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 홍일표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가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은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
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말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 월간 『문학사상』 2021년 9월호 / 2023년 제16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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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일표 시인
1958년 충남 천안 출생.
1988년 《심상》 등단,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청소년 시집『우리는 어딨지』
평설집『홀림의 풍경들』
2013년 지리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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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제16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賞 심사평]
“블랙홀 같은 흡입력이 있고 사족 같은 시어나 이미지나 메시지를 생략하므로
더 많은 상상력의 이파리와 뿌리를 가진 시였다.
과장이나 지나친 상상력이 혼란을 가져오기 쉬우나 홍일표 시인은 자신의 시적 방법에 따라 서쪽으로 가며
시인의 필력을 서쪽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서쪽이란 시는 한 마디로 과장되지 않는 시어의 무게감이 전반에 골고루 퍼져 있어 시의 치밀성이 높은 시였습니다.
서쪽을 보여주며 서쪽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신선함이 있었고 서쪽으로 끌고 가는 시인의 진지한 태도가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언어의 특징을 알고 적재적소에 맞는 표현을 하므로 잃어버린 시의 방법을 확인시키는 시였다.
심사가 끝나도 자꾸 홍일표 시인의 서쪽이 입안에 도는 이 긴 여운은 그만큼 시를 읽는 가슴에
닿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홍일표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한때 시를 포기하고 좋은 독자로 남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제대로 된 시룰 쓰지 못할 바에야 독자의 입장에 충실한 것이 더 나을 듯 싶었다.
그러나 다시 시를 만났고, ‘다른 시’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긴 세월을 흘려보낸 뒤였다.
나름대로 시적 변화를 위해 고심했다. 변곡점이 찾아왔다.
그때 좋은 시는 좋은 시에 저항하는 시라고 믿게 되었다.
정답 같은 시, 기존의 문법에 충실한 모범답안 같은 시가 아니라
언어가 가진 본래의 쓰임에 구속되지 않고 정신의 열도를 간직한 시, 자기만의 언어를 발명한 시,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시를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 심사위원 (김왕노 시인·이혜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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