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나라 -
☆ 2015년 나해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청주] 하느님 나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에제 17,22-24
† 제2독서 2코린 5,6-10
† 복음 마르 4,26-34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여름의 햇볕과 비를 받으며 나무가
자라고 곡식과 온갖 작물들이 커 가듯이, 우리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하늘 나라의 씨앗이 날마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씨앗이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오늘도 이 미사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구원에 대한 약속은 유다 왕국의 멸망을 알리는
심판 선고에 이어서 나온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분께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나라들의 힘에만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무의 연한 순을 다시 심으시고,
시든 나무를 살아나게 하신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에 비유하신다.
농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곡식이 자라듯이 하느님 나라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자라난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나무가 되듯이 하느님
나라도 이처럼 놀랍게 자라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 민족에게 구원에 대한 희망과
약속의 말씀이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선포됩니다. 향백나무 새순에서,
곧 유배 중에 있는 여호야킨 임금의 후손에게서 미래 왕국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새들이 향백나무
아래 깃들이듯이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도 미래 왕국에서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맨드라미 씨앗처럼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이것이 제대로 자라면 2-3미터 이상의 나무가
되어 온갖 새들의 안식처가 되기 때문에 겨자 나무는 정원에서 가꾸는
식물이 아니라 야생 식물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는
처음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거대한 나라로 성장하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믿음이나 신앙,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것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제1독서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방에서도 제국의 위대함과 막강함을 웅장한
나무로 자주 표현합니다. 곧 제국 안에서 피난처와 보호를 구하는
백성들을 나뭇가지에 깃들이는 새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모든 민족이 한데 모여 그 안에서 주님의 보호와
은신처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웅장한 나무, 광대한 나라로
자라나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땅에 뿌려진 씨앗이
저절로 자라나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과 “믿음”을 대비시켜 설명하는데,
그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확신을 더
강조합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서는,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합니다(1코린 7,31 참조).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고통과 시련이 늘 뒤따를지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생애가 이 사실을
증언하는데, 그래서일까요? 그는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성장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 나라가 이렇게까지
성장했구나 하고 자기 만족에 빠진다면 커다란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매일 그대로이고 조금도 나아지는 것이 없는 듯하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가 자라지 않고 요지부동이구나 하고 실망하는 것도
착각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자라나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 가운데에 그 나라가 자라났는지 여부는, 제2독서에서
선언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하느님의 나라 -기다림(望), 내맡김(信), 보살핌(愛)-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에제17,22-24 2코린5,6-10 마르4,26-34
제1독서
<낮은 나무는 높이리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7,22-24
제2독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6-10
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하느님의 나라 -기다림(望), 내맡김(信), 보살핌(愛)-
여러분은 꿈이, 희망이 있습니까?
꿈이, 희망이 있다면 무슨 꿈, 무슨 희망입니까?
꿈 없이는, 희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듯 죽어서 가는 지옥이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곳,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이고
희망과 기쁨이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지옥입니다.
아, 꿈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꿈도, 희망도 사라져 병고病苦와 노쇠老衰로 죽음만 기다리며
절망 중에 살아가는 이들은, 목숨을 끊는 자살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태양 같은 희망입니다. 태양 빛 사라진 하늘처럼, 태양 빛, 희망의 빛
사라지면 캄캄한 절망의 어둠입니다.
살아갈수록 태양처럼, 밤하늘의 별들처럼 빛나는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희망, 영원한 희망을 선물하겠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을 지닌 이들이 진정 강한, 내적 힘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 셋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이 셋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곧 허무하게 사라질 덧없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이 셋은 별개의 희망이
아니라 궁극엔 하나의 실재를 가리키는 희망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
하느님 대신,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스도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영원한 희망인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집중적으로
나누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영원한 희망이자 꿈은, 필생의 화두는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아,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 바로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영원한 행복이 달렸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요 의무요 책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꽃자리입니다.
첫째, 항구히 기다리십시오.
희망의 기다림입니다. 희망을 지니고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행복,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영원한 희망인 하느님의 때를,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계획대로 중단되는 일이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나, 겨자씨의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를 통해 완성의 그날을 내다봅니다. 아, 이런 희망이, 꿈이 있어야
기다릴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이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억지로 기다리다간 얼마 못가 포기하여 내적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의 나라의 희망을 지닌 이들이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성서의 모든 예언자들이 영원한 꿈의, 영원한
희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한 희망을 지닐 때 나이에 상관 없이
영원한 청춘의 사람들입니다.
에제키엘 역시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1독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 친히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위에 그것을 심어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을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이자 꿈이자 희망입니다.
예수님도 여기서 영감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에제키엘의 예언은 예수님의 하느님의 나라를 통해, 이어 위대하고
거룩한 가톨릭 성교회를 통해, 또 우리의 삶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서서히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체가 되어 하시는 일이라 아무도 막거나 방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깨어 준비하며 희망을 지니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기다림의 인내, 기다림의 희망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많은 일이나 문제들이 기다려 때가 될 때 해결되거나 해소됩니다.
그러니 가을의 때가 되어야 둥글게 익어가는 원숙圓熟한 배 열매이듯이
하느님의 나라가 익어갈 때까지 우리도 희망을 지니고 항구히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항구히 내맡기십시오.
믿음의 내맡김입니다. 그냥 건드리지 않고 놔두는 것입니다.
이건 무관심의 방관이 아니라 바라보고 지켜보는 배려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하실 일을 내가 다 하려니 삶이 복잡하고 힘들고 혼란스럽고
안식이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바로 내어 맡기는 믿음 부족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펼쳐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하느님께 겸손히 내 맡기는 것뿐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보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열린 믿음의
눈으로 진행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느님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되는데,
처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디더라도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진행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사람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내맡기는 일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할 때 무모無謀한 개입입니다.
비단 하느님의 나라만이 신비가 아니라 세상 모두가 신비입니다.
우리의 삶 모두가 신비입니다.
오늘 날 사람들의 비극은 이런 신비 감각을 잃어감에 있습니다.
그러니 신비의 원천인 하느님께 겸손히 내맡기는 믿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잘
협력하기 위함입니다.
맹목적 눈먼 열정이 하느님의 나라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에 지혜롭게 협력하는 것이
겸손한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믿음의 확신은 그대로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아,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믿음으로, 하느님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물론 바오로 사도 역시 현자賢者요 각자覺者입니다.
천상 지혜를 지니신 분들입니다.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린 분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다 놓쳐버린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서, 겨자씨의
자람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표징을 발견發見합니다.
발견의 기쁨, 발견의 행복입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세상의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의 빛나는 표징의
선물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표징의 선물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눈이 닫혀서, 몰라서 슬픔이요 불행이지, 믿음의 눈만 열리면
하느님 주시는 기쁨의 선물, 행복의 선물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저에게 하늘은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얼마 전 써놓고 행복했던 시가 있습니다.
하늘을/바라볼 때마다
마음을/들어 올린다.
온갖 생각들/하늘 구름에 띄워 보낸다.
마음은/다시 푸른 하늘이 된다/푸른 믿음이 된다.
셋째, 항구히 보살피십시오.
사랑의 보살핌입니다.
진인사대천명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깨어있는 항구한 보살핌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이웃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눈이 열려 알게 되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입니다.
오늘 두 비유에서 씨뿌리는 어떤 사람은 바로 사랑의 '보살핌의
대가大家'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눈이 닫혀 있어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나라의 표징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인지요.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하느님의 나라의 표징들입니다.
온 세상 가득한 하느님의 나라 표징들이 더욱 하느님의 나라를 살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격려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다.“
아,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하느님의 나라의 빛나는 꿈이자 비전입니다.
이 꿈을, 비전이나 희망을 현실화할 때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에제키엘의 원대한 꿈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예수님의 황홀恍惚한
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은 바야흐로 당신의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겨자씨의 성장은 하느님의 나라의 성장의 표지입니다.
사랑의 성장입니다. 비단 교회만 아니라 우리의 내적 사랑의 성장도
겨자씨의 자람과 같습니다.
비록 외적 육신肉身의 성장은 멈춰도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인 우리의
내적 사랑의 성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래야 진정 아름답고 품위있는 삶이요 죽음입니다.
죽음은 구원이자 심판이요 새로운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죽비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신비가로 불림 받았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신비가로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우리의 유일하고 영원한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입니다.
항구한 기다림의 희망이,
항구한 내맡김의 믿음이,
항구한 보살핌의 사랑이,
바로 신망애 향주삼덕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당신 말씀과 성체의 겨자씨
은총을 선사하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마르 4,26)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멋지고 기쁨으로 충만한
동화 속에서나 꿈에서나 그려볼 그런 곳인가요?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처럼 말씀하시네요.
겨자씨 같기도 하고 누룩 같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는 완성형이라기보다는 진행형이랍니다.
그러니 부자처럼 돈이 많은 상태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한푼두푼 모아가는 과정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수재인 아들을 둔 것이 천국이 아니라 대기만성형 아들을 둔 것이
천국이랍니다.
아름답게 활짝 핀 장미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수줍게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이름모를 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인생살이가 때론 힘들고 고달프다해도
그 길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정이기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천국을 향한 순례의 여정 기쁘게 걸어가는 아름다운 날 되소서.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한상우바오로신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 앞에서 우리모두는 얼만큼 작은 존재입니까.
이 작은 존재를 살게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사랑의 위대한 힘을
예수님 사랑에서 만나게됩니다.
겨자씨는 그 누구도 아닌 겨자씨로 존재합니다.
겨자씨에게는 겨자씨가 가야만 할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겨자씨는 겨자씨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이와같이 자라나는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쓰러지고 일어서는
우리의 뜨거운 여정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는 삶입니다.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겨자씨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주님께 이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하기에 자라나고 사랑하기에
풍요로워지는 사랑과 성장의 나라입니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만나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주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모두가 되게 하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연중 제11주일
2015년 나해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낮은 나무는 높이리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7,22-24
제2독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6-10
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는 1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메르스로
인한 불안과 근심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자가 격리된 사람은 3000명이
넘었습니다. 확진자는 100명이 넘었습니다. 시설에 격리된 사람도 수백
명이 넘습니다. 사망자도 10명이 넘었습니다. 단 한명의 메르스 환자가
이렇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불안과 걱정은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각종 모임은 취소되었고, 관광객은 줄어들었고,
학교는 휴교를 하였습니다. 메르스가 초래한 경제 손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희망의 씨앗도 커져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 꽃동네가 추구하는 정신입니다. 본인도 구걸을 하는
할아버지가 구걸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젊은 신부님이 그것을 보고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꽃동네가 되었습니다. 꽃동네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느끼고 있습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님께서도 꽃동네는 꼭 가고 싶어 하셨다고
합니다. 꽃동네의 수녀님들과 2년을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들께서는 교리를 가르치시고, 차량 운전을 하셨고, 성당과 화장실
청소를 하셨습니다. 텃밭을 가꾸어서 신자 분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가 만난 수녀님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들이었습니다. 꽃동네는
봉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쁨과 보람을 주고 있습니다. 꽃동네는
아프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힘없는 한 할아버지의 나눔에서 시작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의 씨앗을 이야기 하십니다. 길가에 버려질 수도 있고,
가시밭에 떨어질 수도 있고, 자갈밭에 떨어질 수도 있는 씨앗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그 씨앗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근심과 걱정이 있었지만 교회는
성장하고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씨앗은 1784년 한국 땅에도
심어진 것입니다. 한국 땅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도 100년이 넘는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교황님께서 3번이나 방문하셨을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근심의
씨앗이 뿌려지면 근심은 걱정과 불안을 자라게 합니다. 근심은 불평과
불만, 원망과 분노를 열매 맺게 됩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마음에 근심의 씨앗이 뿌려지면 그렇게 커다란 파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근심의 바다에 침몰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면 감사와 기쁨이 자라게 됩니다. 용기와
위로, 용서와 나눔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우리 마음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힘차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과
희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선택하면 근심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설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나라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특정한 시간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비록 겨자씨와 같이 작을지라도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소통의 나라, 흐름의 나라입니다.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함께 있든지, 떠나 있던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나라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어머니의 뜻이
이루어지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일방적인 나라입니까? 기도와
대화가 함께 있는 가정입니까? 함께 살지만 하숙집과 같은 가정입니까?
오늘 영성체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모든 날, 주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주님의 집은 넓은 평수의 집이 아닙니다. 주님의 집은 화려한 주택이
아닙니다. 주님의 집은 작고 초라할 지라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집입니다.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집입니다. 기도와 나눔이 함께 하는
집입니다.
◈ [서울] 하느님 나라
고준석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연중 제11주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6월14 일 연중 제11주일
† 마르코 복음 4장 26-34절
제1독서
<낮은 나무는 높이리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7,22-24
제2독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6-10
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우리 신앙인의 삶은 농부의 삶과 같습니다.
농부의 삶은 믿음과 인내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농부는 조그마한
낱알 하나가 나중에 수십 수백 배의 열매를 맺으리라는 믿음과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주 보잘것없는 모에 불과하지만 가을이 오면 누렇게 익은 벼에
낟알이 맺히게 됩니다. 농부는 잘 익은 벼를 수확함으로써 그 동안의
노고를 깨끗이 잊고 기쁨에 가득찹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는 처음엔 보잘것없이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농부는 인내의 삶을 살아갑니다. 모내기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고 돈이 필요하니 당장 수확하겠다고 말하는 농부는
아무도 없습니다. 농부는 추수하기 위해서 논 바닥을 갈라놓는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견뎌야 하고 논바닥을 휩쓸어갈 듯이 퍼붓는 빗줄기를
견뎌내며 벼가 잘 익는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결국 벼가 누렇게 잘 익어야지 추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 역시 인내로써 그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차면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이 땅에 심어졌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추수할 때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우리 신앙인도 믿음과
인내로써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그 나라가 완성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고준석 신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
◈ [서울] 기가 막힌 하늘나라
2015년 나해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낮은 나무는 높이리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7,22-24
제2독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6-10
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기가 막힌 하늘나라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처럼 된다는 성구를 처음엔 이해 못했습니다.
상상을 뛰어넘을 때에 ‘기가 막히다.’는 말을 하면서부터 이해했습니다.
세상엔 기가 막히는 일들이 어디 한 둘인가요. 부지기수입니다.
태어남 자라남 성숙 늙음 죽음 물론 새싹이 자라 열매 맺음도 그래요.
이런 게 셍각해 보면 기가 막힌데 하늘나라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느님이나 하늘나라는 기가 막힌 것 중에 아주 기가 막히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4,31~3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겨자씨 한알
2015년 나해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낮은 나무는 높이리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7,22-24
제2독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6-10
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문득 처음 타자를 배울 때가
떠올려졌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컴퓨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였지요. 그래서 과제 리포트를 제출하기 위해 대부분 손으로
직접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선배들이 4벌식 수동타자기를 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손으로 쓰는 삐뚤삐뚤한
글이 아닌, 타자기를 통해 나온 잘 정렬된 원고는 내용을 떠나서 너무나도
훌륭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타자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자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했던 독수리
타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열손가락을 모두 사용하다보니 타자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요. 한때 1분에 800타 이상을 치기도 했었지요.
사실 이런 저의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손으로 쓰는 것이
정상이고, 타자를 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또한
독수리 타법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어느 순간에
자판을 보지 않고서도 타자가 가능해졌습니다. 한글만 자판을 보지 않고
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영문 역시 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타자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로 많은 글을 썼습니다. 2001년부터 써온 새벽 묵상
글이 A4용지로 9,000페이지가 넘으니, 이전에 썼던 글까지 생각하면
얼마나 많이 타자를 쳤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져서 자판을 보지 않고도 빠른 타자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당연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만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한 갓난아이가 넘어집니다. 그런데 말풍선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제 1,999번 남았다.”
아이들이 일어서서 걷기 위해서는 2,000번을 넘어져야 한다고 하지요. 그
아이는 그 2,000번 중에서 첫 번째 넘어짐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1,999번 남았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것, 자주
넘어져서 포기하고 싶고 또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속 넘어져야 비로소 잘 걸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땅에 뿌린 씨에 대해서 그리고 겨자씨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잘 모르지만 저절로 자라 열매를
맺게 되어 수확을 하게 된다고 하시지요. 또한 너무나도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로 변화된다고 하십니다.
이 모습이 하느님 나라와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그 사랑을 굳게
믿고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생활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풍성한
열매를 맺고, 큰 나무로 변화되어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한계 짓지 마십시오.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대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느님 나라는 더욱 더 내게 가까이에 있을 것입니다.
경험은 사람들이 실수에 붙이는 이름이다(오스카 와일드).
1999번 남았습니다. 실망하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납시다.
어떤 분과 함께 차를 타고 어느 곳을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외곽의
한적한 도로에 접어들었는데, 바로 앞 차가 너무 속도를 줄여서 가는
것입니다. 왕복 2차선이었기 때문에 추월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운전을 하시는 분이 “저 차 운전자는 분명히 아줌마일거야. 아줌마, 속도
좀 내세요.”라고 말합니다. 잠시 뒤에 차선이 왕복 4차선이 되는 순간,
얼른 추월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모두 앞 차의 운전자가 누군지
보았습니다. 과연 운전자가 아주머니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운전자는
아주 젊은 남자 청년이었습니다.
운전이 익숙하지 않으면 ‘여자’라는 생각.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서 정말로 운전을 잘 하는 분이 계신데, 그분 역시
‘여자’입니다. 바로 고정관념인 것이지요.
이런 식의 고정관념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사고의 폭을 좁게 만드는 고정관념. 이 고정관념을 없애고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오늘 특강을 하는 청라성당입니다.
◈ [청주] 하느님 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11주일(마르4,26-34)
2015년 나해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낮은 나무는 높이리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7,22-24
제2독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6-10
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하느님 나라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그제서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무엇을 하든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농부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봄에 씨를 뿌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꿀 때 비로소 건설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음성감곡의 특산품이 복숭아인데 때가 되어 적과를 하고, 봉지를 싸고
소독을 하는 수고와 땀이 있어야 좋은 품질의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뿌린 씨가 잘 자라려면 씨 자체가 자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뿌려진 땅이 비옥해야 합니다. 또한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서 구체적으로 행하게 될 때
선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 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 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됩니다.”그렇다면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거나 심지도 않고
수확만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법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 투자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신앙생활,
편안한 방법으로 영적성장을 기대하거나 하느님을 체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안일한 신앙생활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우리의 헌신을 통해 더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32).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고 기쁨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겨자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겨자씨가 되어 주위에서 모든
것들,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야 합니다. 내가
자라지 않으면 내 주위의 누구도 그 품에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가장으로, 부모로, 자녀로서, 스승으로, 제자로, 각자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큰 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힘들고 지친사람들, 여러 이유로 외롭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평화로이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번 한 주간 내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그 씨앗이
아주 작다하더라 잘 가꾸어 그 말씀이 나를 점점 더 영적으로 성장
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나무되어 모든이의 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큰
가지를 뻗을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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