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 김천의 小國들
- “김천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첫 번째 여행 ” [감문국 이야기 ]
김천 지역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들이 증명하듯
삼한시대 훨씬 이전인 신석기시대부터 감천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사람들이 분포해 살아왔다.
감천 상류 지역인 부항과 송죽리 등에서 산발적으로 살고 있던 토착민들이 농사짓기 유리한 평야지대인
개령과 감문지역으로 이동해 주변의 읍락을 흡수 통합해 감문국이라는 소국으로 발전했다.
감문국은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하여 비옥한 충적평야지를 기반으로 기원전 1~3세기경 성립되어 성장하다가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전 단계에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사로 즉 신라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을 비롯해
조선중기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후기의 대동지지(大東地志)등 관련사료를 종합해 볼 때 감문국의 중심지는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로 추정되며 그 영역은 감문면과 아포읍, 어모면, 조마면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학자들은 선산군 무을면 일대까지를 감문국의 영역으로 보기도 한다.
감문국과 동시대에 김천지방에 존재했던
소국인 주조마국(朱漕馬國), 배산국(盃山國),문무국(文武國),어모국(禦侮國),아포국(牙浦國)의 흔적을 찾아 떠난다.
# 조마면 일대의 주조마국
김천에서 거창으로 가는 길 중간,양천을 지나 시내가 끝날 무렵 감천을 따라 조마로 가는 길이 있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감천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옛 주조마국의 영역인 조마면이 나온다.
주조마국은 감문국과 함께 변한계 12개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이병도(李丙燾)선생은 주조마국의 존재와 관련해 일본서기(日本書紀) 차명기이년조(欽明紀二年條)에 등장하는
졸마(卒痲)와 삼국지위지동이전의 주조마국을 동일한 소국으로 비정하고 그 위치를 김천시 조마면일대라고 주장했다.
주조마국이 위치했던 조마면은 감천의 서쪽으로 증산면, 지례면, 남면, 농소면과 함께
일찍이 성주의 성산가야와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신라가 감문국과 사벌국을 복속하고 가야제국을 위협하자
서기 541년과 544년에 대가야(大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馬國),
사이기국, 고차국, 자다국(子多國), 산반하국, 걸찬국(乞餐國),염례국등이 함께
백제의 힘을 빌리고자 두 차례에 걸쳐 백제왕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 562년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를 토벌할 때 주조마국이 함께 토벌된 점도 가야와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조마면 장암리 일대의 배산국(盃山國)
조마면에서 다리를 건너 김천쪽으로 들어서면 조마면 장암리다. 이곳이 바로 옛 배산국의 영역이다.
배산국은 조마면 장암리 일대에 있었다는 소국으로 실제 마을에 배산(盃山)이라는 산이 있으나 구전으로만 전하지고 기록이나 증명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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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배산국 지역에서 나온 굽다리 접시/문재원 선생 제공 |
향토사학자인 문재인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배산국지역에서 나온 굽다리접시(고배)사진이다.
당시의 유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문재원 선생은 지례면 황석이 등 김천에서 나온 토기를 비롯해 약 6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연세가 많으시고 건강도 좋지 않으셔서 그 유물이 타지로 유출되지 않고 잘 관리될 수 있는 방안이 시급하다.
#어모국이 있었던 아천
김천 지역의 촌로들 사이에서는 “여산(余山)이 망해서 아산(牙山)이 되고
아산이 망해서 김산(金山)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여산은 문무국이고 아산이 바로 아천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산은 지금의 어모면 중왕리 아천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이 일대에 어모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시대에 현을 설치하면서 어모국의 이름을 따서 어모현이라 했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진다.
김천시청에서 상주로 가는 길로 가다 공단에서 빠져 조금만 내려가서 우측으로 꺽으면 바로 아천이다.
김천 공단의 발전으로 우측으로는 공단과 접한다.
지금도 아천(牙川)이란 내가 흐르고 있고, 좌측으로 꽤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아천에서 감문으로 가는 길로 조금 더 가다 좌측으로 가면 어모면 군자리가 있다.
이곳에 500살 은행나무가 있다. 한 번 볼만 하다.
아천이 끝나갈 무렵 좌측에 울창한 송림이 보인다.
무덤에 심겨진 듯한데 지금은 논으로 많이 개간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야트막한 산이었던 듯 하다.
#고인돌의 보고 문무국
송림을 지나 조금만 가면 문무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여산(余山)이 망해서 아산(牙山)이 되고 아산이 망해서 김산(金山)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는데
그 여산은 지금의 감문면 문무리로 윗마을을 상여(上余), 아랫마을을 하여(下余)라고 한다.
문무국의 뒷산은 백운산이다.
감문의 백성과 군사들이 사로(신라)국과 싸우다 몰살당한 비운의 장소다.
백운산에는 속문산성이 있고, 앞산인 고소산에 고소산성이 있다.
문무리 일대에는 청동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지석묘와 석실묘가 집중적으로 산재되어 있어 문무국의 존재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무리 일대에는 수 많은 고인돌과 지석묘가 있어 고인돌 공원 조성이 검토되기도 했다.
거의 도굴되어 유물은 없다.
동네 주민들을 무덤을 고려장이라고 부른다.
10여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무덤에서 나온 토기 한 두개는 있었다고 전한다.
상여를 중심으로 문무국이 궁궐터도 있었다고 전해지나 관련 자료는 없다.
다만 마을 주변에 산재한 고분과 성곽의 흔적들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상주군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빈천고개 도로변에는 지석묘로 추정되는 덮개돌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 감문국과 겨루던 제석리의 아포국
역사서에 아포국과 관련해
“아포가 배반을 해서 대군 30인을 일으켜 밤에 감천을 건너다가 물이 불어나 되돌아 왔다
(牙浦叛大發兵三十人夜渡甘川水見水漲以退)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아포국은 감문국에 순응하지 않는 나라였던 것 같다.
감문국은 감천을 유역으로하는 여러 소국의 맹주로 군림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서에 배반할반(叛)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주종관계를 유지하던
아포국이 감문국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포읍 제석봉아래 제석리 일대에 옛날 아포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주변에 여러 기의 고분과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왕비봉(王妃峰),관리봉(官吏峰),삼태봉(三胎峰)등과 같은 지명이 작은 나라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실제로 제석봉에 올라보면 족히 작은 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는 요건을 갖췄다.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 감천의 풍부한 물과 넓은 곡창지대가 눈앞에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