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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2024
무용과 오페라
< 월간 무용과오페라 창간 12주년 기념
우리나라 근대 창작음악 창조의 살아있는 역사, 원로작곡가 이영조교수 특별인터뷰 >
“아주 어릴 때 북아현동 집 근방으로 전차가 다녔습니다. 북아현동을 거쳐 서대문 영천으로 가는 전차였는데, 하루는 저가 그 전차들을 따라서 가보기로 했습니다. 땡땡 소리치며 달리는 전차의 모습이 너무나도 멋졌습니다. 계속 전차들만 바라보며 따라갔는데,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 방향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는 울며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오셔서 저를 파출소에 데려가 주셨습니다. 그리고 경찰 아저씨가 주소를 물어도 나이 어린 저는 알 수가 없었고,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가 경찰 아저씨한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게 뭐냐고 하셨고, 저는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노래를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경찰 아저씨께서는 ‘그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가 가만히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이라며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몇 시간 후 무사히 북아현동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이때 이영조교수님의 소중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긴장해서 듣고 있던 평자는 ‘아, 이 이흥렬선생님의 이 음악은 사랑하는 아들의 운명적 안위까지 지킨 음악이며, 이 귀중한 음악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인터뷰까지 소중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했구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무용과오페라는 사랑과 축복의 창간 12주년을 맞은 이번 3월호 영예의 표지인물로 원로 작곡가이시며 우리나라 창작음악 창조의 살아있는 역사이신 이영조교수님(이하 경칭 생략)을 모셨다. 사실 이 인터뷰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2월 25일 새벽 현재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온통 총선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선거날짜가 약 50일 정도 남아 있지만 전 국민들이 다른 뉴스에는 무덤덤하고 - 기껏 ‘의사대란’이나 ‘손흥민에 대한 이강인의 하극상 사건’ 정도에나 조금 관심을 가진다 - 오직 선거판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 적지 않은 국민들이 올해 7월에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도 잘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고등학교 때 럭비 선수로 띈 적이 있어서 제법 스포츠를 좋아 한다는 평자도 이 인터뷰 서문 글을 준비하면서, ‘아, 올해가 올림픽이 열리는 해이며 그것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구나’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올림픽의 해를 맞아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서도 정말 소중한 클래식 해외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등이 올해 6월 올림픽 사전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프랑스 파리 등 유럽공연에 나선다는 것이다. 즉 국립오페라단의 보도자료 등에 따르면,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의 연합공연으로 이루어지는 이번 공연은 프랑스 파리오페라코미크극장, 독일 베를린필하모닉콘서트홀, 오스트리아 무지크페라인 황금홀 등을 순회하며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상 최대의 해외 방문 클래식 공연 투어가 된다.
그리고 특히 이번 공연의 작품이 서양음악의 근본적인 틀을 탄탄히 견지하면서도 우리나라 음악 고유의 국가정체성(national identity)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우리나라 창작 음악의 거장이며 원로 작곡가이신 이영조 교수의 창작 오페라 ‘처용’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클래식음악의 최대 최고의 해외공연에 우리나라 최고의 창작음악 작품이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인터뷰는 토요일인 지난 2월 24일 교수님께서 거처하시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자택에서 있었는데, 제주국제합창심포지엄위원회 위원장인 이교수께서는 그 주 거의 내내 제주 행사장에 계시다가 오셨다고 한다.
- (따라서 이 인터뷰에서는 먼저 제주국제합창제 & 국제합창심포지엄위원회 행사 현황 등에 대해 물어보기로 한다). 현재 제주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2024 제8회 제주국제합창제 & 국제합창심포지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활동 중이십니다.
“네. 이 행사는 벌써 8년째 된 행사인데, 내가 좋아하는 인성(人聲)으로 이루어지는 합창에 관한 행사라 더 좋습니다. 올해는 세계 7개국의 300여명이 참가해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외국에 가지 않고도 세계 각국의 노래를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정말 행복한 기회입니다. 물론 속상한 게 하나 있기도 한데, 왜 우리나라 합창단은 우리나라 곡이 아니고 외국 노래를 주로 부르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부를 만한 곡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작곡가들도 더 많은 훌륭한 한국음악을 새로 창조해내야 합니다.”
- 이번 행사에 대해 많은 분들의 노력과 성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밝은 미소를 가만히 띠며) 네. 완벽한 책임감과 봉사심을 갖춘 김희철 회장 이하 전 스텝들이 식사시간을 잊을 정도로 바쁜 행사업무와 공연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기업들의 협찬도 이어지는데, 특히 제주도 라마다호텔 같은 경우는 150여개 객실을 3일 동안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지원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 특히 이번 행사에서는 교수님의 작품 ‘평화(Pacem)’가 이번 행사의 메인 공연이 되어, 300여명의 국제연합합창단의 연주로 인천의 인천아트센터(2월 24일, 지휘 : T.J. Haper)과 서울의 롯데콘서트홀(2월 26일, 지휘 : 김희철) 등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인터뷰가 지난 2월 24일 낮에 있었는데, 인터뷰가 끝난 이후 이교수님은 인천 공연장으로 떠나가고, 평자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 곡의 주제 등에 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사는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입니다.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을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그리고 특히 근래에는 우크라이나 등에서는 끝없는 분쟁과 살육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평화가 있으면 인간의 죽음을 막고 기아까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양보하고 한발자국씩 물러서면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이는 결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작품 ‘평화’는 신에게 혹은 창조자에게 그리고 또 혹은 절대자에게 간절히 간구하는 노래입니다.(이 교수는 지금 차분히 말하고 있지만, 대단히 명쾌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평자는 이 인터뷰가 끝난 지 이틀 후인 지난 2월 26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이 작품 연주를 직접 볼 수 있었는데, 미국 에스토니아 등 세계 7개국 300여명의 대규모 연합합창단이 이날 공연의 파이널 연주로 이루던 이 합창곡은 작품의 메시지가 뚜렷하면서도 유려하고 장엄한 선율의 감동적인 곡으로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와 박수를 받고 있었다.)”
- 그리고 이제 곧 6월이면 국립오페라단 등이 교수님의 작품 ‘처용’을 가지고 유럽 투어 연주에 나섭니다.
“(다시 밝은 미소를 가득 지으신 다음) 네. 파리 올림픽 사전문화교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행사인데, 저의 작품이 선택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께서 이런 국제교류 행사에는 우리 클래식음악도 꼭 함께 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셔서 이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콘서트오페라 형식으로 이루어져 악보를 다듬고 줄여야 해서 어제도 3시 반까지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때 평자가 깜짝 놀라며 ‘(원로 선생님께서) 너무 힘드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자, ‘원래 12시부터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고, 아직 체력이 있다’는 말씀이 돌아온다)”
- 큰 규모로 나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예술단체가 참여하는지요?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이 함께 하는데, 우리나라 클래식공연예술에서 이런 대규모 해외 연주는 처음입니다.”
- 정말 드문 소중한 공연이 될 것 같은데, 지금 우리에게 왜 이런 대규모 클래식 공연예술의 해외투어가 필요한지요?
“건축도 규모와 설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닭장이나 개장을 지었다고 건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소규모 공연이나 대중음악 공연도 그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국가적인 문화교류에는 완벽한 규격을 갖춘 순수클래식 공연이 나서면, 그 국가의 품위와 기품을 높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때 그 음악은 한국적이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서양음악의 기본 틀 위에서 우리의 전통과 얼을 담는 우리의 창작음악이 나서야지 우리의 전통과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세계에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대중음악이 나서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대중음악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 대중음악과 예술음악과의 차이점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싸이나 BTS 혹은 소녀시대의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런 대중음악을 흥겹게 듣습니다. 어떤 이는 베토벤이나 브람스를 들으면서 좋다 싫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다 싫다를 넘어 이 음악이 뭐지? ‘What is this?’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중음악은 이렇게 깊은 사고를 할 필요 없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생각이 필요 없어요. 예술 음악이 생각을 필요로 하는 음악인 것에 비해 대중음악은 그냥 쉽게 받아들여지고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일갈 한 파스칼의 명언은 오늘날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다다다~~’하고 이루어지는 베토벤 5번 교향곡을 다 이해하려면 수십 번을 들어야합니다. 아니 사실은 수십 년을 반복해서 들으며 고민하고 사유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영조가 생각하는 대중음악과 예술음악의 차이점입니다. 순수클래식음악과 대중음악은 함께 해야 합니다.”
- 개인적인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그리고 굉장히 저의 곡이 이번 이 소중한 유럽투어 연주에 나서게 된 것이 대단히 기쁩니다. 소아적 생각이 아니라, 한국적 요소의 음악이 유럽에 진출해 연주된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곡을 저가 1987년에 썼는데 - 세상에 45년 전에 작곡하신 곡이다 - 그때는 저가 어려서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조금 보완을 하고 있으며, 어쨌든 이번 기회가 우리 음악을 세계에 소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이런 대규모 해외 공연이 우리 음악 및 작곡계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요?
“우리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작곡계가 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작곡을 하거나 연주를 할 때 반드시 작곡가들은 연주자들이나 연출자들 등과 함께 협업을 해야 합니다. 작품 연출의 현대화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열린 사고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저의 작품 처용도 초연 때인 1987년 버전과 그 이후 2013년 버전 작품은 그 연출에서 서로 다릅니다. 2013년 작품은 양정웅의 연출로 이루어졌는데, 처용이 신라로 간 것이 아니고 현시대 압구정동으로 온 것으로 했습니다. 물론 그래서 이제 라이방을 쓴 처용이 핸드폰을 들고 나타나 결국은 권총자살을 하게 됩니다.”
- ‘처용’은 어떤 작품인지요?
“저가 미국 유학 중인 1987년에 우리 국립오페라단으로부터 위촉 받아 쓴 곡입니다. 주요 스토리를 이야기해보면, 신라말기 때 옥황상제가 신라를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신라가 너무 부패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들을 멸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곁에 있던 아들 처용은 이에 놀라 자기가 지을 신라로 내려가 그들을 구하겠노라 하지만 옥황상제는 이미 그들의 운명이 정해졌다 하며 이를 허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을 거역하고 의협(義俠)에 불타 지상으로 내려온 처용은 ‘하늘나라보다 지상이 더 좋아’ 하며, 신라와 함께 같이 타락합니다. 그러자 노승이 나타나 ‘너 여기 왜 왔는가?’라고 호통치기도 합니다. 이때 승려들의 회개의 합창인 곡인 ‘승려의 노래’가 불려집니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를 탐하던 역신이 처용에게 다가가 신라를 구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댓가로 처용의 지상의 여인 가실을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충(忠)과 애(愛) 사이에서 번민하던 처용은 아내 가실이의 방 열쇠를 역신에게 건네며 아내 가실은 자결하고 만다는 내용입니다.”
- (이때 다시 평자는 이제 이영조교수께 클래식 공연예술에서 우리 고유의 정체성 확보 문제 등에 대한 본격적인 말씀을 들어보기로 한다.) 교수님께서는 현재 ‘20 Trillion Production’ 모임의 대표를 맡고 계십니다.
“네. 저는 이 단체의 대표이며, 이 단체는 한국적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가 및 연주자들이 모인 그룹입니다. 우리 전통음악이 훌륭한 예술적 요소들이 많은데 세계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음악이 너무 서양음악에만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되며, 우리 교육자, 국악인, 작곡가, 등등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저까지도 이런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모르고 지내온 잘못이 없지 않은데, 우리들은 학생들에게 우리의 국악은 가르치지도 않고, 서양음악만 교육해왔습니다. 국악인들은 천대받고 자기들끼리만 모였습니다. 결국 우리 자아를 소홀히 하면서 음악의 식민지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희 모임은 이런 문제들을 타파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설립되었습니다.”
- 한국적 음악에 몰입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실 저의 한국적 음악에 대한 열정은 서서히 누적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계기는 아무래도 저가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하면서 그 당시 미8군 사령관 본스틸 장군을 모시고 우리 국악 연주를 들었던 경험입니다. 저는 처음에 장군께서 우리 음악을 듣고 싶다고 하셔서, 우리나라의 시향 등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싶어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군께서는 그런 연주는 뉴욕필하모닉 등에서 많이 들었다고 하시며 우리 전통 국악연주를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뭔가 부끄러워짐을 느꼈고, 연주를 다 본 장군께서는 ‘원자재가 너무 훌륭한 곡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국악박물관의 악기를 시찰하면서, 이 악기는 당나라 악기다, 저 악기는 송나라 악기다, 라고 판별하고 있었는데, 젊은 저는 우리 악기를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아는 장군의 모습에서 자존심이 상했으며 각성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계기는 저의 유학생활에서의 경험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외국 두 곳에 유학을 갔습니다. 독일과 미국이었는데, 그곳에 유학을 갔을 때마다, 멀리 외국에서 한국을 돌아보니 우리의 훌륭한 요소가 정말 많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1970년대에 독일을 유학하면서 서양의 현대적 음악 기법 속에 우리 고유의 요소를 집어넣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이런 작업을 하니, 몇몇 분들이 ‘이영조는 독일 가서 도리어 구시대가 되어 돌아왔다’는 말씀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제자들이 ‘이영조선생님의 말씀이 맞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음악창조는 서양음악의 기법 속에서도 우리의 스페이스를 넣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영원히 없어집니다. 19세기말 선교사 등을 통해 서양문물이 들어온 후 우리의 건축물 즉 기와집이나 초가집 등은 거의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우리 음악에 ‘국민주의(nationalism)’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빈자리는 메우고 가야 합니다.”
- 여러 가지 개선되어야 할 것도 많을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 고유 국악기들의 음량적 약점을 보완해야 합니다. 우리 거문고의 경우 현을 명주실을 꼬아 쓰는데, 10분 연주 후에는 벌써 음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국악기들 전체로 볼 때도 음향이 너무 약해 마이크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올림픽 경기에서 수영선수들이 오리발을 착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기 등을 개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이는 서양악기에서도 경험한 역사입니다. 즉 바이올린 현도 원래 고래 힘줄이나 고양이 창자 등을 사용했는데, 산업혁명 이후 지금은 강철 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교수님의 생각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피리 무형문화재 6호 국립국악원 연주자 정재국 선생님으로부터 피리 레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서양음악 공부하는 이흥렬의 아들이 피리를 공부한다’고 센세이셔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저가 피리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곡을 쓰니까, 국악 원로분들 중에서 ‘짬뽕을 했다’, ‘튀기를 만들었다’며 화를 내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이때 이영조 교수는 유쾌하고 밝은 미소를 가득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저가 1987년에 오페라 처용을 써서 무대에 올리자, 일부 기독교인인 합창단원들이 6명이나 연주를 거부했습니다. 작품 중 승려들이 합창하는 부분이 있는데 목사님 아들이 합창대원으로 있는 경우도 있었고 저도 장로 아들이고 교회 성가대를 지휘 하고 있었기에 맹비난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요. 저는 그저 소리의 문화유산으로 신라의 우리 소리를 추구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ㅎㅎㅎ,,,, 그 당시 연세대학교 총장님이셨던 박태선 목사님께서는 ‘나도 해마다 불국사, 낙산사 등을 찾아간다.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신라의 숨결과 건축미를,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간다. 마찬가지로 이영조 작곡가도 오페라 처용 중 ’승려의 노래‘를 불교 숭배가 아닌 하나의 민속예술표현으로 접근한 것이다’라고 하시며 저를 대변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단계는 지났지요.”
- 아버님께서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속의 전설이 되어 계시는,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일컬어지시며 ‘섬 집 아기’, ‘어머니의 마음’, ‘자장가’, ‘봄이 오면’, 그리고 군가 ‘진짜사나이‘ 등을 작곡하신 작곡가 이흥렬박사님이십니다.
“네. 저가 아들로서 둘째였습니다. 7남매 중 5명이 음악을 했고, 아들 4명 중 3명이 작곡가 이었습니다.”
- 부친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강직하시고 어떤 틀에 매달리는 것을 싫어하시는 유머가 많으신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저가 닮았습니다. 저는 골치 아픈 일이 있어도 결정만 되면 더 이상 생각 않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잠도 잘 자버립니다. 내 생활의 바운더리 밖에 일은 아예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 예술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아버님께서는, 사실 이는 예술가로서는 제일 어려운 일인데, 언제나 ‘쉽고 격조 있는 음악을 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사의 뜻을 선명하고 명쾌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곡을 기품 있게 쓰라는 말씀이셨는데, 저는 평생 이 말씀을 따르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음악은 연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감상까지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평론에서 모든 결론이 내려집니다.”
- 경기도 남양주에 프라움 박물관에 아버님 유품도 소장하고 계십니다.
“네. 그러데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어느 날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프라움 악기박물관의 김정실 관장께서 연락해 오셨는데, 저희 부친께서 사용하시던 피아노 야마하1호를 기증해주실 수 있느냐‘는 - 이때쯤 이영조교수께서 평자에게 ’송대표도 (의미 있는 곳이니) 반드시 가보셔야 해요‘라는 말씀을 하고 계셨다 -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과 의논해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아버님의 악보 등 유품들을 더 기증해, 이제 아버님의 코너가 별도로 마련되어 전시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오페라, 실내악, 관현악, 합창, 등등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오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지요?
“오페라는 ‘처용’이며, 관현악곡은 ‘여명’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실내악은 ‘소리 시리즈 13곡 중 3번 클라리넷 곡’이 기억에 남으며, ‘하늘 천 따지’라는 현악 4중주 곡도 도 저에게는 소중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먼저 말씀드린 남성합창곡은 ’승려의 노래‘가 기억에 남습니다.”
- 작곡은 무엇인지요.
“작곡은 작곡가의 마음과 몸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의미 있는 소리의 나열’ 입니다. 이를 통해 자연의 테마가 풍요롭게 소리로 표현됩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청중들이 함께 듣고 느껴가는 것입니다.”
- 자신의 작곡에 관한 예술적 견해를 말해주십시오.
“결국은 자연을 이해하지 못하면 완성된 작품을 쓸 수도 이해할 수도 없어집니다. 자연 속에는 신비로움과 완벽함과 상상력과 감탄과 감동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연을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3월이 오면 줄콩을 심습니다. 그런데 내가 심는 줄콩이 살아나지를 못 할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시골 동네 분들께 물어보면 ‘줄콩은 다른 풀들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다른 풀들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함께 살아갈 수 있는데 ’이 씨‘는 (여기 시골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부릅니다.ㅎㅎ) 너무 성급하게 씨를 뿌렸다고 합니다.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면 저는 또다시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줄콩이 그것을 아는가?’라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신비로움에 빠져듭니다. 음악의 창조와 탄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작곡은 무서운 기다림 속의 신비로움입니다.”
- 작곡가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음악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음악예술가라는 촛불이 가슴 안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면 타오르지요, 사람마다 촛불은 큰 경우도 있고, 짧은 경우도 있고, 둥근 경우도 있고, 각이 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 작곡가나 연주가들 같은 분들은 더 큰 촛불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음악인들의 역할과 임무는 그 촛불을 계속 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예술가들이 되어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연세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국 아메리칸 콘서바토리 등에서 교수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셨는데,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으신지요.
“저가 지도한 학생들은 이제 모두 각 대학에서 학장급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재원 원장을 맡으면서 천재적 재능의 학생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중 1명이 영재원 1기 김현준 학생이었는데, 16살 때 국립오페라단에서 공모한 전막 오페라에 당선되었습니다. 김현준 학생은 ‘노랑나비의 꿈’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의 대본까지 스스로 집필했는데, 작곡 후 독일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병역의무를 다하기 위해 돌아와 공군에 입대해 공군군악대에서 근무 중입니다.”
- 우리 한국 창작 음악 작곡계가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요.
“나는 우리 전통음악 요소를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계속 말씀드려왔지만 사실 이것이 정말 어려운 것이 우리 것을 강조하면 시대적으로 뒤처지는 경우를 보게 되고, 서양식 기법의 음악을 너무 강조하면 우리 것이 묻혀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 하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것이 결코 ‘낡고 늙은 것’이 아니고 ‘오래되지만 값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를 오랜 세월 동안 세공하거나 오랜 세월 조개의 살 속에 있던 진주가 찬란하고 영롱한 알몸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 어디서 태어났는지요?
“아버님의 고향은 원산이셨고, 저희 7남매 중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큰 누나는 피아노를 전공했고, 큰 형은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둘째 누나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했고 바로 위 세째 누나는 피아노를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작곡을 공부했고, 남동생은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막내 남동생은 역시 작곡을 전공했는데 작고했습니다. 막내 동생은 컴퓨터 음악 작곡 등 저보다 더 재능이 있었습니다.”
- 중고등학교는 어디를 다니셨는지요?
“배재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밴드부를 했는데, 호른 주자였습니다.”
- 어릴 때 추억을 말해주세요.
“음악과 관계없는데 - 그런데 말씀을 다 들어보니, 결국 이 에피소드도 워낙 이나 음악가족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음악과 관계되는 것 같기도 했다 - 큰 형이 굴렁쇠를 굴리며 노는데, 나는 어리다고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방에 가서 SP 레코드 20여 개를 북아현동 고갯길 언덕 위에서 아래로 동네 친구들이랑 신나게 굴리고 놀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시던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등이 다 언덕을 구르며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엄마와 누님들 모두가 ‘넌 이제 죽었다’고 하며 걱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식사 후 신문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아버지 무릎에 앉으며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괜찮아’ 하시며 신문만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께서 그렇게 용서해주신 이유가 ‘알고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이 그 이후 저가 매사 정확한 편이지만 제자들이나 행정 직원들 등에게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 대학 대학원은 어디를 다니셨는지요?
“연세대학교 작곡과에서 나운영교수님 등을 사사했습니다.”
- 독일 뮌헨대학에 유학하셨습니다.
“네. 뮌헨대학에서는 카르미나 부라나를 작곡한 작곡가 칼 오르프(Carl Orff) 교수님에게 사사하였으나 지병으로 인해 1년 남짓 밖에 공부 못하였고 그 후 그분의 제자 킬마이어(Willhelm Killmayer) 교수를 사사했습니다.”
- 그리고 한국에 귀국해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다시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서 American Conservatory of Music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학교의 교수로도 계셨습니다.
“네. 1985년에 미국으로 갔고 1989년에 작곡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4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 마지막으로 전국의 음악인들과 무용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고, 이제 창간 12주년을 맞는 저희 무용과오페라에도 축하의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우리 집을 수리하던 배관공이 오늘은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늘 저녁에 베토벤 수업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클래식 음악예술이 이렇게 생활화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런 아마추어 분들은 대부분 ‘음악학원(Musik Schule)’에서 공부하며 전문 음악 전공자들은 ‘음악 대학(Musik Hoshschule)’에서 공부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음악교육기관이 모두 국립으로 교육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공부하는 이 ‘음악학원’(Musik Schule= 우리나라의 학원에 해당)의 교육 수준이 우리나라 음대 교육 수준보다 결코 낮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클래식음악이 더 우리의 삶과 생활에 가까워지고, 작곡가들끼리만 모이는 등의 작품발표회 풍조 등은 사라져야 합니다. 작곡가들은 쉽지만 격조 있는 음악을 써야 합니다. 음악가 혹은 무용가들은 뭔가 교육자의 입장이 되어 작품을 창조하고 무대에 올려야 합니다. 그것이 성공한 나라가 독일이며 우리나라도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그런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매달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월간지 무용과오페라의 창간 12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감사드립니다.”(송종건/월간지 무용과오페라 발행인/sjkd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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