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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겨울, 부산의 해운대에서 한 노인을 만난 기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노인의 시선은 오로지 바다 위 하늘을 향해 있었고, 손에 얼레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줄도, 그 연줄에 매여 있는 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정신 나간 노인네가 얼레만 들고 바닷가에 서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일순간 햇빛이 몸을 비틀자, 바다 위 허공으로 비스듬히 날아가 있는 연줄이 보였습니다. 1미터쯤 되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연이 없다고 하기에는 연줄이 너무 생생하고, 연이 있다고 하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술인가 헛것인가, 양손을 들어 눈 위에 차양을 만들고 하늘을 더듬자 노인이 옆에서 계속 얼쩡거리는 낯선 이에게 무심히 손가락을 들어 보였습니다. 그 손가락은 내가 더듬고 있던 하늘보다 한참이나 더 높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연이 보였습니다. 별처럼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 새끼손톱만 한 크기가 되어버린 연이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연줄은 햇빛이 감춘 것이었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17년 동안 연을 날렸는데 어떤 때는 너무 높이 올라가서 나도 발견하지 못할 때가 있어.” 그날의 연은 지금까지 살면서 보았던, 인간이 만든 물건 중 가장 멀리 날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연에게는 네 귀퉁이를 붙잡고 있는 실과 얼레가 있었습니다. 실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얼레를 되감으면 아무리 멀리 날아갔어도 돌아올 것입니다. 만약에 실이 끊어진다면 헤매다 결국은 지상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니 이 또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물건 중에 가장 멀리 날아간 것, 지금도 날고 있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보이저 1호(Voyager 1)’입니다. 1977년 9월 5일, 지구를 떠난 미국의 이 무인 우주탐사선은 2012년 태양계를 벗어나 2015년 9월 현재 지구로부터 2백억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를 날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태양이라는 항성에서 다른 항성으로의 여행, ‘인터스텔라’입니다. 목성과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의 태양계를 탐사하는 당초의 임무는 지난 1989년에 이미 완료했습니다. 보이저 1호가 나는 속도는 총알 속도의 17배인 초속 17킬로미터입니다.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창백한 푸른 점〉입니다. 보이저 1호가 1990년 2월 14일 해왕성과 명왕성 궤도 밖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 <창백한 푸른 점> 지구는 진공상태인 우주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색으로, ‘아름다운 푸른 별’입니다.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을 지금까지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보이저 1호가 찍은 〈창백한 푸른 점〉을 설명 없이 보면 도대체 무엇을 찍었는지 알기 힘듭니다. 까만 바탕에 말 그대로 눈에 보일까 말까 할 정도의 크기로 그저 창백한 점 하나가 간신히 찍혔을 뿐입니다. 이 점의 정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지구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었습니다. 그는 보이저 1호가 1990년 2월,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인 해왕성을 지날 때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촬영토록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사진 〈창백한 푸른 점〉입니다. 칼 세이건은 이 사진에 깊은 영감을 받아 동명의 책을 발간했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저 점을 다시 보라. 저 점이 여기다. 저 점이 우리의 고향이다. 저 점이 우리다.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신성한 사람들과 천벌을 받은 사람들이 저 햇살에 떠 있는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우주에서 대단히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는 우리의 망상과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자만심과 가식은 이 창백히 빛나는 점 때문에 그 정당성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행성은 거대하게 둘러싼 우주의 어둠 속에 외롭게 떠 있는 작은 반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천문학을 통해 겸손함과 인격을 함양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들 한다. 우리의 작은 세상을 멀리서 찍은 이 사진보다 인간의 자만심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중에서 어떤 문제가 태산처럼 내 앞을 가로막는 것같이 느껴진다면 시선을 〈창백한 푸른 점〉으로 돌려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홀로인 것 같아 외롭다면, 34년 넘게 혼자 저 컴컴한 우주를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 1호를 떠올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보이저 1호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으며 2030년이면 지구와의 교신마저 끊겨 우주미아가 됩니다. 글 :: 유선경님
Gustav Holst, The Planets - Jupiter Con. James Levine and the Chicago Symphony Orchest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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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창백한 푸른 점'이란 표현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점에 불과한 것을 큰 줄 알고 무어 그리 빛나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지.....
우리는 어쩌면 먼지 같은, 아니 그 보다 더 작은 존재가 아닐는지요.
창백하다는 표현에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사랑해줘야하는 이유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배경 음악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아주 생동감 있게 하네요 ....()....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아직 못 읽엇는데
점점 읽을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봐야겟지요?
홀스트의 "행성"을 한번 올리려고 워밍업 중이엇기에
이 글 배경음으로 망설임 없이 초이스 햇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