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번 : 2019101204
학과 : 사회학과
이름 : 김유민
# 레이블링 게임
펜데믹으로 인한 불경기와 급변하는 사회 속 ‘나’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시기였다. ‘레이블링 게임’이란 용어는 작년 트렌드 코리아에서 제시되었는데, 스스로 ‘나’를 규정하는 라벨을 붙인다는 의미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유형화하고 해당 유형이 갖는 라이프 스타일에 동조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어떤 색깔일까?’, ‘나를 꽃으로 표현하면 어떤 꽃일까?’ 등 개인의 성향과 더불어서 연애 유형, 친구관계 유형 등 다양한 자기진단 테스트가 유행이다. MBTI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각종 자기 유형화 테스트가 급격히 유행한 것은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자아를 찾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스스로를 라벨링하면서 ‘나는 -한 사람’이란 확신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자 할까? 수많은 자기 진단 테스트를 통해서 사람들은 정말로 명확한 정체성을 얻었을까? 이러한 노력이 되려 불확실성에 대한 반증이지 않을까? 나 또한 스스로를 라벨링하고, MBTI를 캐묻고 다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친구와 MBTI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기 진단 테스트 결과를 공유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자기 진단 테스트를 통해서 사람들은 소속감과 유대감을 얻지만, 소속감과 유대감이 곧 정체성을 의미하진 않는다. 몇 개의 유형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하며, 소속감과 유대감만이 정체성을 형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개인에서 분인으로
‘나’라는 존재에 있어서도 다양한 내가 존재한다. 친구들 사이의 나와, 부모님 앞에서의 나와, 직장동료 앞에서의 나는 다르다. 각자가 요구하는 역할과 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며,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존재한다면 ‘진정한 나’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있을까? 또한,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는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온전한 나일까?
처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란 주제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책이 한 권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란 무엇인가’에서 ‘분인’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나눌 수 있는’ 것으로 타인과의 관계 속 나를 정의하는 개념을 의미한다. 불가분한 ‘individual’을 넘어선 새로운 자아 개념인 것이다.
분인 개념의 전제는 타자와의 관계이다. 대학 입학 초기의 나와 졸업을 앞둔 지금의 나는 매우 다른 사람인데, 이는 지식의 양과 더불어 함께한 사람들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지도 교수님의 지지와, 좋은 친구들의 응원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나는 매우 초라하지만, 타인이 생각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기에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이를 저자는 누구를 어떻게 사귀는지에 따라 내 안의 분인 구성 비율이 변화하며, 그 총체가 나의 개성이 된다고 표현했다. 결국 타자와 커뮤니케이션한 분인의 집합체가 나이며,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가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종종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분인을 형성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 익숙하면서도 낯선, ‘나’
비슷한 이야기로, 미국의 사회학자인 어빙 고프만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일종의 연극처럼 바라보는 연극학적 유비를 제안한다.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의 사회적 자아를 연기하고, 다양한 상호작용의 상황을 마주하면서 나라는 배우의 인상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내면에 집중하라는 조언이 넘쳐난다. 서점의 베스트셀러들은 ‘나’를 위로하고, 발견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한다. 또한 각종 테스트를 통해서 나를 정의하며 자아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나’란 존재는 여전히 불확실하며, 가끔은 낯설게도 느껴진다.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게 느껴졌던 나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며, 사회적 자아를 연기하는 배우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나를 더욱 멋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좋은 상호작용 속에서 멋진 자아를 갖춘다면 더욱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낯선 ‘나’의 모습을 즐기는 내가, 그리고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첫댓글 '레이블링 게임'이라는 용어가 "스스로 '나'를 규정하는 라벨을 붙인다는 의미", :자기 자신을 유형화하고 해당 유형이 갖는 라이프 스타일에 동조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라고 소개하였네요. 우선 문맥으로 보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스스로'인 것이 맞을까요? '자기 자신을 유형화'하는 것이 본문에 소개된 것처럼 MBTI 등 이미 누군가가 정의한 것에 따른다고 한다면, "해당 유형이 갖는 라이프 스타일에 동조"한다고 표현하였듯이 결국은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대상 사물을 인식하려고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을 구분합니다. 따라서 나를 나 아닌 것과 구분해야만, 라벨링해야만 나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레이블링 게임'이라는 것을 정의하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강제되는 것일까요? 개인이 타자화된 나, 곧 타자 속의 나라고 할 때 분인은 그것과 구별된 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