더불어 이집트인들의 다수 종교가 된 이슬람교와 무관하다고 오래전 이교도 흔적이니 가져가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던 인식도 깊었었다.
하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20세기에는 이집트인들도 이제 자국 문화재 가치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해외 반출이 막혔고, 카나본 경은 이에 크게 놀라고 실망했다. 이미 병이 든 상태에서 발굴 현장을 보기 위해 무리하게 이집트로 왔다가, 돈만 엄청나게 쓰고 (집안이 어려워서 발굴까지 그만두려고 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유물은 못 가져간다는 사실에 충격까지 받은 카나본 경은 몇 달 못 가 숨졌으니...... 결과적으로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를 비롯하여 단 1점도 영국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되었던 것. 이는 당시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장 알 이븐 하지 라우드 고집이 컸다. 바로 이 사람이 이집트 문화재 보호에 기여한 오귀스트 마리에뜨의 조수를 지낸 인물.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재산을 들여가면서 투탕카멘 무덤을 찾으려던 카나본 경에게 정신적 타격까지 준 셈이다.
하지만 카나본 경과 다른 20명을 제외한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은 셈이다. 별 볼일 없던 고고학자이던 카터는 이 발굴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장수했고, 해외 반출을 막은 라우드는 이집트 정부에게 훈장을 수여받았고 그의 활약으로 이집트에 남은 이 유물들은 막대한 돈을 안겨주고 있으며 그 밖에 대다수 발굴 관련자들은 이 저주가 무색하게 잘 살았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이 마치 저주인 양 각색되어 지금도 세상에 구전되고 있다는 이 명백한 사실이야말로 파라오의 무덤에 대한 경각심을 새로이 환기해주는 확실한 저주가 아닐까.
과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이종호 씨 책자 "파라오의 저주"에 의하면,이 투탕카멘의 저주 이야기의 유래는 카나본 경이 투탕카멘 발굴 관련 인터뷰를 특정 신문이 독점 계약한 것에 불만을 품은 다른 신문사가 쓴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당시 처음에 써진 기사는 그냥 짧게 대충 쓴 기사였는데, 이게 워낙에 대박을 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덧붙여지고, 아주 정설처럼 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마크 베이넌은 투탕카멘의 저주로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 중 적어도 6명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에게 살해 당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4. 대중문화에서의 투탕카멘의 저주
영화 <미이라>(1932년판/1999년판 모두 해당), 부바 호텝, 만화 <천체전사 선레드>의 카멘맨, 애니메이션 <미이라왕 투탕>, 과거 우리나라에 출판되었던 만화책, 우리나라 인형극(80년대 모여라 꿈동산 같은 어린이 드라마에까지 미이라가 나와 발굴범들을 목 졸라 죽이는 것까지 나왔다!)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전설이 서브컬쳐에 끼친 파급력은 헤아릴 수 없다.
덧붙여 각종 서브컬쳐의 미이라 및 파라오 류의 캐릭터가 '저주' 스킬을 패시브 설정으로 지니게끔 지대한 공을 끼쳤고, 이게 미이라를 통해 고착화된 뒤로는 이집트인 캐릭터는 죄다 괴인이나 오컬트 캐릭터로 등장하는 클리셰를 낳게 되었다. 정작 투탕카멘은 단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죄밖에 없는데...
만화 왕가의 문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초반부에는 아예 파라오의 저주를 직접 실현하고 다니는 악녀 아이시스가 주인공 포스를 내뿜을 정도.
5. 기타
보툴리누스균 처럼 밀봉 된 무덤에서 서식하던 혐기성 미생물이 섞인 공기를 호흡해 죽은 것은 아니냐는 설도 있었다. 물론 그냥 그럴싸한 떡밥이다.
1996년에는 이집트 박물관에서 투탕카멘 유물을 훔치려던 자들이 적발되어 구속되었는데, 이들은 다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실패했다고 기자가 언급했다가, 경찰 간부에게 "저주라면 저자들은 피를 토하고 죽었어야지요."라는 비웃음으로 면박당한 적도 있다. 엄청난 돈줄을 도둑맞을 뻔한 것에 분개한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 명으로 이들은 아직까지 교도소 신세. 그 뒤, 경비가 철통같아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2011 이집트 혁명으로 어수선한 와중에 경비가 허술해지자 일부 유물이 도난당했고, 그 중 일부는 아직까지도 회수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무령왕릉 발굴 시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며 자세한 건 무령왕릉 문서 참조. 또한 삼국유사 수로왕편의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능인 수로왕릉 역시 함부로 건드린 사람들이 온갖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수로왕릉 문서 참조.
[1] 당연히 도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이다. 현대로 따지면 쓰레기 무단투기를 막기 위해 'CCTV 감시중'이라고 써붙이거나 몇몇 아파트 단지가 외부차량 주차금지 문구를 써붙이며 견인한다는 협박성(?) 공지를 써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