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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모네(Claude Monet)와 부댕(Eugene Boudin)
和敬淸淑 추천 0 조회 482 15.04.30 21:56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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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해 뜨는 인상>

 

 

BESIDES X INSIDE 모네가 사랑한 노르망디_ 유럽 모던 풍경화의 탄생

인상파를 낳은 노르망디 그리고 모네와 부댕

 

11.22(토)-2015.2.15(일) 한가람미술관

 

 

<클로드 모네>

 

 

한 중년 화가가 언덕 위에서 야외용 이젤에 작은 캔버스를 얹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높은 하늘을 등진 그의 모습 역시 한 폭의 그림 속 주인공 같다.

그가 그린 풍경화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비록 작은 화면이지만, 그 안엔 온 세상이 모두 담긴 듯하다. 나지막한 야산조차 없이 하늘과 바로 맞닿을 정도로 펼쳐진 대평원, 일렁이는 힘찬 파도로 가득한 드넓은 수평선의 바닷가엔 기암절벽의 해안 풍경이 늘어서 있다. 사람들의 모습 또한 활기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뛰쳐나올 것 같다. 바로 면적 3만 672제곱킬로미터의 노르망디 정경이다.

 

그런데 이 노르망디의 매력에 빠진 이가 한 명 더 있다. 중년 화가의 머지않은 곳에 한 젊은 화가 역시 한 순간의 빛이라도 놓칠까 싶어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간혹 나침반을 찾는 선장처럼, 선배의 그림을 흘깃 쳐다볼 뿐이다. 그 눈빛은 견제의 시선이 아니라, 흠모의 감정이 가득하다.

이 청년 화가가 인상파의 선구자로 불리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이고, 그 옆의 중년 화가는 모네의 영원한 스승 외젠 부댕Eugene Boudin(1824~1898)이다. 16년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둘은 단순한 사제지간 그 이상이었으며, 이 숙명의 만남은 바로 노르망디가 산파 역할을 해줬다.

 

실제로 모네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외젠 부댕의 덕분”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자칫 평범한 상업화가에 그칠 수 있었던 모네에게 부댕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색깔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었던 멘토였다.

빛나는 외광을 특유의 신선한 색채감각으로 포착하거나 밝은 대기가 들어찬 해변과 하늘을 탁월하게 묘사했던 부댕의 화풍은 그 자체가 인상파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 일선에 모네가 있었다.

겨울엔 주로 파리에 머물던 부댕은 여름에 접어들면 노르망디에 살았다. 이때 젊은 모네를 만나게 된다. 모네는 몇 달간 부댕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절친했다.

 

 

외젠 부댕 <아브르 지방의 위르 호수>

 

 

노르망디와 모네는 너무나 각별한 인연이 있다. 모네는 빠를 땐 2월부터 노르망디 해안에 내려와 작업했으며, 기초 작업한 그것들을 집에 와서 완성했다. 그중엔 오늘날 인상파란 사조를 탄생시킨 결정적인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크기 63×48cm의 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해 뜨는 인상印象>이다.

1872년 세계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이 그림은 모네가 르아브르 항구(센Seine 강이 노르망디 평원을 거쳐서 도버 해협으로 들어가는 하구)의 창문을 통해 포착한 장면이다.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됐을 땐 제목조차 없었다. 주최 측의 요구로 <해 뜨는 인상>으로 작명된다. 후에 평론가의 혹평과 함께 모네의 그림 제목을 따서 ‘인상파’라 명명된다.

 

이처럼 노르망디 주변 경치는 인상파를 비롯해 많은 화가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녔다.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는 유서 깊고 문화적인 지방으로 이름나 있다. 영불해협으로 들어가는 센 강 유역이라 특히 농토와 목장이 많다. 적지 않은 문학, 예술작품이나 영화의 단골 소재이자 유명 작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사를 바꾼 두 상륙작전의 무대였다. 그중 1944년 6월 6일의 상륙작전은 전설적인 에피소드로 기록된다.

훨씬 이전인 1066년 노르망디 공公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 군대 1만여 명은 노르망디를 출발해 영국을 정복했고, 연합군은 영국을 출발해 노르망디 상륙으로 나치 독일을 무너뜨린다.

 

 

Eugene Boudin - Bordeaux, Boats on the Garonne

 

 

Voiliers devant Trouville by Eugene Louis Boudin

 

 

외젠 부댕, 바다와 하늘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훌륭한 스승으로 더 유명한 프랑스의 대표 화가 외젠 부댕은 주로 고향인 항구마을 옹프륄Honfleur의 풍경에 정이 들어 해변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그 풍경에는 화면 가득 바다와 하늘이 단골로 등장했다.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된 부댕의 작품은 정감 넘치는 온건한 시정詩情이 특색이다.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주로 사람들의 일상적인 여가 생활과 평안한 삶의 모습들이 원경의 해안가나 하늘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다. 세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부댕의 많은 풍경화들은 19세기 초의 자연주의와 19세기 말의 인상주의를 직접 잇는 가교로 평가된다.

 

부댕만큼 바다와 해변을 잘 그리는 작가도 없었다. 그가 그린 태양과 구름 그리고 대기의 순간적인 변화 모습을 포착한 것은 현대의 고해상도 디지털 카메라 사진을 능가할 정도다. 그런 부댕을 프랑스 풍경화의 대가 코로Camille Corot가 “하늘을 묘사하는 데는 왕The King of skies”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사실주의 선두주자 쿠르베Gustave Courbet 역시 파리 살롱전에 첫 출품한 부댕에게 먼저 나서서 미술평론가를 소개시켜 줬다고 하니, 당시의 인기와 덕망이 짐작된다. 또한 프랑스 바르비종파를 이끈 화가 밀레Jean-Francois Millet와 초상화와 역사화로 유명했던 쿠튀르Thomas Couture 역시 부댕에겐 소중한 인연이었다.

 

 

외젠 부댕 <트루빌해변>

 

부댕은 처음부터 전문 수업을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선원이던 아버지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차린 문방구에서 조수로 일한다. 그 덕분에 가게를 오가던 화가들을 만나 새로운 흥미를 갖게 된다.

20세가 되던 해 부댕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가게를 차렸고, 그 즈음 밀레와 쿠튀르를 만나게 된다. 이전부터 여느 화가들 덕분에 취미 삼아 끼적거린 그림을 본 두 화가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하기 시작한다. 2년 뒤 결국 장사를 접고 화가의 길을 선택하며, 때늦게 르아브르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1850년, 쿠튀르는 부댕이 3년간 매년 1,200프랑의 장학금을 받으며 파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파리에서 공부하던 시절, 부댕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필치의 풍경화로 유명한 카미유 코로의 그림에 깊이 매료된다. 그것을 계기로 1853년경부터 대서양 해안 지방에서 파묻혀 거의 한평생 바다 경치에 흠뻑 빠지게 된다. 현장에 직접 나서길 즐겼던 부댕은 날씨와 햇빛의 세세한 변화를 최대한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1858년 당시 꿈 많던 18세 청년 모네를 만났고, 그에게 풍경화가의 길을 적극 권한다. 그 뒤 1874년 이후 부댕은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지만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주로 바다 소재의 풍경화들만 어느 정도 팔리다가 1888년 프랑스 정부의 뤽상부르미술관에서 몇 점을 소장하면서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다.

그 뒤 1892년 68세엔 프랑스 공화국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현장에서 그린 그림에는 작업실에서 재창조할 수 없는 힘과 명암, 생생함이 담겨 있다.” 한평생 풍경화에만 빠져 있던 부댕은 1898년 파리에 있던 시절 현기증을 느껴 프랑스 남부로 휴양을 떠났지만 회복이 힘들다는 소견을 듣는다.

결국 부댕의 “바다가 보고 싶다”라는 바람으로 가족들은 도빌의 바닷가로 옮겨간다. 하지만 같은 해 74세의 나이로 도빌의 집에서 생을 마감한다. 서양미술사에서 현대미술의 전환점을 선사했던 인상파, 그 인상파를 선도한 ‘모네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영원한 스승’ 부댕의 삶은 거기까지였다. 부댕이 남긴 유작은 유화와 드로잉, 파스텔화, 수채화 등을 모두 합쳐 4천5백여 점에 이른다.

 

모네, 가장 성공한 인상파 화가

 

“내가 받는 인상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클로드 모네. 파리 식료품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가족은 해변 근처의 르 아브르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캐리커처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고, 자신이 그린 캐리커처를 10~20프랑에 파는 등 비즈니스 기질도 남달랐다.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부댕 역시 모네의 특출한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는다.

부댕은 야외로 사생을 나갈 때마다 꼭 모네를 데리고 나가 유화로 풍경 그리는 법을 가르친다. 모네 역시 “부댕 덕분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아버지에게 그림 공부를 하러 파리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곳의 화가들은 모두 칙칙한 실내에서 인공 조명에 의지해 역시 칙칙한 그림을 그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댕 못지않게 모네가 화가로 성공하게 된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이 가족 중에도 있다. 바로 숙모의 헌신적인 보살핌이었다. 1857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남편과 아들까지 여의고 외롭게 살던 숙모의 손길로 성장한다. 숙모는 모네를 친자식 이상으로 여기고 훌륭한 교육 환경을 마련해줬으며, 역시 숙모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59년 미술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다. 마침 모네가 살던 파리 바티뇰 가에 게르부아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이곳에선 매주 목요일 밤 화가들의 모임이 이뤄졌다. 그곳에서 세잔, 드가, 에밀 졸라, 미술평론가 뒤랑티 등과 만나 예술에 대한 논쟁을 벌이며 어엿한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모네는 정말 사람 복이 많았다. 1870년대 파리는 매우 불안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배고픔과 사회적 불안에 큰 내란까지 겪을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모네는 1876년, 백화점을 경영하던 후원자 오슈데를 만난다. 그는 인상파와 모네의 그림을 워낙 좋아해 별도로 작업장까지 마련해줬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슈데 몰래 그의 아내 알리스와 밀애를 나눈다. 하지만 오슈데는 둘의 관계를 모른 채 죽었고, 모네는 첫 부인 카미유가 사망한 후 알리스와 결혼해 살았다. 또 다른 후원자는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1차 세계대전 시 베르사유 조약을 기초하고 총리까지 올랐던 그는 정부에서 모네의 그림을 살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준다.

 

이렇게 모네는 초기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재정적인 성공을 누렸는데, 40대에 접어들면서는 화가로서의 삶도 안정을 이룬다. 50대엔 미국인 화가들까지 모네와 가까워지기 위해 지베르니로 찾아왔다고 하니 그 인기가 짐작된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그의 역작 중 하나인 <생라자르 역> 시리즈 제작 과정이다.

1877년 모네는 인상파 전시회에 생라자르 역 그림 일곱 점을 전시했다. 모네가 이 그림에서 현장의 극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기관사에게 증기를 내뿜어줄 것을 역장에게 부탁하겠다고 하자 르느와르는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역장은 흔쾌히 모네의 청을 들어줘 오늘날 우리가 이 명작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Saint-Lazare Station, Arrival of a Train

 

 

Saint-Lazare Station, Arrival of a Train

 

 

 

 

Water Lilies

 

 

Monet dejeunersurlherbe

 

 

모네는 1890년 이후부터 <생라자르 역>처럼 한 주제의 연작을 즐겼다. <건초더미>,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 등이 대표적이 예다.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순간순간 어떻게 변하는지, 그 빛과 색감의 시각적인 효과의 관계 등을 한눈에 보여준다. 이런 모네의 그림에 감탄한 폴 세잔Paul Cezanne은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실제 모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생애 마지막 작품인 <수련> 연작을 그릴 땐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었을 정도로 빛의 표현에 매달렸다. 아마도 모네의 이 같은 진정한 예술혼은 노르망디에서 영원한 스승 부댕과의 숙명적인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_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미술평론가)
사진_ Wikimedia Commons

 

 

/ SEOUL ARTS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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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4.30 22:14

    첫댓글 미술시간 인상주의 마네,모네,드가,피사로 엄청 외웠던 기억이....ㅎㅎ

  • 15.05.01 00:11

    으음~~

  • 15.05.01 03:03

    화경청숙님(응? 한자 독음이 맞나 모르겠네요 배운지가 워낙 오래라 ㅋㅋ)은 뭔가 예술적 인문학적 철학적 깊은 소양을 가지신 분인거 같아 넘 부러버용*^^*

  • 작성자 15.05.01 18:19

    ㅎㅎㅎ
    노블레스님,너무 칭찬해주시니,몸둘바가 없군요^^그냥 그림이 좋고 귀한분들의 글이 좋아 놀려왔다 가는 모습이죠^^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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