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입구의 안내 바위-목련이 수줍은듯
낙동강물이 마을을 휘감고 돌아 '물도리동'이라고 해요.(물河 돌아올回)
하회마을 방문했을 때는 막 벚꽃의 향연이 시작되었답니다.
고려말엽 가선대부 공조전서 류종혜공이 이 일대가 늪지대였음에도 풍수지리학상 최고의 명당으로 인정하는
'연화부수형-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 '행주형-배가 짐을 가득 싣고 떠나는 형상'이어서 모든 재산을 털어
늪지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고-풍천류씨 입향시조 기적비
하회마을의 상가들입니다.
안동소주가 독하기로 유명한데 정종과 같이 누룩 냄새가 나고 도수도 20도 이하짜리가 있어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제일 클 것이라는 세계탈박물관.
22개국 3,200여 점의 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요.
하회마을에 도착하면 오른 편으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입니다.
국보 제121호 하회탈입니다.
대개 탈은 놀이가 끝나면 태워 없애기 일수이나 이 하회탈은 마을의 신으로 600여년 동안 소중하게
보관해 온 탈이라고 해요.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곳에 전시된 탈은 복제품입니다.
당시 영국 여왕은 79세이신데 참 아름다우시지요?
영국여왕은 임진란 당시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에 헌신하신 서애 류성룡선생의 13세손
탤런트 류시원씨의 본가인 담원재에서 79살 생일상을 받으셨는데요
그 생일상을 그대로 복원해서 전시하고 있어요.
굳게 잠긴 류시원씨의 담원재
대부분의 집 담장이 흙만으로 만든 판담 형식입니다.
돌로 담장을 만들면 배가 무거워 갈아 앉게 된다고,
또 우물은 절대 파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동안 마을을 돌아가는 낙동강 물을 퍼다 썼다고 해요.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뚫려 갈아 앉게 될 것이 걱정되어서라네요.
평범한 민가의 대문
높다란 솟을대문
민간인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대부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으면 이와같은
솟을대문을 만들 수 없었다고-
아담한 초가가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선 마음이 편안해요.
입향시조 류종헤공은 마을에 터를 잡자 마자 연꽃의 수술에 해당되고,
배의 돛에 해당되는 곳에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즉, 명당 중의 명당 터에 나무부터 심은 거지요.
이곳에서는 신의 나무, 그래서 삼신당 신목으로 부릅니다.
예로부터 자식 없는 부녀자들이 기도하면 득남할 수 있다고
전해 오면서 누구나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고 합니다.
느티나무 옆에는 소원을 적을 수 있는 종이와 펜이 놓여 있어
무수한 소원이 나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동제를 지내고 달집태우기를
할 때 수많은 소원이 적힌 종이를 같이 태워 하늘로 보낸다고 합니다.
만송정 솔숲-천연기념물 제473호
우람한 소나무로 가득한 이 솔숲은
겸암 류운룡 선생(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님)이
젊은 시절에 조성했습니다.
선생은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서쪽 땅의 기운이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헤 심은 비보림, 또는 방풍림이라고 합니다.
이 소나무는 400년 된 보호수입니다.
이 곳은 일제때 초등학교 자리인데
당시 이 운동장에 주민들이 모여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인 뒤로
만세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물론 학교는 페교되었지요.
양진당-보물 제306호
하회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두 채의 한옥이 있습니다.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은 입향시조인 류종혜공이 처음 지은 집으로 풍천류씨 대종택입니다.알기 쉽게 설명하면 영의정 류성룡 선생의 아버님과 형님이 사시던 집입니다. 입암고택이라고 한 것은 류성용 선생의 아버님이신 류중영공의 호가 입암이기 때문입니다. 양진당의 특징은 기둥이 위는 좁으면서 가운데는 배가 부른, 이른바 배흘림기둥입니다. 이러한 건축기법은 로마에서 건너 온 방식으로 시각차에서 무척 안정감을 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 몇 군데에 불과하고 민간 가옥으로는 양진당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충효당-보물 제414호
서애 류성룡 선생은 평소 생활이 검소하기로 유명,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도 청백리로 알려져 초가삼칸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장손인 졸재 류원지 공이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집(충효당)을 지었습니다.
충효당이란 현판은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의 친필입니다. (명필로 유명)
충자를 자세히 보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용상, 즉 임금을 뜻하고, 효자는 늙을 노자에 아들 자,
즉 젊은 아들이 부모를 업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지송입니다. 대부분의 소나무는 위에서 가지가 뻗어가지요.
만지송은 밑에서부터 가지가 여러 갈래로 자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충효당의 종부가 만가지의 가지처럼 자손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며 심었답니다.
충효당 내의 영모각입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을 재건축할 때의 비용은 고 육영수 여사께서 분담하셨고,
영모각이란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입니다.
류성룡 종가 유물(柳成龍 宗家 遺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로
첫째, 유성룡 선생이 직접 쓰던 것, 둘째,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선생에게 조정에서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습니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지요.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어요.
보물 제460호 류성룡 유품
유물 가운데 선생이 쓰던 것으로는 갑주와 투구, 가죽으로 만든 신발인 혁화,
왕의 군사 명령서를 넣은 유서통, 갓끈, 관자 등입니다.
갑옷
투구
유서통
갓끈
관자
관대
가죽신
중요민속자료 제88호 옥연정사
류성룡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한 서재
중요민속자료 제84호 화경당(북촌댁)
석호 류도성 공이 1862년에 집을 지을 때는 99칸짜리였으나
불행히도 45칸은 소실되고 현재는 44칸만 남아 있습니다.
화(和)는 어버이를 섬기고, 경(敬)은 임금을 섬기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6대에 걸쳐 3천석 부자임에도 딱 한 채가 초가집입니다.
화장실입니다.
우리 세대에서는 99% 만족을 느끼고 살지만 1%의 모자람이 있어야
후손들이 이를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할 수있다는 교훈이라고 합니다.
화경당 뒤뜰에는 하회송이란 보호수가 있습니다.
소나무가 하회마을을 감고 흐르는 강물처럼 가지가 휘어져 올라가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1980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800여년 전통의 민속놀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