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선암사의 세월
순천시 조계산 동쪽 자락에 안겨 있는 선암사 전경
선암사는 순천시 조계산 동쪽 자락에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이자 창건한 지 천 년이 넘은 고찰이다.
그리고 조계산 반대편에는 조계종의 근본 사찰 송광사가 있다. 한국 불교계의 양대 산맥이라 하는
통일신라 시대 도선국사가 세운 선암사는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화재로 인해 몇 차례의 위기를
맞았는데, 조선 시대 정유재란 때는 거의 불타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후 부분적으로 중건해 다행히 옛 모습을 되찾았고 오늘에 이르렀지만, 화재를 예방하자는 뜻에서 산이름은 맑고 서늘한 청량산(淸凉山), 절은 바다와 샘을 의미하는 해천사(海泉寺)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선암사 곳곳에서는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려 전각 벽면에 새긴 물 수(水)자,
바다 해(海)자를 볼 수 있다.
우여곡절 속에 지켜진 천 년이 넘는 세월, 헤아리기도 힘든 시간 동안 수없이 바람이 들었다가
나가고 꽃이 피었다 졌을 테지만, 이 사찰은 여전하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끝없이 오가는 계절과 수행자 사이에서, 선암사의 아름다움은 낡지 않고
점점 깊어진다는 게 순천 사람들의 말이다.
오감 만족, 선암사 숲길
선암사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이어지는 1.5km 숲길이 오감을 자극한다.
조계산에 들어서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하면 조금 걸어 들어가야 한다. 가파른 산길이 아니라, 널찍한
숲길이라 걷기를 즐기지 않는 이들도 거부감 없이 갈만하다. 굴참나무를 비롯한 여러 수종이 어우러진 선암사 입구의 이 숲길은 담양군의 메타세쿼이아 길과 함께 전남을 대표하는 아름다움 숲으로
선정된 곳이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감을 여는 숲길이다. 폭신한 흙을 밟으면서 촉각을, 맑은 계곡
3월 말이면 나무에 싹이 모두 자라 연녹색으로 물들고, 숲이 그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응당 눈과 코도 즐거워진다.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 깨끗한 공기가 맛있게 입안으로
들어온다.
주차장에서 사찰 입구까지 약 1.5km로 영 짧은 길은 아니지만, 천천히 길을 음미하면서 걸어도
금방 끝에 다다르게 된다. 선암사를 만나기 전 훌륭한 워밍업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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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초입에서 만나는 승선교. 아치형으로 견고하다.
숲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이어주는 돌다리가 나오면 사찰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이는 선암사에 와서 꼭 봐야 할 세 가지에 속하는 보물 제400호 ‘승선교’. 물 위로 아치형을
이루고 있어 무지개다리라고도 하며, 그 아름다운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돼있다.
승선교 바로 뒤로 선녀가 오르내린다는 강선루가 보인다. 보통의 사찰은 일주문이 그 시작을
뜻하는 데 비해, 선암사는 강선루가 먼저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조금 더 걸어 올라오면 연못
‘삼인당’을 만난다.
안에 작은 섬이 들어있는 독특한 형태로 화재 시,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곧이어 우뚝한 굴참나무와 자그마한 차(茶)나무로 이뤄진 작은 언덕 위에 비로소 나오는 일주문.
한때 60여 채 전각을 거느렸던 사찰치고는 아담한 규모이지만,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꽃 피는 선암사, 그 화사함
선암사의 봄을 수놓는, 수령 600년 이상 된 매화나무
선암사 경내에는 꽃을 피우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아 특히 봄 풍경이 아름답다.
일주문을 지나 삼층석탑 2기가 서 있는 대웅전 앞마당부터 홍매를 볼 수 있는데, 나무 자체의
덩치가 커서 꽃이 만발하면 누구라도 탄성을 뱉을 만큼 수려한 풍경을 만든다. 선암사를 대표하는
명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선암매의 정확한 수령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사찰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약 600여 년 전에 심어졌다고 한다.
경내에는 50주 정도의 매화가 있는데, 그중 대부분이 사찰 안쪽 무우전 담장을 따라 모여 있다.
또, 원통전 뒤편에도 덩치 큰 백매를 볼 수 있다.
이 매화나무들은 천연기념물 48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선암사에는 매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백과 개나리를 더불어 커다란 왕벚나무도 선암사 꽃 대궐에 일조한다.
특히 무량수각 옆 수양버들처럼 아래로 늘어져 피는 벚꽃은 흔치 않은 장관을 이룬다.
이 밖에도 선암사 경내 곳곳에는 목련, 철쭉, 모란, 등이 봄이면 너나 할 것 없이 피어난다.
선암사의 진면목을 보려면 봄에 가야 한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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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로 누운 와송은 선암사의 또 다른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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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도 지정된 화장실, 해우소에서는 속세의 근심을 덜어낼 수 있다.
꽃 대궐이 화사한 선암사를 한 바퀴 돌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것이 와송과 해우소다.
천불전 앞에 있는 와송은 굵은 줄기 한편은 땅으로 눕고, 한편은 하늘로 솟은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앞서 말한 매화나무와 함께 600여 년 전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바로 앞 해우소는
문화재로 등록된 가장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 정호승의 시<선암사>에 등장한 곳이다.
사찰 전체의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는 2층 누각 화장실은 산세를 감상할 수 있어, 말 그대로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인 해우소(解憂所)라는 명칭이 딱 맞아 떨어진다. 정호승의 시 구절은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면 슬퍼하러 오는 게 아니라 해소하러 오게 될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선암사에 봄기운이 돌면 곳곳에 꽃망울이 터진다.
푸르게 우거진 나무가 맞이하는 숲길, 600년을 살아온 매화나무가 꽃을 피우는 담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해우소가 있는 선암사. 절을 모두 보고 다시 내려오는 길에는 무언가 마음이 홀가분한
것을 느낄 것이다.
꽃이 피어 마냥 화사할 줄 알았더니, 세월을 아는 나무는 옛이야기를 해주듯 푸근하고 아기자기한
사찰을 둘러보는 내내 평온함이 가시지 않기 때문. 시 속에 등장한 해우소에서도 밖으로 못다 한
말을 그한쪽 기둥에는 걸어두고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선암사의 세월에는 그렇게 다져진 내공의 분위기가 있다.
봄이 오면 선암사로 가자, 그 마음 다독여주는 산사로 꽃을 맞으러, 속세를 잊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