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낮은 곳에서 뜨는 별 스무 살을 앞둔 겨울, 나는 사람을 대하는 게 두려웠다. 단기 아르바이 트를 하러 예식장에 가면서도 '그냥 도로 집에 갈까?' 망설인 것도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던 순간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하는 중이었다. 설거지 를 하는데 직원들이 말을 걸었다. "춥진 않아요?" "물 차가우면 얘기해요" "핸드크림 바를래요?" 예전에 일한 예식장은 아르바이트생을 일회용품처럼 취급했기에 이런 호의가 얼떨떨했다. 반복되는 지루한 작업 속에서 사람들은 말문을 열었다. 재수를 준비하 는 친구, 가족 몰래 알바하며 편입 공부하는 언니, 구직 중인 오빠까지 모 두 각자의 이유로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한 오빠가 말했다. "그래도 여기는 날 필요로 하니까 자꾸 오게 돼.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그간 내게는 쉴 새 없이 고난이 몰아쳤다. 엄마의 암 투병으로 한창 불 안하고 예민한 시기 당한 믿었던 사람의 배신, 나를 좋아한 친구의 변질 된 집착, 학교 폭력과 이간질... 그로 인해 사람을 믿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들 속에서 온기를 느끼고 싶었나 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발끝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직원들이 챙겨 준 샌드위치를 들고 집으로 가는 전철 안, 창밖의 고층 빌딩과 수많은 자동차 불빛이 반짝였다. '별이 하늘에만 뜨는 게 아니구 나. 낮은 곳에서도 별은 뜨는구나.' 오늘 만난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소망했다. 늘 밝게 빛나기를. 이서진 | 경기도 부천시 *중요한 사람들 소설가 심윤경은 단골 미용실 원장님이나 옷 가게 사장님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이들의 도움과 배려 덕에 자신감과 안정감이 생긴다고. "일상 속에서 대단치 않은 일들로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서로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공감이라는 언어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 접근성 개선 사업을 할 때였다. 그날은 가 게 출입구에 휠체어, 유모차 등이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경사로를 내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 궁금했는지 멀리서 지켜보던 한 카페 사장님이 조심스 럽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공사인가요?" "경사로와 자동문을 설치하고 있어요. 장애인과 노인, 임산부, 어린이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는 과거에 자신도 사고로 다리를 다쳐 불편함을 겪었다고 이야기했 다. "정말 좋은 일이네요. 혹시 저희 카페도 참여할 수 있을까요?" 사업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장님의 모습에 감동받은 나는 적극적으로 답했다. "정 말요? 참여가 가능한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며칠 뒤 그의 가게는 사업 대상 업체로 추가 선정됐다. 사장님의 세심한 배려로 경사로와 자동문 설치는 물론 화장실 개선까지 문제없이 마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의 가게를 다시 찾았다. 그는 사람들이 편히 오가는 모습 을 보니 마음이 좋다고 했다. 도시의 건축이 사회적 약자에 맞춰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겐 참 고마운 사장님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일상을 '보기'보다는 '읽어야' 한다. 우리의 작은 일상을 읽고, 사 회적 약자를 배려한 공간을 만든다면 지금보다 더 따뜻한 도시가 되지 않 을까? 나는 아직까지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사업에 동참해 준 사 장님들의 마음을 잊을 수 없다. 평창에서 만난 카페 사장님과 같은 사람 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이훈길ㅣ건축사 행복한 할머니 여든이 된 내게는 손주가 여섯이나 있다. 비록 세 명은 외국에 있어 매 년 한두 번밖에 못 보지만, 나머지 셋이 자주 들러 주는 덕에 행복하다. 기특하게도 그 셋은 2인용 침대에서 나하고 자겠다며 옥신각신한다. 결 국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자기로 했다. 누구 하나 자다가 떨어질까 걱정 돼 침대용 울타리도 구입했다. 다 같이 자는 날엔 방바닥에 이불을 편다. 할머니로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열한 살 손주와 자는 날이었다. 얼굴에 뽀뽀한 뒤 잘 자라고 하자 아이 가 내게 물었다. "할머니, 왜 수면 마스크 안 하세요?" 6~7년 전부터 수면 중 호흡을 돕는 양압기를 착용하고 자지만 자식들이 나 손주들이 오는 날엔 웬만하면 안 쓴다. 아이들이 놀라거나 겁먹을까봐 서다. 지난번에 우연히 봤다는 손주에게 무섭지 않았냐고 묻자 아이가 말했 다. "하나도요. 할머니가 아플까 봐 걱정했죠.” 그 말에 울컥했다. 한번은 손주들에게 물었다. "할머니가 해 준 음식 중에 제일 기억에 남 는 게 뭐니?" 아이들은 새우젓이 들어간 닭볶음탕을 꼽았다. 우리 집 전매특허 요리 지만 솜씨가 많이 녹슬었을 텐데, 그럼에도 맛있다고 해 줘서 고마웠다. 손주들이 커 갈수록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워진다는 드라마 대사를 들은 적 있다. 헤어짐이 두려워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훗날 손주들에게 어떤 할머니 로 기억될까?' 내가 상처되는 말을 하거나 나쁜 기억을 안기진 않았을까?' 손주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자고 새해 다짐을 해 본다. 장영희(가명) | 서울시 강남구 *손주 미국 에모리대학교 연구진은 12세 이하 손주를 둔 할머니 50명에게 손주 사진을 보여 주며 뇌 반응을 살폈다. 그 결과, 우는 사진에는 고통을, 웃 는 사진에는 행복감을 느꼈으며 그 정도는 자식 사진을 봤을 때보다 컸다. 연 구진은 "자식을 키울 때 느낀 부담이 손주에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치고 깨고 깨우치는 1월의 술 종이를 펼치고 그물망에 든 토기를 올린다. 나무망치를 들어 내리친다. 망치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빗겨난다. 토기에 애매하게 간 금이 영 시원스럽지 않다. 망치를 다시 힘 있 게 말아 쥔다. 전완근을 단단히 긴장시킨다. 치는 거라면 자신 있다. 2023년에 가장 잘한 일을 꼽자면 드럼을 치기 시작한 거니까. 매일 집에서 두세 시간씩 기타를 연주하는 남편을 보며 시끄럽다고 잔소리하다 지쳐 더 시끄러운 악기인 드럼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지가 벌써 3개월이다. 그 길로 집 앞 실용 음악학원에 등록해 매주 드럼 레슨을 받는 중이다. 집에서 울리는 기타는 여전히 시끄 럽지만 이제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무심코 장단을 맞춘다. 학원까지 찾아간 이유가 남편 때문만은 아니다.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아는 어른이 되 고 싶은데 그나마 드럼이 만만해 보였다. 능숙히 연주하려면 당연히 쉽지 않겠지만 일 단 치기만 해도 소리가 나긴 할 테니까. 중학교 수행평가 때 끝끝내 단소에서 소리조차 나지 않아 점수가 깎였던 나, 통기타를 배우려다가 쇠줄에 손가락이 눌리는 고통을 참 지 못해 곧장 그만둔 나는 내 음악 세계의 밑바닥을 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착각이 깨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좁은 연습실의 반절을 차지한 채 존재감을 뿜어내는 드럼 세트를 본 순간부터 나는 기가 죽었다. 크고 작은 북과 꽹과리 같은 게 주렁주렁 달린 악기는 생각보다 거대해서 짧은 시간 안에 팔을 다 뻗기도 어려워 보였다. 내가 감 당할 수 있는 건 고작 중간 크기의 북하나 정도랄까. 게다가 소리는 그 생김새를 압도했 다. 제일 조그만 북조차도 내가 듣기에 부담스러운 데시벨로 공간을 메웠다. 시범을 보 이는 선생님을 따라 드럼 세트 앞에 어색하게 앉아 두꺼운 젓가락처럼 생긴 스틱을 쥐 어보았으나 도무지 팔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도 되나 싶어서. 친다고 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쳐도 소리는 나지만 제대로 잘 쳐야 음악이 되었 다. 망설이지 말고 힘 있게 쳐야 하지만 어깨와 손목엔 힘을 빼야 하고, 팔꿈치를 일자로 올렸다가 그대로 내려오게끔 신경 쓰면서, 야구공을 던지듯 손목 스냅을 이용해 드럼의 정중앙에 스틱을 내리쳐야 했다. 주로 쓰는 오른팔에 비해 왼팔의 힘과 속도가 떨어지 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친다.'라는 동사가 어떤 의미인지 드럼 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드럼 학원에 첫발을 들인 지 3개월이 지난 지금의 나는 걸음마 정도는 뗐다. 여전히 왼 팔은 오른팔보다 둔하고, 엇박자 리듬에서는 팔다리가 나도 모르는 자아를 가진 채로 움직이지만, 어쨌든 전보다는 낫다. 칠 줄 아는 곡도 많아졌고 합주하는 밴드까지 생겼 다. 무엇보다 여러모로 거대하게 느껴졌던 타악기의 존재감에 더 이상 짓눌리지 않는다. 부담스럽기만 했던 드럼의 요소들이 연주할수록 지나치지 않게 느껴질 때의 기분이란. 드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데시벨과 근육의 쓰임새에 익숙해질록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나를 만났다. 드럼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커다란 소리 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노라면 어떤 외부 충격도 제대로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 분이 든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큰 소리를 낼 배짱이 없던 나의 저력을 확인하는 것만 같달까. 요즘은 드럼을 치는 것보다 드럼을 이렇게밖에 연주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견디기가 더 괴롭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기를 벗어나자 갈 길이 구만리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거 다. 발버둥에 발버둥까지 쳐도 여전히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 이상적인 모습과 너무나 동떨어진 나, 수많은 못난 '나'의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는 사실에 벌써 아득해진다. 잘하고 싶은데, 분명 전보다는 더 잘하는데, 그런데도 자꾸만 나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밑바닥의 기준이 올라갔기 때 문이야! 닳아가는 스틱을 쥔 내가 외친다. 가끔은 기세로 이겨내야만 하는 때가 있다. 자신 있게 쳐야 좋은 소리가 난다. '오매락 퍽'의 토기를 깰 때도 마찬가지다. 힘 있게 한 지점을 향해 꽂아넣듯 망치를 내 리쳐야 한다. 그러면 이름 그대로 퍽 소리가 나며 토기가 갈라지고 숨어있던 술병이 조 금씩 모습을 보인다. 그 안에서 매실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담황색의 술이 찰랑인다. 취 한 줄도 모르고 마시다 보면 어느새 병이 밑바닥을 드러낸다. 술병의 밑바닥을 보게 되 는 일만큼은 즐겁다. 인생은 오매락 퍽 같지 않아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을 테다. 그래 도 지금은 다시 한번 결심하기에 좋은 1월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결심하기에도, 새로운 구만리를 찾아 떠나기보다 지금의 지난한 행렬에 지치지 말자고 결심하기에도 좋은 1월 이다. 잠을, 눈을, 의식을, 벽을, 액운을..., 많은 것을 깨고 싶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다. 글 김혜경(에세이스트 겸 광고기획자) |
Concert du Nouvel An de Vienne le 1er janvier 2024 - Happy New Year
2024년 1월 1일 비엔나 신년음악회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첫댓글
잘 읽으며 고맙게 감상했습니다...망실봉님!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따뜻한 온정이 많습니다.
여기 세가지의 글에서도 그렇습니다.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죠.
한 사람 한사람 마음이 모이면 더 포근한 세상이 되겠지요.
오늘도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고운 글 감사합니다.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이란 하루를 즐겁게 해줘야지요...망실봉님!
※ 甲辰年 새해 다대포 일출입니다.
조금 늦게 뜨기는 했지만요.
감사합니다~
바다고동 님 !
새해 해 보러
다대포에 다녀오셨군요~
멋찐 일출 장면입니다 ~!!
좋은 기운 듬뿍받으셨서
갑진년 한 해 행복하게
보내세요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낮은 곳에서 뜨는 별 외(外)
좋은 글 고맙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핑크하트 님 !
새해 활기찬 하루를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