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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병자호란과 남한산성.
1636년 병자년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70년 전 치욕적인 슬픈 역사를 되씹어봅니다.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14년) 12월~1637년 1월 청나라의 정묘호란에 이어
제2차 침공으로 일어난 청나라의 일방적인 침략전쟁 이였습니다.
<후금의 누루하치의 8번째 아들 홍타이지의 탄생설화엔 홍타이지의 모친의 소변의 힘이 땅이 패여 말채찍의 끝 부분까지 끝이 안 닿았다고 전해진다.>
홍타이시는 수도를 지금의 심양으로 정하고 자칭 황제 태종 이라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정묘호란 후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하여 왕자 둘과 대신들을 척화론자를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 보다는 척화론자가 다수로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묵살하여 발생한 전쟁이었다.
청나라 포로로 잡혀가는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쫒아가는 궁녀의 어미가 손가락을 딸에게 잘라주며 이별하니 보는 이들의 코끝이 찡 하였다.
모녀가 괴로이 생이별하는데 서로 붙잡고 길에서 통곡 하는구나!
스스로 능히 목숨을 가볍게 여겼거늘 어찌 다시 살갗을 아끼리오.
떨어진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는 옷에 물들고
애간장이 끊어져 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지네.
간곡히 뜻을 같이하는 이에게 말하노니
죽음을 아끼는 것은 결코 장부가 아니라네
<이 시는 당시 영의정 이경석 선생의 시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잠시 그 상황을 그려 봅니다.
1637년 1월1일 청태종은 남한산성 아래 탄천과 벌봉에 20만 군사를 집결시켜
산성을완전히 고립시켰다.
새해를 맞은 벌봉 청나라 진영에서 산성내 행궁의 장면을 본 홍타이지 황제는 조선국왕을 혼낼 모양으로 홍이포를 쏘아 행궁 외행전의 좌측 기둥을 명중시키자 혼비백산한 조정 문무백관은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고 한다.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조와 소현세자가 명나라에 신년 하례를 하였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조선 16대 인조 임금님은 백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여 47일 항거 했고
남한산성 행궁에서는 이조판서 최명길 등
주화파 권을 앞세워 상황에 따라 화의를 주장하는파 와 김상헌 예조판서 경을 앞세워 지켜야 도리는 지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며 논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성 밖에서는 청군들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져 거의 모두 굶어죽고 동사하는 일이 벌어 졌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 되어 산성네에서도 노숙하다시피한 군사들 군장비가 모자라 거적 가마니를 쓰고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 죽는자 가 속출하였다.
마침내 1637,1.30 서문을 열고 삼전도로 나아가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조선의 왕이 성 밖으로 나와 잠실 벌판에서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인조는 외교정책이 쫓겨난 광해군의 친명청 정책보다 얼마나 미숙하고 초홀 했나를 가늠해 볼수 있다.
때를 맞추어 강화도로 피난 간 왕족들이 적에게 함락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군에 보내어 항복 조전을 교섭하게 된다.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이민족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의 순간 그날의 광경을 연려실기술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 삼전도 굴욕의 날
잠실 벌판에서 주상 전하께서 남색 전복차림 으로 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섰다.
성에서는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태종은 한강 동편의 나루터인 삼전도에 9층으로 단을 만들어 그 위에 앉아있고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의 막과 양산에 병기와 깃발이 단을 에워싸고 있었고 정병 수 만 명이 단을 중심으로 네모지게 진을 치고 있었다.
청태종은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시키다가 멈추게 하고는 인조에게는 100보 가량 걸어서 삼공육경(3정승 6조판서)와 함께 진흙 위에서 배례하게 했다.
신하들이 돗자리를 깔기를 청했지만 인조는 황제 앞에 어찌 감히 스스로 높이리오 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인조는 청태종이 앉아있는 단을 향해 걸어가 평지에서 삼배 구고 두 의 예를 행하셨다. 삼
배구고두란 한번 절할 때 마다 머리를 세 번 땅바닥에 찧는 예를 세 번 하는 것이다.
인조는 얼어붙은 땅에 머리를 부딪쳤고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마상에서 항복의 예를 받는 청태종은 무자비하게도 인조를 향해 호령하며 소리 지르기를 머리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자기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더 크게 박으라고 강요하였고
인조는 마지못해 고통을 무릅쓰고 뇌진탕을 일으킬 만큼 얼어붙은 땅에 존귀하신 이마를 피가 나도록 부딪쳤던 것이다.
이를 두고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이어 청태종은 인조에게 돈피(모피) 갑옷 두벌을 건네자 인조는 그중 한 벌을 입고 다시 뜰에서 세 번 절하며 사례했다.
처절한 몰골로 변한 인조는 제가 죄인이니 제발 이백성 들 만큼은 살려달라고
땅바닥에 엎드려 오랑캐 들을 받들겠다고 항복문서를 작성 하였다.
1월28일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을 제시 하였다.
1. 출성항복과 동시에 명나라로부터 수여된 고명(명나라 황제명령문서)
책인: 명나라황제의 조선 국왕 책봉문서 및 조선국왕의 金印을 청국황제에 게 바칠 것
2.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청국과 군신관계를 맺을 것
3.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국연호를 사용할 것
4. 세자와 왕자 및 대신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5. 청 이명나라를 징벌할 때 원병을 파견할 것
6. 청이 가도를 공략할 때 원병을 파견할 것
7. 매년 정기적으로 정조사. 동지사. 천추사 및 각종 경조에 사절을 파견할 것
8. 포로가 도망하여 환국할 경우 이를 즉각 심양에 반송할 것
9. 조, 청 양국 신하들의 통혼을 장려하여 화해를 돈독히 할 것
10. 성지를 개축하거나 신축 하지 말 것.
11. 매년 다음과 같은 품목 수량의 세페를 보낼 것.
황금 100냥, 백금(은)1000냥, 수우각궁면 200부, 호피100장, 녹피100장
차 1000포, 수달피400장, 청서피200장.
호초10두, 소목200근, 호요도26파, 호대지1000권, 순도10파, 오조용석4령 각 양화석40령, 백저포200필, 각색면주2000필, 각색세마포10,000필, 각색 세포 10,000필, 포1400필, 쌀10,000포
이는 곧 청국황제가 조선 국왕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고 항복을 받아들인다는 사면조서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위와 같은 조건은 도저히 수용키 어려운 조건이라 왕에게 보고드릴 면목이 없어 산성아래 창곡동에 이르러 다시 발길을 돌려 청군의 진영으로 되돌아 가 재차 강화조건 완화를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지 48일째 날 인조는 세자 등 호행 500여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청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 하였다.
청나라는 맹약에 따라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환 윤집 오달재 등 삼학사를 잡아 자기나라로 끌고 갔고 그해
2월16일 청군은 심양으로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조선의 왕이 이민족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려 항복하는 최초의 사건 이였다.
3) 쌍령 전투와 정충묘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12.14일 남한산성에 입성한 인조는 19일 전국에 밀서(격서)보냈다.
영호남에서 남한산성의 인조임금을 구출한다는 패기 하에 자원입대한 의병 수천 명이
광주 쌍령 천에 이르러 인근에 진을 쳤다. (지금의 도평리 섬뜰)
그러나 청병에게 노출 되어 한차례 싸워보지도 못하고
청의 철기병 300명에게 비참하게 참패 전멸 되었다.
마을 주민과 병사들이 산을 넘어 도망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강물에 빠져 죽은 자리를 낙화암이라 하였다.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되면서 그 흔적마저 사라지고 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주민들이 그날의 참상을 기억하고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동네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장군들의 위패와 그 수를 혜아릴 수 없는 무명용사들은 항아리에 볍씨를 담아 모시고 청충묘에서 오늘날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중 4장군 慶尙左道(경상좌도) 兵馬使(병마사) 許完(허완)
慶尙右道(경사우도) 兵馬使(병마사) 閔栐(민영)
公淸道(공청도) 兵使(병사) 李義培(이의배)
安東營將(안동영장) 宣世綱(1970년대에 추가배향)
4)환향녀와 호로자
이로써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부속 되었으며 잡혀간 처녀
수만 명이 노예시장에서 상품으로 또한 성적 노리개로 인간 이하의 수모를 당했다.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여자들은 조상에 죄가 된다하여 속환시녀의 이혼문제가 사회 정치문제 의 골칫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청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 양반의 부녀들을 많이 잡아 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사람들은 속가를 마련 할 수없는 가난한 백성 들이였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25~30냥 대개 150~250냥 이였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 에 이르렀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문제까지 수만에 이르러 (어떤 기록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문제가 대두 되었다.
청나라 장군들은 조선여자들을 데리고 가 본부인의 학대에 특이할 것은 뜨거운 물로 상철를 입혔고 죽을 때 순장까지 한 일도 있었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온 2만5천명의 환향녀를 화냥년이라 부르며 멸시와 조롱을 했다.
국가가 잘못하여 끌려갔건만 조선시회와 우매한 백성들은 그들을 천시하였다.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기위하여 속죄의 예로 예성강 대동강 한강 임진강과 심지어
홍제 천에 작은 연못을 마련하여 물을 잠기는 세례식을 거행 하여 절개를 회복시켜준다고 하였으며 이를 회절강 이라 불렀다.
본의 아닌 임신으로 인해 낳은 아이들은 호로 자식이라 하여 멸시하였다.
인륜의 도를 숭상하던 조선의 풍습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아 이혼과 천대로 환향녀에 대한 멸시는 많은 사회적 문제점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5)대청황제 공덕비(삼전도 한비)
항복이후 2년 후 청나라는 대청국의 승전을 기념하는 공덕비를 세우도록 하라 고 조선 조정에 지시하였다.
조정은 대제학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참판 오준이 쓰고 여이징이 전서하도록 했다.
비문은 만주어 몽골어 한자로 쓰였다. 지금의 잠실 송파구 에 역사에 길이 수치스러운 삼전도비 가
370년 전에 세워진 것이다.
왜 당했는가?
병자호란 반발 40여 년 전 1592~1597 임진왜란은 백성 들을 극심한 빈곤으로 몰아넣었다.
정비록 에는 왜란 중 백성들의 처참한 실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으며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 시체와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일찍이 율곡 이이는 왜구의 침략을 대비해 십만 양병 론을 조정에 건의 하였으나 조정은 이를 무시하고 전쟁은 쌍놈들이나 하는 것이라 하여 무방비상태를 만들어 왜구에 강토를 유린당했다.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국방을 소홀히 해 당한 임진왜란의 교훈을 얻었고 결국 조선은 군사대국으로 성장한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이제 다시는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하여서는 안 된다.
지나온 시대마다 정권을 주도하는 세력들은 권력의 중점이 어떠했느냐?
각 국가의 운명을 반석위에 세우느냐 아니면 풍전등화처럼 위험에 처하게 하느냐 하는 막중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상고 해본다.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구조는 어떠하며 주변상황은 어떠한가?
예로부터 우리는 고의로 부끄럽고 치욕적인 사건들을 덮어버리고 감추려는 경향이다.
학교에서도 이런 내용을 배운바 없으며 간단히 한 줄로 기술할 정도 이다.
그리하여 똑같은 경우를 수업 시 반복하는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 명분과 결의는 없더라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으면 당할 수밖에 없고 또다시 굴욕의 역사를 쓸수밖에 없다
조선은 국방을 등한시 하여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란을 겪었으며 300년도 채지나지 않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게 된다.
삼전도비는 후일 일본이 36년간 식민지로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 조선은 청나라에 지배를 받았듯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빌미를 준 표징이 되었다.
조선 말기 고종은 수치스러운 비라 하여 매몰하였으나 5.16 후 박정희 대통령 께서 수치와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이기에 후세를 위하여 다시 세우도록 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로써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 되었고 이후 청은 명을 침략 통일하고 1895년까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할 때 까지 계속 되었다.
역사에서 교훈과 지혜를 얻지 못하는 지도자와 민족은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
역사학자의 말을 엄중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하다고 하였다.
민족의 역사는 그 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미래의 새 시대를 개척해나갈 불멸의 활력소를 제공 해주는 무진장한 민족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번영과 쇠퇴의 자취는 그 나라의 역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부각 되어야한다.
우리민족은 5000년 동안 930여회의 외침을 당하여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빼앗기며 살아왔고 말 못 할 사연도 무수히 많다. 이런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으로써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끝으로 우리민족과 유태민족을 비교 해봅니다.
1945년 동안 디아스포라 유랑민족으로 전 세계를 떠돌면서 자기나라 조국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며 살다가 일개 개인의 시오니즘에 의한 내나라 찾기 운동에 동참 7일 전쟁으로 승리 자신의 조국을 찾아 지금 전 세계 정치 문화 경제에 앞장 서가고 있습니다.
반대로 한때 북유럽과 아시아를 주름잡던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어떻습니까.
유목 생활을 못 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열강들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 10위 경제 대국 권에 이르고 있는 부강한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 사랑하고 보듬어주며 위로부터 아래 까지 한마음으로 뭉쳐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멋쟁이님 역시 옛 역사 실력 유감없이 발휘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게을러 못 배웠던 한국역사학 앞으론 열심히 공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