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신수설의 배경과 성격
1) 왕권신수설의 배경
왕권신수설은 유럽근대초엽에 전개된 정치학설로서 군주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크리스트교 개념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 형성과정은 중세의 군주권은 신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성경에 “시이저의 것은 시이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것을 근거로 정신적 영역에 있어서는 교황이 최고권을 가지며, 세속적 사항에 관해서는 신성로마황제가 최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중세시대에는 정신적 사항에 있어서는 물론 세속적 사항에 있어서도 교황이 거의 최고권을 가지고 있었다. 1300년 교황 보니파키우스8세는 신성로마황제에 대하여 세계지배의 권리를 주장하고 교황은 황제인 동시에 교황임을 신수설을 토대로 해서 천명하였다. 그러나 16세기까지 걸친 유럽사회의 변화는 지상에 있어서의 최고권성의 주장이 상실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여기에 신수설은 왕의 권위를 입증하는 이론으로 전화되었다. 근대의 왕권신수설은 교황의 종교적 권위나 중세의 도덕 등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서 군주권이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찾으려고 한데서 성립된 사상이며, 그것은 절대주의의 세속적 권력을 신격화 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교황과 대립하고, 대내적으로는 다원적으로 분열되어있었던 권력을 국왕 중심으로 일원화하기 위한 정치학설로 전개 되었다. 왕권신수설의의 신학적 토대를 이루는 것은 구약성서에 제시된 분권적 지배이론이었다. 이는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각 정부는 그 권위를 신으로부터 부여 받는다는 신약적 제도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에 대한 복종은 정치적 필요성과 더불어 종교적 의무로서도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신봉된 사상은 중세에 들어와서 교회세력의 확대와 봉건제도의 확립으로 말미암아 때때로 매몰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정치사상이었다. 이것이 근대적 주권국가와 절대군주정치체제의 시대적 요청과 결합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었다. 각국의 왕은 강대한 국가적 통일을 목표로 왕권신수설을 이용했는데, 그 이유는 교황중심의 구교세력과 종교개혁 이후 제네바 중심의 신교세력에서 오는 외적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세력인 시민세력의 반항을 누르기 위해서였다. 신․구 두 종파는 모두 성(聖)․속(俗)의 두 분야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국왕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또 국민은 두 종파의 어느 한 곳에 속해 있었으므로, 국왕과 국민 다수의 종교가 다르면 국왕과 국민 사이에서 또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국민 사이에서 종교분쟁이 일어나고, 종교문제는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국내정치는 항상 불안정했다. 왕권신수설은 이러한 국제, 국내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왕당파의 정치이론이었는데, 이 설은 국왕이 자국에서 성․속 모두의 수장이므로 국왕의 의지와 결정은 최고이고 절대이며, 이 국왕군주론에 의거한 지배의 정통성은 신에 의해 보증되었다. 근대의 이러한 사상은 영국의 헨리8세가 교황과 절연함으로써, 프랑스에서는 1589년 위그노의 반항을 누른 앙리4세가 부르봉왕조를 창설함으로써 구체적인 기반을 얻었다.
2) 왕권신수설의 성격
왕권신수설은 17세기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신교적 교의에 반대하여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된 군주주의론자들의 절대군주의 군주를 옹호하기 위한 학설이다. 이 학설은 다음 네 가지의 원칙이 있다. 첫째, 군주제는 신의 뜻에 따라 제정되었다는 점, 둘째, 왕위 계승권은 철폐되지 않는다는 점, 셋째,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인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 넷째, 인민은 신에 의해서 왕에 대한 저항이 금지되어 있으며 또한 왕이 비록 폭군일지라도 수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권신수설의 이러한 원칙들은 왕권에 부여한 특이한 합법성에 대한 분석이나 합리적 주장을 거부한 점에 있었다. 군주에게 신권을 부여함은 본질적으로 신앙과 같이 인정되어야 하며 이성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 왕권신수설의 근본이 되는 이론이다.
왕정제의 옹호론으로서 왕권신수설이 절대주의적 정치 하에서 전개되는데 있어서는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시 유럽사회의 국가들 대부분이 절대왕정체제를 유지했음에도 에스파냐와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은 왕권신수설을 정치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왕권신수설은 왕권과 인민의 권리와의 대결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옹호이론인 것이다. 왕권신수설은 근대적 민족국가시대에 왕권이 인민 또는 기타의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는 상황이 존재해야 한다. 에스파냐와 러시아의 경우, 군주의 일방적 주권행사를 거부할 어떠한 제후들의 도전도 없었으며, 시민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군주권을 옹호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영국의 튜더왕조의 경우 왕조 말기에 절대주의적 군주에 대해서 정치권력에 참여하려는 시민적 세력이 꾸준히 힘을 기르고 있었다. 따라서 제임스1세 치하의 영국의 시민들은 하원(The House of Common)을 근거로 의회의 형태로 왕과 정치권력을 둘러싼 투쟁을 전개 했던 것이다. 이로서 인민의 반항권이 반군주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군주옹호론으로서 왕권신수설이 전개되었다. 왕권신수설은 앞서 밝힌 것과 같이 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 이론으로 일반인민에게 수용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민중은 국가의 황폐화와 혼란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족의 통일과 번영, 질서유지는 국가의 역할 및 책임이라는 의식이 인민들 사이에서는 대중적이었다.
왕권신수설의 내용
1) James I(재위1603~25)

16세기에 있어서 영국의 중요한 문제는 질서를 회복하고 국가 이익을 수호하는 문제였다. 튜더왕조의 왕들은 이러한 열망에 힘입어 독재적 통치가 가능했으며, 결과로 정치적 권력은 귀족으로부터 지방 상인계급으로 옮겨졌다. 이에 반하여 귀족적 전통의 재판소는 독립을 요구하고 또 왕의 명령에 대한 보통법의 우월을 주장하였으며, 하원은 과세와 일반정책문제를 결정하는데 참여하는 권리를 서서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왕권신수설의 전개는 민족적 통일을 담당할 대표로서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군주권의 방위이론(의회의 반군주론에 대항하여)에 불과했다. 영국왕권신수설은 왕 자신이 최전면에서 전개되었으며, 제임스1세는 그의 저서「자유군주국의 진정한 법」에서 자유군주국이란 군주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국가이고 진정한 법이란 군주와 인민의 정당한 관계라고 하였다. 그는 1609년 의회에서“왕이 신으로 불리는 것은 타당하다. 그 이유는 왕이 지상에 있어서 신의 권력과도 같은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왕은 모든 신민을 심판하며, 더욱이 신 이외에의 아무것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임스1세의 왕권신수설은 다분히 자연주의적이었다. 즉 질서유지는 지배자의 기능이며, 지배란 신의 지배와 같이 왕의 지배가 자연의 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절대왕정은 실제에 있어서 의회의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관료들과 고문들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귀족, 성직자, 세습관리 등 저명인사들에 의해 저항과 제한을 받게 된다.
2)Louis XⅣ(제위1643~1715)

절대왕정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프랑스의 루이14세는 국왕의 절대적 지배권에 대해 만일 “결정하는 권리를 신하에게, 또는 명령하는 권리를 인민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사물의 참다운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신하가 국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비록 국왕이 악인이든 탄압자이든지 간에 항상 일정불변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라고 단언하였다. 또한 그는 국왕은 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입법․사법․행정의 최고 권위자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루이14세는 태양을 문장으로 사용했고 “짐은 곧 국가이다.” 라며 과시할 정도였다.
당시 프랑스인들이 루이14세를 프랑스에서의 신의 대리자라고 믿은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왕립은 무력으로 뺏은 것도 아니고, 인민이 선출한 것도 아니며, 이미 10세기 위그까페 시대에 신에 의해 정해진 장자상속제의 원리에 따라 신의 축복을 받아 부여된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3) Bossuet Jacques Benigne(1627~1704)
보쉬에는 프랑스의 신학자이며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디종(Dijon)에서 지방관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루이 14세의 통치에 종교적 측면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반카톨릭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낭트칙령 폐지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신수설을 위한 「성서정치학」을 저술하고 신권에 의한 절대군주정치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홉스의 이론을 많이 수용하였다. 그의 철학적 근본원칙은 인간은 본래 사교적이고 사악한 감정을 갖고 있으므로 정부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독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신 밑에서 군주정치를 가장 좋은 정치형태로 보았다. 군주정치는 세습적 군주정치가 최고로 좋은 것으로 보았다. 국왕의 권력은 신성하고 절대적이며 신성불가침이라 하였다. 국왕은 신 자신의 존엄의 모습이고 인간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따라서 신민은 왕 앞에 절대복종과 충성을 해야 한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에 있어서 영국과 같이 교회와 왕위와의 불가분의 결합이 신권에 의한 왕권정치교리의 합리적 결론으로 전개되었다.
결론
당시 사회상은 종교개혁운동, 수많은 분쟁 때문에 정치적,사회적 혼란은 극도에 달했으며, 각국의 국민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그 생활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민은 질서의 회복과 평화의 재건을 갈망하고, 신흥 시민계층(상인, 은행가, 공업인)들은 전쟁으로 파산된 경제의 회복을 절실히 요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종교적 혼란이 그칠 새 없었지만 교회는 여전히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밑으로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요소를 주관하는 중추 기관이었다. 당시는 또한 이성보다 신앙이 우위에 있던 시대였으므로 사람은 하루도 교회를 떠나서는 존재 할 수가 없었다. 절대군주는 이와같은 종교적 요소를 이용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바로 왕권신수설이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의 비합리적인 이론들은 당대의 신흥 시민계층을 오랜 기간 굴복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며, 국왕의 무절제한 전제정치는 시민혁명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 하게 되었다.
출처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2005, 김만권 개마고원
『서양사의 이해』1994, 김진웅, 손영호, 정성화 공저 학지사
『서양정치사상사2』1997, 박채용 세계아기선교출판국
『서양근대사총론』1998, 박무성 법지사
『풀어쓴 서양근대사 강의』2005, 이세희 삼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