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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행진하소서
요한복음 12:12-16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며, 종려주일이다.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일 년 중에서 가장 경건하게 지키는 시간이다. 경건도 의무감으로라도 따라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고난의 심정에 대한 구체적인 참여가 가능해질 것이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위대한 기간이다. 복음서는 절반을 예수님의 능력, 절반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고난받으신 일주일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절정이다.
위대한 구원드라마는 ‘고난에서 부활까지’이다. 생각해보자. 오늘, 여기 나는 그 드라마에 관여된 사람이다. 지금 나는 구경꾼인가, 참여자인가? 구경꾼은 겉모습만 보지만, 참여자는 그리스도의 고난, 부활, 영광을 본다.
구경꾼은 환호하다가도 상황이 달라지면 분노로 바뀐다. 자기중심의 이기심 때문이다. 외적 모습에 열광하다가,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소리 지르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의 신앙고백이 아닌 집단심리에 빠져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경꾼으로 사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지한 참여자이다. 한 주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며, 세상의 작은 고난이라도 함께 멍에를 매려고 한다면, 나는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에게 내 삶의 문을 여는 사람이다.
이렇게 간구할 수 있다. “주님, 내 삶으로 행진하소서.” 나는 예수님의 특별한 시간에 초대받은 사람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누구와 함께 할까? 그런 종려주일이다.
1)
고난주간은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금요일을 정점으로 토요일 한밤중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지 사흘째 새벽, 주님은 부활하셨다.
고난주간의 출발점이 되는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개선행진을 기억하는 날이다. 복음서는 갈릴리부터 예루살렘까지 여정에 많은 사건과 이야기를 담았다. 이제 마지막 경유지인 여리고를 거쳐 예수님 일행은 목적지 가까이 이르렀다. 이제 가파른 산지로 오르면 예루살렘에 다다를 것이다.
예루살렘을 앞두고 지나는 여리고는 가장 비옥한 오아시스였다. 이곳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세리장 삭개오의 마음도 돌이키셨다. 그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메시야의 행차를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기적 속에서 예루살렘 성내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기대감이 커 간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는 마침 유월절 명절을 앞둔 터라 평소와 달리 매우 들떴고, 혼잡스러웠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12).
유월절은 민족 해방절이고, 종교적 절기였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할 만하였다. 예수님이 성에 들어오시는 그 길에서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환영하였다.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
환영 인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한 마디로 ‘호산나!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라고 소리를 질렀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한다. 종려나무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드는 것은 왕을 영접하는 고대의식 중의 하나였다. 호산나 찬양은 ‘오시는 이’(마 21:9)를 환영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거룩한 상징이고 승리와 번영을 의미한다. 장막절의 일곱째 날을 호산나의 날이라고 불렀는데, 이날은 축일, 곧 기쁜 날에 해당한다.
외경 마카비서를 보면 기원전 165년 마카비 가문의 장군들이 이방인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했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바로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개선행진, 혹은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2)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조연 역할을 한 장본인이 있다. 나귀였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14).
주님이 사용하신 나귀 새끼는 임자가 따로 있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두 제자가 가서 매인 나귀 새끼를 풀려고 할 때, 주인이 그 이유를 물었다. “주가 쓰시겠다”(눅 19:31)고 하자 순순히 나귀를 빌려 주었다.
내 친구 김진국이 신학교 다닐 때 동화를 썼다. 제목은 ‘꿈을 이룬 어린 나귀’를 썼다. 그도 위대한 드라마에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어 어린이를 위한 종려주일의 설교를 더 풍성하게 하였다.
한 어린 나귀가 망아지와 갈등하였다. 망아지는 나귀를 가리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말을 만들고 남는 것을 버리기 아까와 만든 것이라고 늘 놀려댔다. 주인 역시 항상 말을 편애하였다.
망아지의 꿈은 헤롯왕을 한 번 등에 태웠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귀 역시 꿈을 키웠는데 발람의 나귀처럼, 사마리아 사람의 나귀처럼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귀는 말의 거창한 꿈을 듣고 좌절하였다. 결론적으로 선택을 받은 것은 말이 아닌 나귀였다. 주인의 말에 따라 말은 짐을 부리러 마굿간으로 가고, 새끼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러 나섰다.
개선행진의 주역인 메시야가 새끼나귀를 타고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기대했던 메시야 행렬과는 너무 달랐다. 예수님의 개선행진은 장관이었다. 제자들은 나귀 등에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겉옷을 깔았고, 또 행진할 때에 길가에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겸손히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았다. 마치 붉은 양탄자 위를 걸어가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군중의 행동은 매우 자발적이었고 또 몹시 흥분된 모습처럼 보였다. 온 시민이 들떴다. 군중이 뒤를 따랐다.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흥분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예수님께 요구하였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
과연 누가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거스릴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세계 역사에도 보면 억압의 시대일수록 숱한 돌맹이들이 소리를 질러 외쳤다.
예수님의 구원드라마는 과거 옛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 여기 나와 관련되어 있다. 신앙의 능력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 속에 나를 참여 시킬 때 가장 빛난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내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고백이고, 진실한 간증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시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님의 내 삶으로 행진하신다. 나도 위대한 드라마에 참여할 수 있다. 어느 날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 그 때에 “주님 나를 나귀처럼 쓸모있게 사용하십시오”라고 준비하길 바란다.
지난 주 수요일에 느닷없이 기독교연합신문에서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이 신문은 장로교(백석교단)의 주간지이다. 대개 고난주간이면 편집자들은 특집에 골머리를 앓는다. 제일 쉽게 연상하는 것이 십자가이고, 십자가를 검색하니 내 이름이 나왔을 것이다.
일부러 약대교회에서 만났다. 나더러 십자가에 대한 나의 간증, 내 고백을 부탁하였다. 인터뷰 내내 십자가를 말하면서 내 이야기에 부족함을 느꼈다. 늘 십자가에 대해 말하면서도 ‘간증’이란 주문에서 말이 막혔다. 한 마디로 “네 이야기를 하라”는 요구인데, 나는 여전히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내 길’이라는 소명감을 갖고 계셨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길이자, 동시에 죽음의 길이 되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개선행진은 비로소 내 삶으로 이어져야 참 의미가 있다. 내 이야기, 내 간증, 내 역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믿음의 길’이 된다.
3)
종려주일 예수님의 입성은 메시야의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아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말을 탔다면 더 근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새끼나귀를 타신 왕의 모습은 차라리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말은 전쟁을,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입을 모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행진을 수백 년 전 선지자 이사야와 스가랴가 말한 예언의 성취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5).
스가랴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나귀 타신 예수님은 이기러 가는 모습이 아니라 지러 가는 모습과 같았다. 나귀 타신 예수님은 정복자의 모습이 아니라 평화의 행진이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지금까지의 임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왕이다. 높은 말이 아닌 새끼 나귀를 타신 왕이었다. 군악대의 행진곡이 아닌 아이들의 노래 속에 오신 왕이었다. 군인들의 열병식이 아닌 백성이 스스로 깔아놓은 겉옷과 남녀노소의 환영 속에 오신 왕이었다. 이 새로운 왕을 수행한 것은 빛나는 창검이 아닌 부드럽고 푸란 종려나무 가지였다.
강요되지 않은 개선행진곡이 사람들의 가슴과 가슴마다에 희망으로 울려 퍼진 장면을 상상하면 오히려 위엄있다. 예수님의 구원 행진은 이렇게 사람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관심과 방법을 달리한다.
지난 목요일에 색동교회의 전도사로 애썼던 이들과 만났다. 김준호, 김학준, 우경준 전도사님이다. 올해 부활절 직후에 열리는 서울남연회에서 김준호, 김학준 전도사님이 목사안수를 받는다. 미리 축하하고 격려하려는 식사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김학준 전도사님의 아들 온을 만났다. 색동교회 ‘고요한 밤’ 기도회 이야기 시간에 젊은 부부가 아기를 임신했다며 기쁜 소식을 전해준 일을 기억하는가?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벌써 5살이다. 이름이 김온인데, 아주 명랑한 아이로 컸다.
어린이집에서 친구와 둘이 엄마 아빠 놀이를 했다고 한다. 주인공은 누굴까? 먼저 역할을 나누는데 온이는 아기가 되었고, 다른 아기는 다른 역할을 선택하였다. 엄마일까, 아빠일까? 이모란다. 엄마 아빠 놀이에서 어른들이 생각하는 엄마와 아빠는 소외된 셈이다. 존재감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의 상상세계는 너무 즐겁다.
아이들도 주인공을 선택할 줄 안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주인공 노릇을 하는가?
우리는 지난 사순절 기간 동안 사순절 묵상집을 읽었다. 각 속장님이 조간신문처럼 배달해 주었을 것이다. 올해 묵상집에는 ‘나의 겟세마네’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하였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길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셨다. 십자가의 길은 자동판매기같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신앙에서 바로 세워야 할 주인공은 바로 나이다. 내 삶이 빠진 신앙은 허전하고, 의미가 부족하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행진하시듯, 내 삶으로 행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연 내가 준비할 나귀, 겉옷, 종려가지는 무엇인가? 스스로 침묵하고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 들어앉은 돌맹이가 진실이 되고, 양심이 되어 소리칠 것이다.
내 삶으로 행진이 없다면,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신앙이 겉돈다. 신앙고백이 허공으로 뜬다. 신앙생활을 몇십 년을 했어도 내 이야기가 빈곤하다. 내 믿음의 컨덴츠는 무엇인가? 신앙의 에피소드를 만들라.
그 당시에는 제자들도 몰랐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
진정한 부활신앙은 이제 내 안에서 믿고, 고백하며, 내 삶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내가 주님과 동행하겠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고난의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새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길’이며, 동시에 ‘생명의 길’이었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고백과 간증은 십자가를 넘어 부활을 꽃피우는 종말론적 희망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주간의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길 바란다. 그리하여 나만의 십자가를 잘 감당하고 이겨낼 힘을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