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900m 울진 산속에서 ‘대왕 금강송’을 만났다 수백년 바람과 폭설 견딘 소나무가 나를 사로잡았다 지구온난화 탓에 우리 소나무 사라진다는데 소광리 금강송 원시림을 세계자연유산에 올리는 게 내 마지막 과업이다" 나는 15년 전부터 소나무만 찾아다니면서 인적 없는 산속을 헤매고 있다. 연중 절반은 산속에서 보낸다. 그것도 모자라 세계 최대 소나무 군락지로 꼽히는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로 5년 전 아예 이사를 해버렸다.
지난해 늦여름, 여느 때처럼 이른 새벽 산속 원두막에서 일어나 소나무를 찾아 나섰다. 길도 없는 해발 900m 원시림 속을 건장한 청년 두 명의 도움을 받아 헤쳐나가길 6시간쯤,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둘레가 5m나 되는 엄청난 소나무였다. 수백년 동안 동해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과 서쪽 태백산에서 내리는 폭설을 견디느라 키는 9m밖에 자라지 못했지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넘쳐났다. 바람에 가지가 서로 부딪치면서 상처가 나고, 그 자리에는 송진이 흘러내렸다. 송진에 어린 가지들이 달라붙은 채 성장해 거대한 분재를 보는 듯했다. 바람과 눈, 그리고 시간이 만든 걸작품이었다.
우리나라 소나무를 대표하는 '국송(國松)'의 격(格)을 갖춘 소나무와 드디어 만난 것이다. 넋이 빠져 사진 찍는 것조차도 잊어버렸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가다듬고 육중한 대형 카메라(필름 크기 9㎝×10㎝)를 꺼내 촬영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 소나무에 '대왕 금강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1970년 사진에 입문했다. 초기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는 휴먼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간첩으로 오인돼 경찰서에 붙들려가기도 여러 번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산 사진에 빠졌다. 백두산·한라산·지리산·설악산 등 전국의 산이란 산을 다 헤집고 돌아다녔다. 1주일이고 2주일이고 산속에서 야영을 하며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1초의 승부'로 판가름나는 결정적 순간을 만나는 것은 심마니가 산삼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1년 동안 산속을 헤매고도 작품 한 점을 얻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내 사진 인생에 운명처럼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왔다. 산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가 소나무가 고사(枯死)한 현장을 자주 목격하게 됐다. 지구 온난화로 100년 이내에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전 세계 어딜 가도 한국 소나무보다 격이 있고 아름다운 소나무는 없다고 나는 자부해왔다. 새로운 소명이 생겼다. 나는 영정 사진을 찍는 마음으로 한국의 걸작 소나무를 사진으로 남겨야겠다는 뜻을 세웠다.
작품 사진에 담을 소나무를 찾아내는 것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그런 소나무들은 항상 깊은 산중에 호랑이처럼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엔 길이 없다. 가까이 가려면 길을 내줄 산꾼 3~4명과 함께 입산해야 한다. 하지만 소나무를 만나는 것과 사진을 찍는 것은 또 별개다. '사진이 되는' 단 한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9년 전 나는 오대산에서 '왕송(王松)'이라 부르는 걸작 소나무를 만났다. 지금까지 본 소나무 중 수피(樹皮)가 가장 붉었다. 이 왕송은 눈 덮인 고고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야 한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왕송 사진을 찍기 위해 오대산에 올랐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해 설 직후 영동 지방에 폭설이 내렸다. 내게 사진을 배우는 제자 2명, 전문 산악인과 함께 오대산에 올랐다. 눈이 허리까지 찼다. 전문 산악인도 200m를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2.2㎞를 걸어서 올랐다.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9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눈 덮인 왕송 사진을 찍었다. 9년을 기다린 내게 왕송이 드디어 마음을 연 것이다.
소나무 중의 소나무는 금강송이다. 금강송 중에서도 소광리 금강송이 첫손에 꼽힌다. 이렇게 아름다운 색조와 격조를 가진 금강송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소광리는 1600㏊ 면적에 200~300년 수령(樹齡)의 금강송 8만여 그루가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울진군
나는 '울진 금강송 사진전'을 이달 25일 서울을 시작으로 대구와 울진에서 연다. 내년에는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파리에서 해외전도 가질 예정이다. 40년 사진 인생의 대미(大尾)로 울진 금강송 군락지를 세계자연유산에 등록시켜 후대까지 보존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소나무가 던져준 나의 마지막 업(業)이라고 생각한다. / 장국현 사진작가 |
첫댓글 소나무에 미치듯 사진 찍는 그 열정에 탄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