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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건국 영웅은 외부에서 온다...반론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은 외부에서 온 환웅의 아들입니다. 환웅은 하늘나라에서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고 웅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습니다.
단군은 은나라에서 온 기자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떠났습니다. 기자조선을 쓰러뜨린 위만은
연나라에서 온 망명인이었습니다. 마한을 세운 준왕은 기자조선에서 쫓겨온 사람이었습니다.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은 북방의 고리국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었습니다. 동부여를 건국한 해부루도 서방에서 옮겨온 사람입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지만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습니다.
백제를 세운 온조는 고구려에서 남하해온 인물입니다. 사로국을 세운 6촌의 족장들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는 양산 기슭에서 말과 함께 나타난 사람이며, 그 부인 알영도 홀연히 나타난 용이
낳은 사람입니다. 신라 석씨 왕조를 연 탈해도 왜국 동북쪽 1천리 너머에 있는 다파나국 출신(삼국유사에
따르면 완하국 함달파왕의 아들)입니다. 신라 김씨 왕조를 연 알지는 닭 울음과 함께 계림 숲속의 금궤에서
홀연히 나타난 사람입니다.
가야를 세운 수로왕도 하늘의 명에 의해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수로왕의 왕비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입니다. (이 정도로 약했다고 생각한 가야 왕실의 후계자들은 중국 전설의 소호 금천씨를 조상으로
끌어가는데, 이 이야기는 재밌는 게 많으니 다음 기회에 하겠습니다.)
대가야의 건국시조 뇌질주일(또는 이진아시, 또는 내진주지)은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와 천신 이비가지
(夷毗訶之) 사이의 아들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이 신화에서는 수로왕의 이름이 뇌질청예이며
뇌질주일과 형제로 나옵니다.)
이 시기는 신화의 시대로 건국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선조가 없이 홀연히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렇게 건국 영웅이 하늘이나 외지에서 온 것으로 포장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비주의 전략이죠.
성경에도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출생과정부터 뻔히 아는 사람을 존경하고
충성을 바치기는 쉽지 않았던 겁니다. 그 사람에게 뭔가 멋진 배경이 있어줘야 하는 거죠.
이런 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도 천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사이에서 나온
아마테라스의 자손이 신무천황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중국도 북두칠성의 첫째별에 번개가 치는 것을 본 소전국 왕비 부보(附寶)가 잉태하여 24개월만에 낳은 이가
황제(黃帝)라고 합니다. 은나라의 시조는 제비가 알을 떨어뜨린 것을 받아먹고 태어났다고 하지요. 주나라의
시조는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주의 시조인 기(棄)의 전설은 동명 전설이나 주몽 전설과
같습니다. 불길하다 생각하여 버렸는데(그래서 이름이 버릴 기(棄)입니다.) 동물들이 그를 보호해서 다시
데려왔다는 것이죠.
진(秦)나라 시조의 전설은 은나라 시조의 전설과 같습니다.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받아먹고 태어난 거죠.
하여간 제비란...-_-;; 한고조 유방도 교룡이 어머니를 겁탈하여 태어났다고 하죠.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죠. 길가메시는 자기의 2/3는 신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왕들은 하나같이 신을 아버지로 두고 있었죠. 로마의 왕도 트로이에서 왔습니다.
하찮은 종자로 보였던 아더 왕은 펜드래건의 숨겨진 아들이었죠.
이런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있다고요? 아닙니다.
왕은 원래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선왕들이 자신을 과인(寡人)이라고 한 겁니다.
(이 부분은 농담이 섞여 있습니다.
과인의 寡는 과부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 과인은 寡德之人의 약자로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겸양의 말이
원 뜻입니다.) 위 신화와 전설들을 살펴보면 아버지가 없거나 있어도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살펴보면, 하느님의 왕국을 세운 예수도 아버지가 없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뭔가 시사한다는 것을
알게 되죠.
단군이 즉위한 후 환웅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환○는 열외!) 주몽은 왜 북부여로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유리는 고구려로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온조는 아버지를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탈해나 준왕은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한고조처럼 분명한 역사 시대에 들어와 아버지의 역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교룡의 자식으로 날조하는 일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당시에 멋지다고 생각하여 꾸며낸 전설이 후대에는 엉뚱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기자(箕子)가 그에 해당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주에는 [위략]을 인용한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
기자는 누구일까요? 기자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신하 중 한 명으로 현인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은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으로 달아나 단군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집니다.
조선에 8조법금을 가르쳤으며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쳤다고 [서경] 홍범편에 나옵니다.
대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한국사학계에서는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무시하고자 합니다.
이 무시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기자동래설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기자가 동쪽으로 온 일이 없다는 거죠. 동쪽으로 오지
않았으니, 조선의 왕이 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설의 대표주자가 이병도입니다. 재야사가들은 허구헌날
식민사학자라고 이병도를 욕하지만, 이병도는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기자 조선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병도는 심지어 위만 조선의 위만도 한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죠.
다른 하나는 오기는 왔는데, 조선에는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자의 유물이 대개 난하 하류 일대에서 발견
됩니다. 그리고 이곳은 백이, 숙제가 있었다는 고죽국의 영역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로써 기자는 그 정도
위치까지만 왔으며, 그곳이 바로 기자 조선의 위치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천관우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이 주장은 약간 새끼를 칩니다. 기자 조선이 난하 하류에 있었으므로, 위략에 나오는 기자 조선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던 것이며,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그 동쪽에 여전히 있었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이 있습니다.
윤내현이 대표주자입니다. 당연히 위만이 빼앗은 조선도 그곳이며, 위만조선의 멸망은 고조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 됩니다. 더불어 한무제가 정벌한 왕검성도 위만조선의 수도일 뿐이라 그곳에 동방변군이 설립되었
다고 주장하지요. 전 포스팅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낙랑군 등이 난하 하류에 있었으니, 이 주장은 통짜로
완벽해 보입니다. (하지만 난하 하류의 동방변군은 후일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지난번 포스팅에서 보았죠.)
이 주장을 따르게 되면, 우리 역사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라는 것 빼고는 별로 기술할 일이 없는 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중국은 동방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술하지 않은 이상한 나라가
됩니다. [조선]만 빼고는 [부여]나, [한]도 기술하는데 [조선]만 기술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기자조선]은 왜, 어떻게 [조선]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었던 걸까요? 이 문제가 모두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요서에 있는 조그만 [기자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는 것이 두려워 한무제가 공격했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고,
그 공격이 1년이나 갔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민족주의에 눈이 멀지 않는 한, 이런 이야기를 믿을 수는 없겠지요.
한무제가 대군을 동원해 동방 원정군을 파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에 맞서서 1년여의 전투를 벌인
국가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국가는 위만이 세운 국가이며, 위만은 그 나라를 준왕으로부터
탈취했는데, 그 준왕은 자신을 기자의 후예라고 이야기했던 것이죠.
(위만 조선도 조금만 더 왕조가 지속되었으면 위만의 아버지에 대한 멋진 전설이 만들어졌을 겁니다.)
전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건국영웅의 화려한 치장에 [기자]가 동원된 것이죠. 현대의 관점에서는
“아, 쪽팔리게 중국인을 시조로 삼는 전설 따위를 갖고 있냐?”라고 하겠지만, 고대에는 그런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건국 영웅은 외부에서 오는 법이니까요.
쪽팔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해보죠. 고려 왕건의 조상은 당나라 사람입니다.
정확하게는 당나라 숙종이라고 이야기하죠. 고려사에는 대략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이 백두산에서 내려와 부소산(扶蘇山) 좌곡(左谷)에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어느날, 호경이 아홉 사람과 함께 매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바위굴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모두 위험해졌습니다. 동굴 안의 사람들은 머리에 쓰고 있던 관을 던져 호랑이가
선택한 관의 주인이 호랑이 먹이감이 되기로 의논했습니다.
호랑이는 호경의 관을 선택했고 호경은 호랑이와 맞짱 뜨고자 과감하게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 순간 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굴 안의 아홉 사람은 모두 죽었죠. 사실 그 호랑이는 여신이었습니다.
호경은 여신과 결혼하여 산중대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처를 잊지 못해 가끔 산을 내려와 본처와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 강충(康忠)을 낳았습니다.
강충은 산 남쪽에 송악군을 세우고 이제건((伊帝建)과 보육(寶育)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보육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둘째의 이름이 진의(辰義)였습니다. 당 현종 천보 12년(753년=신라 경덕왕 12년)에
현종의 태자(후일의 숙종)가 고려 패강(浿江=예성강) 서포(西浦)에 유람을 왔습니다. 태자는 송악군까지 놀러와
보육의 집에 묵었습니다. 보육은 진의를 들여보내 태자를 한 달간 모시게 했습니다.
(여기에 오줌을 누어 삼한을 덮는 꿈을 사고파는 이야기도 곁들여 있습니다.)
태자는 진의가 임신하였음을 알고 활과 화살을 증표로 주고 당으로 돌아갔습니다. 진의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작제건(作帝建)이라 지었습니다. 작제건은 16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당으로 떠났으나
풍랑을 만나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대신 용왕의 장녀 저민의(渚旻義)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저민의는 뒷날 원창 왕후(元昌王后)라는 시호를
받는군요. 저민의는 황룡의 현신이었습니다. 여자모습은 당연히 폴리모프 상태였던 거죠. 변신하는 모습을
보지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작제건은 그 모습을 엿보고 맙니다. 황룡 저민의는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지요.
작제건과 저민의 사이에는 4남이 있었는데, 장남이 용건(龍建=왕륭)이었습니다. 이 용건의 아들이 바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입니다.
고려 왕실 계보는 외가쪽 조상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친가로는 당 황실이 조상이군요. 왕건은 당숙종의
손자입니다. 이 설은 “연대가 맞네, 안 맞네” 하면서 당 황제를 숙종이 아니라 선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 논쟁이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 학자가 물어보는데서 시작된 것을 보아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려 왕실이 당나라 황실의 후예라는 주장을 오늘날 믿는 학자는 없습니다. 고려 왕실이 지어낸 뻥인 게
분명하니까요. 위에 고려 왕실의 전설을 보면 알겠지만, 산신에 신라 태종왕의 문명왕후 전설까지 끌어오고,
거타지 설화까지 집어넣은 종합선물세트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 종합선물세트 중 가장 핵심은 역시
당 황제입니다. 건국 영웅은 외부에서 와야 하거든요.
이렇게 외부에서 온 건국영웅이란 그 나라의 역사 소속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재야사가들은 금 태조 아골타의 8대조 함보가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므로 금나라 역사는 한국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고려는 당숙종 손자가 세운 나라이므로 중국사인 것이죠.
우리나라 역사는 금나라 역사이고, 고려사는 중국사인데 우리는 중국사를 배우며 한국사라고 하고,
한국사를 배우면서 중국사라고 하고 있는 거죠. (아이고, 헷갈려라)
그런데 함보가 신라인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함보가 고려인이라면, 고려는 중국사니까 고려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금나라도 중국사가 되어버리는 군요. 그럼 한국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것 참...
이것 역시 전설일 뿐입니다. 기자 전설처럼 금 왕실은 이 전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금사]에 적혀 있는 이야기니까요. [금사]는 원나라 때 쓰인 것이니 원나라 학자들이 금을 미워해서 일부러
그렇게 적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전설은 송나라 포로로 금나라에 잡혀 있던 홍호가 쓴
[송막기문]이라는 책에도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려사]에도 실려 있습니다.
[금사]에는 고려인이라고 적혀 있으며, [송막기문]에는 신라인, [고려사]에는 국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아(我)]라고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당대기록인 [송막기문] 쪽이 더 정확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금나라가 뭐가 아쉬워서 쪽팔리게 신라나 고려 사람을 조상이라고 했겠느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스스로는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하니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조상을 깔보는 민족주의자라...금나라의 저 시조 전설을 정말로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우리는 저 전설을
신라가 그렇게 쪽팔린 나라가 아니었다는 증거로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금나라 역사가 우리꺼라고
주장하는데 사용해서는 안 되지만 말입니다.
저 전설이 사실인건 사실이지 않건 간에, 금 황실에서 신라를 쪽팔린 나라로 생각했다면 저 사실은 전해지지
않고, 뭔가 그럴듯한 전설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우리는 금황실이
자신들이 신라인의 후예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금나라 역사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기자를 숭배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쪽팔려 하고, 조상들을 욕하는 것이죠. 그리고 한낱 왕가의
전설을 따라 금은 우리 역사에 넣고, 조선은 우리 역사에서 지우려는 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건국 영웅인 이성계도 외부에서 온 사람이었죠. 이미 근대로 들어온 시점에서 조상을
신으로 바꿔치기는 못했지만, 아쉬운 대로 삼한일통의 주역 태종무열왕을 조상들의 외가로 두었습니다.
기억하세요. 건국 영웅은 외부에서 왔다는 것. 우리 역사건, 중국 역사건, 어디 역사건 그러했다는 것을.
[앵무새들의 합창]
<잠본이> 뻔히 알면서도 미처 연결지어 생각지 못한 사실들이로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leinon> 태클은 아니고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임금이 '과인' 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겸손함의 표현
아니었나요? 짐이나 고, 마마 따위처럼요.
<시퍼렁어> 근데 과거에 연연하는거 보면 좀 웃기기도 한데요 이지역에 존재했을뿐이지 우리 역사인건
아닌거 아닌가 -_- 과거의 나라는 과거에서 종결되는거지 없어진 국가를 우리거 남의거 하는건 무슨
이야기인지 뭐 고조선을 이어 조선을 개창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뭐 그당시 그렇게 이야기 한거고...
왕조시대라서 그런지 저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 먼나라 들인듯...
<초록불> 잠본이님 / 감사합니다.
leinon님 / 맞습니다. 일종의 말장난을 한 셈인데, 자세히 적을 것을 그랬나 봅니다. 과인은
寡德之人의 약자로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겸양의 말이 원 뜻입니다만, 과부를 나타낼 때의 寡자기도 해서
(환과고독 같은 경우에도 쓰이죠.)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짐"에는 이런 겸양의 뜻이 전혀 없습니다.
시퍼렁어님 / 현대인이시군요...^^;;
<페로페로> 정리해 두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 초록불님 말씀듣고 있으면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런것들이 많습니다, 또한번 다시 정리해볼 내용이 생겼네요.
<措大> 이런 글은 정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탁 하고 치게 됩니다. 신열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읽었는데, 무의식 중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군요. 소위 민족사학이라는 이들은 왜그리도
"오늘의 피아" 구분을 턱없이 소급시키려는지 모르겠습니다.
<풍백비렴> 확실이 그렇군요. 그런데 왜 하필 건국영웅은 외부에서 왔어야 할까요. 단지 신비감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었나요? 조금 이유가 약한 느낌도있는데..
<초록불> 풍백비렴님 / 실제로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닐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고대에는 발달한
정치 경제 기술을 가진 집단이 들어와 정권을 장악했겠지만, 나중에는 집단 내부에서 권력을 잡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권력을 잡은 집단은 조상을 높일 수밖에 없었죠. 왕건이나 이성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출신내력을
주위에서 다 아니까 조상을 높이면서 외부에서 권위를 빌려오게 되는 거죠.
<solette>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결국 그 당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을 괜히 요즘
사람들이 멋대로 부풀려서 왜곡하는 것이 문제군요...;;
<날씨좋다> 오홍... 좋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후세는 선조가 멋진 배경을 타고나는 걸 바라나봅니다
(껄껄)
<한도사> 이번 대통령은 누굴 뽑아야 할까요. 클린턴이 요새 쉬고 있다는데, 데려다가 한국 대통령을
시키면 참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왕은 외부에서 온다니... 클린턴이 대한민국에 집권하면, 여태까지 한국
대통령들보다는 훨씬 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에휴... 저런놈들중에서 인물을 뽑아야 하는 우리 민족도 참
불쌍한 민족입니다...
<초록불> 한도사님 / 출마하시는 겁니다!
<2007/02/02 02:24> 비공개 덧글입니다.
<초록불> 비밀글 / 그렇군요. 굳이 폭파할 거야 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혜미오빠> 내년 상반기 SBS에서 방송예정인 `단군(가제, 극본 야설록, 제작 JS픽쳐스)`과 구체적
방송시기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MBC가 저작권 단독계약을 맺고 드라마로 제작하기로 한 가야를 무대로 한
소설 `제4의 제국`이 바로 그 작품.
우선 100부작 사극 `단군`은 기원전 23세기 동아시아의 혼란기에 등장, 티베트에서 사할린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한민족의 시조 단군의 일대기를 다룰 예정이다.
제작사인 JS픽쳐스 관계자는 "고대사에 대한 고증된 자료가 워낙 부족해 역사서 `한단고기`를 참조하되
판타지적 요소를 많이 가미해 대본 작업중이다"라고 밝혔다. ㄱ- SBS 야..
<초록불> 혜미오빠님 / 그 이야기 들었습니다. 정말 큰일입니다. <슈타인호프> 티베트에서 사할린......
(말을 잃었음)
<BigTrain> 티베트에서 사할린이라.. 메소포타미아까지 안 넘어간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네요.
저 방송사들은 80년대, 90년대 재야사학자들의 만주고토 타령이 동북공정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알기는
아는지. 참 큰일입니다.
<한도사> 100부작 단군 얘기는 들었는데, 저거 반대시위라도 해야 하는건 아닌가 싶습니다. 드라마
연개소문도 완전히 개판 판타지 만들어놔서 역사를 코메디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요새 한국의
국수주의적 역사왜곡을 보노라면, 20세기 초반의 일본제국이 자꾸 떠오릅니다. 우리도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일본과 중국인보다 문명인은 아니라는...
<개발부장> 역시 초록불님이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잠본이> 티벳에서 사할린......OTL
<홍비홍신랑> SBS에다가 왜 고작 사할린에서 티벳까지이냐고 항의글이나 쓸까나.....그 이전에 수밀이국
(수메르)는 어쩌고.........나 참....나라가 망하려나??? 한도사님 말씀처럼
연개소문하고 주몽 보시면서 "자꾸 저한테 저게 사실이냐? 앞으로 어떻게 되냐?" 이렇게 물으시는 저희
어머니, 장모님, 집사람, 동생들.....정말 미칩니다....한숨만 나오구요......드라마 조선왕조500년도 완벽한 정사라고
믿으시고, 허준도 100프로 사실이라고 믿으시는 울 외할머니도 계시고.........
아무리 시청률도 좋다지만 어찌보면 몽매한 국민들의 정신세계를 오염시키는 최대 주범은 방송국이 아닌가
싶네요....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들딸들은 어떻게 해야하죠? 눈과 귀를 죄다 막아버릴 수도 없고...덧글쓰다가
갑자기 짜증이 물밀듯......
<초록불> 홍비홍신랑님 / 제 책이 출간되면 한권 비치해 두었다가 자제분이 혹여 혼란에 빠지면
읽어보라 하시면 됩니다. 뭘 걱정하세요. (자, 한 권 팔았다...^^)
<홍비홍신랑> 초판본으로 구입합지요...^^어떤 분이 금동 김동인의 [춘원연구] 초판본을 소장하고 계셔서
(사실 헌 책방에서 우연히 매우매우 싸게 구하셨답니다. 책방 주인이 그 책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바람에
다른 책 살 때 서비스로 받았답니다)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데....우리 자손들도......^^
<겨울사랑> 저는 주몽이나 연개소문을 안보는데 가끔 보시다가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어머님과 와이프
때문에 진땀을 빼죠. ~~에서는 이렇던데 왜그래? 아, 진짜... 그건 역사적 사실이 아닌 드라마라니깐...-_-;;
<총천연색> 후...한숨만. _-_ '건국 영웅은 외부'라는 공식 잘 알았습니다.
<amish> 원래 방송국은 대책없지요-_-..
<이야타> 초록불님 이 글도 좀 퍼가도 될런지오??? 물론 출처 확실하게 밝힐거구요 초록불님
이글루스도 주소 올려놓을 생각입니다. 디시인사이드 드라마 천추태후 갤러리에 올려놓고싶네요^^;
혹시 정 꺼려지신다면 답글 달아주십시오. 그럼 제가 조만간 와서 보고 함부로 퍼간 글을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초록불> 방어가 되지 않는 곳에 글을 버려두는 것을 싫어해서 퍼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게시판 분위기를 모르겠는데,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면 지워주시면 되겠습니다. 괜찮다고 여기시면 그냥 두어도
무방하겠고요.
<이야타> 초록불님 아주 뒤늦은 인사이지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천추태후라는 드라마
(현재 KBS 2TV 주말 10시에 방영중이랍니다)에 나왔던 경종이라는 캐릭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1,2월달 내내
디시인사이드 천추태후 갤러리에서 놀고 그랬답니다.^^;거기서 역시 경종팬인 한 분께서 경종폐하의 멀고먼
조상님들의 이야기 -
당나라 숙종의 사생아인 작제건의 탄생설화 -.- 포함 - 를 [ 전설따라 삼천리 ] 란 제목으로 글을 올리셨길래
그 글을 읽으면서 갑자기 초록불님의 [ 건국영웅은 외부에서 온다 ] 라는 글이 생각나서 올려본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사극갤러리인지라 역사에 나름 관심들이 많은 분들도 몇몇 있으신지라 꽤나 여러가지 다양한 반응을
기대하며(" 와~ 이런 관점도 있을 수 있구나!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네~ 이 분 싸이트 좀 가르쳐주셈~~ *_*
" <- 요런 호응(?)을 사실 기대했었다는 ^^;;;;) 올려보았는데 생각보다 아주 조용하게 아무 탈없이 지나가더라
구요 ^^; 그래서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ㅎㅎ
<이야타> 그나저나 얼마전에 책을 읽다가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직지심체요절의 원제목을
보고 깜놀했답니다.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 을 보고 혹시 초록불님의 닉넴의 기원???이 여기에서
비롯된게 아닌가 싶어서요 ^^ ㅎㅎㅎ 아닌가요?????????? 아무튼 왠지 반갑더라구요 <- 이상한데서 급반가
움을 느끼는 1人. ㅋ~
<초록불> 아니지만 검색하다보면 같이 나오곤 하더군요.
<Tzar Bomba> 참으로 좋은 글이군요. 님 블로그가 3년 연속 파워블로그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요. 킁
<초록불> 고맙습니다.
<김갑환> 은나라는 중원의 조그만 지역을 차지하는데 불과했는데 거기서 기자가 그 머나먼 한반도
까지 건나가 영향력을 끼칠리가 없다고 중국사(공대지만 교양으로 들었습니다)에서 가르치더군요. 따라서
기자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한국에 책봉조공을 했던 것을 기억하여 만들어낸 역사라고 생각하는게 옳다고
하는데 초록불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초록불> 기자 문제에 대해서는 태그를 이용해 주십시오...^^
<김갑환> 음. 초록볼님께서는 기자조선이라는 존재가 꽤 오래전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초라한지 또는 화려한지는 제쳐두고 전설의 근원이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거 같은데 맞습니까?
예를 들면 중국에 넘치는 홍수로 인해 치수잘하는 사람을 우두머리로 뽑던 시절이 훗날 용을 부려 왕이
되었다라는 신화로 남은 것처럼요.
<초록불> 태그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천관우 선생의 의견처럼 기자족의 일부가 이동해 온
사실이 후대에 기자라는 문화영웅으로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갑환> 천관우 선생님은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은 다르다라는 견지인 것 같은데...제가 배우기로는
중국이 전국시대(시대명칭은 정확한지 모르겠으나)로 혼란스러울 때에 나라가 망해서 위만과 그 일당들이
고조선으로 도망쳐와 허락받고 위쪽에 자리잡아 중궈와 고조선의 완충역할을 하다가 이내 고조선을
따먹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랬던 위만이 기자조선의 뒤를 이었다고 한다는 것인데..그럼..따먹은 고조선은 기자조선일테고..혼란스럽군요 \아니면 위만의 멸망당한 나라(작년에 배워서 까먹었네요.)가 기자조선일까요
<초록불> 기자조선은 춘추전국시대 그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며
이미 간략한 설명은 블로그에도 들어있습니다. 그보다 더 정보가 필요하시면 직접 논문이나 책을 살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좀 간단한 정보는 한국사시민강좌 제2집 /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송호정)를 참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절초> 문득 생각났는데 이승만 선생도 외부(미국)에서 오셨군요.(...) 아 그래서 국부....죄송합니다 orz
<초록불> 이승만은 자신의 정체성을 왕족에서 찾았다는 이야기도...(쿨럭)
○○○○○○○○○○○∞∞∞※∞∞∞○○○○○○○○○○
◀■ 반론에 앞서 ■▶
1. 첫 번째로 우리가 이 글에서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될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해 [앵무새]가 은근슬쩍
주장하고 싶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잘 꾸며 놓은 그럴듯한 포장包裝을 벗겨내는 일이다.
사실 [건국영웅建國英雄은 외부外部에서 온다] 는 전제前提에 대해서는 필자筆者도 공감共感한다. 분명하게도
역사적인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얼핏 훑어보거나 역사에 조금 식견識見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읽으면 정말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본질本質은 그게 아니다. 필자筆者는
벌써부터 이러한 서술방식敍述方式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속셈]을
놓쳐버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읽는 사람들에게 어줍지 않은 <눈속임>을 하여 저도 모르게 끌려 들어오게 하려는
[앵무새]의 진짜 의도意圖는 이렇기 때문이다.
1) 먼저 역사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건국영웅建國英雄들이 외부外部에서 온다]는 일반적인 사실事實을 표면에
부각浮刻시켜 독자讀者들의 공감대共感帶를 형성한다.
2) 이어서 곧바로 [기자箕子의 문제]를 서두序頭에 집어넣은 다음부터 차츰 우리나라의 시조始祖나 역사
이전의 개국조開國祖 들을 [아비 없는 자식子息 혹은 한족漢族이나 서방西方의 신이神異한 탄생설화誕生說話]
와 혼돈混沌시켜 믿지 못할 이야기나 아예 신화적神話的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으로 세뇌洗腦시키려는
<인식화認識化 작업作業>을 시작한다.
3)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말미末尾에 이르면 아주 극적劇的인 상황이 연출된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기자箕子]의 문제로 곧장 접근하여 그가 아무런 신화적神話的 색칠이 없는 <실존인물實存人物>로서 정말로
외부外部에서 온 [조선건국朝鮮建國의 영웅英雄]이라는 서술입장敍述立場을 강조하는 가운데 이글의 대미大尾
를 장식裝飾하고 있다. 착하게(?) 읽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우물 속에 빠진 꼴이다.
4)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꾸며 놓은 장치裝置는 더욱 <드라마틱>하다. 갑자기 왕건王建과 이태조
李太祖 문제까지 언급하면서 이번엔 아예 금태조金太祖의 선조先祖 이야기까지 양념으로 곁들여 우리의
역사를 되찾으려는 일단의 학자學者들을 모조리 정체성正體性이 없는 부류部類로 매도罵倒하는 가운데
이런 가운데 오로지 정확한 사실은 [기자箕子]뿐이라고 아예 못을 박는다.
실제로 [앵무새]는 결론結論 부분에서 사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그리고 금金의 선조先祖를 그렇게 만든 것은
전적全的으로 우리들의 잘못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런 억지가(?) 금金나라 역사의 정체성正體性을 뒤흔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독자讀者들의 의식意識을 교묘하게 유도誘導하고 있다.
그러면서 금金의 시조始祖가 그대로 개국자開國者인 것처럼 [기자箕子]도 [조선朝鮮의 개국자開國者]란 정체성
正體性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게 아니라고 마지막 방점傍點을 찍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앵무새]의
속셈이 그대로 나타난 구절句節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고 한낱 왕가王家의 전설傳說을 따라 금金은 우리 역사에 넣고 조선朝鮮은 우리 역사에서 지우려는
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주...아주 고단수高段數의 [초점 흐리기와 핵심核心 비틀기]이며 따라다니는 [작은 앵무새]들의 눈까지
멀게 만드는 고단위高單位 처방전處方箋이다. 그리고 그런 악의적惡意的인 서술방식敍述方式의 대미大尾를
[앵무새]는 이렇게 끝맺고 있으며 여기에서 그가 가장 말해주고 싶었던 결론은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런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조선朝鮮이 기자箕子를 숭배崇拜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쪽팔려 하고
조상祖上들을 욕하는 것이죠]
이밖에 나머지 주장들은 다만 [기자선조설箕子先祖說]의 극적劇的인 효과를 높여주기 위한 무대舞臺 위에
설치된 조명照明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결론結論 부분 원문原文을 다시 소개하면 여러분들도 이젠
확연히 다른 진실眞實이 보일 것이다.
[결론結論 부분 원문原文]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금金나라 역사의 정체성正體性을 뒤흔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조선朝鮮이 기자箕子를 숭배崇拜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쪽팔려 하고 조상祖上들을
욕하는 것이죠. 그리고 한낱 왕가王家의 전설傳說을 따라 금金은 우리 역사에 넣고 조선朝鮮은
우리 역사에서 지우려는 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2. 두 번째로 [앵무새]의 글은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세 단락段落>으로 압축壓縮할 수가
있음을 일견一見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 속을 들추어 보면 그야말로 원하는 방향으로 논지論旨를 전개展開
하기 위한 아주 기막힌 [연결장치]라는 점이 확연하다.
[단락 1] 건국영웅建國英雄은 외부外部에서 온다는 기본 전제前提이다.
[단락 2] 시조始祖의 출생出生은 대개 아비가 없다는 논리구조論理構造이다.
[단락 3] 우리나라의 기원起源은 기자箕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결론부분이다.
참으로 영악獰惡하다 못해 교활狡猾하기까지 한 설명구도說明構圖이다. 그러니 위에서처럼 [작은 앵무새]들이
호들갑을 떤 것도 모자라 골이 빈 머리를 흔들며 파닥거릴 만도 하다. 따라서 필자筆者도 본론本論 부분을
이와 똑같은 설명구도說明構圖에 맞추어 견해見解를 밝히려고 한다.
3. 세 번째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 부분이다.
틀림없이 왕건王建을 당唐 황실皇室의 출자出自로 바꾼 이들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물든 당시 고려조高麗朝
의 왕실王室 세력들이었으며 [참된 역사를 회복하려는 진정한 재야학자在野學者]들은 이 부분을 치욕恥辱으로
생각하면서 철저하게 부정否定하고 있는 입장이다.
4. 네 번째로 [앵무새]의 논리論理는 [금태조金太祖의 전설傳說] 대목부터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이는 스스로 원하는 무리無理한 결론結論을 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주장과 재야사학계在野史學界의 견해見解
들을 제 입맛에 맞추어 마구 뒤섞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원문原文을 같이 보고 이야기해보자.
[앵무새의 주장 1]
재야사가在野史家들은 금金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의 8대조代祖 함보函普가 신라인新羅人 또는 고려인高麗人
이므로 금金 나라 역사는 한국사韓國史라고 주장합니다.
[필자筆者 견해]
상당 부분은 맞다. 다만 [민족사학民族史學 진영陣營]에서는 금金이 우리와 동일한 민족적 근원根源을
공유共有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라는 의견에서 일치一致할 뿐이지 그들의 역사가 곧 한국사韓國史에
포함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금金은 당연하게 [중국사中國史]에 포함되거나 우리와는 역사적歷史的*민족적民族的
근원根源이 전혀 다르다는 게 아니라 뿌리가 [단군조선 제국檀君朝鮮帝國]에서 갈라진 [같은 동방민족東方民族
역사의 한 부분]라고 주장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앵무새의 주장 2]
그런 논리論理를 그대로 적용하면 고려高麗는 당唐 숙종肅宗 손자孫子가 세운 나라이므로 중국사中國史인
것이죠. 우리나라 역사는 금金 나라 역사이고 고려사高麗史는 중국사中國史인데...
[필자筆者 견해]
[사대모화론자事大慕華論者]들의 주장일 뿐이다. [고려高麗 시조始祖-당唐 황실皇室]이라는 웃음거리는
이미 앞서 설명한 대로이고 이 때문에 중국사中國史의 일부라고 보는 멍청이들은 [사대모화론자事大慕華論者]
의 견해見解를 충실하게 따른 [앵무새]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 역사=금金의 역사]는 [앵무새] 동산에서 상상 속에서만 펼쳐진 <코메디>이다. 한 마디로
의도意圖하고 있던 논리論理를 성립시키려고 억지로 끌어다 두들겨 맞춘 흔적이 역력한 부분이기도 하다.
[앵무새의 주장 3]
우리는 중국사中國史를 배우며 한국사韓國史라고 하고 한국사韓國史를 배우면서 중국사中國史라고 하고
있는 거죠. (아이고 헷갈려라)
[필자筆者 견해]
위와 같이 [변종사학자變種史學者]들의 기본 입장과 민족사학계民族史學界의 태도를 윤색하여 뒤섞어
놓았으니 당연히 머리가 아플 만하다. 현재 [재야사학계在野史學界]에서는 누구도 이렇게 결론結論을 내리지
않는다. 도끼로 제 발등을 찍었으니 다리가 아플 텐데 왜 머리까지 헷갈릴까? 머리도 찍었나 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전형典型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앵무새의 주장 4]
그런데 함보函普가 신라인新羅人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함보函普가 고려인高麗人이라면 고려高麗는 중국사
中國史니까 고려高麗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금金 나라도 중국사中國史가 되어버리는 군요.
그럼 한국사韓國史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것 참...
[필자筆者 견해]
거듭 말하지만 [변종사학자變種史學者]와 [재야사학계在野史學界]의 주장들을 한 바구니에 담아 놓았으니
이런 소설이 나온다. 그야말로 자신이 만든 논리論理의 쳇바퀴 속에서 자기가 빠져 바퀴를 굴리고 있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의 모범이다. 그러므로 한참 돌리다가 머리가 어지러워 갈피를 못 잡고
[그럼 한국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라고 지저귀면 지나가던 개도 웃는다. 이것 참...
[앵무새의 주장 5]
그러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금金 나라가 뭐가 아쉬워서 쪽팔리게 신라新羅나 고려高麗
사람을 조상祖上이라고 했겠느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스스로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
라고 주장하니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조상祖上을 깔보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라...
[필자筆者 견해]
[금나라가 뭐가 아쉬워서 쪽팔리게 신라나 고려 사람을 조상이라고 했겠느냐?] 는 쳇바퀴에 빠진 [변종사학자
變種史學者] 들의 반박反駁이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
라고 천연덕스럽게 옷을 바꾸어 입고 있으니 [민족사학계民族史學界]에서 [참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젓는 것이다.
[재야사학계在野史學界]의 단호한 입장은 필자筆者가 주장 1)에서 충분하게 설명하였다. 자기 조상祖上을
깔보면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라는 허울 좋은 탈을 뒤집어쓴 한심스러움이 너무 지나치다.
[앵무새의 주장 6]
저 전설傳說이 사실인건 사실이지 않건 간에 금金 황실皇室에서 신라新羅를 쪽팔린 나라로 생각했다면
저 사실은 전해지지 않고 뭔가 그럴듯한 전설傳說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우리는 금金 황실皇室이 자신들이 신라인新羅人의 후예後裔라는 것에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필자筆者 견해]
이 부분은 제대로 설명되었다. 금金 왕조王朝 스스로 자기들의 역사서歷史書에 기록할 정도였으니
더는 사족蛇足을 붙일 까닭은 없다. 이 점은 [민족사학民族史學 진영陣營]의 입장과 거의 같은
맥락脈絡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앵무새]는 [건국영웅建國英雄]으로서 [기자箕子]의 존재를 부각浮刻시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위에
언급한 대목부터 비유比喩를 근본적으로 잘못 들었으며 이 때문에 이윽고 제 가슴에 자기 칼을 꽂은 셈이
되고 말았다.
◀■ 본론 시작 ■▶
먼저 결론結論부터 내리자면 이 글의 제목題目은 이렇게 바뀌어져야 한다. [건국영웅建國英雄은 외부外部
라고 해도 반드시 북방北方이나 동방東方에서 온다] 즉 기자箕子처럼 남방南方에서 거꾸로 올라오거나
근원根源을 서부西部에 두고 진입進入해오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일관성一貫性 있게 북방北方과 동방東方에서 진출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모두가 [단군조선 제국]
에 뿌리를 두고 진화進化한 [유라시아 초원草原의 유목사회구성체遊牧社會構成體]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立證하는 기록들은 의외로 많으며 이를 이미 [초원의 지배자]라는 글에서 밝혀주었다.
제1절 건국영웅建國英雄은 외부外部에서...그것도 반드시 북쪽이나 동방東方에서 온다.
먼저 지속적으로 동방東方에서 밀려와 새로운 왕조王朝를 개창開倉하거나 특별한 국가國家를 건국建國한
[단군조선제국문명檀君朝鮮帝國文明의 충실한 전파세력傳播勢力들과 그를 계승繼承한 투르크Turk-몽골 계열
系列] 집단들이
고대문명古代文明 발전시기의 운명을 좌우하는 구심점求心點으로서 본질적本質的으로 작용함으로서 이를 두고
<요르다네스Jordanes>는 [대륙 아시아는 모든 민족국가民族國家의 자궁uagina gentium이며 아시아의
게르마니아germania이다]라고 묘사描寫할 정도였다는 사실로서 이 단락段落을 시작한다.
1. [단군조선 제국帝國]의 충실한 전도사傳道師로서 다른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誇示한 지배자들
1) 다만 흑해黑海 너머에서 서진西進했다는 것만 알려질 뿐 어디에서 온 종족種族인지 분명치 않다는
[히타이트Hittite]는 서방西方의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당시 학자學者들의 인식을 살펴보면
기존의 유럽을 포함한 지중해地中海와 소아시아 지역 세력 집단 움직임의 행동반경行動半徑에서 벗어난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세력이라는 느낌이 매우 강하다.
이런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명확한 입증立證으로서 이들은 분명하게도 [동방東方 루트와 연결되었던
러시아 서남부를 통해 북쪽에서 진입進入한 족적足跡이 뚜렷하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 결과로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2) 전성기全盛期에 서아시아를 비롯해 소아시아 지역까지 지배한 [수메르Sumer]도 기록에 <북쪽에서 온 검은
머리의 세력-사실은 동쪽에서 확산擴散된 진출로進出路를 경유經由하여 북부에서 내려 온 듯하다]이라고
표현되었다. 이들 문명은 <앗시리아Assyria-바빌로니아Babylonia>로 연결된다.
3) BC 1200년 무렵의 [푸리기아Phrygya(부리지아Brygya 즉 우리말 부리*불 계열)-트라키아Thracia 종족種族]
들이 세운 소小 왕국王國들은 한 때 <탈그렌Tallgren>에 의해서 <인도-유럽 계통>으로서 헝가리Hungary나
루마니아Romania를 기원起源으로 보았지만 <동방민족東方民族의 언어형식言語形式>을 주로 사용한 매우
깊은 민족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현재 거의 정설定說로 굳어졌다.
4) BC 750년-BC 700년 경 [스키타이Scythai 인人]들은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투르가이Turgay 지역과
우랄Ural 강江 지대에서 이동하여 남부 러시아에서 키메르인(Cimmerians-이들도 역시 초원草原 유목기병전사
遊牧騎兵戰士들인 푸리기아 즉 부리지아 계열로 보고 있다-Benveniste Societe Asiatique에서의 발표)들을
몰아냈다.
[키메르 인人]들의 일부가 남방으로 도주하여 트라키아(스트라보Strabo의 기록-헤로도투스Herodotus는
콜치스Colchis)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가 프리기아(BC 720년 겅) ⇨ 카파도키아Cappadocia와
킬리키아Cilicia(BC 650년 경) ⇨ 폰티스Pontis(BC 630년 경)에 도착했다.
[스키타이]의 수령首領인 바르타투아Bartatua는 코카서스Caucasus를 통해 데르밴드Derband 통로로 추격하여
그 무렵 국경인 카파도키아Cappadocia와 킬리키아Cilicia로 밀려들어 압박해오고 있는 공동의 적(키메르 세력)
에 대항하자고 신중하게 앗시리아Assyria에 접근한다(이후 거의 1C 동안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결국 <앗시리아>의 묵인 아래 폰티스Pontis로 들어가 마침내 <키메르 인人>들을 격파하였다(BC 638년).
바르타투아Bartatua의 아들인 마디에스Madyes(헤로도투스 기록) <앗시리아>가 이란Iran 북서부에 있던
메디아Media의 공격에 도움을 요청하자 직접 쳐들어가서 메디아를 정복했다(BC 628년 경).
이후 아르메니아Armenia까지 정복한 <스키타이>는 메디아에서 악사레스Cyaxares의 반란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7년간 소아시아 지역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맹주盟主로서 군림한다.
북쪽 초원에서 온 강맹强猛한 기마군단騎馬軍團을 가진 유목민遊牧民 정복자征服者는 카파도키아Cappadocia
에서 메디아까지 그리고 코카서스에서 시리아Syria까지 구세계인舊世界人들에게 전율戰慄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후 서아시아의 맹주盟主로 올라서려는 페르시아Persia의 퀴루스Cyrus가 감행敢行한 마사게테(Massagetae-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호레즘Khoresm 지방인 히바Khiva의 동부 지대) 원정遠征으로 소아시아의 패권覇權은
돌려주었지만
다리우스Darius의 <트라키아-벳사라비아 즉 몰도바Moldova>를 거친 유럽 원정(BC 514년-BC 512년)은
전형적인 유목민遊牧民의 전술에 따라 현명하게 유인하여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서 그 후 BC 200년대
까지 [드네프로Dnepro 강江과 폴란드Porland 동부 부그Bug 강江 사이의 우크라이나Ukraine 남부-유럽-키에프
Kiyev 남부와 보로네즈Voronezj 지역-동쪽으로는 볼가Volga 강江을 건너 사라토프Saratov]에 이르는 지역의
패자覇者로서 군림한 것이다(헤로도투스*Max Ebert).
□□□□□□□□□□ [여기서 잠깐] □□□□□□□□□□
이들은 흑해黑海 북부인 남부러시아의 [프리기아Phrygia 인人에 뿌리를 가진 키메르Cimmerian 문명으로서
최대 BC 1400년-최소한 BC 1000년까지] ⇨ 간자Gandzha-카라바흐Karabakh의 [트란스코카서스transcaucasus
문화로 BC 1400년 또는 BC 1250년에서 BC 8C]까지 ⇨ [그루지아Georgia 테렉Terek 초원인 렐바르Lelvar
문명] ⇨ [투르키스탄Turkistan 문명-카자흐스탄Kazakhstan의 안드로노보Andronovo 문화]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방東方에서 대초원大草原을 가르는 루트를 통해 서부로 진출 ⇨ 우랄Ural 지역에서 지형적인
조건으로 일시 막히자 방향을 틀어 러시아 남부로 남진南進 ⇨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로 확산擴散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후기後期의 [흉노匈奴에서 몽골]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간직하여 지속적으로 반복된 결코 달라지지 않았던 진입進入 방식이었다.
이를 더욱 입증立證해주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사실로서 상商의 안양安陽에서 출토出土된 투겁 있는 전투용
도끼*납작한 단검短劍과 창날 등이 니즈니Nizhni 노르고로드Novgorod(현재의 고르키Gorki)부근인
세이마Seima*노보그리고리예프스크Novogrigorievsk의 유형類型과 같다는 점이 모범적인 사례事例이다.
(부그 강江 유역의 청동제작장소靑銅製作場所인 니콜라예프Nicolayev BC 1000년경).
※ 그동안 서양학자西洋學者들은(탈그렌 등) 청동기靑銅器의 <유럽 기원설起源說>을 은근히 유도하기 위해
BC 1500년 무렵 서부 시베리아의 문화를 기반으로 동방東方에 전파되었으며 그 기원起源은 거의 같은 시기인
다뉴브Danube 지역의 온예티즈Aunjetitz 문명과 연결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동방東方 지역에서
BC 3000년을 넘어가는 유물遺物들이 속속 발견됨으로서 이 견해見解는 이미 설득력을 상실喪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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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행동반경을 관통貫通하는 [공통점]이 있다.
① 모두가 <북방 유라시아 초원벨트>의 중핵지대中核地帶에서 성장하고 진화進化한 세력들이다.
② 이들의 뿌리는 한결같이 고대 [단군조선 제국]의 영역領域 안에 기원起源을 두고 있는 가운데 갈라져
나온 집단들이다.
③ 전통적으로 이동 방향과 왕조王朝 개창開倉은 대부분 서방西方 진입과 남부로의 확산擴散이라는
전형典型을 이루고 있다.
④ 하나같이 주변 지역을 압박하면서 스스로는 [문명의 지배자]로서의 운명(천명天命)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또 그렇게 행동했다.
이들이 시종일관 유라시아 지역이나 동북 만주滿洲를 거쳐 내려와 한반도韓半島까지 우세優勢를 점點하면서
변함없는 [새로운 왕조王朝의 창시자創始者로 군림君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의외로 쉽게 이해된다.
가장 근본적인 바탕으로서 이들 지역에 진입進入할 당시 전장戰場이나 전투 방식이 대부분 평원平原과
구릉丘陵 그리고 초원草原을 무대로 보병步兵에 맞서는 기병騎兵에 의한 섬멸전殲滅戰의 형태로 펼쳐져
왔다는 기본적인 속성屬性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통상적인 전투戰鬪의 양상樣相이 어떻게 벌어지며 진행되어 가는가? 는 아래의 비슷한
대결구도對決構圖를 지닌 다른 지역에서의 사례분석事例分析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立證할 수 있다.
1) AD 1532년 11월 16일의 전투에서 스페인 기병대장騎兵隊長 <프란시스코Francisco 피사로Pizarro>가
이끈 168명의 기병대騎兵隊들이 잉카Inca 왕王 아타우알파Atahuallpa의 8만 대군大軍을 쳐부순 근본적인
원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총銃과 <말>을 앞세운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돌격突擊*천으로 된 갑옷을 압도壓倒하였던 철제鐵製 사슬
갑주甲冑와 투구로 무장한 병사들의 위력과 공포는 물론 파수꾼이 배후背後의 주력군主力軍에게 알리려
할 때나 후퇴하는 무리들을 간단히 앞지를 수 있는 기동성機動性은 거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2) 아타우알파Atahuallpa의 뒤를 이은 <망코Manqu 카파크Qhapaq>의 가장 뛰어난 장군將軍이었던
<키소 유판키>는 AD 1536년 리마Lima의 스페인 진영陣營이 있는 도시를 포위하였으나 기병騎兵 2개 부대가
평지平地에 진陣을 치고 있던 잉카Inca의 군대에게 돌격突擊을 감행敢行하여 첫 공격에서 <키소>와
휘하麾下 장수將帥들을 모조리 죽이고 궤멸潰滅시킨다.
3) 이어 <망코Manqu 황제皇帝>가 이윽고 <쿠스코Cuzco>의 스페인 군대를 포위했을 때에도 26명의
기병騎兵이 돌진突進하여 <망코>의 친위병親衛兵 가운데 최정예부대最精銳部隊를 초토화焦土化시켰다.
아무튼 이들은 그동안 관행적慣行的으로 이루어졌던 탁 트인 벌판에서의 보병전술步兵戰術과는 전혀 다른
<말>들이 돌진突進할 때의 엄청난 충격파衝擊波와 진퇴進退와 방향전환에 의한 신속한 공격이 자유로운
새로운 전투방식과 접接하는 가운데 철저한 무력감과 절망적인 패배감을 맛보았다.
위와 같은 사례事例는 그 전개 양상이 고대古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비슷한 상황의
반복으로서 작용하였던 새로운 무기 체계(총銃과 맞먹는 활의 성능*금속기술의 월등함*비교할 수 없는
갑주甲冑와 투구의 위력)와 발달된 전투능력(기마騎馬를 이용한 전술 등)을 보유한 선진先進 이주移住 집단과
원주原住 세력과의 전쟁에 대한 승패勝敗를 결정했던 요인들이었다.
2. [단군조선제국]의 후예後裔들
가. [동쪽]에서 온 건국세력建國勢力 월씨(月支*月氏)
모돈선우冒頓單于는 진한秦漢 교체기交替期를 틈타 BC 201년에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지역을 공격하여
이전에 잃은 땅을 모두 회복했다. <BC 177년-BC 176년>에는 감숙甘肅의 월씨月支에게[1]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월씨月支는 결국 아들인 노상선우老上單于가 그 위협을 완전히 끝내고 왕王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듦으로서 감숙甘肅을 떠나 서쪽으로 이주移住하게 만들었다)
[1] 월씨月支(氏)도 [단군조선 제국]의 일원一圓이었음은 원래 살던 감숙甘肅 서부지역을
지리학자 프톨레미Ptolemy가 토가라(Thogara-가라계 어군語群으로서 혹은 타구리Thagouri라고도 하였다) 라고
기록했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달씨-달지-다루지]에서 비롯된 어원語原을 가지고 있는 지명地名임도 알게 해주는데(자신을 달씨Thagi라고
부르는 가라에서 딴 Tha-g 어근語根이다) 타지Tadzhi-키스탄kistan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는 섬서陝西와
산서山西 남부까지 활동반경으로 삼았던 서융西戎*강융羌戎*견융(犬戎*畎戎)의 잔여 세력들을 포용包容하였다.
월씨月支는 고비Gobi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투르키스탄Turkistan[1] 을 거쳐 박트리아Bactria로 쇄도殺到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다. <스트라보Strabo>는 이 민족들을 <토하로이Tokharoi>라고 하였는데
그리스Greece 역사가歷史家들의 토하로이Tokharoi*산스크리트어로 토하라Tokhara로서 토가라Thogara의
이형異形이다.
[1] 동東 투르키스탄은 지금의 신강新疆 위구르 자치구自治區이며 서西 투르키스탄은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우즈베키스탄Uzbekistan*타지키스탄Tajikistan*키르키즈스탄Kyrgyzstan*
카자흐스탄Kazakhstan]을 말한다.
대부분의 학자學者들은 중국中國의 기록에 정확하게 BC 160년경 월씨月支가 마지막으로 대하大夏 즉
박트리아Bactria의 변경邊境인 페르가나(Fergana-대완大宛으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부의 주州)에 있는
시르다리아(Sirdarya-그리스어로 약사르테스Jaxartes)강江 상류上流에 도달했다 고 한 걸 근거로 하여 동일시
同一視 하고 있다(한서漢書를 예例로 든 스트라보Strabo*Toru Haneda*Sigmund Feist*W. W. Tarn*H.
W. Bailey의 Ttaugara).
이후 <BC 140년-BC 130년> 사이에 박트리아Bactria의 그리스 왕王 헬리오클레스Heliocles를 무너뜨린
민족으로서 [아시오이Asioi*파시아노이Pasianoi*토하로이Tokharoi*사카라울라이Sakaraulai]를 들고 있는데
모두 약사르테스Jaxartes 강江 [1]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였는데 그리스 인人들이나 인근隣近 지역에서도 출자出自를 모르는 민족이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1] 약사르테스Jaxartes 강江은 시르다리아Sirdarya 강江으로 동남쪽에서 아무다리아Amudarya 강江
(옥서스Oxsus 강江)은 서남쪽에서 아랄Aral 해海로 들어가는데 그 사이의 지역을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지역)라고 하였다.
사르팡티에르Charpentier는 [아시오이Asioi]를 폼페이우스Pompeius 트로구스Trogus가 말한 <아시아노이
Asianoi>로 보아 중국中國의 사가史家들이 흉노匈奴에 의해 일리illi로 밀려난 오손烏孫으로 인정했다
(그는 오손烏孫을 알란Alan으로 알려진 즉 스키타이Scythian를 압박하던 사르마트Sarmat 부족의
선조先祖로 보았다).
[사카라울라이Sakaraulai]는 다르게 사카라와카Sakarawaka로도 불리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사카라Sakara]라는
이름을 사용한듯하다. 그런데 이 명칭은 분명하게도 <토가라-사가라>처럼 가라계가 어원語原이다(삭Sak은
색索으로도 표현되는 솝리-솟으로 크고 높다는 우리말이 어원語原임을 이미 밝혔다).
스키타이Scythian의 갈래로 북쪽 지방인 페르가나Fergana*타쉬켄트Tashkent*카쉬가르Kashgar에 살고 있었다.
아무튼 [월씨月支]는 <사마천司馬遷>에 따르면 장건張騫이 BC 128년 방문했을 때 옥서스(Oxsus-규수嬀水)의
북방인 소그디아나(Sogdiana-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많은
동양의 학자들은 월씨月支가 박트리아(Bactria-대하大夏)로 들어간 뒤 그 땅을 5명의 흡후(翕侯-야부구Yabghu
즉 수령首領)로 나누었다고 기록한 [후한서後漢書]의 사실을 들어 옥서스Oxsus 강江을 넘어 그 지역까지
장악했음을 단언한다.
파르티아Parthia 제국帝國(지금의 이란Iran 지역)의 왕王 아르테바누스Artebanus 2세가 <BC 124년-BC 123년>
무렵 [토하리Tokhari]에 반격하다가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로 볼진대 이 시기 이후에도 월씨(月支-月氏)
가 박트리아(토하리스탄Tokharistan)에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폼페이우스 트로구스).
이후 계속 팽창하여 사카Saka 인人들이 지배하던 <이란 동부에서 아프카니스탄 남서부에 걸친 세이스탄
Sistan-아프카니스탄Afghanistan 남부인 칸다하르Kandahar>에서 <카불Kabul-인도 북서부인 펀잡Punjab-
인도 북부인 마투라Mathura>까지 점령하면서
AD 1C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쿠샨(Kushan-타지키스탄*카스피Caspie 해海*아프가니스탄*갠지스Ganges 강江
상류上流를 가로지르던 제국帝國으로 <귀상貴霜>이라고도 했다) 왕조王朝를 이루었다(R. Ghirshman
Fouiles ὰ Begram 1943-1944 70p-71p*Sten Konow Beitrag zur Kenntniss der Indoskythen 220p*H.
W. Bailey Ttaugara 136 4p*Henning Argi and the Tokharians 1938 545p).
이때부터 월씨月氏가 매우 강성强盛해졌다. 모든 왕국王國들이 그들을 귀상貴霜이라고 불렀지만
한漢은 예전 이름대로 월씨月氏라고 불렀다. <후한서後漢書>
흉노匈奴는 감숙甘肅에서 월씨月支를 쫓아냄으로서 멀리 인도와 서아시아까지도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연쇄連鎖를 만들어내었다. [헬레니즘Hellenism 세계]는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을 잃어버렸고 흉노匈奴는
그곳에서 알렉산더Alexander의 자취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파르티아Partia의 이란Iran은 격렬하게 흔들렸으며
감숙甘肅에서 쫓겨 나온 세력들은 카불Kabul과 인도 북서부에 예기치 않았던 제국帝國을 건설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역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북방 초원草原의 한쪽 끝에서 일어난 작은 파도波濤는
수시로 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넓은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유라시아 초원벨트] 한쪽에서의 충격衝擊이 이 지역의 이후 문명에 얼마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지? 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事例이다.
나. [북방北方] 초원지대草原地帶 동쪽에서 서부로 진입進入하여 또 다른 [흉노제국匈奴帝國]의 기원起源이
된 질지郅支
BC 58년 <악연구제握衍朐鞮>를 쫓아낸 [질지郅支와 호한야呼韓邪(耶)] 형제兄弟가 서로 다투다가 패배敗北한
<호한야呼韓邪>가 한漢의 도움으로 [질지郅支]를 북방으로 쫓아내고 선우單于에 올랐다.
이윽고 BC 56년 외몽골을 중심으로 [질지郅支]의 북흉노北匈奴와 내몽골에 근거지를 둔 <호한야呼韓邪>의
남흉노南匈奴로 분열되었는데 BC 43년 한漢 선제宣帝와 연합하여 [질지郅支]를 다시 키르키즈(Kyrgyz-
격혼鬲混 또는 격곤鬲昆) 초원草原으로 밀어낸다.
<호한야呼韓邪>에게 패배한 [질지郅支]는 투르키스탄 방면의 발하쉬 호湖 지역으로 이동해 일리illi에서
오손烏孫을 격파하고 근처의 호게呼揭와 아랄Aral 초원의 견곤堅昆을 복속服屬시키며 소그디아나Sogdiana로
쳐들어가 추Chu 강江과 탈라스Talas 강江 초원에 아정牙庭을 세웠다.
이것이 서부 지역에서 출현한 거대한 서흉노제국西匈奴帝國 [1]의 기원이 되었다.
※ 질지郅支는 BC 41년부터 카지흐스탄Kazakhstan의 추Chu 강江과 탈라스Talas 강江 지역에 근거하여
투르키스탄Turkistan에서 자리를 잡아 강거羌渠*오손烏孫*호게呼揭*견곤堅昆*대월씨大月支*소그디아나Sogdiana
등을 복속시켜 중앙아시아는 물론 터어키Turkey 부근까지 영향을 미치는 패자覇者로 군림君臨하였다.
그러나 BC 36년-BC 35년 한漢 원제元帝와 연합한 <호한야呼韓邪>의 공격을 받았다. 대담하게 추Chu 강江
지역까지 들어가 기습한 한漢의 장군將軍 감연수甘延壽와 서역도호西域都護 진탕陳湯이 이끄는 7만 연합군
聯合軍에 의해 도읍都邑이 함락되고 [질지郅支] 등 지배귀족支配貴族 1318명이 참살斬殺됨으로서
결국 초원草原에서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4C 말(AD 370-AD 375)에 볼가Volga 강江과 돈Don 강江을 거쳐 유럽을 공격해 공포에
떨게 한 [위대한 영웅 발라미르Balamir와 앗틸라Attila]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볼 수 있다.
[출처] 【앵무새 죽이기】건국 영웅은 외부에서 온다...반론 [1]|작성자 대수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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