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부터 우찌무라로부터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을 몰랐다. 원래 신학을 한다는 것은 돈과는 거리가 먼 직업이지만 먹고는 살아야 한다. 더욱이 전문화되고 규격화되고 세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의 존재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성경구절을 끌어드려서 아무리 합리화, 정당화해도 예수 당시부터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은 경계 대상이었다. 예수에게 날마다 결투 신청을 했던 이들이 누구였던가? 당시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잘 먹던 못 먹던 현실적 여건상 밥숟가락을 놓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종교인들은 자기를 정당화하기 보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면 평생 추상적, 관념적, 비현실적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다. 거기서 더 나가서 잘하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전혀 무지하면서 교회 안에서만 큰소리치는 가련한 목사도 될 수 있는 법이다.
교과서에서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가르치지만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가 적용될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세상살이에는 두 가지 원칙이 모두 적용되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선택하는 판단력이 필요한 것이다.
직업상 “가는 말이 험해야…”를 주로 사용하는 곳은 검찰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사용되면 요즘의 한국 검찰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예수도 “가는 말이 험해야……”를 사용하기도 했다. 예수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들면서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네가 가진 그 많은 소유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했다. 옛날에 깡패들이 싸울 때 “너 오늘 밥숟가락 놓고 싶어?”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이 말과 예수의 말이 무엇이 다른가? 말을 점잖게 했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 아닌가?
예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즉 "가는 말이 험해야....."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자기 긍정의 방법 밖에 몰랐던 사람에게 자기부정을 가르치기 위해서 효율적인 방법을 쓴 것이다.
어느 종교나 순교자를 기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순교자를 기리는 일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믿음을 갖지 않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종교에 접근하는 것이 장애가 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오히려 순교자 보다 박해자일 것이다. 즉 죽은 사람 보다 죽인 사람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또 왜 죽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할 일이다.
단순히 예수 믿는다고 죽였다는 것은 5,000년 한민족의 문화역사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한번도 특정 종교가 지배하는 종교 국가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사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손양원 목사 부자 순교 사건만 해도 종교적인 동기 보다는 정치적인 동기가 컸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을 묻어 버리고 여전히 죽은 사람만 기억하는 것은 또 다른 비겁한 타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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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예수는 자기 때문에 순교를 바랄까?
과연 찬송가의 가사대로 순교자에게 영생복락 면류관의 보상이 있을까?
생명의 면류관이란 예수가 가르치고 실천했던 길을 따라가면서 고난이 따르더라도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 스스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