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년 오랜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32좌의 크고 작은 비석들은 신념을 지키고 다스리던 관리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을 백성들이 세운것이다.
영천시 신녕면사무소 앞에 이르면 특별한 풍경을 만난다.
32좌의 크고 작은 비석들이 두 줄로 나란히 돌 숲을 이루고 있다.
비바람으로 얼룩진 세월의 흔적인양 거무스레한 석화가 피어나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 동안 오가는 사람의 손때가 묻어 회빛으로 착색이 되어 있다.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수려한 문양을 새긴 두개석을 눌러쓴 것도 있고 맨몸처럼 겉치레가 전혀 없는 단순한 비들도 한데 뒤섞여있다.
500여 년 전부터 누대를 이어가며 신녕 땅을 지키고 다스렸던 관리들을 칭송하여 기록한 비석들이다.
오래 묵은 비석 군들이 방문객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한다.
누가 세운 것일까. 신녕현민들, 어질고 순박한 순천백성들일리라.
신녕은 동으로 영천, 서쪽으로 군위군 부계와 구미 그리고 남으로 경산시 하양, 북으로는 의흥과 의성에 이르기까지 20여리 안팎으로 둘러싸인 요새지 같은 지역이다.
서울에서 부산을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인 신녕은 편리한 교통에 더하여 비옥하고 자연재해가 적은 곳이라 사람들이 기대어 살기 좋은 땅이다.
그러기에 신라 경덕왕 이래 여태껏 동일한 지명을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까지 영천시와 별개의 독립된 지방행정을 수행하여 오다가 1914년에 들어 영천시로 통합되었다.
비를 세운 사람들은 같은 의미인데도 나름 각기 다르게 분류를 하고 있다.
먼저 불망비라하여 수령의 공적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노라며 세운 비가 12좌 있고, 고을사람을 위하여 착하고 어진 정치를 하였음을 기리는 선정비가 11좌 있다.
그리고 또다른 이름으로 치덕을 사모하거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가 9좌 있는데 대부분 신녕현감과 군수를 지낸 분들에게 바치는 비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전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감정이 사뭇 달랐던 탓일까. 아니면 비를 세우고 글을 새기는 양식의 차이 때문인지. 세운 이들의 감정을 세세히 적어놓지 않아 비문을 읽는 방문자의 감정대로 짐작해 볼 뿐이다.
지역마다 옛 관가 터에 한두 개 세워진 선정비를 만나곤 하지만 신녕처럼 군집한 비석을 만나기란 그리 흔하지 않다.
선정을 베푼 관리가 대를 이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선정을 기리는 백성들의 어진 손길이 서로 모여 마을의 역사를 따뜻하게 지켜나갔던 것이리라.
그 많은 비들 중에서도 면사무소 앞에서 100m 정도 떨어진 타루각에 안치된 비 하나는 유독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모진 가뭄과 흉년이 들어 허덕이던 1700년 여름에 신녕현감으로 온 윤명운의 거사비이다.
그해 신녕현민들은 지독한 가뭄으로 알곡하나 제대로 만질 수 없어 허기에 차고 지쳐있었다.
상실감에 빠져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삶의 의욕을 돋우기 위해 현감은 무엇보다 먼저 심리적인 안정에 온 마음을 기울이고 점진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면서 부조리한 사회제도까지 바꾸기 시작한다.
그 후 5년 동안이나 윤 현감은 신녕땅을 떠나지 않고 현민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희망의 삶터로 일구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의 이러한 공적을 거사비 뒷면에 꼼꼼하게 음기하고 있어 그 시대 백성들의 감읍한 마음을 짐작케 한다.
◆ 270여명이 사용하던 우물 ‘관가샘’
영천시 신녕면 장수역 일대에 있었던 역참의 관가샘터. 과거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활용하였던 말이 지치면 물을 마시게하던 곳이다.
비석 가운데는 장수도 찰방의 선정을 못잊어 세운 불망비 4좌가 함께 있다.
장수도(長水道)는 조선시대의 신녕에 있었던 경상도에서 가장 큰 역참이다.
장수도 밑에는 군위, 경주와 경산 등지에 14개의 작은 역을 두고 찰방이라는 관직의 역장이 일반 행정과는 별개로 교통통신과 물류에 관한 국가 임무를 수행했다.
팔공산 갑령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서천(신녕천)가로 걸음을 옮기면 개울 건너 야트막한 매산 허리춤에 옹기종기 처마 끝을 맞대고 있는 마을이 있다.
별동리다.
옛 장수도역이 위치한 곳으로 현청이 있던 면소재지 부근을 본관이라 하고 찰방이 위치한 곳을 별관이라 했다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지금 별3동 중간쯤, 그러니까 매양리에 장수도 역사의 흔적인 마른 우물이 하나 남아있다.
마을에서는 관가에서 사용하던 우물이라 하여 아직도 관가샘이라고 부른다.
장수도역에 상주한 크고 작은 말과 말을 재우고 대체하는 등 여러 가지 마사를 돕던 270여 명의 인력이 사용하던 우물이었으니 그 규모가 미루어 짐작된다.
옛 이야기만을 간직한 관가샘터는 자연석으로 우물 둘레를 쌓은 여느 시골마을의 동구 밖 공동우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굳어 버린 나무판 뚜껑을 억지로 열고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제법 깊지만 물 한 방울 없이 바싹 말라있다.
마을 우물의 효용성이 없어진데다 농촌마을사업을 하면서 우물 가운데를 묻고 주변을 손댄 나머지 관가샘은 옛 모습을 지니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농경에 필요한 관정을 논밭 여기저기에 뚫다보니 저절로 새암길이 끊어져 버렸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돌을 쌓아올린 축조 방식은 물론 주변의 환경들이 특별히 눈길을 끌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우물이지만 120여 년 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까지 장수도 역참의 귀한 음용수로 사용된 것이다.
17세기 중엽, 대일외교 사절단이던 조선통신사 행렬도 이곳 장수역참에서 머물러 하룻밤을 쉬어 간다.
한양에서 동래를 거쳐 일본으로 가기 위한 사신 행렬이 신녕에 이르러 여정을 풀면 그 날은 거창한 축제일이 된다.
정부사의 사신을 수행하는 400∼500여명의 단원과 천리 길을 함께 걸어온 말들. 거대한 사신 행렬이 장수도에 머무는 날은 고을의 민가도 떠들썩한 잔치 날이 된다.
피로에 젖은 말을 달래랴 수행원들 대접하랴 골목마다 국을 끓이고 전을 부치며 간 내음을 풍기는가 하면 거리는 왁자지껄한 장터로 변한다.
어디 말인들 얌전히 엎드려만 있었겠는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매산 자락을 아름답게 수놓은 푸른 대나무 숲을 지나면 선승교 아래로 서천의 맑은 물이 넌출져 흘렀으니 사람들은 먼 길을 걷느라 지친 발을 서천 개울에 담구기도 하고 재주 많은 이들은 대나무 한 가지를 잘라 젓대로 삼고 흥취를 돋우었으리라.
이곳 장수도 역에 찰방으로 있었던 이명기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정조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1781년과 1791년, 두 차례나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주관화사가 된다.
그를 도왔던 동시대의 동참화사로 세간에 너무도 잘 알려진 단원 김홍도가 있다.
정조는 화원 화가인 이명기(李命基)에게 장수도 찰방을 맡기고 김홍도에게는 안동의 안기역장으로 명한다.
두 사람 모두 흔치 않는 파격적인 인사다.
중인의 신분인 그들에게 정통의 관직을 부여한 것은 그들의 재주를 인정해 준 정조의 특별한 배려이기도 하다.
1793년부터 2년 동안 장수도 찰방을 수임했던 이명기는 신녕 고을의 진산이라 할 화산이 너무 좋아 자신의 아호를 화산관이라 붙일 정도였다.
화산관 이명기의 아버지 이종수와 장인 김흥환 역시 모두 영정조 시대의 걸출한 화가였으니 화가로서는 명문집안 출신이었다.
김홍도가 풍속화에 능숙한 그림 솜씨를 발휘하였다면 이명기는 초상화로 당 시대에 이름을 날려 정조어진 외에도 강세황과 채제공, 허목 등 그 당시의 걸출한 문인과 재상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정조 18년(1794년)에 경주 일원에 큰비가 내리고 사태가 일어나면서 경순왕 영정이 훼손되자 경주 부윤이 조심스럽게 상소를 올렸는데 정조의 대답은 간명했다.
장수도 찰방 이명기로 하여금 은해사에 보관하던 경순왕의 어진을 본뜨게 하라는 명이었다.
은해사와 신녕은 지척에 있지 않던가. 지금 경주 숭혜전의 경순왕 어진은 그때 이명기가 그린 것이리라.
화산관이 장수도 찰방을 지내며 신녕을 좋아하다 갔지만 신녕에 남긴 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즐비하게 남긴 비림 속에도 떠난 찰방을 못잊어 하는 불망비 하나 없거니와 화가로서 신녕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둔 그림 한 장 남겨두지 않았으니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
◆ 장수도 역참에서 비롯된 영천대마
1,000여 년 전의 영천에는 하늘이 내린 말이 있었다.
경주의 외성 역할을 하던 영천의 남쪽, 금강산성을 축조하던 황보능장은 꿈에 현몽한 신마를 옥황상제로부터 얻는다.
신마와 자신이 당긴 활시위의 속도를 겨루면서 훈련을 거듭하던 황보장군은 마침내 견훤의 남진을 막고 승전장이 되어 고려 건국을 돕는다.
자신의 성급함으로 그의 애마를 죽게하였다는 말무덤은 아득한 옛 이야기로 내려온다.
20세기 들어 기차역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수하물 집하장이 만들어지고 많은 말수레들이 왕래하기 시작한다.
말들이 쉬고 말먹이를 제공하는 소위 말죽거리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내후년이면 국제규모의 경마장이 열릴 예정이라니 영천은 예나 지금이나 말의 고장으로 내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1635년 이래 일본으로 보낸 조선통신사 행렬단에는 마상재꾼들이 동행하곤 했다.
막부가 조선의 마상재를 찬미하고 요구했던 까닭이다.
사신행렬단은 동래에 이르기 앞서 영천의 남천가 조양각에서 잠시 여장을 풀고, 물푸른 개울 앞 넓은 자갈밭에서 마상 재주를 펼친다.
경상도 관찰사가 사행단에게 베푼 전별연인 동시에 일본 막부에게 공연할 마상재를 영천에서 먼저 연습시연했던 것이다.
마상의 재주는 다양하였다.
말 위에서 선채로 달리기도 하고, 말 등을 넘나들며 거꾸로 서는가 하면, 말 위에서 가로로 눕기, 말 가슴으로 몸 숨기기. 당시의 일본무사들이 가장 즐긴 공연예술이었는데 여기에 참여한 말이나 재인들 중에는 영천일원에서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근원이 장수도 역참이었을 듯하다.
비록 장수도역은 사라지고 없지만 관가샘 앞에 서노라면 옛 얘기들이 샘처럼 솟아난다.
일군의 말떼와 함께 찰방을 지낸 화가도 만나고, 마상축제에 취해있는 민초들의 환한 얼굴들이 스쳐간다.
올해가 말의 해라 더욱 그런가 싶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