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중생들이 상相으로 관찰하면 천지 우주가 천차 만별의 구분이 있습니다.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구별이 됩니다. 그러나 본래적인 근본에서 관조할 때는 모두가 하나의 자리로 귀일됩니다.
♣ 성인들은 천지 우주를 하나로 보기 때문에, 나와 남의 구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 우주는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 차원에서 너와 나를 구별해서 보기 때문에, 가지가지 갈등이 생기고 부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 오늘은 우리 불자님들께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습니다. 보살계는 다른계와는 다릅니다. 가령 무슨 계율을 지킨다든가, 살생을 말라, 거짓말을 말라는 식으로 금지적이나 금욕적禁慾的으로만 되어 있는 계율은 보통 계율입니다.
그러나 보살계라는 것은, 마치 공자님이 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와 같습니다. 내가 칠십세에 이르러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공자님이 칠십세에 이르러 우주의 본바탕을 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우주의 본바탕(當體)을 깨닫고 보니, 나도 없고 너도 없습니다. 또 우주가 하나의 몸이므로, 자기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에게 신세를 끼칠 일이 없습니다.
♣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모두를 대상화하면, 분명히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존재가 무엇인가, 우주가 지금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실상에서 본다면, 그때는 너와 나 구별이 없습니다.
♣ 철학에도 여러 학문적 갈래가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실존철학은 우주의 실상을 밝히는 철학입니다. 모든 것을 겉으로 보면 이것저것 천차 만별로 차이가 있지마는, 바탕에서 보면 하나입니다.
♣ 큰 바다에 떠 있는 무수한 섬들이 있습니다. 바다 표면을 보면 섬입니다. 그러나 바다의 바탕, 바다의 바닥에서 본다면, 섬이 아니라 육지입니다. 섬은 없고 육지뿐입니다. 이와 똑같습니다. 이와 같이 천개 만개의 섬이 있더라도, 바다의 바닥에서 보면 하나의 육지입니다. 우주 만유가 바탕에서 보면 하나인 것입니다.
♣ 우리는 인생을 고해라고 합니다. 그 고생 바다에서는 다 고생스럽습니다. 아무리 행복한 분도 생로병사라는 한계 상황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또 생사 문제 말고도 얼마나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까? 그러면 고생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가? 고생은 절대로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생으로 해서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업장을 녹이는 것입니다.
♣ 우리가 잘못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수도 있고,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부처라는, 중생이 내왕하고 생사윤회하는 길에서 업 딸 죽고 나며 살고 있습니다. 한도 끝도 없이 우리 생명은 연속됩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입니다.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업 따라서 모양만 바꿀 뿐입니다.
♣ 우리 생명은 본래가 하나의 실상입니다. 본래가 실상이라는 그 말은, 본래 우리가 부처란 뜻입니다. 부처만이 참다운 실상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우주의 본성품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또한 우주 에너지의, 우주의 본생명 자리이기 때문에, 그냥 무생물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입니다.
♣ 우주 생명 자리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도 끝도 없는 능력, 한도 끝도 없는 자비 행복이 다 갖추어진 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를 인격적으로 또는 생명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나 우주 에너지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또한 우주 에너지나 부처님이나 내 생명이나, 모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명이나 우주에너지나 부처나 똑같은 말입니다. 이 셋이 차이가 없습니다.
♣ 우리가 남한테 보시를 할 때도, 흔히 애견대비愛見大悲에서 못 벗어납니다. 애견愛見을 여의지 않고 행하는 소승적인 대비인데, 남을 구제하면서도 번뇌가 있어서, 즉 너는 나보다 못하니까 내가 좀 도와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주 만유의 진상을 보지 못하고, 중생이 참으로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자비를 베풉니다.
♣ 참다운 베풂이란 무엇입니까? 저 사람과 나의 생명이 본래로 둘이 아닌 자리에서 베풀어야 참다운 보시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저 사람을 봐야, 실상 자리에서의 보시이고 참된 보시가 됩니다. 그 자리가 실상 자리입니다. 다른 말로 실존 자리입니다. 원래가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그렇게 보지를 못하니까 너 따로 나 따로 봅니다.
♣ 보살계는 바로 불성계佛性戒입니다. 불성계는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계가 아니라, 바로 우주의 본성, 우리 인간의 본성 자리에서 본성을 밝히는 계戒입니다.
♣ 공자님 말씀같이 칠십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하는 바로 그 자리가 불성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에 안주하면, 우리 주체성이 바로 불성입니다. 불성에 우리 마음을 두고 행동한다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이고, 다른 동물과도 둘이 아닙니다. 하나의 풀포기, 하나의 돌멩이도 다 살아 있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물활론物活論이라는 것은, 유정무정有情無情유상무상有相無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명이 있다고 보는 철학입니다.
♣ 지식정보화라는 것은 정보의 홍수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정보를 소화하지 못하면 마음이 항시 불안합니다. 그러기에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만중생이 모두 다 철인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진리의 당체當體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주체가 섭니다. 주관이 섭니다. 주체가 서야 비로소 불안 의식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 보살계는 불성계입니다. 바로 불성, 우주 만유의 근본 자리에서 우리 인간성의 근본실강 자리에 알맞은 법도法度가, 계율이 불성계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하면 무상청정계無上淸淨戒입니다. 보살계는 상이 없는 계율입니다. 현상에서 보고 있는 차별적인 구차한 계가 아니라, 우리 불성의 법도, 이 우주의 법도 그대로 우리 인간이 준수해야 될 규범이 보살계입니다.
♣ 모든 지식 정보가 혼란스럽게 얽히고 설킨 시대 상황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인생의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이른바 모든 존재는 다 물질로 되어 있다고 보는 유물론이 있고, 이에 대립해서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관념론 또는 유심론이 있습니다.
♣ 우리가 관념론에 설 것인가, 유물론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은, 불자님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깁니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철학상의 유심론 또는 관념론 쪽에다 우리 이상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물론은 오직 물질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평등에다 중점적 관심을 둡니다. 때문에 우리 인간성은 다분히 건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부처님 가르침은 하나의 마음으로, 불성으로 보는 그런 사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범신론입니다. 같은 유심론, 같은 관념론 다운데도 범신론과 일신론이 있습니다.
♣ 일신론은 모든 존재를 하느님이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창했으니까 응당 하느님이 섭리를 해야 되겠지요. 하느님이 창조했는데 그 창조도 공평무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하고 동물하고 다른 식물하고도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도 예수하고 다른 사람하고 차이가 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 우리가 지켜야 할 계율만 하더라도, 일신론 에서는 사람끼리는 서로 죽이지 말고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이나 식물은 사람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 희생당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도 역시 우리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자비하게 개발하고 훼손시켜도 무방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신론 사상입니다.
♣ 범신론이란 무엇인가? 범신론은 우주 모두가 바로 신이라 봅니다. 자연이나 다른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자연이 곧 신이요. 신이 곧 자연 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위해서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
♣ 보살계는 범신론적 견지에서, 전체 우주가 하나의 생명 덩어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 차원에서 보면 천차만별로 구분이 되겠지마는, 본바탕에서 보면 더 높고 낮은 우열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자 여러분들은 우선 철학적으로 범신론의 견지에 서시기 바랍니다.
♣ 천지 우주의 근원적인 성품을 기조로 해서 이루어진 법도法度가 보살계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우리 인간이 우주 내에서 지켜야 할 가장 근원적인 하나의 윤리도덕입니다. 참다운 철학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의식적인 실천이 따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라는 것이 그냥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법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당체當體입니다. 때문에 마땅히 윤리 도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 우주의 법도 가운데서, 우리 인간이 닦아야 할 법규가 바로 보살계입니다.
♣ 보살계는 열 가지 무거운(重) 계와 마흔 여덟 가지 가벼운(經) 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흔 여덟 가지 가벼운 계도 열 가지 무거운 계 가운데에 다 포함된 진리이기 때문에, 그 열 가지 무거운 계율만 말씀드리겠습니다(그 가운데에 마흔 여덟 가지 계는 다 포함되어 있는 계율입니다)
♣ 우리가 계를 받을 때는 먼저 참회를 해야 합니다. 잘못해서 과거에 지은 죄가 없어져 버려야, 낡은 포대에 든 것을 다 비워 버려야, 새로운 것을 거기에 넣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해서는 마땅히 낡은 것을 모두 깨끗이 없애야 하듯이, 과거에 지은 죄를 모두 다 참회해야 합니다.
♣ 우리가 세속 생활에서 무슨 큰 일을 한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하자가 많이 있다거나 그럴 때는 절대로 성취를 못합니다. 우리 출가 스님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절에 가서 상주를 할 때도, 적어도 큰 불사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산의 산신이 감동할 정도로 청정해야 불사가 이루어집니다.
♣ 우리 불자님들! 우리 인간 존재의 생명이라는 것은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닙니다.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함부로 소홀히 하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 보살계는 바로 천지우주의 근본 성품이며, 우주 에너지의 법도이며, 동시에 우리 인간성의 본래 생명인 진여불성에 알맞은 인간의 윤리행위입니다. 그래서 이 보살계를 가리켜서 무상심지계無相心地戒라, 상이 없는, 상을 여읜 마음 자리의 규범이라고 합니다. 이 계는 동시에 금강보계金剛寶戒라, 다시 흐트러지거나 파괴가 안되는 견고부동한 윤리도덕입니다. 그래서 금강보계이기도 합니다.
♣ 금생에 나와서 인간된 보람을 이룩하려고 할 때는, 꼭 보살계를 지켜야 됩니다. 인계생정因戒生定하고 인정생혜因定生慧라 하였습니다. 계를 지킴으로 인해서 삼매, 곧 선정에 들고, 선정. 곧 삼매에 의해 지혜를 얻습니다. 계율이 오나벽해야만 참다운 깊은 삼매에 들어갑니다.
♣ 삼매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 오로지 참다운 본체를 여의지 않고서 동요가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오로지 참다운 정신 통일, 이것이 삼매입니다. 이런 삼매에 들어 서야 깨달음이 옵니다.
♣ 우주의 실상 자리인 불성을 우리가 증명해서 알기 위해서는, 꼭 깊은 정신 통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무슨 명상을 하든지간에, 깊은 명상에 들려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마음이 하나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법희성열法喜禪悅이라, 그 불성에 깃들어 있는 한도 끝도 없는 환희심이라든가 성품 공덕이 발휘됩니다.
♣ 우리가 계율 없이 참선한다고 하면, 법희선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켜가면서, 철저한 도덕률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우리 마음의 통일을 도모해야, 깊은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가 없으면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지금 연비를 하심으로해서, 과거 누겁 동안에 우리가 지어 내려온 업장을 소멸하셨습니다. 따라서 청신한 마음에서 부처님의 청정 계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죽이지 말라. 생명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을 써서 죽이거나, 찬탄을 하여 죽이거나, 또는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으로 죽이는 그런 모든 짓을 하지 말지니, 죽이는 그런 인因이나 죽이는 연緣이나 또는 죽이는 방편이나 죽이는 업을 지어서, 일체 생명 있는 것을 짐짓 죽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응당히 상주하는, 항상 변치 않는 자비심으로 마치 효도하는 사람이 부모님의 뜻을 따르듯이, 진리에 효순孝順하는, 진리에 따르는 효심을 내어 방편으로 일체 중생을 구원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방자한 마음으로, 통쾌한 생각으로 살생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바라이죄彼羅夷罪니라.”
♣ 바라이죄는 무거운 죄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시정市井에 나가면 낚시질을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안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혹시 하고 계신다면 그냥 중지를 하셔야 됩니다. 낚싯대를 팔고 낚시용품을 파는 그런 장사하시는 분한테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그런 생명을 해치는, 생명을 죽이는 그러한 직업은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그렁저렁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 인생은 수련 도장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 세상에서 마음 한번 잘못 먹으면, 그냥 지옥地獄으로 전락합니다. 그 반대로 마음을 잘 쓰면, 생각 한번 고치면, 그냥 해탈로 우리 마음을 비약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초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 가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 천상보다도 우리 인간 세상을 소중히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천상은 너무 편해요. 너무 편하기 때문에 수행을 하려고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세상은 다행히도 고생이 많고 여러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곁들여서 초월, 해탈로 인도하는 그러한 특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천상보다도 더 돋보이는 것입니다.
♣ 다른 생명을 해치는 그런 직업을 갖지 말고, 다른 직업이나 성자가 되는 길을 택하셔야 합니다. 다른 직업을 택하여서 조금 더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생명을 해치는 직업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 어느 누구한테나 반생명적 직업은 도움이 안됩니다. 우리 생명은 자기 생명 홀로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함께 모두 더불어 있습니다. 지금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이 계시지만, 각각개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소■수소■질소■탄소 그런 원소 차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다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사실은 붙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겉만 보니까 각각 떨어져 뿔뿔이리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실존적으로 볼 때는 다 붙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나와 남이 둘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은, 사람들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 인생이라는 것은 엄숙한 것입니다. 성인들의 가르침, 인생을 바로 산 성자들의 말씀을 환희심으로 정성을 다해서 수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인생을 사는 보람이 있습니다.
♣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것은, 사람은 다시 말할 것이 없고,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라 하더라도 필요 없이 생명을 해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해치면, 생명은 다 하나이기 때문에 금생에 그냥 보복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겁생래多劫生來로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면서, 또 역시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받습니다.
♣ 금생에 수명이 짧은 분이나 또 금생이 병치레를 많이 하시는 그런 분들은, 틀림없이 과거 전생에 다른 동물이나 다른 사람을 핍박했다든가 다른 생명을 함부로 살상하여, 그런 보복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나, 마땅히 살생을 말아야 합니다.
♣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지니라, 너희 불자들이여! 일체 재물에 바늘 하나 풀 한 포기라도 짐짓 훔치지 말지니라. 보살은 마땅히 불성에 효순하는, 불성에 따르는 그런 마음과 자비심을 내어, 항상 모든 사람을 도와 북이 되고 즐거움이 되게 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남의 재물을 훔치는 자는 보살의 바라이죄彼羅夷罪니라” 하였습니다.
♣ 사기를 친다든가 또는 소매치기를 한다든가 하는 것만 훔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을 갖는 거, 무슨 사업을 할 때 자기의 신성한 노동의 대가 외의 것을 취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 부처님주의는 사실상 물질적인 면에서 보면 사회주의입니다.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것은, 공산주의가 말하는 유물론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철저한 정신의 내면적 사회주의란 말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수입이 아닌 것을 함부로 취한다면, 복덕의 종자를 없애는 것입니다.
♣ 우리가 금생에 복을 지어야 공부하기도 쉽고 또 좋은 인연을 만나 공부가 잘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복덕을 훼손시키면, 그만큼 인연도 잘 못 만나고 그때그때마다 여러 가지 장애가 생깁니다. 마땅히 이런 복덕의 근원을 없애는 투도, 다시 말해 정당한 재물이 아닌 것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 “음행하지 말라.” 우리 재가불자들은 당연히 결혼을 해서 식구 가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음행하지 말라고 하면, 이것은 어긋난 말씀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가불자라고 하더라도 음행을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시는 바와 같이 욕계 색계 우색계 삼계입니다. 우리가 윤회한다는 것은, 뱅뱅돌아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여기 태어나고 저기 태어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윤회해서는 해탈의 가망이 없습니다.
♣ 우리 인간 존재의 구경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은 해탈입니다. 윤회를 떠나서 영생 불멸하는 참다운 마음의 고향, 우리 생명의 고향에 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목적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역시 생로병사를 떠나서 열반락涅槃樂이라, 영생 해탈의 구경지究竟地에 도달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목적입니다.
♣ 삼계 가운데서 욕계가 가장 낮은 세계입니다. 욕심을 미처 못 떠난 세계가 가장 낮은 세계입니다. 욕심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입니까? 욕심이 곧 욕망이 되겠지마는, 가장 중요한 욕심은 먼저 식욕이고, 그 다음 욕심이 남녀 이성욕입니다. 그 다음 욕심이 수면욕睡眠欲입니다. 따라서 욕계의 이런 상징은 바로 욕심을 의미하는데, 방금 말씀드린 식욕■이성욕■수면욕 중에서 음행淫行, 이것은 남녀 이성간의 욕심입니다.
♣ 부처님 법문은 심심미묘해서, 우리 재가불자들이 제대로 잘 못 지키니까, 육재일六齋日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재일은 음력으로 팔, 십사, 십오, 이십삼, 이십구, 삼십일인데, 이 육재일만이라도 식욕을 참고 절제해서 한 끼만 먹어라, 또는 그날은 고기를 먹지 마라, 또 내외간도 같은 방을 쓰지 마라, 이렇게 하셨습니다.
♣ 부처님 당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만 아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육재일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우리 재가불자들은 의지가 약해서 평생동안 절제하고 살수가 없으니까, 육재일만이라도 출가한 셈치고, 출가 수행자인 셈치고 절제하라는 것이 육재일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음욕을 절제하는 것을, 가급적이면 음욕을 끓는 것을 원칙으로 하셔야 됩니다.
♣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이데아가 무엇인가 하면, 결국 하나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이데아만 실상이고, 다른 현상적인 것은 모두 그림자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 금강경에도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모두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나 그림자 같습니다. 항상 풀 끝의 이슬처럼, 또는 번갯불처럼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 금강경에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했습니다. 응당히 이렇게 관하라, 이렇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안 봅니다. 우리 중생들은 우리 눈에 지금 보이는 것을 사실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 세계에 있는 것은 사실로는 사실이 아닙니다.
♣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철학적으로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 있습니다. 소박실재론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들은 소박하게 나는 나요, 이것은 이것이요, 금은 금이요, 은은 은이요 하면서,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사실로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우리 감각의 속임수입니다. 실제로 있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항시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상식이 아닙니다. 상식이 아니라 실상적인 지혜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겉으로 봐서 검다 희다 또는 좋다 궂다 그러는 것이지, 본래로 본바탕에서 보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입니다. 이것 저것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무쌍한 것은, 사실은 어느 공간, 어느 시간대에도 있지 않습니다.
♣ 불교는 상식론이 아닙니다. 하나의 실상을 그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우주 생긴 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단 플라톤이나 그런 분들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인이나 학자는 다 한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 불교는 상식론이 아닙니다. 하나의실상을 그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우주 생긴 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단 플란톤이나 그런 분들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인이나 학자는 다 한 가지를 말씁했습니다.
♣ 현상계, 이것은 꿈 같은 것이지, 실제로 있지가 않습니다. 플로티누스란 철학자도 일자一者라, 우주는 하나의 실상뿐인 것이지, 가상假相이 있지가 않다고 했습니다. 가상, 이것은 그때 그때 변화무쌍한 것이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것은 일초 전과 일초 후과 똑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 이천오백년 전에 우리 부처님은 우주의 실상을 보셨습니다. 그 뒤에도 무수한 도인들이 다 그와 같은 말씀을 역설하고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생들은 보이는 것이 사실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가상인 것입니다.
♣ 몽환포영이라서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니까, 여실히 그것을 그대로 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실상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금생 내내야 애쓰고 산다 하더라도, 가상假相만 가지고 가상 가운데서 그때 그때 시비 분별하고 죽습니다. 가상이 자기에게, 자기 몸뚱이에게 이로우면 좋다고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욕 문제를 여러분께서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 우리 인간이 음욕을 끊지 못하면, 결국 자멸하게 됩니다. 따라서 가정 생활을 하는 내외라도, 이성간의 욕망을 절제해야 됩니다. 부부간이 동지간이 되어서 진리를 닦으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를 맺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부부간의 관계를 맺되 정말로 성자들이 우리한테 당부한 바와 같이 청정하시면 됩니다.
♣ 육재일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삼십일 내내 육재일처럼 살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을 더 받고 몸도 더 건강해지고, 또한 우주에 대해서도 공헌하는 것이 됩니다.
♣ “망녕된 말을 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말하거나,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지 말지어다. 보살은 항상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소견을 가져야 하며, 또한 일체 중생들에게도 바른 말과 바른 소견을 갖게 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일체 중생에게 삿된 말과 삿된 업을 내게 하는 자는 보살의 바라이죄니라.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하였습니다.
♣ 우리는 마땅히 진리에 걸맞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짧지 않습니까? 이래 저래 다 제해 버리면, 정말로 수행할 시간은 지극히 짧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번 사박오일 동안 공부하신 것은 정말로 대용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가급적이면 많이 가지셔야 합니다.
♣ 우리가 과거 전생에 심은 습관성도 많지만, 금생에 나와서 잘못 생각하고 잘못 배우고 잘못 행동한 습관성도 많습니다. 이것을 옥이기 위해서는 별시수행別時修行이라, 사흘이고 나흘이고 한 달이고 몇 년이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업이 녹아집니다. 업이 녹아져야 본래적인 성품인 불성이 바로 나옵니다. 흐린 물을 자꾸 휘저어 버리면 맑을 겨를이 없지 않습니까? 가만 두면 앙금이 가라않고서 바닥이 보입니다.
♣ 우리 마음은 본래로 무량無量의 자비와 지혜와 행복과 능력을 갖춘 불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성을 중생이 자꾸 잘못 생각하고 분별시비하기 때문에 흐려 놓습니다. 그런 마음을 안정을 시켜야 됩니다. 안정을 시키려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닷새고 한 달이고 몇 년이고, 우리 마음을 고요하니 명상 체험을 해서 수련을 시켜야 됩니다.
♣ 평생 내 마음 수련하는 것이 금생에 태어난 보람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하셔야 기회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막연히 살면 그런 기회가 오지를 않습니다. 정말로 이번 사박오일 동안 오십이 넘으신 원로 교수님들도 계시는데, 여러분께서 굉장히 훌륭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 우리 중생들은 버릇 때문에 너무나 필요 없는 짓을 많이 합니다. 술이 우리 건강에 대해 좋은 것이 아닌데도, 술 때문에 이루어진 해악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마음이 영롱하게 철두철미 맑아야 할 것인데, 잘못된 버릇 때문에 상당히 혼탁합니다. 여기에다 술을 먹고 어영부영하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중한 자시 생명을 그만큼 훼손하고, 그마만큼 자기 스스로 파멸할 뿐입니다. 그것은 또 우리 마음만 해害를 입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 건강이란 것은 우리 음식과도 굉장히 관계가 있습니다. 음식을 마로 먹고 절제해서 먹는다면, 웬만한 병에는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너무 음식을 많이 자십니다. 너무 많이 자시고 거기다가 고기고 뭣이고, 굉장히 많이 먹지 않습니까? 참 주의하셔야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여러 가지 병이 거기에서 발생합니다.
♣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제일 좋고 제일 가볍고 제일 쉽습니다. 마음도 몸도 제일 건강한 법입니다. 부처님은 팔십세에 가셨는데 팔십세까지 평생 동안 손수 탁발을 하셨습니다. 그 따가운 인도에서 머리에다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맨발로 다니면서 탁발했습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다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 성인들 사는 대로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우리에게 표본이 없으면 어렵겠지만, 표본이 있어서 우리는 그렇게 따르면 됩니다. 술 장사하는 불자님이 계시면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하시게 되면 “ 아. 내가 지금 v하는 술을 마시고서, 불심을 보다 돈독히 내 가지고 깊은 수행을 하시라”고 기원 드리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십시오.
♣ “너희 불자들이여, 출가한 보살이나 재가한 보살이나 비구나 비구니의 허물을, 자기 입으로 말하거나 남을 시켜 말하지 말지니라, 보살은 외도학인과 이승학인二承學人.성문연각승聲聞緣覺承입니다. 성문연각승이 불법에 대하여 비법비율非法非律을 말하더라도, 항상 자비심으로 이들을 교화하여 대승에 대한 신심을 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살이 도리어 불법승의 허물을 말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하였습니다.
♣ 사부 대중은 곧 재가불자님들, 이른바 우바새■우바이, 또는 출가한 불자들, 비구■비구니 합해서 사부 대중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부 대중 가운데도 역시 그때그때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서 험담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법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계에 있어서 굉장히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 부처님 법은 우주의 진리기 때문에, 우주의 진리가 더욱 융성하고 보다 더 빛나야 합니다. 주금 허물이 있다고 해서 사부 대중끼리 서로 비방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부처님 법을 그만큼 약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이것은 부처님 법에 배치가 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 우리의 사명이니까, 마땅히 허물이 있으면 직접 만나서 은근하게 우리 정성을 다해서 충고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상호 비방을 할 때는, 필요 없이 오해를 사게 되고, 또 소중한 우리 부처님 가르침을 그만큼 약화시킵니다.
♣ “너희 불자들이여, 자기를 칭찬하고 타인을 비방하거나, 또한 남을 시켜 자기를 찬탄하고 다른 이를 비방하게 하지 말지니라. 보살은 응당 일체 중생을 대신하여 남의 훼방을 받아서, 나쁜 일을 자기에게 돌리고 좋은 일을 다른 이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어 늘, 도리어 자기의 공덕을 드러내고 남의 칭찬稱讚할 일을 숨겨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훼방을 받게 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하였습니다.
♣ 우리 불자님들은 관포官脯의 지극히 훌륭한 우정을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관포란 것은 관중管仲과 포숙아飽叔牙인데, 서기전 육백여년 경의 분이에요. 공자보다 백년 이상 먼저 사시던 분인데, 관중과 포숙아는 아주 친한 친구입니다.
♣ 처음에는 포숙아라는 친구가 먼저 사회적으로 출세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제환공齊桓公을 섬겨서 상당한 지위로 올라갔었는데, 그 포숙아가 보니까, 자기 친구인 관중이 자기보다 훨씬 더 총명해 보입니다. 그러다가 관중이란 분이 나라를 비판하다가 불경죄不敬罪에 걸려서 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 관중이 죄를 받아서 귀양 가서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포숙아가 제환공한테 말을 해서. “ 전 관중이 나보다 훨씬 총명해서, 내가 제환공 당신을 모시는 것보다, 지금 죄를 받아서 귀양가게 된 관중을 기용하시면, 나라에 훨씬 도움이 되고 당신한테는 큰 공덕이 될 것” 이라고 건의를 했습니다.
♣ 그 제환공도 총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직위를 만들어 가지고 줄 수가 없어서, 포숙아가 자기 직책을 양보했습니다. 자기 직책을 내놓으면서 포숙아가 제환공에게 간청을 드리니까, 제환공도 감동해서 포숙아보다 더 높은 자리를 관중에게 주었습니다.
♣ 관중은 훌륭한 분이라, 제환공을 섬겨서 정말로 제나라를 그 당시 중국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이른바 패자覇者로 만들었습니다. 주나라의 튼튼한 초석을 놓은 것이 관중입니다. 그래서 백년 후의 공자도, 문화민족인 한족이 관중 덕택으로 오랑캐한테 유린당하지 않고서 문화를 건설하게 되었다고 찬탄했습니다.
♣ 위대한 사람들은 남을 함부로 비방하지 않습니다. 신의 있게 친구를 위해서, 또 나라를 위해서 공평 무사합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을 보면 참 딱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딱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 부처님의 보살계, 남을 비방하지 말라는 보살계를 단 한번이라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못 지키더라도, 이론적으로라도 알면 좋을 것인데, 너무 모르기 때문에 지나친 행동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어떤 경우라도, 꼭 남을 찬탄해서 보다 더 높은 쪽으로 향상되어, 결국은 성자가 되고 부처가 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 야스퍼스란 철인도 참다운 우정이 무엇인가, 실존적인 우정은 그 사람을 참다운 실상인 영원적인 해탈로 인도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참다운 우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참다운 우정은 역시 성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자의 길로 편달시켜주고, 그 길을 더불어서 가는 것이 참다운 우정입니다. 내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이 되었으면 서로 격려해서 애정만 쏟으려고 하지 말고서, 정말 참다운 우정, 서로 피차 성불로 가는 그런 도반이 되어서, 서로 책선責善도 하고 서로 충고도 하셔야 될 것입니다.
♣ “너희 불자들이여, 너희는 인색하지 말며, 남을 인색하도록 가르치지도 말지니라. 보살은 일체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가르치지도 말지니라. 보살은 일체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주어야 할 것이어늘, 보살이 나쁜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돈 한 푼, 바늘 하나, 풀 한 포기라도 보시해 주지 아니하고, 법法을 구하는 이에게 한 구절의 법문도, 한바디의 게송도 일러 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쁜 말로 욕설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하였습니다.
♣ 보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남이 달라고 할 때는 모든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는 말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와 남을 절대로 둘로 생각하지 말고서, 자기 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남한테도 똑같이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펄학적이고 종교적인 깊은 뜻으로,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 하나의 존재, 하나의 실상이다. 저 사람과 나는 원래 한 몸이다”라고 생각하며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몸으로 생각하고 베푸는 것이 참다운 보살입니다.
♣ 한 몸으로 알지 못하고 구분해서,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우월감에서 “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하니까 내가 좀 베풀어야겠구나”하고 베풀면, 결국 하나의 위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위선이 안 되려면, 철학적으로 기본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나와 더불어서 꼭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이론적으로 따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진리와 진리 아닌 차별이 어디 있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는 천지 우주를 하나의 존재로 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하나의 진리로 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은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나누어서 봅니다.
♣ “너희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일체 중생에게 착하게 대하여 다투는 일이 없게 하며, 항상 자비심과 효순심孝順心을 내어야 할것이어늘, 도리어 일체 중생이나 중생 아닌 물질에 대해서라도 나쁜 말로 욕설하고 폭행과 구타를 하고, 좋은 말로 참회하고 사과하여도 성난 마음을 풀지 않으면, 보살의 바라이죄니라” 하였습니다.
♣ 이 우주에 가장 큰 보배가 삼보입니다. 이른바 부처님과 부처님법과 부처님법을 지키는 불자들이 삼보입니다. 그래서 독경삼보篤敬三寶라, 항시 삼보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일체 중생이 다 공경하고 받들어야 될 우주의 법입니다. 바로 그 자리는 생명 자리입니다.
♣ 부처님이란 것은, 우리가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법성■진여■법계입니다. 진리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법입니다만,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 자리란 말입니다. 현대말로 하면, 우주 에너지의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는 변동이 있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사회 변천 따라서 이렇게 표현하고 저렇게 표현하고 했지만, 위대한 철인들이 말한 것은 다 똑같습니다.
♣ 근세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스피노자 같은 분도 가까스로 마흔을 넘기고 작고했습니다. 그 천재들은 과거 전생에 많이 닦아서, 금생에 말한 것들이 모두 다 진리에 수순隨順합니다. 진리에 벗어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독신 생활이라 다른 친구들이 도와주려고 했으나 받지를 않았습니다.도움을 받으면 구속된다고, 하숙방에서 안경을 갈아서 자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자기 하숙방에서 안경알을 갈고 있으니, 위생적으로 좋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 먼지 구덩이에서 안경알을 갈다가 폐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위대한 철학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은 하나 하나의 것을 영원의 차원에서 관찰하라, 다시 말하면 본체에서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실상에서 보라는 말입니다.
♣ 우리 중생들은 하나 하나의 것을 현상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영원한 차원에서, 본래면목적인 차원에서 보면 다 하나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하나 하나의 존재를 모두 다 영원의 차원에서 관찰하라, 그러면 모두가 영원에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나쁜사람 좋은사람 모두를 이 사람 저 사람 모두를 영원의 차원에서 본다면, 모두 다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분들은 틀림없이 과거 전생부터 닦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 말씀은 다 똑같습니다.
♣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훌륭한 철학자가 많이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 또는 엠페도클레스 라든가 그런 분들은 그 당시도 모든 존재 자체에서 보았습니다. 즉 모든 존재를 실상에서 보았습니다.
♣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철인의 가르침보다 확실하고 보다 더 간단하고 철저합니다. 이른바 진여 연기라 , 진여 연기는 천지 우주의 모든 본래 자리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일체 존재는 진여불성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진여불성은 오염이 안됩니다.
♣ 우리가 현상적인 자리에서는 오염되고 변질되는 구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자리, 본래의 바탕에서 볼 때는, 오염이 되고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물자체物自體, 즉 존재 자체에서 본다면 그것이 바로 불성이고 진여고 또는 허공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는 오염될 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바탕 자리에서 봐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보는 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런 자리가 인격화된 상징적인 표현이 부처님입니다. 관무량수경에 보면 “염불행자念佛行者인중분다리화人中芬陀利花라”는 말이 있는데,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 아주 향기로운 분다리화, 연꽃이라는 말입니다.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염불 이라는 것은 자기 생명의 근원자리를 우리가 환기 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주의 본래 자리를 현실적으로 상징화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염불”입니다. 또한 우주의 본래 생명本來生命을 부르는 것이 염불입니다.
♣ 우주의 근본 자리에다 마음을 두는 염불 수행자는 인중분다라화라, 사람 가운데서 가장 향기로운 연꽃이나 같습니다, 따라서 관음세지위기승우觀音勢至爲其勝友라,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염불하는 사람, 우주의 본체, 자기 본래면목을 부르는 그런 사람을 가장 훌륭한 벗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진정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하신다면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보현보살이나 다 우리를 참다운 벗으로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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