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 사회교리와 부활 신앙
이사 35,1-10; 루카 5,17-26 / 대림 제2주간 월요일; 2022.12.5.; 이기우 신부
사회교리 주간의 첫 날인 오늘은 사회교리에 따른 실천은 부활의 행동이라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대전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1891년에 레오 13세가 「새로운 사태」 회칙을 반포한 이래 역대 교황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천명한 교회의 현대화와 복음적인 쇄신과업을 앞장서서 선도하였고, 공의회 이후에는 공의회의 개혁 정신을 담아 노동과 경제 문제는 물론 정치 문제와 환경 및 생태계 보전 문제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천명함으로써 추동해 왔습니다. 백년 넘게 이어져온 이러한 전통은 부활 신앙에 입각한 것으로서 사회교리 실천을 통해서 이 세상에 ‘새 하늘 새 땅’을 앞당겨 실현하라는 초대였습니다.
바빌론 유배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오늘 독서의 예언은 거의 두 세대를 넘어가던 유배생활에서 지칠 대로 지친 동족에게 이사야가 놀라운 반전의 희망을 선포하는 대목입니다. 유배의 절망적인 상황은 아주 인상적인 여러 어휘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이라든지, ‘맥 풀린 손과 꺾인 무릎’, ‘눈먼 이들과 귀먹은 이들’, ‘다리저는 이와 말못하는 이’, ‘뜨겁게 타오르는 땅과 바싹 마른 땅’과 같은 수식어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망의 언어들은 이렇게 희망의 언어로 바뀝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환성’, ‘피어나는 꽃과 힘이 생긴 손과 무릎’, ‘눈을 뜬 이와 귀가 열린 이’, ‘사슴처럼 뛰는 이, 환성을 터뜨리는 혀’, ‘물이 터져 나오는 광야와 냇물이 흐르는 사막’ 등입니다. 이러한 날카로운 절망과 희망의 대조는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살던 백성이 다시금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가 하면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 숱하게 많은 병자들이 찾아와 치유를 받았던 공생활 중에, 오늘 복음에서는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이웃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와서 치유를 청하고 있습니다. 중풍의 증상은 뇌와 몸 사이에 연결된 신경망이 마비되어,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거나 말이 어눌해지는 등 인지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일상적인 활동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의사소통도 단절되고 생각하는 능력까지도 지장을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는 거의 사망 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중풍의 원인이 신체적인 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으로는 정신적이고 심지어 영적인 기가 눌리는 데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사회적 억압과 착취가 지속되고 대인관계에서 소외되는 처지가 일상화되면, 신체적인 면역력도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이라고 보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 앞으로 데려온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영적인 소통을 먼저 시도하셨습니다. 영과 혼의 소통이 원활해져야 기운이 돌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일어나 누워있던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마비된 신체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를 지켜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서 신적 권능을 지니셨기 때문으로 알아차리기보다는 그분이 신성 모독을 하고 있다고 자기들 식으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결국 이 일이 나중에 십자가에 처형될 만큼 중대한 혐의로 둔갑해 버립니다.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던 이유는 그분이 신체의 면역력을 회복시키는 능력은 물론 하느님의 영과 단절된 불구의 혼을 지닌 이들에게 영을 다시 불어넣어주시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사람들의 혼과 소통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마귀들이며 이 마귀들은 사회악 현상을 구조적으로 일으켜서 사람들에게 온갖 신체적 질병과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소외 현상과 영적인 불신 증상을 초래합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눈으로 사회를 관찰하고, 그 중에 발견된 사회악 현상을 통해서는 결핍된 공동선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하며, 판단된 공동선 가운데에서 우리들이 힘을 합쳐서 그리고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는 사도직 활동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찰 – 판단 – 실천의 방식과 과정이야말로 신앙인들을 부활의 행동으로 이끄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부활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살아있지 못하면 사회교리의 진리성을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중풍 병자의 치유 기적이 말해주는 것은, 첫째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이미 부활된 처지에서 손상된 공동선을 회복시키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신 것이고, 둘째 당신을 믿고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도 신체적 치유와 사회적 공동선 회복 그리고 영적 소생의 행동을 본받게 하시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바빌론 유배처럼 이기심과 욕망의 포로가 되어 버린 절망적인 상황이 만연되어 있는가 하면 중풍과도 같이 하느님의 영과 단절된 불구의 혼으로 영적 소통이 마비되어 있는 사회 현실에서 사회교리 실천은 사회 공동선을 회복시켜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인 한편, 우리를 부활 신앙으로 이끌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