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1-12)
예수님께서 팔복에 말씀십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가난이 미덕이냐?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가난해야 되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넉넉하게 살면서 풍성한 중에 더 많은 것들로
구제와 선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땅에 살면서 부유하게 살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나는 부유하게 살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가난이 싫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되리라! 하셨으니 부자가 되니라! 라는 고백을 하고 싶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얼마나 자신이 있으시면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라고 까지 하셨을까요?
틀림 없다고 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 의무감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넉넉하게, 계산하지 말고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늘 십일조보다 더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없는 살림에 십일조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드렸습니다.
청약도 포기하고, 적금, 보험 다 포기하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참 묘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들어가던 돈들이 안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고를 막아주셨습니다. 큰 돈 들어갈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늘어나는 만큼 수입도 더 늘어났습니다.
경제부흥의 세 번째 요소는 십의 구에 대한 바른 사용입니다.
십일조를 했다고 부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십의 구도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꼭 필요한 것이 청지기 신앙입니다. 맡은자의 삶!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맡아 관리하는 자입니다.
두달란트 맡은 자도, 다섯 달란트 맡은 자도, 한 달란트 맡은 자도 다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외적인 표현이요, 구원받은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십일조로 드러납니다. 어쩌면 십일조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이고, 하나님께 경외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반면 십의구조는 내가 청지기임을 고백하는 방법입니다.
꼭 필요한 생활비를 쓰되 낭비나 헛된데 죄를 짓는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되리라! 의 말씀이 되니라! 의 고백으로 변했습니다.
부유함의 은사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십일조도 물론 정성껏 드려야 하지만, 십의구조에 대한 청지기적 사용도 중요합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본문 4절에 ”애통하는 자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도 하셨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 라고도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울지 말라는 말씀을 더 많이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두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그들을 붙잡고 함께 아파하며 눈물짓고 위로하셨지만 동시에 울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오히려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뭍여 있는 동굴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서 많은 사람들이 슬피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그러니 슬피 울지 말라고...
나인 이라는 자그마한 성으로 들어가실 때 너무 슬피 울려 장지를 향하는 한 무리의 행렬을 보셨습니다.
외아들을 잃고 삶의 의미와 맛을 잃어 애통하는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왜냐하면 애통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볼때는 끝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분명 끝이 아니었습니다.
- 말씀하신대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소녀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고 감격이 되고 놀라움이 되었습니다.
마르다가 오빠 나사로가 죽어 묻힌 동굴의 큰 돌 문을 열어 젖히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온 몸에 붕대를 감은 나사로는 벌떡 이러나 죽은지 사흘이나 지났지만 걸어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생명을 그에게 불어 넣어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다시금 생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하고 울었는데 그 끝, 그 절망이 예수님께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을 사람으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들을 살리셔서 생기를 불어 넣으사 큰 군대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자를 고치시고, 아파하는 자들을 위로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의 아버지!, 보호자요 후원자이십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리 슬프겠습니까?
실패라 할지라도, 몹쓸 병이라 할지라도, 행여 죽음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점에 불과하고 하나의 과정이요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니 말입니다.
이 믿음으로 울지 말고 넉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2024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본문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성경은 온유해지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들여지지 않아서 패망한 사람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야곱의 아들 12명은 각자 번성하여 부족을 이뤄 부족장이 되었고 그 부족들마다 수가 불어났습니다.
애굽에서 400여 년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200만 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200만 명! 하나님께서는 이 200만 명을 대상으로 한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일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 홍해를 가르셔서 아말렉을 이기게 하시고,. 마라의 쓴 물도 달게 만들어 놓으시고,.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때로는 메추라기를,
. 때로는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200만 명을 먹이고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 또 낮의 더위가 그들을 삼키지 못하도록 구름을 띄우셨고, 밤의 습기와 추위가 그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불기둥을 세우셔서 온기를 유지해주셨습니다.
전능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살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으로 마음과 행동이 길들여지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못 간다고..
모세의 전달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소리로 환호하며 환영했습니다. 우리가 다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며 가나안에 들어가겠다고 약속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겠다, 헌신하겠다, 봉사하겠다, 사랑하겠다, 거룩해지겠다, 희생하겠다 하면서도 늘 내 잇속 챙기기에만 바쁘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철저하게 무시하듯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앞에서는 약속을 지킨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우상 숭배를 하고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시기, 질투가 많아서 남이 잘 되는 것에 대해 박수를 쳐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더니 결국 200만 명 중에 어린아이들과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왜요? 온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내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는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그 성질을 죽이고 그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질 때, 천국 백성이 되고 이 땅에서도 약속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 나를 세워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져 가고 있나?’
‘지옥 체질을 천국 체질로 개선하고 있나?’
‘난 오늘 무엇에 길들여져 가고 있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이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