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 방에 혼자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 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끔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그리며 침목을 밟고간다 김수영 - 오래된 가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