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시 모음 41편 ☆★☆★☆★☆★☆★☆★☆★☆★☆★☆★☆★☆★ 《1》 겨울 편지를 쓰는 밤
박남준
무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툇마루에 떠다놓은 물이 꽁꽁 얼음이 되는 날들도 있었다. 그 겨울 밤 문밖에 나서면 쩡쩡 거리는 소리가 들릴듯한 푸른 별들 부끄러워서 고개를 묻던 날들이 있었다. 반문처럼 그 별들에게 보이지 않는 길의 나침판을 묻기도 했었다. 불쏘시게로 쓰던 잔 나무가지들이며 소나무 잎들이 다 떨어진지도 십여일에 가깝다. 나무청의 나무들은 사흘이나 버틸 수 있을까. 새벽부터 구들장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새우처럼 잔뜩 웅크린 채 이불을 둘러쓰고 미적거린다. 문밖이 훤하네 새들이 또 흉을 보고 있겠지. 결국은 일어난다. 금새 날이 꾸무럭 거린다. 심상치 않구나. 나무를 조금이라도 해야겠어. 갈퀴와 큰 자루를 찾아들고 앞산에 오른다. 노란 소나무 잎들이 어느새 저렇게 수북하게도 떨어져 내렸구나. 슬슬 갈퀴질을 몇번 하는데 소나무 잎새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 녹두알 만한 푸른 열매가 대여섯개나 보인다. 어디서 왔을까. 열매를 손에 들고 살펴보니 송진 냄새가 물큰 거린다. 무슨 나무의 열매일까. 어떤 새가 이 열매를 먹었겠지. 그리고 여기와서 실례를 했겠지. 새들의 튼튼한 뱃속에서도 살아남아 여기에 싹을 틔우려는 모양이구나. 그 씨앗들 다시 제자리에 놓아둔다. 나 여기 숲속에 살며 그간 나무 한그루 심지 않은 채 나뭇잎들을 긁어가거나 새파랗게 살아있는 나무들을 베어오지 않았던가. 내 한 몸 따뜻한 잠자리를 얻고자 그 나무들 깜깜한 아궁이 속에 들이밀고 불을 때며 살아 왔는데 새들은 나무들에 깃들어 둥지를 짓고 벌레들을 잡아
먹으며 이제 또 그 씨앗들을 옮겨서 숲을 키우려 하는구나. 갈퀴를 내려놓고 한동안 우두망찰로 앉아 있었다. 해가 뉘엿거린다. 너 뭐하니. 저만큼에서 직박구리가 꾸짖음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그래 나무하러 왔었지. 갈퀴나무 한짐을 해서 서둘러 내려온다. 툇마루에 앉아 담배한대 불을 당긴다. 뜰앞에 무성하던 지난 여름의 풀들이, 나무들의 낙엽들이 경배를 하듯 낮게
엎드린 채 다시 돌아올 거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길을 갈 수 있겠지. 돌아갈 수 있겠지. 새들이 돌아간 겨울 저녁 숲에 적막처럼 어둠이 깃든다. 편지를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위하여 올 겨울 길고 긴 편지를 써야겠다. 내가 나에게 써야겠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어찌 세상의 그리운 것들에게 떳떳할 수 있겠는가. 뉘우침의 편지를 그리움의 편지를 쓰는 이 겨울 밤, 밤새 세상을 하얗게 눈은, 흰눈은 내릴 것이다. 그 눈길 위에 첫 발자욱을 새기며 걸어 편지를 전하러 갈 것이다. 그 발자욱을 따라 그리운 것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며 달려 올 것이다. ☆★☆★☆★☆★☆★☆★☆★☆★☆★☆★☆★☆★ 《2》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박남준
나 오래 침엽의 숲에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감각을 곤두세운 숲의 긴장이 비명을 지르며 전해오고는 했지. 욕망이 다한 폐허를 택해 숲의 입구에 무릎 꿇고 엎드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한때 나의 유년을 비상했던 새는 아직 멀리 묻어둘 수 없어서 가슴 어디께의 빈 무덤으로 잊지 않았는데
숲을 헤매는 동안 지상의 슬픈 언어들과 함께 잔인한 비밀은 늘어만 갔지. 우울한 시간이 일상을 차지했고 빛으로 나아갔던 옛날을 스스로 가두었으므로 이끼들은 숨어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포자의 눈물 같은 습막을 두르고 숲의 어둠을 떠다니고 있다. ☆★☆★☆★☆★☆★☆★☆★☆★☆★☆★☆★☆★ 《3》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박남준
남은 불빛이 꺼지고 가슴을 찍어내리 듯 구멍가게 셔터문이 내려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성이며 발 구르던 사람들도 이젠 보이지 않고 막차는 오지 않는데 언제까지 나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춥다 술 취한 사내들의 유행가가 비틀거리다 빈 바람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막차는 오지 않을 것인데 아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처럼 발길 돌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일 같은지 막차는 오지 않았던가 아니다 막차를 보낸 후에야 막차를 기다렸던 일만이 살아온 목숨 같아서 밤은 더욱 깊고 다시 막차가 오는 날에도 눈가에 습기 드리운 채 영영 두발 실을 수 없겠다. ☆★☆★☆★☆★☆★☆★☆★☆★☆★☆★☆★☆★ 《4》 기다림이 지는 밤
박남준
눈을 감았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이 첫 만남이어서가 아닙니다. 당신과의 이별이 첫 이별이어서도 아니고요 빈방에 눅눅한 적막이 흐르고 꿈도 없이 무릎 꿇었습니다. 이제는 잊자고 잊었었지요. 무너지며 무너지며 어깨 들먹였었지요. 산 숲 가득 바람 불고 눈물 같은 비 젖어오는데 뚝 뚝 감 꽃이 지는 밤 멀리 호랑지빠귀 소리가 아득해져갔습니다. 이제 사위어질지요. 타고남은 재로 다 타고남은 재로 ☆★☆★☆★☆★☆★☆★☆★☆★☆★☆★☆★☆★ 《5》 길
박남준
길이 빛난다 밤마다 세상의 모든 길들이 불을 끄고 잠들지 않은 것은 길을 따라 떠나간 것들이 그 길을 따라 꼭 한번은 돌아오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 《6》 나도야 물들어간다
박남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대의 곤한 날개 여기 잠시 쉬어요 흔들렸으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은 풀잎이 속삭였다 어쩌면 고추잠자리는 그 한마디에 온통 몸이 붉게 달아올랐는지 모른다 사랑은 쉬지 않고 닮아가는 것 동그랗게 동그랗게 모나지 않는 것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는 것 그리하여 가득 채웠으나 고집하지 않고 저를 고요히 비워내는 것 아낌없는 것 당신을 향해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자라 허공을 당겨 나아가듯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여간다는 것 맨 처음 씨앗의 그 간절한 첫 마음처럼 ☆★☆★☆★☆★☆★☆★☆★☆★☆★☆★☆★☆★ 《7》 나른한 오후
박남준
꽃의 눈부심에 갇혀 자괴에 빠졌다 새들의 창공에 매여 악을 쓰기도 했다 이십이었을 때, 삼십이었을 때
꽃을 바라보다 내 얼굴을 만져보네 새들의 하늘을 올려보다 걸어온 발등을 바라보네 이제 그만 나른해져야겠네 ☆★☆★☆★☆★☆★☆★☆★☆★☆★☆★☆★☆★ 《8》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박남준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숫가락 목이 부러진 화순 산골 홀로 밭을 매다 다음날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 난 어느 할머니, 마루 위엔 고추며 채소 산나물을 팔아 마련 한 돈 백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이 검정 고무줄에 묶여 매달려 있었다지
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 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9》 독탕
박남준
언 개울물 풀려 흐르자 앞산과 뒷산 우르르 겨우내 묵은 때를 씻겠다고 달려와 얼굴 비춰보려는데 어랏 혼자 다 차지하고 아예 몸을 담그고 있는 저 젓- 쬐끄만 녀석 퐁당 톡 도토리 한 알 ☆★☆★☆★☆★☆★☆★☆★☆★☆★☆★☆★☆★ 《10》 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 《11》 떠도는 떠도는
박남준
지난 밤 풀벌레 소리 들려오지 않네 노래하지 ?네 새들 새들은 어디 갔을까 먼동의 햇살을 타고 날아오른 새들 돌아도지 않고 나 어디에 서 있는가 취한 모 그만 곤한 잠 뉘려는데 떠돌아야 하나 치둥치둥 바람은 갈잎새 휘휘 돌며 눈발처럼 불어오고 돌아가야겠는데, 갈 곳 없는데 ☆★☆★☆★☆★☆★☆★☆★☆★☆★☆★☆★☆★ 《12》 먼 강물의 편지
박남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는 눈 내리고 궂은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 《13》 먼 길에서 띄운 배
박남준
부는 바람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사랑 때문도 더욱 아닙니다 그 길의 길목에서 이런저런 만남의 인연들 맺었습니다
산 넘고 들을 지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끝에서 발길 돌리며 눈시울 붉히던 낮밤이 있었습니다 그 길가에 하얀 눈 나리고 궂은비 뿌렸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 갈 곳 없이 떠도는 막막한 일이 되었습니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도록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지요 강물로 흐를 수 없는지 그 강엔 자욱이 물안개 일었습니다
이제 닻을 풀겠어요 어디 둘 길 없는 마음으로 빈 배 하나 띄웠어요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의 큰 병 떠날 리야 있겠어요 제 마음 실어 띄울 수 없었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풀풀이 흩어져 띄워 보낼 마음 하나 남아 있지 않았어요
흘러가겠지요 이미 저는 잊혀진 게지요 아 저의 발길은 내일도 배를 띄운 강가로 이어질 것이어요 ☆★☆★☆★☆★☆★☆★☆★☆★☆★☆★☆★☆★ 《14》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박남준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사는 일도 어쩌면 그렇게 덧없고 덧없는지 후두둑 눈물처럼 연보라 오동꽃들, 진다 덧없다 덧없이 진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다
모진 바람 불고 비, 밤비 내리는지 처마 끝 낙숫물 소리 잎 진 저문 날의 가을 숲 같다 여전하다 세상은 이 산중, 아침이면 봄비를 맞은 꽃들 한창이겠다
하릴없다 지는 줄 알면서도 꽃들 피어난다 어쩌랴, 목숨 지기 전엔 이 지상에서 기다려야 할 그리움 남아 있는데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너에게, 쓴다 ☆★☆★☆★☆★☆★☆★☆★☆★☆★☆★☆★☆★ 《15》 명사산을 오르다
박남준
고비사막 돈황의 모래가 우는 산이라는 명사산에 올랐네 인생이 이렇게 발목이 푹푹 빠져드는 길이라면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네 일찍이 그만둬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고개를 내저어 보기도 했네 끄덕이기도 했네 산 넘어 모래바람 갈기 세우는 명사산에 엎드려 삶이 때로 늙고 힘 다하도록 능선에 올라 지친 땀 씻으며 걸어온 길 되돌아보는 일이라는 것 그렇게도 생각해보았네 명사산에 귀기울였네 살아오는 동안 내 울음은 곡비처럼 너무 컸네 결코 울음소리 들려주지 않는 명사산 세상에 지친 이들이 여기 올라 모든 울음을 묻고 갔으리 안으로 울음을 묻고 묻어 산을 이룬 모래산 터덕 터덕 낙타 등에 몸을 싣고 사막을 가던 날이 있었네 ☆★☆★☆★☆★☆★☆★☆★☆★☆★☆★☆★☆★ 《16》 몽유 별빛
박남준
별을 보며 길을 묻던 날이 있었다
반짝이는 것을 생각한다 어린 날에 달음질로 두근거리다 가까이 가면 이내 빛을 거두고 말던 사금파리나 유리 조각 깨어지고 부서진 것들이 반짝일 수 있다니 별처럼
무지개를 좇아 얼마나 숨차게 안타까웠던가 살아 있다는 일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의 거리로 아른거리며 달아난다 다는 신기루 같다 툇마루에 나앉은 햇살이 어느새 마당으로 내려선다 제 속에 지닌 수분을 남김없이 토해내기까지 형벌 처럼 매달린 빨래들이 좀처럼 평행이 되지 않는 외줄을 타며 가는 햇살에 몸을 뒤척인다
이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듯 삶의 구비구비에 이미 묻어 두었으나 아련한 것들이 몽유로 서성인다 그때마다 침엽의 숲속이 마른 바람에 젖어 잠겨간다 문득 풍경 소리 마당을 가르는 개울물 소리
날개 없는 것들이 비누 방울처럼 허공을 달고 반짝인다 모 든 것이 반짝이다니 쓰러진 것들이 구천 저자 거리를 떠돈다 떠도는 것들이 저물 녘마다 제 이름 부르며 별빛을 보고 길을 묻던 옛날을 더듬는다 ☆★☆★☆★☆★☆★☆★☆★☆★☆★☆★☆★☆★ 《17》 바람에 실어
박남준
어찌 지내시는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늘 의 해, 지는 노을 저편으로 수줍게 얼굴 내어 미는 아미 고운 달, 그곳에도 무사한지. 올 장마가 길어 지루할 거라느니 유별나게 무더울 거라느니,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지 초복인가 했더니 어느덧 말복이 찾아들고 입추라니, 가을의 문턱에 들었다니 아, 그런가보다, 그런가보다. 이곳 모악의 밤도 이제 서늘한 입김 피워 올리니 따듯한 불기가 간절하구려.
보고 싶구려 내 날마다의 밤 그리움으로 지핀 등 따듯한 온돌의 기운 바람에 실어 보내노니 어디 한번 받아보시려나 서리서리 펼쳐보며 이 몸 생각, 한 점 해 주실런가. ☆★☆★☆★☆★☆★☆★☆★☆★☆★☆★☆★☆★ 《18》 별빛에 실려
박남준
겨울밤의 하늘에 별들 참 낮게도 내려와 빛을 뿌려요 저 맑고도 고운 별빛 내가 키발을 딛고 훠얼 훨 손짓하면 금세 다가설 것 같은 별 하나 당신의 환한 얼굴 실려왔어요 ☆★☆★☆★☆★☆★☆★☆★☆★☆★☆★☆★☆★ 《19》 별이 지는 날
박남준
어디 마음 둘 곳 없습니다 그가 떠나서만이 아니고요 산다는 것이 서러웠습니다
빨래를 널듯 내 그리움 펼쳐 겨울 나뭇가지에 드리웠습니다 이제 해 지면 깃발처럼 나부끼던 안타까움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을까요
어디 마음 둘 곳 없습니다 별이 뜨고 별 하나 지는 밤 언제인가 오랜 내 기다림도 눈감을 테지요 ☆★☆★☆★☆★☆★☆★☆★☆★☆★☆★☆★☆★ 《20》 봄 편지
박남준
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도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침 아기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둣빛 봄 편지 ☆★☆★☆★☆★☆★☆★☆★☆★☆★☆★☆★☆★ 《21》 봄날은 갔네
박남준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작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번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 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랬을 것이다 새 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두 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은 섬진강가 잔물결마져 눈부시구나 언젠가 이 강가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빛과 분홍과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 《22》 분열증세
박남준
푸른 별을 세던 밤이 있었던가 거울 앞에 섰는데 분명 낯선 얼굴 하나 딱 정확하게 깨졌는데 비명소리가 고통스럽지 않는데 깨인 꿈도 그러할까 조각난 찢어진 만신창이의 누가 있었는데 별들은 붉은 것인가 뚝뚝 떨어지는 하나 둘 별들이 지는가 ☆★☆★☆★☆★☆★☆★☆★☆★☆★☆★☆★☆★ 《23》 사랑
박남준
직박구리가 찍-하고 울었다 흰 해당화 한 송이를 와자지끈 꺾었기 때문이다
소나무 한 그루 우두둑 가장 굵은 팔을 부러뜨린다 누군가 군불도 없는 찬방에 새우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그대를 위해 붉은 목숨을 내놓으리라 그런 날이 있었다 ☆★☆★☆★☆★☆★☆★☆★☆★☆★☆★☆★☆★ 《24》 상처받은 자에게 쑥부쟁이 꽃잎을
박남준
쑥부쟁이 그 목 긴 꽃그늘이 바람결에 사위어 가는 강 길을 따라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랑을 보냈는가 짐승처럼 웅크린 채 한 사내가 울고 있다 언젠가는 사랑에 비하면 오늘의 상처는 턱없이 가벼우리라 쑥부쟁이 꽃들 그 여린 꽃잎 가만가만 풀어 보내 사내의 물결쳐 가는 뒷등을 잔잔히 껴안는다
모든 자살은 용기가 있다 눈물나더군. 더럽게도 아름답더군. 거기에 정말 숨어 있었는지. 쏟아놓았는지. 새싹들 솟아서 하루가 다르게 그늘을 드리워 가는지. 꽃 피워 가는지. 죽음의 문에 가까이 가면 그때마다 세상은 더럽게도 아름답더군. 눈물나더군. 어쩌면 저 작은 벌레 작은 새 저 작은 풀꽃들에 이르기까지 가만, 내게도 불새의 춤으로 화르릉 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던가. 생각나지 않는지 몰라. 여태도 살아왔단 말인가. 정녕 그렇단 말인가. 으아 ― 무너진다 너는 자살할 용기도 없다 발악해봐 악악 악쓰고 있다 비참하게도 아직 숨 , 붙어 있다. ☆★☆★☆★☆★☆★☆★☆★☆★☆★☆★☆★☆★ 《25》 성공하지 못했다
박남준
삼천 원 없었을까 콩나물국밥값 시궁창의 몸으로 끌려가서 첫술에 반한 이름도 이상한 장뻘이라는 국밥집, 긴 뻘밭이던가, 그 집 장뻘 아주머니 내 국밥값 받지 않았다 불편했다 뚝배기 밑에 돈 놓고 나오다가 걸리기도 했다 후다닥 내달리고 아주머니 돈 흔들며 쫓아오고 나는 무단횡단으로 건널목 뛰어가고 아주머니 골목길에 매달린 채 헐떡거리며 삼춘 거시기 이러면 안돼야 발 동동 구르고
된통 혼났다 그때 삼춘 쫓아가다 목구녕까지 숨이 꽉 찼는디 다시는 그런 짓 당최 하덜 말라고 가난한 시인한테 국밥 한 그릇 못 사주겠냐며 울먹이는 화를 내셨다 성공할 때까지 받지 않겠다는 우격다짐이었다 언젠가 그랬다 오메 텔레비 봉깨 삼춘 나오데이 인자 유명해지 것네이 하이고 예, 성공했으니까 국밥값 받으세요 안직 장개도 안가고 차도 없는 것 봉깨 더 성공해야 것는디
오백 원에 오백 원이 또 올라도 국밥 값 낼 수 없었다 책 잘 받았다고 전화기 너머 들리던 풀기 없는 목소리 장뻘 아주머니 암으로 떠나셨다 내 생애 참 속 시원하고 얼큰하던 해장국밥, 전주 남부시장식 장뻘 콩나물국밥값 앞에 끝내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 《26》 아름다운 관계
박남준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 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는가 ☆★☆★☆★☆★☆★☆★☆★☆★☆★☆★☆★☆★ 《27》 아름다운 사람이 떠나고 오랜
박남준
변한 것은 없었지 사랑이 가버린 날에도 밤은 오고 새들은 은밀한 숲속에 또 그렇듯 저문 날개를 풀어놓겠지
늪을 찾아 떠나야겠어 망각의 늪이라는 그 늪에 빠지고 싶어 잊혀진 채 이미 잊혀진 채 나는 남았는데 나만 남았는데 산 위에 산아래 길가에 도회의 낯모를 지나는 뒷모습에서 옆모습에서 강에 나가면 흔들리는 흔들리지 않는 수면의 파문에서 아 독약처럼 달고 쓴 절망 같은 소줏잔 속에서 너는 떠나지 않고 너는 보이지 않고 ☆★☆★☆★☆★☆★☆★☆★☆★☆★☆★☆★☆★ 《28》 억새
박남준
꽃이 있었네. 하얀 꽃 하얗게 새어서, 새어서 죽어 피어나는 꽃
바람 부는 들녘의 언덕에는 하얀 소복으로 바람 날리며 너울거리는 억새들의 잔잔한 한숨이 묻혀 있다 이 땅을 일구며 지켜온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정결하고도 기막힌 삶들의 숨결 같은 억새 밭의 곁에 서면 어데선가 나타나는 새하얀 꽃상여의 행렬 흔들리며 흔들리며 물결쳐 오는 그 애잔하던 울음 ☆★☆★☆★☆★☆★☆★☆★☆★☆★☆★☆★☆★ 《29》 유목의 꿈
박남준
차마 버리고 두고 떠나지 못한 것들이 짐이 된다
그의 삶에 질주하던 초원이 있었다 지친 것들을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생각한다 한꽃이 지며 세상을 건너듯이 산다는 일도 때로는 그렇게 견뎌야 하겠지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일까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때 머물렀던 것들이 병이 되어 안긴다 아득한 것은 초원이었던가 그렇게 봄날이 가고 가을이 갔다 내리 감긴 그의 눈이 꿈을 꾸듯 젖어 있다 몸이 무겁다 이제 꿈길에서도 유목의 길은 멀다 ☆★☆★☆★☆★☆★☆★☆★☆★☆★☆★☆★☆★ 《30》 이름 부르는 일
박남준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 《31》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박남준
그렇게 저녁이 온다 이상한 푸른빛들이 밀려오는 그 무렵 나무들의 푸른빛은 극에 이르기 시작한다 바로 어둠이 오기 전 너무나도 아득해서 가까운 혹은 먼 겹겹의 산 능선 그 산 빛과도 같은 우울한 블루 이제 푸른빛은 더 이상 위안이 아니다
그 저녁 무렵이면 나무들의 숲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가지들로부터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다 귀 기울이면 오랜 나무들의
고요한 것들 속에는 텅 비어 울리는 소리가 있다 그 때마다 엄습하며 내 무릎을 꺾는 흑백의 시간 이것이 회한이라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흔들리는 것인가 이 완강한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는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상처가 나의 무덤이 되었다 검은 나무에 다가갔다 첼로의 가장 낮고 무거운 현이 가슴을 베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 상처가 깊다 잠들지 못하는 검은 나무의 숲에 저녁 무렵 같은 새벽이 다시 또 밀려오는데 ☆★☆★☆★☆★☆★☆★☆★☆★☆★☆★☆★☆★ 《32》 적막
박남준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쌓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 《33》 젊은 느티나무
박남준
지난가을의 잎들 온전히 떨치고 나서야 봄은 온다 세월의 나이테가 한 줄 한 땀 켜켜로 쌓여갈수록 이 땅, 사람의 곁에 내린 뿌리들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 무성한 가지들 부끄러움 없이 곧게 뻗고 푸르게 푸르게 잎들을 키워내서 품안이 너른 그늘도 드리워야 한다는 것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추운 겨울 건너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랜 가뭄 이겨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큰바람 앞에 꺾이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범람하는 홍수를 막아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돌아보면 아득하지 않은 길이 어디 있으랴 어질병의 현기증 일던 모진 시련 없었으랴 말문이 막히고 기막히던 일들 이루 말할 수 있으랴
여기 이 땅의 바람머리 언덕에 서서 나는 보았다 사람의 아이가 자라나서 아버지가 되어 가는 일 세상의 한 하늘을 넉넉하게 받쳐줄 기둥을 세운다는 일이다 그것은 떳떳한 삶의 밥을 지어 나누는 집을 짓고 어둔 밤길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등불을 내건다는 일이다
처음 한 알의 씨앗으로 새싹을 틔웠을 때를 잊지 않는다 까치들이 둥지를 틀고 사람의 마을에 희망의 일들을 전하는 나의 이름은 언제나 젊은 느티나무 무더운 여름날 일하는 자의 아름다운 땀을 식히는 나의 나이는 하늘 아래 싱싱한 푸른 그늘의 나무 ☆★☆★☆★☆★☆★☆★☆★☆★☆★☆★☆★☆★ 《34》 종일시선
박남준
키 작은 차밭에 내렸다 마당 앞 꽃 섶을 서성인다
너도 속이 탔더냐 돌 수조를 부여잡고 홀짝 둬 모금
날아온다 몰려간다 종일
새들이 머문 자리마다 내 눈이 따라갔다 언젠가는 아예 가서 오지 않을 것이다 ☆★☆★☆★☆★☆★☆★☆★☆★☆★☆★☆★☆★ 《35》 지친 어깨 위에 작은 별
박남준
밤 깊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섶에는 저 높은 하늘의 작은 별들 동무 삼아주려는지, 지상으로 내려왔는지, 연록 빛, 참 곱기도 고운 빛 뿌리며 밤길 훤히 밝혀줍니다. 반딧불 말이어요. 여기는 가시덤불이교요. 여기는 허방이에요. 낮은 어깨 위로 날아오르며 힘내요. 힘내요. 혼자가 아니예요.
지난 겨울 별똥별들 무척이나 떨어져 내렸었는데…… ☆★☆★☆★☆★☆★☆★☆★☆★☆★☆★☆★☆★ 《36》 참을 수 없는 슬픔
박남준
눈물처럼 등꽃이 매달려 있다 모든 생애를 통하여 온몸을 비틀어 죄고 칭칭 휘어 감어 오르지 않으면 몸부림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무게로 다만, 등나무는 등꽃을 내 다는 게다 그것이 절망이다 그렇다
등나무는 자학성 식물이다 ☆★☆★☆★☆★☆★☆★☆★☆★☆★☆★☆★☆★ 《37》 최대의 선물
박남준
꽃이 피어나는 건 당신을 향한 내 사랑 때문이다 지금 별똥별이 반짝이는 건 이 밤 당신께 보내는 연분홍 편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산들이 푸른 숲으로 샘물을 품고 있는 것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인생의 나침반을 삼으라고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선물인 것이다 ☆★☆★☆★☆★☆★☆★☆★☆★☆★☆★☆★☆★ 《38》 치명적인 상처
박남준
별똥별 하나 소원보다 먼저 별보다 먼저 상한 마음이 쓰러진다 한순간 삶이 저렇게 져 내리는 것이겠지 흔들리며 가기에 짐이 되었던가 발목을 꺾는 신음처럼 뚝뚝 풋감이 떨어지는 밤 저 별 저 감나무 그 어떤 치명적인 상처가 제 살을 베어내는가 길이 끊겼다 다시 나는 발등을 찍는 바퀴에 두 발을 우겨 넣는다 이것이 끝내는 치명적인 상처를 부르리라 자라난 상처가 그늘을 이룬다 더 깊은 그늘로 몸을 던져야 하는지 아픈 꿈이 절뚝거리는 몸을 끌고 꿈 밖을 떠돈다 ☆★☆★☆★☆★☆★☆★☆★☆★☆★☆★☆★☆★ 《39》 한 걸음의 발자욱도 부르는 노래가 되어
박남준
한 걸음의 발걸음도 그냥 뗄 수 없는데 한 걸음의 발자국도 부르는 노래가 되어 나오는데 노래했지요 꽃 피고 꽃 지는 일 더러 피지 못하고 피어오르던 꽃 지고 말았어요
다시 노래했어요 눈물 흐르는 일 흘러서 흐르는 일 흐르는데로 흘러 보내며 해 뜨고 해 지는 날로 눈을 감고 눈을 떴어요 무심코 발걸음을 떼고 또 그 길을 따라 걸었다는 것이지요
흰눈 내려 쌓이는 날 뒤돌아보니 하얀 눈길 위 도장을 찍듯 뚜렷이도 따라오는 내 발자국 아 길을 간다는 것, 산다는 것이 저렇듯 눈길 위에 발자국을 새기며 간다는 것이었는데
여기는 어디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제껏 살아온, 지나온 삶과 그 길 위에 내가 새기며 걸어왔을 무심한 발자국들, 참담하던 날 한 걸음의 발걸음도 그냥 뗄 수 없구나 저 무수한 길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 그 발자국마다에 실려오는 숨가쁜 땅의 역사
한 걸음의 발자국도 부르는 노래가 되어 나오는구나 ☆★☆★☆★☆★☆★☆★☆★☆★☆★☆★☆★☆★ 《40》 흰 부추 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 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 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 꽃 그 환한 환생 ☆★☆★☆★☆★☆★☆★☆★☆★☆★☆★☆★☆★ 《41》 흰빛에 갇혀
박남준
혼자였나 옆이었나 그때 누가 있었는가 혼자였지 보이지 않는데 거대한 흰빛에 갇혀 혼자였나 숲이었지 흰 숲 흰 나무 흰 흰 푸른 새는 죽었는가 혼자였지 흰 산이었는데 혼자였는데 저 앞이었나
첫댓글 8월의 첫날 박남준시인님의 시모음 감사합니다.
행복한 8월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