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의 「벼」 감상 / 고광헌
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시선집 『우리들의 양식』 1974,9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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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생활은 막 열다섯 살이 되던 1970년 고향 정읍을 떠나 한 고등학교 농구선수로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과 「문둥이」라는 시를 쓴 서정주를 읽으며 짧게 문학 소년기를 보낸 뒤였다.
나중에 보니 그즈음 한국문학은 미학의 식민성에서 벗어나 활발한 작품 창작과비평을 통해 현실 참여와 사실주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때였다. 문단 일각의 이런 변화는 머지않아 닥쳐올 권력과의 일대 불화를 예비하는 일이었다. ‘저산소증’에 빠지기 시작한 사회의 위험을 알아챈 카나리아들이 요란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법살인과 3선개헌 등으로 정통성이 취약해진 박정희는 한편으론 지역감정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편으론 중정과 검찰 경찰 등 폭력적 국가기구를 사유화해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대학생과 노동자, 종교인과 양심적 지식인들의 고난이 이어졌다.
권력의 음습한 기획에 따라 불붙기 시작한 지역감정은 전국의 마을과 오일장, 회사와 학교, 공단과 도시의 시장을 태운 끝에 민중의 가슴에 아물 수 없는 또 하나의 분단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나 같은 전라도 청소년들이 어쩌다 섞여 다니는 학교의 운동장까지 옮겨 붙었다. ‘죄도 없이’ ‘죄지’은 것 같던 소년들을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지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연습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돼온 동기생 여덟 명 중 여섯이 중도하차하고, 2학년이 되면서 기량을 인정받은 나는 베스트 멤버가 됐다. 내친김에 나는 주장이 되고 싶었고, 3학년이 되자 감독은 내게 ‘완장’을 채워 줬다. 감독의 대리자인 주장은 힘이 셌다. 그 힘으로 내가 한 일은 하급생들에게 가해지던 폭력을 끊은 일이었다.
그해 가을이었다. 가난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 간 나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방학 때나 짧게 고향엘 가는 기간을 빼고는 좀체 나가지 않던 합숙소 외출을 시도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종로서적에서 처음 읽은 문장이 『이성부 시집』(1969,시인사)에 수록된 「벼」 「봄」 등 단음절 제목의 전라도 연작시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는 구절을 지나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는 구절에 이르자 걷잡을 수 없도록 눈물이 쏟아졌다. '묶은 몸'과 '튼튼해진 백성들'은 고향의 부모형제와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이었다.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 같은 역설적 표현은 당대의 폭압적 정치 상황 속에서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은유였지만, ‘죄도 없이’ 감내해야 했던 내 처지와 동일시되면서 누선을 자극했다. 그것은 어떤 잘못도, 그럴만한 이유도 없이 천대받는 사람들에 대한 시적 옹호이자 문학적 응전이었다.
당시 내겐 시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소양과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만난 이성부의 전라도 시편들은 읽자마자 온갖 시적 장치들이 단박에 내 무지의 감정선을 뚫고 감전되듯 내면을 파고들었다.
나는 「벼」와 「봄」 같은 전라도 연작시를 읽으면서 수직 질서와 위계에 의한 폭력은 물론, ‘죄 없는 죄인’을 만들고 가르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의 본질을 희미하게나마 알아차릴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3 농구선수 시절 수학여행 대신 찾아간 서점에서 시가 내 몸 안에 들어오는 ‘이적’을 체험한 일은 두고두고 내 삶의 밑천이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1973년 다시 한 대학에 농구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지난 3년여 동안 몸을 혹사한 탓인지 내 몸을 숙주로 삼은 결핵균과 장기전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검사 결과 다행히 음성 판정을 받아 대학병원의 관리 아래 선수 생활을 계속하다 3학년 1학기를 끝으로 농구선수로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둬야 했다.
스물두 살이었다. 오직 하나의 경로만 질주해 오던 내게 선수 생활 마감은 사막 한가운데서 혼자 낙오를 당한 기분이었다. 뭔가 해야만 했다. 세 번을 찾아가 겨우 허락을 받아 황순원 교수가 강의하는 3학점짜리 〈문장론〉과 〈수필론〉을 들었다. 글을 쓰게 되는 일생일대의 전환점이었다. 스물대여섯 명의 국문과 학생들 틈에 끼어 겨우 문장을 만드는 훈련을 받으며 어렴풋이 문학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수강을 허락하면서 덧붙인 황순원 교수의 50여 년 전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연구실 창문에 친 커튼을 가리키며) 고 군, 저 창문의 커튼 때문에 안에 있는 우리가 보일락말락 하듯 무릇 작가는 독자들에게 그렇게 비치는 존재여야 하네. 국문과 학생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경주(체육)를 하는 학생까지 함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런(수강거절) 것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