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아래 여동생 손을잡고 추운겨울 저녁에 푸추간에 가서 돼지고기 기름을 얻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많은양도 아닌 시멘트종이에 둘둘말아서 가져온 기름 덩어리
그걸 엄마는 김치찌게에 넣고는 끓여서 상위에 올려 놓으시면 우린 그래도 돼지고기 냄새라도 나기에 정신없이 먹는데 그때 나는 그안에 두부를 고기처럼 생각하고 김장김치에 꼭 쌓아서 먹는 버릇이 생겨난 것이다.
세월이 흘러 돼지고기가 흔해지면서도 여전히 김치찌게 속에 돼지고기를 김치에 쌓아먹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우리엄마 박여사 우리 꼬맹이때 아부지 연좌제에 걸리셔서 정부 주요기관에서 쫓겨나고 이곳 상암동 골짜기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동네로 이사와 월세방에 머물다가 그마져도 밀리자 한겨울 내가 5살쯤 됐을때 쫓겨나 오갈때 없을때 동네 아버님 또래 청년들이 움막을 지어서 그곳에서 기거 하도록 하면서 엄마는 그때부터 안해본 장사가 없을정도로 고생을 하셨다 그러다 내가 국민학교 들어갈때쯤 교육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저멀리 강원도 평창 초등학교에 부임하시고 교통이 불편하고 너무멀어 방학때가 되어야 집으로 오셨던 ... 그리고 무허가땅에 주택을 지어 처음으로 우리집이 생겼고 내방도 생겨났는데 나중에 정부에서 무허가건물 불하를 받으라 해서 정식건물이 되었던..
이렇게 고생고생 하시다가 집에 생활이 편해지고 먹고살만 해지면서 평범한 가정생활을 이어왔던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연금으로 정말 신나게 사시던 박여사가 침대에서 떨어져 온몸이 마비가 되면서 정신만 멀짱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할까 그런세월이 벌써 3년이 넘어간다. 얼마전 병원을 찾았더니 모처럼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내가 아들인줄 모르고 하시는 말씀
" 에고 우리 큰아들하고 똑같이 생겼네 " " 박여사 ! 나야 큰놈" " 에이 울아들은 아니고 비슷하게 생겼다니께"
그사이 치매끼까지 와서 사람을 못알아 보는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위안인 것은 친아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그렇게 제차 물어보면서 마지막엔 큰아들이란걸 아시고 눈물만 흘리셨다. " 아들~ 나이제 얼마못살거 같다" " 이래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낳을거같아" " 요즘들어 니아부지가 종종 나타 나신단다" " 그래 미안해 엄마!" 두손을 꼭잡고서 그져 눈물만이 그감정을 나타낼 뿐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드실까 다행이 욕창이 생기지않은게 다행이지만 손은 장갑을 씌워 꼼짝 못하게 해놓은 것이다 이또한 간호사들의 행동이겠지만 몸에 붙어 있는 호수를 잡아 뽑아내고 기저귀도 뽑아버리고 해서 할수없이 이럴수밖에 어쩔수 없다하니 분명 박여사는 나름의 행동으로 표현 했으리라 차라리 죽는게 나을거라면서 숨만 쉬고있는 식물인간 한국판 고려장이 요즘 요양병원 이라 하는데 그렇게 박여사는 고려장에 갖혀서 조금씩 조금씩 이승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장남으로서 장남역활을 못하니 어머니를 편안하게 가시게 할수도 없다 그집안의 장남이 망가지면 장남으로서의 역활도 사라지는 것이니 동생들에게 어머니 편히 보내드리자는 말도 못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내자신을 찾아야만 한다고 자식된 도리로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다면 그건 후레아들놈 인것이다
내가 할수있는건 자주자주 찾아가 얼굴 보여주는것 이라고
다음주 박여사를 만나러 가야 겠다고 맘먹는데 이밤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유난히 생각나는 밤이다
첫댓글치매가 완전 중증이라도 오래오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기억하더군요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답니다. 생각하면 참 마음아프고 서글픈 일이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다 인생인 것을요 사실 치매걸리신 어르신들은 자주 찾아보아야 별 소득도 없고 자식된 도리로 위안만 삼을 뿐이지요 마음의 갈래치지 말고 그냥 차분히 덤덤히 하면 좋겠습니다.
저런 어머님이 편찮으시니 마음이 매사 허전하겠습니다. 요즘은 요양병원이 있어 다행인데 나는 그런 것도 없어 꼬박7년을 모셨지요. 대소변을 받을 때는 창자속에 있는 것까지 토할 정도의 악취에 솔직히 돌아가시기를 빌고 빌고 또 빌고 임종하던 날 누나에게 전화를 했지요. '정말 속이 다 시원하다' 이런 까닭에 점점 엄마를 만나러 갈 시간은 다가오고 씻지못할 불효를 어찌할고 매일 그생각을 하는군요. 나처럼 후회없는 보살핌 가지세요.
가슴이 아픈데도.. '글맛 좋다'라고 쓰면 미움받겠지요. 엄니.. 지존님의 엄니 사진을 보니 저도 눈물이 살짝 납니다.
제 경험담입니다. 저는 치매걸린 어머니를 모셨지요. 아쉽게도 시골에서 서울 올라와 지내시다가 저녁밥을 먹기지 못하고 콜록대기에 119로 서울아산병원응급실로... 그 뒤로는 제가 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병원에서 중환자실에서...그 큰 병원에서는 강제로 밀어내대요. 지방아산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저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중환자가족용 보호실에서 먹고 자고... 중환자실 면회 하루 4차례... 엄니한테 제 목소리를 들려주었지요. 무의식이라도.. 저는 쉴사이 없이 중얼거렸지요.
지금 상태에서 자식이 해 드릴 수 있는 거 거의 없을 겁니다.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여드리고,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치매가 심하여 자식 얼굴을 몰라본다고 해도 목소리는 기억하실 겁니다. 그저 아무 말이나 들려드리세요. 치매 걸리면... 수명은 이미 정해진 것일 터... 이별연습을 해야겠군요. 얼굴 보여드리고, 손잡아 드리고, 목소리나 들려드리는 게 최선이겠지요.
누구라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짠하기만 합니다. '자식낳고 제대로 키우지 못할라면 무엇하러 나셨소' 그리고 탕자의 길로 들어섰다가 그렇게 벌어진 간극을 간직하고 병원에서 마지막까지 죽을 힘을 다해서 불렀다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립니다. 병원에서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고는 숨을 멈췄고 병원에 CPX가 걸렸다가 결국 10여일이 지난 후에 호흡기를 제거했던 그 아픈 추억이 생각납니다. 어머니를 보내고 그동안의 관계를 유지했던 옆지기와도 준결별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까지 할 수만 있다면 잘해 드리시길요
첫댓글 치매가 완전 중증이라도 오래오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기억하더군요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답니다.
생각하면 참 마음아프고 서글픈 일이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다 인생인 것을요
사실 치매걸리신 어르신들은 자주 찾아보아야 별 소득도
없고 자식된 도리로 위안만 삼을 뿐이지요
마음의 갈래치지 말고 그냥 차분히 덤덤히 하면 좋겠습니다.
좋은말씀 참고해야 할거같아요 ㅎ
덤덤하게 읽어 내려갔지만
맘 한구석 쓰림은 엄마 먼 여행길
가신지 17개월로 접어드네요ᆢ!!
얌전한 치매로
엄마모시고 생활한 지 7년
함께 다니고 출근길 모시고 다녔던 엄마
ㆍ
ㆍ
ㆍ
후회없이 모신다고 했지만
손을 놓고 만질수 없고 볼 수 없으니
그리움만 더 해집니다
지존님
자주 가서 뵈세요
말도 많이 하시고 엄마는 당신의 기억속에 자식을, 큰 아드님을 기억하십니다
후일 언어도 잃어버려 말도 못하시면
자식은 더 애닳지요
후일
우리의 모습일지 몰라 더 마음아파요
어머님 정신 놓지마세요ᆢ_()_
되려 정하나님의 댓글에 제마음이 울적해지는군요
갑장이시네요 반갑구요
저런 어머님이 편찮으시니 마음이 매사 허전하겠습니다.
요즘은 요양병원이 있어 다행인데 나는 그런 것도 없어
꼬박7년을 모셨지요. 대소변을 받을 때는 창자속에 있는
것까지 토할 정도의 악취에 솔직히 돌아가시기를 빌고 빌고 또 빌고
임종하던 날 누나에게 전화를 했지요. '정말 속이 다 시원하다'
이런 까닭에 점점 엄마를 만나러 갈 시간은 다가오고 씻지못할
불효를 어찌할고 매일 그생각을 하는군요. 나처럼 후회없는
보살핌 가지세요.
존경스럽습니다 자식된도리로 어찌 천륜을 거스리겠습니까 허나 그것이 쉽지 않내요
저도 어머님 치매로 가도 못 알아보니 가기 싫어지더군요.
그러나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가 되더군요.
그래도 우리 엄마인데 ㆍㆍ
그렇지요
그래도 알아보시니까 다행이란 사족을 못쓰시고 ...후회는 언제나 하는거같아요
마음 아픈 일입니다. 어머님이 고통 없으시면 좋겠습니다.
표현을 안하시니 어찌 알까요 그럼좋으련만
저런,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시군요.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후회없이 자주 찾아 가셔요~^^.
그길밖에 제가 할게 없네요
그래 ! 마음 아프겠네 그래도 살아계실때
한번이라도 더찾아뵈야지요 가시고나면 한이되지요
울엄마 보고잡다 !
그럴려구 노력하우
자주자주 담아놓으려 하는데
같은 장남으로 어머님에 대한 사랑 머리가 숙여집니다
저의 어머님은 치매는 아니지만 호스피스병동에서 3개월 지내시다 돌아가셨는데
그래도 생전에 못해 드린거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요
자주 찾아뵙는것이 나중에 후회가 덜 되실까 싶네요 힘 내십시오
어머님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턱도모자라는 자식 입장에선 참으로 아플뿐입니다
엄마 얘기엔 댓글도 못답니다
한이 되어
손가락도 후덜덜거리거든요
ㅜㅜ
아~ 온유님도
힘내세요. 살아계실적 효도하셔야 돌아가신뒤 후회안합니다.
미주형 명심할께요
가슴이 아픈데도.. '글맛 좋다'라고 쓰면 미움받겠지요.
엄니.. 지존님의 엄니 사진을 보니 저도 눈물이 살짝 납니다.
제 경험담입니다.
저는 치매걸린 어머니를 모셨지요. 아쉽게도 시골에서 서울 올라와 지내시다가 저녁밥을 먹기지 못하고 콜록대기에 119로 서울아산병원응급실로...
그 뒤로는 제가 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병원에서 중환자실에서...그 큰 병원에서는 강제로 밀어내대요. 지방아산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저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중환자가족용 보호실에서 먹고 자고... 중환자실 면회 하루 4차례...
엄니한테 제 목소리를 들려주었지요. 무의식이라도.. 저는 쉴사이 없이 중얼거렸지요.
지금 상태에서 자식이 해 드릴 수 있는 거 거의 없을 겁니다.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여드리고,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치매가 심하여 자식 얼굴을 몰라본다고 해도 목소리는 기억하실 겁니다.
그저 아무 말이나 들려드리세요.
치매 걸리면... 수명은 이미 정해진 것일 터...
이별연습을 해야겠군요.
얼굴 보여드리고, 손잡아 드리고, 목소리나 들려드리는 게 최선이겠지요.
@곰내 엄지 척
글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생활수필/수기로... 문학계에 등단해도 좋을 터.
살아 있는 글이기에,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도 없는 체험이기에
독자한테 많은 감동을 줍니다.
늙은 어머니와 이별연습을 해야 하는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가는 그날까지 좀더 덜 아프고, 편안하게 눈 감으셨으면 합니다.
의학의술이 아무리 발달되었고, 정성을 쏟는다고 해서 이미 천명은 정해진 것.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힘 내세요!
@곰내 선배님~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는것이지요 생노병사는
저는 두 시부모님 돌아가실때까지 제손으로 다 해드렸네요
허나 정작 내 아버지가 아프실땐 요양병원에서 가셨으니 가끔 회한으로 남아 가슴이 쓰립니다
아~ 정작 아버님은
가슴이 아프네요
우리세대는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참으로 할이야기가 많아요
할수있음에 감사하며
후회없는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
마음 아프고 참 안타까운 모습이십니다.
병환 깊어지면 집에서 모시기도 힘들지요.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 자주 찾아 뵙는것만이
어머님을 향한 효도일것 같아요.
힘 내시어요~
네 ~ 그럴려고 노력합니다 후회를 덜 하려구요
어머님을 향한 숨길수 없는 사랑
불효의 마음
명치끝에 매달지 마시옵고
살아 계실때 손이라도 한번더~
눈 맞춤 일 망정 가끔씩이라도
하고 오세요
아직까지 함께 계셔 주시는
어머님께 감사드릴 일 입니다
자주뵈려고 합니다
참 마음이 쨘 합니다.
되야지괴기 김치찌게 그렇게 맛이 있었던
그시절 다아 지나가고 ...
이젠 늙으신 부모님들 애태우며 바라만
보아야하는 세대가 되었네요.
힘 내시고 자주 찿아가 보시면서..
너무 맘 상해 하지 마시길요.
무악산형~ 여기서 뵈니 참으로 반갑네요
마음고생이 많으시네요‥ 저도 엄마를 병석에 계실때 한오년 고생했지만 돌아가시니 후회와 반성의
마음이 태산이더이다 ‥
후회와 반성 끝이 없나봐요
치매가시작되면 수명은정해진것 이라고 하신 곰내님 말씀에가슴이미어지넉요 엄마도 초기치매이신데 가슴이 답답하네요
그러시군요 딸과 아들과의 그감정이 다르니
뵐 수 있어서
손이라도 잡을 수 있어서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글과 어머님의 사진을 보며
마음이 시립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겠지요
사시는 그날까지 자주뵈는거 외에는 없으니까요
누구라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짠하기만 합니다.
'자식낳고 제대로 키우지 못할라면 무엇하러 나셨소'
그리고 탕자의 길로 들어섰다가 그렇게 벌어진 간극을 간직하고
병원에서 마지막까지 죽을 힘을 다해서 불렀다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립니다. 병원에서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고는 숨을 멈췄고
병원에 CPX가 걸렸다가 결국 10여일이 지난 후에 호흡기를 제거했던 그 아픈
추억이 생각납니다. 어머니를 보내고 그동안의 관계를 유지했던 옆지기와도
준결별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까지 할 수만 있다면 잘해 드리시길요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그래요 후회하지 않게 해야지요 쉽진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