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KTPlUZuaw
1 영혼육으로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께로 리턴하는 방법 즉, 회개하는 방법은 온 마음과 온 영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회개는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자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청종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여 명령을 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회개는 순종으로의 행동 변화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영, 혼, 육 전존재를 주님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마음(감정)을 바꾸어야 하며 생각(지성)을 바꾸어야 하며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행동을 바꾸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신30:2)
2. 행동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문자가 아닌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지켜 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우린 그런 사람들을 문자주의, 극단주의, 근본주의 등으로 폄하하며 역사적 환경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해석한다고 말한다.
비유적 해석이 루터의 말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면 문자적 해석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비유적 해석은 결과는 신천지이다. 그 결과 할아버지가 예수가 되었고 수많은 이단들이 교주가 되어있다. 교회에서도 비유적 해석을 함으로 그 결과 여호와의 절기도, 샤밧도 모두 다른 날로 대체된 것이 아닌가?
이처럼 2000년 동안 교회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스스로 교회를 공격할 수 있으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또한, 역사적 환경적 배경에 따라 진리가 바뀔 수 있는가? 토라를 받은 지 4000년 예슈아가 오신지 2000년이 지났기에 토라는 지킬 수 없고 깨닫기만 하면 되는가?
3 율법의 문자 그대로 성취 하시는 하나님
예슈아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사실 이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옳다는 교리 때문에, 성경의 문자와 다르고 나름 이해하고자 하다보니 비유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불법한 자 멸망의 아들이 미혹할 줄을 아시고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슈아께서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에서 자유한 즉,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 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인가? 과연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바로 그 뜻은 다음 구절에 나온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두 이루어지는 것, 언제까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루어져서 성취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슈아께서 죽으시면서 완성하셨다가 아니라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완성시키기 위해 예슈아께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도 문자 그대로 ... 점하나! 획하나! 까지도 성취하실 거라는 것..
예슈아께서 문자 근본주의이고 극단주의여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마5:17.18)
4 율법을 폐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모를 공경하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는 율법을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해석했다. 만약 부모님께 드려야하는 용돈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렸다면 부모 공경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율법을 지킨것과 같다고 해석하는 전통이었다. 이들이 율법을 폐한것인가? 아니다. 폐한 것이 아니라 육의 부모가 아닌 영의 아버지를 공경하며 드린 더 깊은 의미의 순종이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생각이 달랐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해석의 전통으로 말씀을 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폐한다는 것은 나름 영적인 해석으로 율법의 문자적 순종을 하지 않는 것도 폐한 것과 같다.
이런 전통적 해석을 지적하는 예슈아께서 자신이 율법을 완성했으므로 이제는 영적으로 해석하고 율법을 안지켜도 되게 하셨다니 얼마나 넌센스인가? (막7:10~13)
5 의지적으로(믿음) 결단하고 순종할 때 할례를 베푸신다
앞에서 마음과 영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려고 돌이켰을 때(회개했을 때) 그 다음 따라오는 것이 온 마음과 온 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와 우리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순종을 결단할 때 사랑하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토라이다.
순종을 결단할 때 분명 우리의 의지가 필요하고 그 의지는 믿음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린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없다. 순종으로 따라오는 복은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약속있는 계명이다. (신30:2,6)
6 의지가 믿음이다.
감정은 충동을 따라가고 본능을 따라갈 수 있지만, 믿음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죄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이다. 요셉도 이성적인 노력으로 죄를 이겼다. 과연 우린 죄를 이길 수 있는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의 아내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으로 탐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마카비4서2:1~6)
아버지께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예슈아께서 오셨고 그러므로 이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그분이 완성했다는 교리를 배웠다. 이 교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예슈아를 불법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슈아께서 죄를 이기게 하기위해 오셨지 율법을 없애서 죄가 난무하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7 왜 순종했을 때 소산이 많아지고 복을 받을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언약은 하나님을 사랑하게하고 생명을 주시겠다는 영적인 것만이 아니다. 분명 육적으로도 소산이 많아지는 축복, 머리가 되는 축복, 자손이 잘되는 축복, 나라의 축복등을 약속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온 마음과 영으로 돌아갈 때 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축복이 따라오는 걸까?
아버지께 순종했더니 장사가 잘 되는가? 못 받았던 돈을 받는가? 부동산 값이 올라가는가? 지원금이 더 많이 나오는가? ... 그럴 수도 있지만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때문에 복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신30:9,10)
8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창조자들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본 적도 들은적도 생각지도 못한 것을 공짜로 주신다. ('은혜로 주신것'은 헬라어로 무료로 주셨다는 뜻이있고, KJV영어 성경도 freely 로 번역했다)
이렇게 성령을 좆아 나는 일들은 세상 사람의 눈에 가려져 있다. 왜냐하면 어리석어 보이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은 오직 주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있다. 이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일은 창조적인 일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이끌어 간다.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을 따라가는 것은 추종자들의 일이고 꼬리의 일이다. 꼬리는 머리가 가는대로 따라갈 뿐이다. 그러나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머리의 일이고 트렌드를 만들어 내고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창조적인 영역은 반드시 계시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일심 동체처럼 코드가 맞다면 우리의 창조성이 깨어날 것이다. 이것이 에덴의 회복이고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우리의 창조성이 깨어날 때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이끌어가는 트렌드를 만들고 하나님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리더가 되며 세상을 움직이는 머리가 된다.
우리가 이미 천국을 산다면 천국의 것을 다운로드하여 이 땅에 성취하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취하는 삶이며 계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세계중에 뛰어난 민족이되고 머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세상의 재정이 들어오는 것은 또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우리가 이러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전 존재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 존재, 전 재산, 명예와 생명까지 걸고 하나님께 올인한다면 (재산을 헌금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한다) 분명 하늘의 보고가 열릴 것이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며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영감을 받기위해 사단에게 영혼을 파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는다.
어둠을 거짓말 쟁이다. 어둠은 피조물일 뿐이다.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진정한 영감은 오직 창조주이신 아버지께로부터 온다. 할렐루야!(고전2:9~14)
9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달성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분명 율법은 지키기에 어려운 것도 먼것도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어려운'의 히브리어 뜻은 달성하기 너무 어렵다, 숨겨져 있다. 지키기에 너무 높다 등이고,
'멀다'는 장소나 시간적으로 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율법은 지키기 너무 어렵고 너무 높고 심지어 진짜 의미가 숨겨져 있어서 아무도 지킬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4000년 전에 준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하느냐"라는 말에는 시간적으로 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경은 달성하기 어려운 것도 장소에 제한적이거나 시대 착오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신30:11,12)
10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
율법이 저 하늘위에 저 바다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있고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으로 우리는 순종할 수 있다. 바로 이 구절을 바울이 인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믿음에서 시작하는) 의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것도 무저갱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말씀이 마음에 있고 그것이 우리의 입에 있다고 하는 것이 믿음에 관한 말씀이다. 이처럼 믿음의 결과는 순종이다. 그러나 믿음에서 시작하였으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인 것이다.(신30:13,14 롬10:6~8)
11 모세가 말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바울은 예슈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마침'은 헬라어로 '도달점이 되다, 목적이 되다, 결국이 되다'라는 방향성을 포함한 본보기를 나타내는 말이다.
모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기록했고 또한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도 기록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말리암는 의는 모든 행위 이전에 율법이 너무 가까워 내 마음에 있고 입에 있기 때문에 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은 율법을 행하기에 어렵지 않다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에서 시작하는 의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함께 온전함으로 간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행함으로 온전하여 지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행함으로 시작하여 믿음을 만나고 행함이 믿음으로 온전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특별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더욱 강조한 것이다.(롬10:4~8)
12 생사화복을 선택하는 것은 내 믿음의 결과물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우리 앞에 두었다.
아담과 하와도 뱀의 교리(선악과)를 받아들인 것에 대한 책임을 진 것처럼 우리도 우리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과연 우린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 주신다고 하는 토라를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박수쳐주는 전통을 선택할 것인가?는 나의 믿음에 달려있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이 선호하는 전통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평안을 줄거같고 최소한 외롭지 않고 내 미래에 소망이 있을 거 처럼 보인다.
그래서 하와도 넘어진 것이다.
그리고 토라를 따라가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시대 착오적이며 망하는 길처럼 보일 수 있다.
이 모든 선택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믿음의 현 주소를 볼 수 있다.
선택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며 그 댓가를 그날에 지불해야 할 것이다. (신30:15~18)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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