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그막에 퇴임하고 낙향해
한평생 한양에서 살며 나라의 녹을 먹다가 늘그막에 퇴임하고 낙향해 천석꾼 집안 일을 돌보고
한가롭게 글을 읽으며 조용히 지내던 정 대감의 오장육부가 뒤집혔다.
삼대 독자 손자 녀석이 서당에서 피범벅이 돼 돌아왔다.
어느 학동과 싸우다 코피가 터진 것이었다.
만사에 너그럽고 따뜻한 정 대감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인지라 집안 식구들과 하인들이 모두 뛰쳐나왔다.
정 대감이 박달나무 지게 받침대를 들고 팔을 걷어붙인 채 대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걸 집사가 달려가서 막았다.
“대감 마님, 진정하십시오.
싸운 아이는 최 대인의 손잡니다.
대감께서 그 애를 구타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집사가 귓속말하자 씩씩거리던 정 대감이 발길을 되돌렸다.
장날이 서너 번 지난 어느 날 저녁.
어둠살이 내린 다리 위로 최 대인의 손자 녀석이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는데
장정 하나가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와 엉덩이를 걷어찼다.
다음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최 대인의 손자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 다리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이었다.
최 대인은 고을 사또와 친했다.
육방 관속과 포졸들이 다리에 모여 들것에 실린 최 대인의 손자로부터 사건 경위를 들었다.
수소문하고 수사를 해도 사건은 오리무중.
한 장날이 지나고 두 장날이 지나도 범인은 안 잡히고 사건은 흐지부지 세간의 이목에서 지워져 갔다.
가슴 졸이던 정 대감도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범인을 알려주는 사람에게 일금 천냥을 사례하겠습니다.’
방이 나붙은 밤, 집사가 정 대감 사랑방을 찾았다.
“대감 마님, 사람들이 모두 저를 쳐다보는 것 같고 포졸이 금방이라도 몸을 오랏줄로 묶을 것 같습니다요.”
처가 쪽 친척인 집사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정 대감이 그를 다독였다.
“쓸데없는 걱정이네.
천지간에 아는 사람은 자네와 나뿐인데 무슨!”
그래도 집사의 미간은 펴지질 않았다.
며칠 후 수척해진 집사가 다시 정 대감을 찾았다.
“소인 죽을 것 같습니다요.
잠도 못 자겠고, 밥도 못 먹겠습니다.
아무래도 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 대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집사가 자수하면 자신이 사주한 게 그대로 들통날 터였다.
“대감 마님, 자수하더라도 대감께서 시켰다는 말은 하지 않고 소인이 혼자 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집사의 말에 정 대감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자네는 곤장 세 대에 모든 걸 술술 불 것이야.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그날 밤 정 대감은 한숨도 못 잤다.
아침밥을 한 숟갈 떠 넣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하루는 집사가 사랑방을 다시 찾아왔다.
“소인, 흔적 없이 멀리멀리 사라지겠습니다.”
정 대감이 생각해보니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다음날 밤, 정 대감이 오백 냥을 싸서 집사에게 내밀었다.
전대를 펴본 집사가 “손자 깨엿이나 사주십시오.”라면서 전대를 도로 정 대감에게 밀었다.
정 대감의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얼마면 되겠나?”
“만냥을 만들어주십시오.
삼일 내로.”
사정 사정해서 팔천 냥으로 합의를 본 정 대감은 집안 곳간을 탈탈 털고, 패물을 팔고, 급전을 구해 집사에게 건넸다.
새벽닭이 울었다.
“대감 마님, 소인 첫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죽은 듯 흔적 없이 사라지겠습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러나 집사는 나룻배를 타지 않고 반대편 여우고개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어둠이 깔려 있었다.
집사가 사라진 후에도 정 대감은 안절부절못했다.
집사가 떠나고 삼일째 되는 날 밤, 왕년에 망나니를 했다는 왈패가 정 대감을 슬쩍 찾았다.
“대감 마님, 짐작대로 그놈이 여우고개를 넘더군요.
여기 있습니다.”
왈패가 들고 온 보자기를 풀자 집사의 상투와 귀 한쪽이 나왔다.
“그런데 오천 냥을 돌려드려야 하는데, 노름판에서 다 잃고 이렇게 천 냥만….”
정 대감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 후로 보름쯤 지났나.
저잣거리 기생집 사동이 계산서를 들고 왔다.
며칠 후엔 금방에서 돈을 받으러 왔다.
또 얼마 후엔 어떤 놈이 말값을 받으러 왔다.
망나니 왈패는 신수가 훤해져 백마를 타고 다녔다.
최 대인의 손자는 다리가 다 나아 뛰어다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