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1964년 도쿄 올림픽 한 해 전, 다카이 세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 일본은 낡은 것을 부수고 새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이며 고속철도를 개발하고 통용 은화를 만드는 등 기존의 시스템을 바꾸려는 시도가 다분 보였던 시대이다.
그럼 이 애니메이션은 어떤 내용을 내포하고 있을까. 이 보고서에서 다룰 내용은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옛 건물인 동아리 실 “카르티에라텡” 철거 반대 내용이고 둘째는 주인공인 마츠자키 우미가 작에서 행하는 ‘깃발 올리기’ 행위에 대한 내용이며 셋째는 우미와 학교 선배이자 철거 반대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가자미 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우선 카르티에라텡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카르티에라텡은 고난고등학교의 동아리 실이며 1920년에 지어져 작품의 배경인 1964년까지 유지되었던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은 매우 낡았고 내부는 더러웠으며 안에서 동아리를 어떻게 운영하나 싶을 정도로 허름했다. 그런 건물을 철거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역사”이기 때문이다. 작중 가장 인상 깊은 말을 떠올려보자면 단연 주인공 가자미 숀의 철거 반대를 주장하며 외쳤던 말이다.
“오래됐다고 없애는 건 과거의 기억을 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는 걸 무시하는 것이라는 거다. 새로운 것에 매달려 역사를 무시하는 너희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느냐. 소수자의 의견을 듣지 않는 너희들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과거의 낡은 것들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들이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최고라고 여겼던 시대상에 반대되는 주장이었다. 숀은 카르티에라텡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수많은 학생들 앞에 서서 오래된 것의 보존을 주장하였다. 처음엔 수많은 학생들이 이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었지만, 주인공 우미의 조언으로 하나둘 카르티에라텡을 청소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하고 학생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철거 반대를 주장하게 되었다.
옛 역사를 남기려는 학생들의 주장은 매우 인상 깊을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나에게서 일본의 이미지는 ‘역사를 왜곡하고 잊으려는 국가’로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거 본인들의 행위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은 일본 정부 때문에 생긴 사고였다. “역사를 잊은 사람에게 미래 따윈 없다.” 작가가 의도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깔끔하게 청소된 카르티에라텡을 보며 이사장은 철거하지 않기로 학생들과 약속한다. 청소된 카르티에라텡을 보고서 이사장은 “이제야 이 건물의 가치를 알겠군. 교육자가 문화를 지키지 않고 뭘 가르치겠는가. 내가 책임을 지고 동아리방 건물은 다른 곳에 짓겠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학생들의 뜻에 따라 카르티에라텡은 보존되었다. 새것을 중시하던 당시 시대상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학생들은 카르티에라텡에 권력자를 초청해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곳이 철거되지 않음을 인정받은 셈이다.
다음으로 다룰 주제는 마츠자키 우미가 하는 ‘깃발 올리기’ 행위에 관해서이다. 우미는 한국전쟁 때 아버지를 잃었다. 한국전쟁때 물자수송선에 탄 아버지가 그대로 실종되신 것이다. 우미는 배를 타는 아버지를 위해 항상 깃발을 올렸고 이를 보고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깃발은 국제신호기 UW를 게양한 것이었고 그 의미는 ‘안전 항해를 기원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실종된 현재까지도 우미는 계속해서 깃발을 올리고 있다. 그 깃발이 이제는 숀과의 매개체가 되었다.
우미는 아버지가 보고 돌아오기를 희망하며 깃발을 올렸다. 그리고 그 깃발을 발견하고 답신하듯 건너편에서 깃발을 올린 건 숀이었다. 숀은 아버지를 따라 종종 배를 타곤 했고 그 배에서 깃발을 올린 것이었다. 우미는 마당에서 깃발을 올렸기 때문에 숀이 올리는 깃발을 볼 수가 없었지만, 집의 2층 테라스로 올라가면 그 깃발이 보였다. 이는 우미와 하숙집에 같이 거주하는 언니의 그림에서 발견한다. 숀이 올리는 깃발을 그려낸 그림을 말이다.
우미가 소망하는 ‘아버지가 돌아오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의 생사는 ‘실종’이라는 말로 포장된 ‘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깃발을 올리는 행위는 아버지가 돌아오길 바라는 소망,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은 과거부터 줄곧 이뤄지던 행위 의식이다.
존재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믿는 것, 누군가의 예언을 믿는 것, 어떠한 행위를 하면 축복이 내려올 것이라는 믿음 등, 수많은 믿음이 줄곧 존재해 왔고 이는 불확실한, 또는 암울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밝은 미래를 꿈꾸도록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했다.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아버지를 그리는 우미를 위로하고 미래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깃발’이고 이를 숀이 받아내어 준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다루고 싶은 내용은 숀과 우미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다. 작중 이 둘은 남으로 만나지만 초중반쯤에 ‘가족’이라는 혈연관계로 인지된다. 그 이유는 우미의 하숙집에서 발견한 사진 때문이다. 그 사진 속 ‘사와무라 유이치로’라는 사람이 우미의 아버지이자 숀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둘은 서로를 좋아했지만 혈연이라는 관계에 얽혀 좋아하면 안되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극 중후반에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우미와 숀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다줄 말을 전해줄 역할인 듯 했다. 사실 숀은 유이치로의 친아들이 아니며 다치바나 히로시의 아들이었다. 배 사고로 죽은 다치바나를 대신해 숀을 유이치로가 안고 현재 숀을 키워주는 ‘아버지’인 카자마 아키오에게 전해주어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었다.
이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도 숀과 우미는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 혈연관계라고 알고 있을 때도 여전히 서로를 좋아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흔히 부르는 ‘막장 드라마’ 같았다. 출생의 비밀로 등장해 이 내용이 둘의 관계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 애니메이션에는 다양한 가치관들이 담겨있는 듯했다.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시대상에 맞지 않는 태도부터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소망, 흔히 일어날 수 없는 남매간의 사랑(막장드라마라고 불리우는) 등을 다룬다. 사실 내가 발견한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고도 더 많은 사상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숙집에서 모든 집안일을 담당하고 있는 우미, 그런 우미를 돕지 않는 동생들. 유난히 현재의 사상을 곁들여 볼 때 장녀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부분이 상당히 거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따져봤을 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게 된다면 처음 볼 때부터 등장인물의 모든 행동에 의미부여 해보며 보는 것을 추천한다.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이나 의식, 행위 모든 것에 의미를 찾다 보면 어느샌가 그 시대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위 내용들이 그러한 것이다. 보다 보면 얻는 교훈도 꽤 많은 듯하다. 교훈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과거를 잊은 자에겐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첫댓글 세 가지 키워드로 작품을 분석했군요. 우선 과거에 대한 기억 부분에서 "권력자를 초청해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곳이 철거되지 않음을 인정받은 셈"이라고 하였는데, "권력자, 가치, 인정" 가운데 하나라도 누락되었다면 과거에 대한 기억은 의미 없는 것이 될까요?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도 실은 "권력자, 가치, 인정"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라면 결국은 모두가 "권력자, 가치, 인정"이라고 하는 잣대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기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과거부터 줄곧 이뤄지던 행위 의식"으로 표현된 "소망"을 비롯한 "믿음이 줄곧 존재해 왔고 이는 불확실한, 또는 암울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밝은 미래를 꿈꾸도록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그런데 그와 반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생사는 ‘실종’이라는 말로 포장된 ‘사망’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부질없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여기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보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