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4년 병인(1626) 1월 15일(기미)
04-01-15[19] 전 행 홍문관 부제학 정홍익의 졸기
전 행 홍문관 부제학(行弘文館副提學) 정홍익(鄭弘翼)이 졸(卒)하였다. 홍익의 자(字)는 익지(翼之)이다. 인품이 단아하고 지조가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글을 잘 지었다. 선조조(宣祖朝)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성대한 명성을 얻었다. 정인홍(鄭仁弘)이 성혼(成渾)을 무고하여 비난할 적에 군소배(群小輩)가 일제히 일어나 마구 공격하였으나 홍익은 홀로 정도(正道)를 지니고 동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크게 거스렸는데 사람들은 그의 강직함에 탄복하였다. 광해(光海) 때에 모후(母后)를 폐하기 위해 백료들에게 수의(收議)할 때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면서 광해의 뜻을 받들어 따랐으나 홍익은 이항복(李恒福) 등 몇 사람과 함께 소장을 올려 직간(直諫)함으로써 무너지는 이륜(彛倫)을 부지시켰으니, 그가 목숨 바쳐 절조를 세운 것이 위대하다고 이를 만하다. 남쪽과 북쪽의 극변(極邊)에 유배되어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계해 반정(癸亥反正)에 승지(承旨)로 부름을 받았다. 이어 간원과 옥당의 장관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일찍이 장독(瘴毒)에 상하여 병이 이미 고질이 되었기 때문에 모두 배명(拜命)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염빈(殮殯)을 할 수 없었는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차탄하면서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귀장(歸葬)할 때에 이르러 상이 연로(沿路)에서 호송하도록 명을 내리고 또 군인(軍人)과 석회(石灰)를 지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