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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이야기-나를 울어버리게 한 노래
나를 울어버리게 한 가수가 있다.
스물세 해 전인 1996년 1월에,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가수 김광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가 부른 노래들이 너무나 슬퍼서도 울었고, 질곡 같은 삶을 살다가 가버린 그의 요절이 안타까워서도 울었다.
살아생전 그는, ‘이등병의 편지’라든가, ‘슬픈 노래’라든가,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이라든가,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이라든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든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라든가, ‘서른 즈음에’라든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라든가 해서, 딱 그 제목만 들어도 슬픈 느낌이 드는 노래들을 주로 불렀었다.
얼마나 슬픈 노래를 불렀던지, ‘노래하는 철학자’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노래한 그였다.
구절구절에 서정을 가득 담아놓은 노랫말을, 진솔하면서도 차분하게 부르는 그의 노래는, 늘 내 가슴에 깊고 슬픈 감동으로 담겼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나를 울린 노래가 한 곡 있다.
1990년에 김목경 작사 작곡으로 발표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제목의 노래가 바로 그 노래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노래는 그렇게 아름다운 추억의 세월을 떠올리는 것으로 첫 소절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간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60대 노부부로서 지난 세월의 인생길 그 길목 길목에 담아둔 추억을 함께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추억의 사연들은 계속 이어진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의 추억이 그 사연이고, 큰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의 추억이 그 사연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60대 그 나이까지 왔고,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이제는 그 눈물이 모두 말랐다고 했다.
그러고도 세월은 자꾸만 흘러가고, 흰머리가 늘어가고, 모두가 떠나고 있으니, 이제는 손이라도 꼭 잡고가자고 했다.
그쯤에 이르면, 누구든 콧잔등이 시큰해질 수밖에 없고,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다들 엇비슷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기까지였으면, 내 그 노래로 울지 않았을 수 있었다.
이어지는 끝 소절에서, 내 그때까지 참고 참았던 눈물샘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로 그 소절이다.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때론 그 끝 소절에서 펑펑 울기까지 했다.
그때로 스물다섯 나이밖에 안된 김광석 그가, 마치 60대 인생의 온갖 경험을 다 해본 양, 그렇게도 슬픈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익은 삶을 살았다는 시대적 현실이, 또 나를 슬프게 했었다.
지난주 토요일인 2019년 12월 14일의 일이다.
전날인 같은 달 13일 금요일에는, 내 고향땅 문경시내 ‘금곡송어장’에서 있었던 중학교 동기동창 송년모임에 발걸음 하느라 아내와 함께 문경으로 달려갔었고, 그 다음날인 이날에는 아내가 올해 마지막 김장인 동치미 담는다고 해서 ‘햇비농원’을 들렀었고, 한낮에는 부친상을 당한 내 중학교 동기동창인 전재학 친구를 조문하느라 빈소가 차려진 문경제일병원 영안실을 들러야했었다.
그리고 또 부리나케 서울로 돌아와야 했었다.
아내가 지켜야할 약속이 하나 있어서였다.
오후 5시에 서초동 단골집인 ‘남도찌개’에서 초등학교 동기동창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하는 약속이라고 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줘야 했다.
딱히 말을 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정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아내의 낌새를 늘 느끼기 때문이었다.
내 그래서, 때론 등 떠다밀다시피 해서 아내로 하여금 그 동기동창 친구들 모임에 발걸음을 하게도 했었다.
“나는 사무실에 있을 테니, 친구들하고 잘 놀다가 오세요.”
나 역시 아내의 친구들을 다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만남은 송년회의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부담 없이 어울리라는 생각에서, 내 그렇게 빠져주기를 아예 작정했었다.
그러나 내 작정대로 되지를 않았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러십니까? 퍼뜩 오시라니까요!”
전화통이 불이 날 정도로, 아내의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내게 전화를 걸어와서는, 그렇게 나를 불러 제키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해서, 처음부터 아내를 따라가서 같이 어울려주고 싶기도 했고, 이왕 어울린 김에 그 저녁의 밥값 술값까지 덮어써주고 싶기도 했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 모두에게, 아내가 자랑스럽고 떳떳한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마음은 그랬지만, 겉으로는 그 불러댐을 못이기는 척했다.
“내가 있으면 불편할 텐데, 왜 나를 불러요. 자기네들끼리 노시지.”
그러면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밀어 그 자리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함께 어울리게 되었으면서도, 쭉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에 내켜할까 아닐까를 어림셈으로라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퍽이나 즐거워했고, 남편인 내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로서도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권커니 잣거니 술잔이 오가는 도중에, 슬슬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내가 좀 더 챙겨줄 역할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동하는 마음을 주저앉히지 못했다.
끝내 내친 김에, 좀 더 나가고 말았다.
뜬금없는 약속 하나 한 것이 그랬다.
“우리 초등학교는 ‘한 갑자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잔치판을 벌였었어요. 제대로 따지면 2020년 내년이 되어야 초등학교 졸업한 지 한 갑자 세월이지만, 한 해 당겨서 한 겁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못 볼 얼굴들이 있을까 싶어서였어요. 여러분들도 머잖아서 초등학교 졸업 60년이 될 겁니다. 그때 우리 초등학교처럼 ‘한 갑자 우정’이라는 잔치판 한 번 벌여보세요. 그 판을 부추기는 의미에서 기금 100만원을 내겠습니다.”
내 그렇게 기금 내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그 약속을 하면서, 내 문득 떠올린 노래가 바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그 노래였다.
그들이 60대 그 나이였기 때문이고, 그 중에는 이미 짝을 잃어 외로워진 삶도 있음을 내 알기 때문이었다.
17일 화요일인 바로 오늘 일이다.
오전 9시 반쯤해서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 인근의 거래은행인 NH농협은행서초지점을 들렀다.
월 30,000원씩 해서 3년짜리 정기적금을 들었다.
매월 월정금은, 어쩌다 잊히거나 또 다른 이유로 빠뜨리지 않게끔, 아예 나와 아내가 살아생전에 받을 연금이 입금되는 연금통장에서 자동이체가 되도록 조치를 했다.
“이거.”
그러면서 그 적금통장을 아내의 눈앞에 내 밀었다.
“뭐예요?”
그렇게 응대하면서 통장을 받아든 아내였다.
그러나 아내의 그 물음에, 내 답할 필요가 없었다.
통장을 받아, 딱 펼쳐보는 순간에, 아내가 그 통장의 의미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얼굴에 반색이 돌았다.
그 반색의 얼굴만으로도, 내 가슴은 이미 뿌듯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 하는 말이 이랬다.
“친구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셨네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