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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선____
자유롭기 위해 쓰는 시
김규성
자유는 만고불변의 인류 보편적 가치이다. 그 안녕을 위해서는 물질과 영혼이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만 가능하다. 몸과 마음의 동행이 건강의 최선이듯이 개인과 사회의 적정 관계는 물론 물질과 쌍벽인 정신적 자유 추구에도 소홀해선 안 된다.
자유는 욕망과 금욕의 사이좋은 합주이다. 허무의 전주곡인 욕망의 일방적 독주는 반사회적 부패의 미끼이다. 때로 본연의 자기 진면목부터 기만하고 배반해야만 그 방임적 자유가 가능한 욕망은 돌이키기 힘든 타락과 죄악과 자기분열을 형벌로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자유를 훼방하는‘카인의 표적’이다. 이름이라는 허상이 돋보일수록 언행의 구속은 확대된다. 그러기에 자기가 가진 이상으로 포장된 이름은 하루속히 반납해야 한다. 자신을 드러낼수록, 치장할수록 자유는 반감한다. 자유는 불필요한 관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때 온전하고 풍요해진다. 필요 이상의 소유 또한 불필요한 구속의 빌미이다.
조화로운 사회적 기능을 초과하는 능력은 오히려 자신을 구속하는 올가미일 뿐이다. 과음 후의 속 쓰림이나, 마취성 쾌락 뒤의 몽롱처럼 뒤탈이 남는 것들은 부자유의 발음기호이다. 한 모금 흡연을 위해 도둑처럼 밀실을 찾아 두리번거리는‘중독성 기호’역시 늘 불안이라는 벌칙으로 자유를 압박한다.
한편 소극적 자유는 때로 피동적 소외를 부른다. 그것은 작은 충돌에도 상처받고 실망한다. 그래서 비사회적이다. 때로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간적이기도 하다. 개를 사람보다도 더 좋아한 철학자의 염세주의를 사랑할 수 없듯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지극히 당연한 의무를 외면하는 자유는 반쪽 자유, 식물성 자유로 인간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사회적 동물이 할 짓이 아니다.
자유는 진정한 자기 목소리와 언어를 가질 때만이 제대로 누릴 수 있다. 편리한 만큼 피곤한 문명이 싫거나, 사람이 사람에게 실망하여 숨어든 산중은 진정한 자유의 거처가 못 된다. 저잣거리의 실상을 외면하고 산천초목의 피상만 좇는 도망자의 독백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새나 물이나 산바람 소리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기껏 그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세파 속에서 그 격랑의 한 축이 되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다.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놓고, 만나는 이웃마다 격의 없이 노상 담론을 즐기는 소박하고 활달한 소통이야말로 자유의 능동적 무기이다. 물 흐르듯 세상과 대화하며 조화로운 일상의 찬가를 합창하는 가운데 자유는 무한히 확장된다.
뒤가 깨끗한 즐거움을 즐기는 것은 자유의 첩경이다. 한 떨기의 들꽃, 갓 태어난 산새의 노래로 피곤한 걸음을 씻는 오솔길은 맨날 걸어도 상쾌하다. 맑은 날의 저녁놀은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참 감미로운 여운이 남는다. 만나는 사람마다 맑고 따뜻한 심성을 선물할 수 있다면 내일이 또 얼마나 기다려 질 것인가. 자유란 그 산뜻한 여운에서 재생된다.
할 일을 만족스럽게 마치는 성실은 자유에의 초대장이다. 언행은 일치하지 않으면 시비의 발단이 되고, 대인 관계의 불편을 부른다. 자율은 자유를 위한 전제인 만큼 끼니처럼 챙겨야 한다. 자신과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유는 부자유에게 그 옥좌를 넘겨줄 수밖에 없다.
진실은 자유의 핵심이다. 두려움 없고 거침없는 진실이 발휘될 때 세상은 무풍지대로 열린다. 때로 진실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괴로워하는 것은 스스로 자유를 유린하는 자학이다. 진실한 것만으로 곧 자유로운 것이다. 진실과 자유의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자는 아직도 그 진실이 미흡한 탓이다.
중용이야말로 자유의 궁극이자 패스워드이듯 평범은 평화로운 자유의 요새이다. 다수의 공통분모 속에서 자족하는 대범은 자유를 양육하는 최상의 조건이다. 진리는 가깝고 평범한 일상 속에 둥지를 틀기에 선현들의 이구동성처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
잠시의 국지성 소나기를 전 우주의 재난으로 과대 포장하는 시각으로는 자유를 거느릴 수 없다. 생사조차도 영원의 일시적 통과의례로 담담해 하는 장부의 품에만 자유는 연인처럼 안긴다. 나를 샛강으로 낮추어 너와 내가 합류하는 큰 바다로 즐거이 흐를 줄 알아야 자유인의 일급 자격증이 주어진다.
자유를 안방에 가두고 부려먹으려 들면 때에 따라 엄청난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반면 목숨을 던져 자유를 얻은 선각들의 자유에 대한 순교는 우리에게 자유의 무한 가치와 존엄을 되새기게 한다. 행동반경이 넓을수록 부딪치는 것들은 많다. 높은 산에 오를수록, 체력의 한계가 드러나고, 그만큼 정상에 머물 시간이 짧고, 내리막길이 버겁다. 저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자유는 병이 되거나 약이 된다. 황금을 돌로 보듯 돌을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지혜만이 자유의 맹주를 보장할 수 있다.
시인은 고통의 영구주택에 사는 멀쩡한(?) 조울증환자이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고통이 주조를 이룬다. 아무리 혼자 누리기 벅찬 환희라도 지나고 보면 고통의 누옥을 잠시 빌린 무력한 세입자에 다름 아닌 것처럼 고통은 곧 시인의 거처이다.
고통은 시의 원천적이고 잠재적인 소재이자 발원적 동력이다. 고통을 시원적 담보로 하지 않는 시는 연목구어나 수박 겉핥기에 그치기 일쑤다. 고통을 희열로 바꾸거나 최소한 고통의 정체와 의미를 되새김하는 작업은 시인이라는 실용에 동떨어진 무위도식가가 시로 표현하는 존재의 변이다.
생이 죽음의 무기수인 것처럼 시인은 우주적 고통의 무기수다. 매화 흐드러진 꽃비늘 속에서 결연한 인동을 읽어내고, 진홍 절정의 동백에서 논개나 삼천궁녀의 비극을 염탐하고, 아직도 ‘어린 백성’을 못 면하는 민중의 질긴 천형이 제 몸탈이듯 아파서 통곡하고 분노하는 이가 시인이다.
술은 시인의 음료수다. 그러나 잠시의 환희였다 할지라도 술을 마시고난 뒤끝은 에누리 없는 고통에의 복귀이다. 술은 잠시의 도취 혹은 마취를 빌리기 위한 고의적 미침이지 결코 고통의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시인의 도피처이다. 그러나 잠시의 화려한 외출일 뿐 이내 고통이라는 누추의 현주소로 귀가해야만 한다. 중독될수록 희열에 따른 고통도 동반한다. 펄펄 끓는 열병일수록 열이 식었을 때 눅눅한 이부자리에 식은땀만 고인다.
통곡에도 일정한 음률이 있고 파안대소 역시 그렇다. 노래는 희로애락의 일차언어이다. 음악의 분자이자 파생어인 시의 어원은 고통과 고통의 세입자인 환희의 노래이다. 다만 시는 시어 하나하나 그리고 행과 연 속에 악보를 감춘 것이 여느 노래와 다를 따름이다.
시인은 내면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안팎에 걸쳐 치열하게 고차원의 자유를 추구하는 메시아이다. 시인이라고 시만 붙들고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세상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따라서 유마의 거창한 설법을 빌리지 않더라도 마땅히 나도 아파야 한다. 세상과 아픔을 같이 못하는 산 속에서는 더 아파해야 한다. 내 시는 그 신음의 산물이다.
시는 늘 나름의 세계를 창조하고 설계한다. 그것은 나와 상대 곧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정립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좋은 시에는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깃들기 마련이다. 한 톨의 햇살, 한 방울의 소낙비, 무심코 마시는 산 중턱 공기 한 모금에서도 우주의 원소인 은혜를 재발견하고 감사하는 관계에 대한 예의야말로 시심의 원천이며 시의 진정성을 확보하는 첩경이다.
시의 기호인 언어에 피와 땀과 정이 베여있지 않은 시는 인간의 것이 아닌, 외계의 방언처럼 낯설어 아무래도 호감을 느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모험가와 방랑자들이 언어도단과, 무의미와, 해체와, 반시의 능선을 되돌아와야 했던가.
은혜를 잉크로 찍어 쓰는 시는 경이롭고, 겸손하며, 진지하고, 따뜻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적어도 시가 독이 되거나 혼란만 부추기는 악영향의 부담은 덜 수 있다. 세상의 보약이 되고, 거름이 되고, 위안이 되고, 깃발이 되는 시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혼탁하고 삭막할수록 그런 시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거지와 도둑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욕 둘만 고르라면 아마도 거지와 도둑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거지와 도둑은 수고도 없이 남의 것을 쉽게 거두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거지는 드러내놓고 상대방에게 잘 보이게 때 묻은 손을 내밀지만, 도둑은 숨어서 상대방이 한사코 모르게 검은 손을 놀린다.
우리가 흔히 쉽게 떠올리는 부류는 깡통 속의 동전을 헤아리는 하찮은 알거지와, 기껏 밤샘한 장물이 역시 하찮은 좀도둑의 경우이다. 한편 진짜 거지 중의 거지, 도둑 중의 도둑이면서도 오히려 경외의 대상이자 위세의 주인인 경우가 있다. 그에게는 권력은 물론 권위까지도 부상으로 주어진다. 갖은 거짓과 흉계로 국권을 도둑질하여 국고를 제 맘대로 훔쳐 쓰며, 국민의 인권을 장물처럼 유린하고서도 오히려 국민에게 굴종과 경배를 강요하는 왕 도둑들의 경우이다.
그 주위에는 연쇄적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한 거지와 도둑 떼들이 여름날 똥파리처럼 몰려든다. 그 면면을 들여다보자. 우선 글께나 들었다는‘먹물거지’들일수록 권력에 굴욕적으로 아부하고, 부당한 권력의 우상화에 헌신하기 위해 현란한 감언이설로 국민의 눈과 귀를 마비시킨다. 그뿐인가. 선거 때마다 별별 진수성찬 공약으로 순진한 국민의 표를 구걸하고 당선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국민을 외면하며, 표를 돈과 바꾼 본전을 뽑기 위해 갖은 도둑질을 다하는 ‘정치거지’들은 어떤가. 근로자를 닦달한 땀과, 국가의 몫인 세금을 도둑질한‘기업거지’들도 그 구린 구석을 감추기 위해 정관계에 줄을 대고 면죄와 통정을 구걸하기는 마찬가지다. ‘종교거지’들도 그 못지않다. 입에 발린 거짓 기도로 은총을 신께 구걸하고, 그 판에 박은 말 품값의 수천 배를 신도들에게서 도둑질한다. 제 역할은 제대로 못하면서도 땀 흘린 몇 곱의 대우를 받는 소위 각계의 엘리트들 역시 거지와 도둑의 욕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거지와 도둑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거지와 도둑을 겸업하는‘거지도둑’으로, 왕 도둑의 성채에 포진한 토호세력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뺏길까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전에는 숨어서 살짝살짝 누리던 경제와 사회, 문화적 특권을 이제는 아예 드러내놓고 만끽한다. 우리 것은 소홀히 하거나 천시하는 터에 잘 나가는 강대국의 문화 쓰레기는 충견처럼 뒤져 핥으며 귀족적 거드름을 피운다.
세상이 온통 거지와 도둑 소굴 같다. 더욱이 너나없이 무차별적으로 거지니 도둑이니 침을 뱉어대니 이 땅은 거지와 도둑의 오물로 가득 찬 쓰레기장 같다. 숨이 막힌다. 물론 이러기까지에는 서투른 개혁세력들의 오만과, 안일과, 불찰이 한 몫 단단히 거들었다. 개혁에 피로를 느낀다는 성급한 패배주의자나 비판적 회의론자들도 문제지만 그보다도 초심을 버리고 도처의 물 좋은 강남으로 야합해 들어간 소위 왕년의‘좌파 거지’들은 그 죄질이 기존의 해묵은 거지와 도둑들 못지않다. 도대체 모처럼 벅찬 민주화의 환상에 젖었던 국민들의 도덕적 열정을 무참히 배반한 오욕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비록 서민 대중의 피곤과 눈물을 씻어주지 못하는 민주화지만 적어도 국가의 주인은 다수의 국민이라는 주인의식만큼은 확실히 심어놓은 터, 그러니 다시 출발하자. 무엇보다도 상습적 거지에게는 적선을 하지 않는 것이, 도둑에게는 도둑질을 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을 본때 보일 수 있는 선거 때만이라도 제대로 해보자. 그동안 얼마나 홧김에 서방질하듯 감언이설이나 환상 혹은 불안에 속아 우왕좌왕 헛손질을 해왔는가.
‘정치거지’와‘정치도둑’은 발붙이지 못하도록 중의에 휩쓸리지 말고 냉철하고 사려 깊게 주권 행사를 해보자. 그 새로운 선거풍토를 통해 비로소 국민다운 국민이 고루 명실상부한 민주주의를 누리도록, 먼저 자신의 의식구조부터 참신하게 개혁하자. 루쉰의 “물에 빠진 개”에 관한 충고처럼 제 버릇 개 못 주는‘도둑 거지’들에게 제발 더는 속지 말자. 세상은 속이는 자의 죄가 아니라 속는 자의 벌만 남을 뿐이다.
■내 몫의 희망 찾기
그동안 왜(?)와 어떻게(?)에 대한 화두를 새의 좌우 날개처럼 몰고 오느라고 머리와 발이 빤한 날이 며칠이나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아찔하고 아득하다. 그러기에 이쯤 해서 희망과 화해하고자 한다. 그동안 내 시선은 음지와 비관과 분노에 지나치게 편향돼 있었다. 광활한 허공에 점점이 구름 몇 떠도는 것을 두고 청정해역을 통째로 구름 낀 하늘이라고 매도하곤 했다. 날이 새면 어김없이 머리 위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두고도 내 일기는 우울한 잿빛 표지만큼이나 희망에 대한 불신과 불안과 배신감으로 얼룩이 져있었다. 그리고 그 탓을 비겁하게 외부로 돌리느라고 내 시신경은 극도로 핏발서 있었다.
왜, 옥의 티만 찾느라고 정작 그 청강의 은은한 자태를 놓치곤 했던가? 왜, 도처에 박혀 있는 금 조각들의 “저요, 저요” 소리를 못 듣고 몸 전체가 금덩어리가 아니라고 그 아까운 금광석들을 쓰레기처럼 내버리곤 했던가? 왜, 한참 숨 가쁘게 자라고 있는 진주의 성장이 더디다고 해서 신성한 산고를 앓고 있는 조개들을 무심코 화풀이하듯 깨부수곤 했던가? 판도라 상자를 재확인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이라는 삶의 무기를 배급받아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희망은 감히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천부인권이며 평생의 천록이겠기 때문이다. 나는 불청객인 절망이나 실망을 희망 대신 먹여 살리느라고 정작 희망을 챙기는 것에 소홀했다. 이제 미처 누리지 못한 내 몫의 희망을 되찾아 내 재산목록 1호로 뚜렷이 등기해 놓으려 한다.
내 글의 칠 할은 세태의 불합리에 대한 불신이나 부정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누군가가 이미 살다간 빈집을 털 듯 앞선 비평가의 분탕질을 재확인하는 앵무새이기 십상이었다. 그러기에 내 험구가, 가뜩이나 어둡고 짜증나는 세상에 정형수술이 되지 못하고 부정적 사고와 스트레스만을 확산하는 부메랑이곤 하는 참담함에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예술에서 비평은 대개 평론가의 몫이듯,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시시각각 도처의 가렵고 구린 곳을 들추어 시퍼렇게 칼질을 해대는데(물론 실천적 지성의 진정성이 깃든 비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마땅히 존중되어야한다), 굳이 해당 지식도 밑천도 부실한 나까지 그 살벌한 틈에 끼어들어 혓바닥에 백태가 끼도록 시간과 열정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자괴감에 떨곤 했다.
그보다 어둡고 피곤한 음지에서도 꿋꿋하고 따뜻하게 희망의 결실을 일구는 일손들을 찾아 세상에 활짝 드러내는 것이 내 아둔한 능력에도 어울리고 몇 배 더 효과적인 친 사회적 전략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도 세상에는 소금이나 양념처럼 필요한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기에 여전히 역사는 지속되고 인류의 수명은 황송할 정도로 늘어가는 게 아닐까 하고.
사실 완전무결은 변화와 운동을 수단으로 운영되는 우주의 구조 속에서 무리한 비현실인지 모른다. 식수로는 부적절한 증류수나 차면 기우는 보름달을 보아도 완벽은 정지된 시간에만 가능한 신화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가끔 드러나는 실수나 결함 앞에 인간적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것은 현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폭을 넓히려는 동병상련적 자기배려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앓을 줄 안다면 남의 상처나 과실에도 관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사 고락이 반반이라 하더라도, 그 절반의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한시적 운명체로써 대개의 잘못은 당사자나 비난하는 자나 오십보백보의 숫자적 차이일 뿐으로 감히 신이 인간을 단죄하는 식의 권리는 누구에게도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지나고 보면 거품을 물고 비난한 자 역시 뒤가 개운치 못하긴 마찬가지여서 세상을 어지럽고 곤혹스럽게 하기 일쑤다. 어쩌면 자신의 비리와 상처를 감추거나 죄의식을 덜기 위한 투사로, 동질의 범죄자를 찾아내 대리 형벌을 치르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완벽하지 못한 한계를 공유한 터에 타의 일정부분의 성취에 함부로 난도질을 해대는 것은 부질없는 자가당착인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다.
부정적 사고방식의 확산은 죽음의 신의 흉계이다. 인간만의 버릇인 직립보행은 뒷걸음치기보다 전진하기 위한 걸음걸이다. 따라서 일상의 계율은 그 대부분을 긍정적이고 진취적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 비난보다 칭찬을, 질책보다 격려를, 매보다 사랑을, 수영 금지보다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처세가 열린사회의 율법이다.
그러기에 보다 높은 곳(인격의)을 향하여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구슬땀을 흘리는 시시포스(구도자)는 아름답다. 자신의 흠집을 결연히 뜯어고치며 동시에 제 일처럼 이웃의 복락을 추구하는 성불제중은 만고의 법도다. 열 사람의 죄를 응징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선행을 표창하는 것이 열린사회 법철학의 요지여야 한다.
아이들 울음에 짜증을 내다가도 그 벙실벙실한 웃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즐거워한다. 그것은 비단 아기웃음뿐 아니라 어른들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일 연속극의 시시콜콜에도 넋 놓고 깔깔대는 게 울음보다는 웃음에 친근한 사람들의 속성일 것이다. 따라서 이웃에게 늘 맑고 밝은 표정을 선물한다는 건 몇 권의 시집보다 실질적인 정서 함양일 것이다.
장사는 죽은 자들로 지내게 하고 나는 산 자들의 도시락을 챙겨 희망여행을 따라 나서야겠다. 우선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보는 훈련부터 해야겠다. 원망이나 오해에 앞서 비록 사소할지라도 은혜를 발견하는, 그래서 늘 감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이도록 해야겠다. 사회적 인연과 관계의 그물에서 결코 달아날 수 없는 한계를 부정하지 못할 바에야 적어도 그 축복을 훼손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하겠기에 말이다. 긍정과 온유를 통하여 부정과 살벌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낙관의 영토를 넓혀가야겠다는 뜻이다.
사회가 혼탁하면 먼저 언어가 간악하고 투박하고 흉흉해진다. 대중들 사이엔 욕설이 난무하고 지식인의 문장은 모호하고 번쇄해진다. 갈수록 내 입이 거칠어진다. 내 발음과 억양이 자꾸 딱딱해진다. 내 시어들은 너무 건조하고 산문적이 돼간다. 내 마음이 각박해진 탓이다. 자꾸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내 언어의 엔트로피를 제자리로 돌이켜야 할 때다. 내 영혼의 사막화에 급제동을 걸어야 할 때다. 내 서정의 싱그러운 초원을 회복해야 할 때다.
말을 곱게 하려면 마음을 순하게 해야 한다. 마음을 순하게 하려면 가슴을 따뜻이 해야 한다. 가슴을 따뜻이 하려면 공생관계의 동질감을 가지고 사물을 만나야 한다. 측은지심을 눈으로 선인선과를 밝혀야 한다. 과열경쟁과 약육강식을 생존의 법칙으로 당연시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더불어 사는 의리를 지키기란 여간 힘들겠지만 그러기에 그만큼 가치가 있는 고차원의 계책인 것이다.
지금까지 국가와 사회, 역사의 진보 등 거대담론을 구실로 쏟아 부은 과격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에너지를, 평범한 이웃의 작아도 소중한 미시담론을 기리고 꽃피우는데 더 신명나게 발휘하려 한다. 열 사람의 흠결을 들추는 것보다 한 사람의 진실을 다지고 지켜주는데 더 신경을 집중하려 한다.
평범하고 순박한 이웃들의 숨은 철학과 지혜를 사랑하고, 사방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생명 예찬의 증인들을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들(사람과 사람)끼리만 옮는 아폴로 눈병조차 사랑하고, 여름 매미소리와 가을 풀벌레소리를 듣던 귀로 봄 버들강아지 눈뜨는 소리와 겨울 함박눈 내리는 소리를 사랑하고, 대가족을 부양하느라 지쳐 밤새 코를 곯아대는 아내의 피로를 사랑하려 한다.
알게 모르게 핍박받는 초라한 이웃들의 잠자는 권리를 일깨우고, 지고지선을 향한 몸부림인 서투른 순수에도 박수를 보내고, 행여 다중의 합의를 전제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따위의 횡포를 경계하듯 개인의 독선을 무기로 다수의 이익을 방해하는 월권을 더욱 경계하려 한다. 장거리 버스 안에서 라디오의 잡담을 굳세게 틀어대는 운전기사의 무료와, 그 소음에 두통을 앓는 산승의 알레르기를 동시에 편들려고 한다. 술 못 먹는 이에게는 술잔을 돌리지 않는 손으로 술에 미친 사람의 주정에는 느릿느릿 박자를 맞춰주려고 한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선뜻 말하고, 꽃이나 종달새나 수석보다는 그래도 닮은꼴인 사람을 더 사랑하고, 두 사람의 범죄에 실망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개과천선에 환호하며, 타인의 잘못 속에서 나의 공통점을 도려내듯 타인의 장점을 즐거이 본받으려 한다. 비난보다 침묵에 침묵보다 칭찬에 익숙하며, 받고 주는 수학적 계산 보다 주고받는 국어사전의 어순에 충실하려 한다.
누군가의 배신에 절망하기보다 찾아보면 널려있는 무수한 이웃의 작은 진실에 가슴 뿌듯해하며, 그저 좋아서 줄 따름이지 그만큼 되돌아오기를 행여 기다리지 말며, 지금껏 싸움닭처럼 공격적이던 투쟁의지를 지양하여 한시적 승부에 연연할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원숙을 추구하는 거시적 성취에 맛을 들이려 한다.
궁극적 경지는 처절한 허무주의의 늪을 탈출한 긍정의 미학을 이를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늘 흐르기에 결코 썩는 법이 없다. 사랑만큼 위대한 실리와 마술은 없다. 그 통역이 필요 없는 세계 공통어, 신비의 주술인 지상과 하늘의 공용어야말로 실어증을 앓는 내 모국어이다. 나는 이제 사랑의 기수인 희망을 불가분의 반려로 확실히 자리매김 하려 한다. 이웃이 고맙고, 살아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무엇보다도 저 무한의 희망에게 고맙다.
김규성 /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신이 놓친 악보』, 산문집 『산들내 민들레』, 『ㅁㅘ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