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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의 세월 섬유공학과 58년 졸업생 옛 교사 방문기
서울공대지 2017 Summer No.105
이충호(섬유공학과 54-58, 82세)
섬유공학과 58년 졸업생들이 졸업 60년을 맞아 공릉동 옛 교사를 찾았다. 30주년과 50주년에 관악 캠퍼스를 갔건만 회상할 아무런 추억이 없어 허전 하였기에 실제 공부하고 실험 했던 옛 배움터를 찾기로 한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60년이 지났으니 얼마나 변했을까…… 사람도 많이 변했다. 45명 졸업생 중 찾아 가는 동창은 14명으로 줄었으니…
지하철 7호선 공릉역 2번 출구에서 모이기로 하여 나와보니 온통 빌딩숲이 되어 명동과 진배 없다. 도로도 6차선과 4차선이 교차 하여 동서남북을 모르겠다. 60년전 허 허 벌판이던 기억을 더듬어 신공덕 역사를 찾았건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교방향으로 100미터쯤 갔을 때 옛 철로가 나타났으나 폐선이 되어 아스팔트로 포장된 작은 골목이 되었고 100미터쯤만 옛 철길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 놓아 향수를 자아냈다.
학교 정문 앞에 당도하니 어허! 학교 캠퍼스가 하나의 작은 도시를 형성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다닐 때는 넓은 벌판에 시계탑이 있는 1호관과 2호관이 한 가운데 딱 버티고 그 앞에 풀장이 있고 뒷 편에 연못 따라 가면 기숙사로 쓰던 4호관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건물만도 60동이 넘고 고층 건물도 즐비 하다. 다행인 것은 1,2,4호관이 신축 건물 속에 원형이 보존된 채 그대로 남아 있고 1호관 (현 2호관) 현관 옆에 “서울공대 교사로 사용 하였다”는 입간판과 “京城帝大理工學部 址”라는 비석이 옛날을 말해준다.
서울공대가 관악으로 이전 후에는 마포구 아현동에 있던 경기공전이 이사 왔고 후에 4년제 산업대학교로 개편 되었다가 지금은 국립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발전 하였단다. 대지 154,216평, 건물 총면적 68,578평, 6개 단과대학에 학생수가 11,363명이며 교직원수가 781명에 달한다, 경기공전의 전신이 1910년 고종황제께서 설립한 어의동실업보습학교 (於義洞實業補習學校)라 하여 100년 기념관도 건립되어 있었다.
옛 1호관은 2호관으로 호칭이 변경되고 그 옆에 신축건물을 지어 대학본부로 사용하며 1호관이라 호칭 하는데 건물에 들어서자 김종호 총장 (서울공대 기계과 78년졸)이 미리 나와 있다가 반갑게 맞아 준다. 건물 내벽에 우리를 환영하는 전자식 플래카드까지 설치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였다, 김총장도 신공덕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총장과 담소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공대학장실로 자리를 옮겨 다과를 들면서 학교 연혁과 현황에 관한 비디오 브리핑을 받고 나서 캠퍼스 투어에 들어 갔다. 학교 다닐 때는 임야로 있어서 들어가 보지도 않아 그렇게 넓은 줄 몰랐는데 택지로 개발되고 건물이 들어서서 도보로는 1시간을 다녀도 다 못 볼 만큼 광활 하였다. 설명에 따르면 서울 공대 시절에는 26만평이었는데 관악으로 옮긴 후 원자력 병원, 청량리 공고 등에 10만평을 활애하고도 16만평이 남았으며 이 규모면 서울 소재 대학 중 다섯번째에 들어 가는 넓이란다. 우리가 다닐 때는 그렇게 넓은 줄 몰랐는데…… 실험 실습실을 견학하고 나서 점심은 교수식당에서 대접 받았으며 작별할 때는 운동모자와 보온병을 선물로 받았다. 학교 버스를 동원하여 안내해주고 환대해 준 총장, 공대학장, 행정실의 백광욱 박사께 감사 드린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지난 학창시절을 회상 하고 졸업 후 60년의 세월을 음미해 보고 싶다. 사람이 회갑만 살아도 오래 살았다고 잔치를 하였는데 졸업 후 6순이 되었으니……
1. 檀紀, 新學期, 漢文
방문에 앞서 학창시절을 회상 하고자 앨범을 꺼내 보았다. 표지에 4291 이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다. 그때는 서기를 사용하지 않고 단기를 사용한 증거다. 입학은 4287 (1954)년이어서 내 학번이 7036번이다. 입학년도인 4287에서 7을 따오고 당시 공대에는 10개과가 있었는데 섬유과가 제일 먼저 생겼다고 과(科) 번호가 0 이고 이름의 가나다 순서가 36번째이기 때문이다.
졸업 날자는 3월28일이다 신학기가 4월에, 2학기는 9월에 시작 하였는데 1학기 교육일자가 상대적으로 짧으니 조정 하고자 한달 땡겨 현재의 3월 신학기로 변경 되었나 보다…
앨범 사진 아래 성명을 비롯하여 뒤에 첨부된 주소록 등 모든 문자가 한문으로 되어 있다. 빛 바랜 앨범은 연호, 학기, 문자 등 지금과는 사뭇 달라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2. 주소와 경춘선
우리가 다닐 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였다 지금은 서울로 편입되어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이다. 도민증이 시민증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교통편의 변화이다. 당시는 신공덕역(지명이 孔德里인데 역 이름이 新孔德인 것은 마포구 공덕동에 공덕역이 있었기 때문이며 현재는 폐선이 되어 공덕역도 사라짐)이 학교 입구였고 경춘선의 세번째 역이었다. 청량리 – 연촌 (현 성북) –신공덕-태릉 순이었는데 현재 경춘선은 상봉역에서 춘천으로 가고 신공덕이나 태릉은 폐선이 되었다. 그 대신 지금은 서울 지하철 7호선이 태릉을 거처 공릉역으로 가는데 옛 신공덕역 보다는 500미터 정도 더 멀어졌다.
3.校舍 이전
우리는 휴전 이듬해인 1954년 4월 입학인데 당시 신공덕 교사를 미 공군이 사용하고 있어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당시 사범대학의 일부를 빌려 수업 하다가 2학기때 비로소 신공덕 교사로 이전 하였다. 허허 벌판에 우뚝 솟은 1,2 호관의 위용을 보니 내가 정말 좋은 대학에 들어 왔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특히 1호관의 시계탑은 그 위용이 대단하였다. 실험 실습 기구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장소만은 넉넉하여 마음이 다 시원하였다. 2호관을 지나 연못을 따라 걷다가 마주하는 4호관은 일부 기숙사로도 사용 하였지만 섬유공학과 실습동으로 방적, 방직기기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5호관인 광산전문학교 건물들은 당시 군에서 사용하여 우리들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일제때부터 있던 건물이라 낡기는 했어도 문화재로 지정된 부분도 있다니 역사적 가치가 대단한가 보다.
4. 통학의 어려움
학교 다니기가 너무 힘들었기에 통학의 어려움은 특기 하고 싶다. 54년 9월, 1학년 2학기에 본교 교사로 이전 하고 보니 교통편이 너무나 불편 하였다.
첫째는 통학열차를 이용 하는 것인데 아침에 개학시간에 맞춰 청량리-연촌-신공덕-태릉 까지 가고 저녁 4시경에 역순으로 청량리에 도착 하는 기차를 말한다. 그런데 객차가 아니다 화물차에 연탄난로를 가운데 설치했다. 나무의자는 있는 칸도 있고 없는 칸도 있었다. 치마 입은 여학생은 타고 내리기가 지난 하였다. 학교까지 서서 가는 것은 보통이었다. 정작 문제는 화물칸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휴전 직후라서 철도 복구가 덜 된 점도 있었지만 모든 기차는 군용열차 위주로 운행 되어 지각 도착이 다반사였다. 운행시간표는 있었지만 정시 운행은 사전에만 있는 말이었다. 학교는 통학열차가 도착해야 첫 교시가 시작 되었는데, 1시간 늦으면 수업시간을 10분씩 단축 운영하고 1시간 넘게 늦으면 1교시는 뛰어넘어 2교시부터 강의 하기도 하였다. 연촌에서 송유관에 화재가 발생하여 당시 화공과 1년이던 이준원군이 사망(燒死)하는 사고도 있었으니 기차 통학의 어려움을 짐작 했으면 한다.
둘째 기차편이 어려우면 버스를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줄 안다. 그러나 버스는 더더욱 사정이 어려웠다. 딱 두 대가 청량리와 신공덕을 왕복하는데 한대는 정원 50명 정도의 중형 버스이고 한대는 그 보다 작은 소형 버스였다. 청량리를 떠나 되돌아 오려면 시간 반은 걸리니 마냥 기다리는 수 박에 없다. 교직원을 포함 하여 2천명을 운송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 하였다. 뿐만 아니라 버스 자체가 요즘 같이 성능 좋은 것이 아니라 군용 자동차 불하받은 엔진을 얹은 것이니 중간에 고장도 잦았다 어떤 때는 청량리에서 2킬로미터가 되는 태창직물 앞 정거장까지 걸어 가서 청량리로 되돌아 오는 버스를 타고 청량리에서 내리지 않고 다시 학교로 가기도 하였는데 그러면 차장(당시는 운전수 이외에 차장이 따로 있었음)은 차비를 왕복으로 내라 하여 시비가 붙기도 하였다.
본교로 복귀한 이듬해인 1955년 4월에 발족한 학생회 (당시는 학도호국단이라 지칭함)의 현안사업은 대형 버스 2대를 구입하여 운행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교통난이 해결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나 대학당국에만 의지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주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한 것은 평가 할 만하다. 한편 학교는 동숭동 대학본부를 왕복하는 교직원 버스를 운행하였는데, 당시는 휴전 직후라 군에서 제대한 나이 많은 복학생은 뱃심 좋게 중절모를 쓰고 시간강사 행세를 하여 교직원 버스에 편승하기도 하였다.
5. 낭만의 워킹 --걸어서 청량리까지….
화창한 가을 날에는 우리 학과 30여명(기숙사생이나 근처 하숙생 제외)이 걸어서 중랑교를 거처 청량리까지 가는 일도 허다 하였다. 두 세시 경 수업이 끝나고 버스 정거장에 가면 기다랗게 줄을 서 있다. 한대가 오면 50명은 타는데 도저히 다음 버스 차례는 아니다. 그러면 또 1시간 넘게 더 기다려야 하니 누가 “우리 걷자”라고 제의 하면 단체로 걷는다. 걷는 길에는 유명한 “먹골배” 과수원이 줄지어 있어 한참 걷다가는 쉴 겸 과수원에 들러 배 깎아 먹는 재미로 멀리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는 낭만의 걷기였고 지금 회상하면 추억의 걷기였다. 어떤 때는 연촌을 지나 종암동 옛 상과 대학 옆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요즈음 학생에게 걸으라 하면 택시 탄다고 하지 않을까? 그때는 돈도 없었지만 택시도 없던 시절이다.
6. 서울공대 뺏지
우리가 입학 했을 때는 현재의 서울대학교 뺏지가 아닌 서울공대 뺏 지를 달았다. 감(绀)색판에 노란 영문 “S”자와 한문 “工大”가 사선 으로 적혀 있어 흔히 “S공대”라 하였다. 서울대학교가 1946년 10월 발족 당시 각기 설립과 전통이 다르고 校地도 달라 독립적으로 운 영되던 京城帝大 ,高工, 高農, 高商, 鑛專, 法專, 醫專, 藥專을 통합 하여 설립된 후 3년이 좀 넘어 6.25가 발생하여 종합 대학교로서의 일체감이 미처 조성 되지 않았던 때였다. 사실 동창 의식도 공대 아 닌 서울대학교의 타 대학과는 고대 연대와 등거리로 여겨졌다. 이 런 면에서 본다면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통합된 이후 공부한 세대들이 타 대학과의 동창의식이 훨씬 강할 줄 안다.
신공덕 교사가 종로구 동숭동의 대학가와는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 편하여 교양과목 강사는 바로 옆 태릉의 육사 교관이 초빙 되는 경 우가 많았다. 군복을 입고 오는 분도 있었다. 민선 서울시장을 역 임한 조순 교수가 부총리(경제)에 취임 하였을 때 동창회에 나가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조순 부총리가 우리 영어를 가르치던 육사 교 관이었다고 듣고 깜짝 놀랐다. 경제를 가르쳤으면 모를가 영어 선 생님이였기에 동명이인줄 알고 있었는데……
육사는 청량리에서 중랑교 와서 좌회전해서 한참 오다가 우회전하 여 태릉으로 가고 우리 학교는 직진하여 2키로미터쯤 더 오면 되었 는데 육사 까지는 포장이 다 되고, 갈라져서 공대 오는 2키로는 먼 지 나는 비포장도로였다. 그때 얘기로는 육사 졸업식에 이승만 대 통령이 참석 하니까 포장이 되었다고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동 숭동에서 거행 되는 서울대학교 졸업식에도 매년 참석하였다. 우리 동기들의 졸업식은 1958.3. 28일 교정에서 거행되었는데 봄이었지 만 날씨가 흐리고 눈발이 날려서 단상의 老 대통령이 추울가봐 담 요로 몸을 싸드리는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 하다.
8. 우리 학과의 특징.. 사상 최다 여학생
1954년 4월 입학 당시 섬유공학과는 남자 40명, 여자 7명이었다. 당시 여자가 대학 가는 것은 아주 드문 시대인데 하물며 남녀공 학 대학 그 중에도 공대를 지망 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시대였 다. 공대 전체 입학정원이 400명정도인데 우리 이전 학년들은 여 자가 한 두명 뿐이었다. 그런데 한 반에 7명이니 단연 화제가 되고 교양과목의 여러과 합동강의 시간에는 단연코 섬유과가 인기였다. 7명중 졸업은 4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살벌한 남자대학에 아 름다운 일곱송이 꽃은 주변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 중에 서도 K양의 인기가 높았는데 짝사랑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 과 남 학생 한명이 졸업후 바로 세상을 떴는데 상사병이라는 말이 돌았 을 정도니까……
9. 인기학과
우리가 입학한 해는 부산에서 환도한지 반년도 안되어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배 고픈 시대라서 어느 학과를 선택할 것인가는 본인의 적성보다는 졸업 후 취직이 잘 되느냐에 두었다. 그만큼 먹고 사는 게 절실한 때였다. 중화학 공업은 이 땅에 생기기 전이며 경공업인 방직공장은 존재하여 섬유과의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지금은 섬유과는 보이지 않는다. 재료공학부에 편입 되었다나… 60년전 컷트라인이 제일 낮고 정원도 적었던 조선항공과가 그 후 한국을 세계 제일의 조선국가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 되었고… 하기는 지금 최고를 자랑하는 전자공학과는 통신학과로 있었는데 취직처가 전화국 밖에 없다 하여, 한전 (당시는 조선전업,경전, 남전)이 있어 취업이 잘 되는 전기공학과 다음이었으니까…
세월의 흐름은 산업의 구조도 바꾸고 인기학과의 서열도 바꾸고… 그러니 지금 대학 지원자는 10년 20년 후를 조감 하면서 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10. Minesota Project와 교환교수
서울대학교 공대, 농대, 의대 교수들이 미네소타 대학에 교환교수로 파견 되어 연수 받는 프로그램이 있어 많은 젊은 교수들이 미국을 다녀 왔다. 섬유과는 미네소타 대학에 해당학과가 없어 Lowell 대학이 지정 되었다. 그 선생님들은 일제시대 학병을 다녀 오고 6 25때 참전 하느라 연구에 소홀했던 세대였다. 미국의 땅이 넓은데 놀라고, 발달한 공업력에 놀랐다. 미네소타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과학 분야 교수의 안목을 높이고 질을 향상 시킨 획기적인 제도라 생각 된다. 전후 복구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가백년대계를 설계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여담이지만 미국 호텔에서 문을 닫고 잠그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잠겨 낭패를 당했다든가 양변기 말고 비데가 있었는데 대소변을 따로 보나 의심 했었다는 후일담을 들으며 우리 눈도 동그래졌었다.
11. 우리 모임 -– 維信會
입학 당시 47명이던 우리 반이 졸업시는 45명이었다. 입학동기생 중 여러명이 입대하고 휴학한 반면 많은 복학생이 졸업 동기생이 되었다. 모임의 명칭은 섬유의 維자와 믿을 信을 엮어 “유신회”로 하고 졸업 후 지금 까지 꾸준히 모임을 계속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싶다. 요사이는 거주지역에 따라 서울의 강남북으로 나뉘어 매달 모임을 갖고 연말에는 합동 총회를 개최한다. 문리대 출신의 친구가 말하기를 공대는 유대관계의 끈끈함이 고등학교 같다는 말을 한다. 현재 명부에는 25명이 기재 되었는데 외국에 나가 있거나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을 빼면 20명이고 그 가운데 5명은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여 모임에 나오지 못한다. 하늘나라에서 내려다 보는 친구도 14명이 넘었고…
동문 중에는 모교 교수가 2명이며 그 중 한 사람은 현재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전공분야에서는 京紡, 大農의 사장 역임자가 배출 되었고, 비 전공분야에서는 우리나라 양돈사업을 최초로 기업화 하여 상장기업으로 키우고 황우석 박사보다 더 먼저 복제 돼지를 생산하고 장학재단을 설립한 이색 기업가가 있는가 하면 졸업 후 바로 금융계에 투신하여 리스, 렌탈, 신용카드 도입을 선도한 이색 동문도 있다. 여학생 중에는 외무부 장관 부인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한 분이 있고…
60년 세월은 이런 흔적을 그리며 지나갔다. 끝
주) 필자는 서울工大 초대 大學新聞 기자 1954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