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산반도 낙조
........변산반도국립공원.......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공원으로
1988년 19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
희귀동식물 서식지로 자연생태 잘 보존.
생태관광지 요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
면적 153.934㎢.
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서해안
최고 경관을 자랑.
변산반도국립공원은
크게 외변산과 내변산.
해안선 따라 펼쳐진 외변산은
태고의 자연을 간직한 채석강과
적벽강, 고사포해변 등이 볼만하다.
의상봉(508m) 중심으로 10여개 크고 작은 산과
직소폭포를 품은 내변산은 산악형 국립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절경을 자랑하며 소탈한 멋을 간직.
특히 천년고찰 내소사와 개암사는
백제의 역사를 은은하게 보여주는
사찰로 변산반도국립공원의 백미다.
채석강(격포해수욕장)은
20세기 마지막 해넘이 행사가
개최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동해의 낙산일출
서해의 월명낙조.
변산반도 끝자락 격포.
하루 중에 가장 오랫동안
해가 떠있고 노을이 아름답다.
천년의 불씨를 이곳에서 채화하고
새천년 첫 번째 불씨를 호미곳에서
채화하여 천년 불씨를 호미곳에 보관.
채석강 주변에는 관광지가 즐비하다
채석강 바로 옆에 있는 격포해수욕장.
해수욕장 오른쪽 사자바위 중심으로
적벽강(전북기념물 제29호)과 수성당,
1종항인 격포항이 있으며, 새만금전시관.
변산해수욕장,
고사포해수욕장,
모항해수욕장.
드라마 촬영지
궁항 전라좌수영,
영상테마파크 등이 있고
누에타운, 청자박물관 을 비롯
천년고찰 내소사, 개암사, 줄포만
갯벌생태공원 등 관광지들이 즐비.
.............................................
.

격포.,채석강
행여나, 변산반도에 가게되면
꼭 들러보고 싶은 곳들이 있다.
내소사, 격포 채석강, 부안 수성당.
변산반도를 오고 가는 길에
주변경관이 좋기 때문이리라.












채석강 인근
부안 수성당.
.

격포

변산반도 격포 해수욕장

격포해수욕장에서
바라보이는.,수성당.
부안 죽막동.,해신당.

변산반도 수성당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수성당)](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blogthumb4.phinf.naver.net%2FMjAxNzExMTBfMjMx%2FMDAxNTEwMjc3NTU2MDYx.-RxxWs0VazIAZM5HTO6-g8wR8Es6irI3J0_JXWiM8fUg.1nV_V6FBaB1lgzx_d-JcfP2MNrouoieatTXHlJEuBqkg.JPEG.pjk3108%2Fmug_obj_201708021120103951_%2528%25EC%259E%2590%25EB%25A3%258C%25EC%25B6%259C%25EC%25B2%2598%25EB%25AC%25B8%25ED%2599%2594%25EC%259E%25AC%25EC%25B2%25AD%2529.jpg%3Ftype%3Dw2)
부안 죽막동 수성당 제사유적

..........부안죽막동제사유적.........
국립전주박물관이 전북 서해안 일대
지표조사 중 발견되어 1992년 발굴 조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제사 유적이다.
부안죽막동제사유적
(扶安竹幕洞祭祀遺蹟)
해발22m 절벽 위에 형성,
이곳 평탄면에 3세기 후반부터
조선시대 유물이 퇴적되어 있었다.
이 일대는 절벽 위로 주변보다 높다.
이곳에서 20km 내 서해에 점점이
고군산열도. 상왕등도. 위도(蝟島),
식도(食島), 비안도(飛雁島) 등 섬들.
먼 바다까지도 바라보기에 유리한 지점.
유적 바로 북쪽에는
육지로 10m 만입(彎入)해
들어온 해식동굴(海蝕洞窟).
그 주변으로도 해식동굴이 많이 발달.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근처를 항해하던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곳으로 인식.
유적 주변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북에서 남으로 연안반류(沿岸反流).
조류가 급한데다가 주변에 섬이 많아
조류의 흐름에 섬들은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물의 흐름이 굉장히 복잡,
겨울에는 계절풍이 심하게 불어와
큰 파도를 형성해 항해에 위험한 곳.
한편, 이곳은 서해상으로 돌출된
변산반도 중 최선단(最先端) 지점.
항해술의 제약 때문에 연안항해나
근해항해가 일반적이었던 삼국시대
서해안 일대의 남북을 잇는 해상기점.
멀리 중국·왜 교류 때에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지점.
유물은 현대의 해신당(海神堂)인
수역당(水城堂) 바로 뒤편 평탄면
(平坦面)에 8×13㎡의 범위에 약 30cm
두께로 퇴적되어 있었는데 유물 대부분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것
유물은 각종 항아리[壺],
기대(器臺), 독(甕), 잔(盞),
배부병(杯附甁) 등의 토기류.
쇠차[鐵鉾], 쇠살촉[鐵鏃],
찰갑편(札甲片), 쇠도끼[鐵斧],
말안장조각[鞍橋片], 행엽(杏葉),
동령(銅鈴), 동경(銅鏡), 불명철기 등
금속유물, 도끼(斧), 거울(鏡),
손칼, 판갑(板甲), 낫, 말 등
실물 모조석제· 토제모조품 등.
그 외에도 소옥(小玉), 곡옥(曲玉),
중국 도자(中國陶磁)가 소량 출토.
금속유물은 대옹(大甕)의 내부에
넣어져 있는 상태로 출토되었다.
석제모조품은
좁은 범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백자가 소량 출토.
이곳은 예로부터
항해상의 위험한 장소
항로의 중요한 기점이었다.
바다에서의 해상활동을
감시하기에 유리한 지점.
따라서 항해상의 안전이나
어로와 같은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한편,
종류가 다양한 유물들이 섞인 채
절벽 위 평탄면에 퇴적되어 있었다.
이는 이곳에서 제사와 같은
일정 목적에 유물을 사용한 후
그대로 폐기하거나 의도적으로 파쇄.
이상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곳은 해상활동과 관련된
해신(海神)에게 제사지낸 곳.
이곳에서 진행된
해신제사의 내용을
출토유물을 통해 보면
시대별 많은 차이가 있다.
먼저 삼국시대에는
전 기간에 걸쳐 4단계로
제사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Ⅰ단계(3세기 후반)는
마한의 제사로 추정된다.
둥근 바닥 짧은 목 항아리
[圓底短頸壺]만 사용하였다.
Ⅱ단계(4세기)는 마한·백제 제사.
항아리[壺] 중심의 토기만 사용.
그러나 토기의 기종과 수량이 증가해
제사의 규모가 Ⅰ단계보다는 확대되었다.
Ⅲ단계(5세기 전반∼6세기 전반)는
백제와 가야, 왜(倭)의 제사로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중심을 이루는 시기.
먼저 백제의 제사에는 항아리[壺]·
독(甕)·파배(把杯)·뚜껑접시[蓋杯]·
병 등의 각종 토기와 토제모조품,
중국 청자를 사용했으며, 제사에
국가가 관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의 제사에는 쇠창[鐵鉾]·
쇠도끼[鐵斧]·말안장[鞍橋]·
동경(銅鏡) 등의 금속유물을
독(甕)에 넣어 공헌(供獻)하였다.
역시 국가나 최고지배층이
제사에 관여했을듯 추정된다.
왜 제사는 석제모조품 사용.
일본에서 행해진 해신제사
양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Ⅳ단계(6세기 중·후반∼7세기 전반)는
백제의 제사로 Ⅰ·Ⅱ단계처럼 제사에는
항아리[壺], 통형기대(筒形器臺),
곧은 입항아리(直口壺), 병 등의
토기만 사용하였다.
각 단계별로
진행된 제사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제사에의
관여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는듯.
Ⅲ단계의 백제와 가야의 제사는
해상교섭의 필요성이 증대하던 시점에
국가적 차원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한 것.
해상교류의 길목이나 중요한 기점에서
원거리 항해의 안전이나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위해 제사에는 토기뿐만 아니라
금속유물, 토제모조품, 중국 청자와 같은
특수 공헌물품을 다량으로 사용하였다.
그 외의 제사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이
연안을 통한 이동이나 어로활동과 관련
별도의 공헌물 없이 소량의 토기만을
사용해 제사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제사는
삼국시대의 Ⅳ단계처럼 소량의
토기나 청자, 백자 등을 제기(祭器)로
사용해 해상이동의 안전이나 풍어(豊漁)를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제사양상은
현재 우리나라의 서해안 일대에 남아 있는
해양신앙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와가 출토되고,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수성당(水城堂)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부터는
노천제사(露天祭祀)를 벗어나 실내에서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




제사 유적이 발굴된.,수성당 당굴 ^

인신공회 풍습이 있었던 대가야.
그 유물.,고령 지산동 44호 고분.

지산동 44호 고분


진시황 무덤.,인신공회 풍습

.....2017.10.19.......
동아시아 최대 해양
제사유적 인정 받아
부안군은 19일 문화재청 고시
제2017-127호로 부안군 변산면
‘부안 죽막동 유적(扶安 竹幕洞 遺蹟)’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변산면 적벽강 해안절벽
죽막동 유적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해상교류 중요한 길목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뱃길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해양 제사가 행해져 오고 있다.
지난 1992년 발굴조사에서
백제, 가야, 통일신라부터
조선, 중국, 일본에서 만들어진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다양한 유물(제사용 토기, 금속유물,
토제·석제 모제품, 중국 도자기 등)이
출토되어 동아시아 최대 해양
제사유적으로 인정받았다.
현재에도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가 이뤄지고 있으며
개양할미와 그의 여덟 딸을
모신 수성당이 위치하고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해양제사
유적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다.
........................................
수성당은 건평 4평 단칸 기와집으로
해신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
1864년 최초 건립한 것으로 여겨왔던 곳.
현재, 수성당은 1972년에 신축한 건물,
당내에 있었다던 '무신도'는 불타 없어졌다.
그런데, 이곳 당굴에서 선사시대 유물을 발굴.
.

부안 수성당.,당굴.



수성당 당굴., 빛내림



변산반도 서쪽 돌출 부분,
즉, 격포항과 채석강 북쪽에
'죽막동(竹幕洞)' 마을이 있다.
원래 명칭은 대막골인데,
한자 표기로 바꿔 "죽막동".
죽막동에서 고추처럼 불거져나간 서쪽 끝부분에
'수성당(水聖堂 또는 水城堂)'이라는 당집이 있다.
서해를 관장했다는 해신(海神) 개양할미를 모신 당집.

13.2m2(4평) 목조 단칸
기와집 안에 무신도(巫神圖)
개양할미와 8 딸, 용왕도,산신도,
장군도, 칠성도 등으로 이뤄졌다.
1996년 당집을 새로 건립할 때 봉안.
원래 무신도는 불타 어떤 형태인지
알 길 없지만 '인신공회 풍습' 무신도.
조선시대 심청전.
공양미 3백석에 팔려
백령도 앞바다 인당수
제물이 된.,심청 이야기.
이는 조선시대까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친
인신공회 풍습 대표 사례.
........벽골제 쌍룡놀이.,인신공회 풍습............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0호. 벽골제를 지키고 풍년과
인간 화합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던 단야(丹若)낭자의
정신을 기리는 놀이이며 벽골제 쌍룡놀이는 해마다 10월
중순(음 9월 9일) 벽골문화제전(1998년 38회)의 주요 행사.
벽골제는 국내 저수지 효시(嚆矢).
충청북도 제천의 의림제(義林堤)와
경남 밀양의 수산제(水山堤)와 함께
삼한시대의 3대 수리시설의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현재 김제시 월촌동과
김제군 부량면의 경계를 이루는 원평천을
가로막은 벽골 제방 하류 신털미산(草鞋山)
북쪽 끝 큰웅덩이 용추(龍湫)에 백룡(白龍)이
살고 있었는데 이 용을 '벽골룡'으로 칭하였다.
한편으로 벽골제 중간 제방 하류지점인
부량면 용골마을 남단 연포천(蓮浦川)에
청룡(靑龍)이 살고 있었는데 두 웅덩이를
쌍룡추(雙龍湫)라 하고, '백룡과 청룡' 쌍룡.
백룡은 온후(溫厚)하여
인명을 수호하며 재난을
막아 주는 존재였다고 한다.
청룡은 포악하고 심술궂어
재난을 일으키며 제방과 인명을
해쳤고, 백룡의 충고에도 아랑곳 않고
청룡은 난폭해 쌍룡 간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이런 와중에
붕괴 직전에 놓인
벽골제를 보수공사.
축제(築堤) 때 반드시 처녀를
희생제물(犧牲祭物)로 바쳐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가져온다는
속신에 의해 스스로 제물이 된 김제
태수의 외동딸 단야의 희생정신에 감복
청룡은 물러나고, 그후 인신 제물 악습도
없어지게 되어 평화를 찾게 된다는 줄거리.
놀이 용구인 용의 제작은 옛날에는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 엮어 둥그렇게 휘어
중간에 띠장(가로 대는 나무)을 대어 몸통을 만든 후
그 위에 광목을 입혀서 물감을 칠했다. 그러나 지금은
비닐로 제작하여 행사 때마다 쓰고 있다. 제의는 아침 7시
벽골제 현장에서 진행하며, 시장이 초헌관이 되고 시의장과
동진농조조합장이 종헌관이 되어 벽골제제향홀기에 의해 진행.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쌓은 지 오래 되어 붕괴 직전에
놓인 벽골제 보수공사를 위해 조정에서는
국내 으뜸 기술자 원덕랑(元德郞)을 현지에 급파.
당시 김제 태수 유품(由品)에게는
아름다운 외동딸 '단야'가 있었다.
단야는 원덕랑을 연모하였지만
원덕랑은 고향 서라벌에 이미
월내(月乃)라는 약혼녀가 있어
단야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옛날부터 이러한 큰 공사는
반드시 처녀를 용추에 제물로 바쳐
용의 노여움을 달래어야 공사가 순탄.
원덕랑은 이것을 미신이라 하여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공에
가까운 둑이 곧 무너지게 될 것이라
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때 서라벌에서 월내낭자가 남장을 하고
약혼자 원덕랑을 찾아 왔다는 사실을 안 태수는
월내낭자를 밤에 보쌈을 하여 용에게 제물로 바쳐
딸의 사랑을 성취시키고 백성원성도 진정시킬 계략.
이 계략을 알게 된 단야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고민 끝에
제방의 완공과 원덕랑의 행복을 위해
월내낭자 대신 자신이 보쌈을 당하여
제물로 바쳐지고 보수공사는 준공된다.
그리고, 원덕랑은
'월내낭자'와 혼인.
국내 인신공회 설화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개성<지내산 전설>,
청주<지네장터전설>,
제주도<김녕사굴전설>
무속신화 <토산당본풀이>
인신제물 악습이 없어지게 된 유래담
제물은 '처녀 희생제물'이라는 공통점.
제물을 받는 신이 대개 지네·구렁이
여기서는 용으로 나타난 점이 다르다.
논농사 초기에 발생한 향토신사(鄕土神祀)
민속으로 수리관개와 관련되어 '용'을 대상.
<심청전>·<춘향전>·
<무영탑 설화> 등에
복합적 충·효·열이 굴절
수용된 형태로도 풀이된다.
1975년 전라북도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1975년 9월 제1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민속놀이 부문 최우수상인 문공부장관상을 수상.
..................................................................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는 제의는
죽은 자를 위한 영원한 봉사를 뜻하는
‘순장(殉葬)’의 형태이지만 인류학적으로
인신공희는 농경시대까지 폭넓게 존재했다.
페루·잉카·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이란 인도·그리스 ·로마·중국 등
고대문명 발상지 대부분 인신공희.
제물을 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행위의
기원이 인신공희에 있다는 설도 있다.
고고학사에서
멕시코 지역에
달의 피라미드 .
이 피라미드는 도시 전체를 관통하며 설계
‘죽은 자의 길’ 끝에 우뚝 솟은 거대 피라미드.
종교적 상징성이 강했던 왕국답게 이 곳에서는
사람의 심장과 피를 제물을 바쳤던 것으로.,연구.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는데
‘인신공희’가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진 뒤에도 유독 테오티우타칸
중남미 지역에서는 오래 유지되었다.
테오티우타칸이 7세기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에도
16세기, 에스파냐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까지 유지된 인신공회.

........해신당(海神堂).........
당집의 명칭과 모시는 신격은
전국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제주도 해변 마을에는 해신당· 개당(浦堂)
돈짓당(해변당 뜻)이라 부르는 당이 있다.
이들 당신 이름은 해신, 또는 개(浦)하르방.·
개할망· 돈지하르바님· 돈지할마님 등 부부신.
.
당집에서 모시는 신들은 공통점이 있다.
용왕이나 그 딸들로 용왕계 신이 인간계에
와서 바다를 차지한 신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대부분 해신당 제일(祭日)은 초하루와 보름,
개당에는 개날(戌日)에 간다 하여 포구 개(浦)
개(犬)를 뜻하는 술일당(戌日堂)으로 언어 혼동.
해신당 의례는 어부와 해녀들의 개별 치성.
본향당 경우는 물론 마을공동의 당굿도 거행.
해신당 계통의 신당이 형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동해안 일대에서는
서낭당 또는 암서낭당,
해신당 또는 해랑당(海娘堂)
등으로 호칭되는 당들이 있다.
이 당들은 나무로 깎은 남근(男根)을
당집에 바치는 주술적 풍요 기원으로
알려졌는데, 강릉 해랑당, 삼척 해신당.
그런데 강릉 해랑당에서는
남근 대신 ‘해랑지신위’ 위패로
강릉시 강문동 여서낭당에서는
제물로 우랑(牛囊)을 바치는데
이것도 그 한 변형으로 보인다.
이 목각 남근 봉납의 유래담으로는
흔히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가 고기가
안 잡히게 되어 고민하는 어부들에게
현몽해서 남근을 봉납하면 된다고 해서
해랑당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전한다.
이 남근숭배는
해안형 민간신앙
이것은 어부들의 풍요 다산 기원이며,
남근숭배가 작용하고 있는 특수한 사례.
서남지방의 다도해에서는
흑산도(23개당), 우이도(4개당),
하의도·비금도(각 1개당) 등에서
용왕신을 모시며, 그 당제를 갯제·
용왕제·풍어제·서낭제 등으로 부르며,
제신(祭神)은 용왕신·서낭신·당할아버지.
그 용왕신은 어민을 수호하고
뱃길을 돌봐주는 신으로 모신다.
신체는 제주(祭主)가 짚으로 만든
1m 정도의 허수아비인데 얼굴은
흰천에 눈·코·입을 그리고 4지 분명.
특히, 남근을 크게 만드는데
이는 '남근 숭배사상'에 기인.
용왕신은 여사제들 기원이 끝난 뒤
놀이꾼인 하당 당주가 씨름도 하고
농도 하다가 다리를 부러뜨리고 나서
모든 재액을 실어 먼바다에 띄워보낸다.
이것도 동해안 해랑당의 남근봉납과
같은 제의형태의 변형으로 여겨진다.
또 서해 부안군 변산반도에는
수성당할미 또는 개양할미라는
거신이 나막신 신고 서해를 거닐며
수심을 재고, 어부들을 보호한다는
어로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수성당(水城堂)은 지방문화재 지정
거신(巨神)설화 주인공이 여자 당신.
이와 같이 해신당의 내용은 다양한데
그 핵심은 어부들의 용신신앙으로 역시
도서지역에서 선명해짐을 볼 수가 있다.
.....................................................




삼척 정월 대보름제


삼척 해신제

탐라 해신제.,줄당기기

탐라 해신제

변산반도.


변산반도 부안군 변산면 죽막동.
바다 위로 20m쯤 솟아오른 절벽.
인근 해역이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날씨 맑은날 가까운 위도(蝟島)는 물론
멀리 북쪽의 고군산군도까지 볼 수 있다.
이런 입지 여건으로 일찍부터 연안 항로의
주요기점,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옛부터 선조들은 이런 지역에서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특히 이곳은 해류의 흐름이 복잡하고
바람도 강해 해난사고 위험이 상존한 곳.
해신제 같은
제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했을 곳.
이곳 수성당은 그러한 전통적인 해신제 제의 유산이며,
그 오른쪽에 위치한 당굴(堂窟)도 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원형으로 거대하게 파도에 패여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바위굴.
"여울굴"이라고 부르는데,
오래전부터 주민들 사이에
당굴로도 불리는 것은 이 굴이
민속신앙 대상이었음을 알려준다.
1992년 전주박물관에서는
수성당 일대를 정밀 조사해
제사 제의 유물들을 발굴했다.
대부분 5세기 중반에서부터
6세기 전반에 걸친 유물들인데,
그 다양성과 규모가 백제나 가야의
지도자급 고분 출토 유물과 맞먹을 정도.
수성당 일대에서 출토된 제의 유물들은
옛날 옛적 이 지역이 동북아시아 무역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거나, 별도의 군사세력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입증된 셈.
.
수성당의 개양할미는
수성할미라고도 하는데
딸 8명을 위도, 영광, 고창 등
칠산바다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혹은 8도에 나누어 보냈다고도 함),
자신은 막내딸과 구랑사(九?祠)에 머물며
서해를 총괄했다는.,'서해를 다스리던 여신'.
여신은 수성당 옆 여울굴에서 나와
바다를 열고, 풍랑과 깊이를 조절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했단다.
이를 나타내듯 수성당 옆에는
별도의 단을 마련해 나무로 된
긴 자(尺)를 모셔두고 있다.
그런데 죽막동에는 개양할미 설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또 다른 설화가 전한다.
‘대막골 철마(鐵馬)’라 하는 설화가 그것이다.
부안군지(扶安郡誌)에 수록된 내용을 옮겨본다.

...대막골 철마..
먼 옛날 대막골에
마음 착한 고기잡이 형제가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형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아우는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비록 가난하지만 두 형제는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며 의좋게 살고 있었다.
어느날 고기를 많이 잡는 꿈을 꾸고
부푼 기대를 안고 바다로 나간 형이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에는 형을 찾아 바닷가로
나갔던 동생마저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미칠 지경이었다.
모두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더듬더듬 바닷가로
나간 곳이 수성당 옆 여울굴 절벽이었다.
어머니는 바다를 향해 소리 높여
두 아들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부르고 또 부르자 그 소리가
깊은 여울굴에 메아리져 돌아오는데,
두 아들이 대답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 어머니는
두 아들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한발 한발 떼어놓다 그만 절벽 아래
여울굴 속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날, 하얀 돛단배
한척이 대막골에 멈췄다.
화려한 배에는 잘 생긴 두 청년이
아름다운 두 여인과 함께 타고 있었다.
바로 예전에 사라진 그 고기잡이 형제였다.
형제는 배에서 내려 여울굴 절벽 위에 섰다.
이윽고 여울굴 밑 푸른 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백발노인이 물속에서 나와 두 형제에게 말했다.
“수고 많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황금부채 한개씩을 줄 것이니,
하나로는 나라를, 또 하나로는 고장을 구하라.
너희 모친은 내가 잘 모시고 있으니 그리 알거라.”
말을 마친 노인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형이 가진 황금부채로 바다를 향해 부치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성난 파도가 바다를 뒤집었다.
다음에는 동생이 가진 부채를
부쳐봤더니 거센 풍파가 잠잠.
두 형제는 노인의 큰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해
여울굴 옆에 수성당을 세우고 받들어 모셨다.
그 후 여울굴에서
철마(鐵馬) 한마리 나왔는데,
이 철마는 두 형제만 탈 수 있었다.
평소 작았다가 형제가 타면 큰 말이 됐다.
형은 왜구가 침입하면 이 말을 타고 달려가
황금부채로 적을 침몰시켰고, 동생은 바다로 나간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면 부채로 부쳐 목숨을 구했다.
세월이 흘러 형제가 죽은 뒤
철마만 여울굴에 남아 있었는데,
어느 못된 사람이 철마를 훔쳐다가
깊숙한 곳에 감추고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그런데 후에 열어 보니 철마가 오간 데 없었다.
그래서 여울굴에 와보니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여러 차례 훔치자
철마는 여울굴 속 깊이 들어간 후에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이들 형제가 바다에서 없어진 것은
봉래도(蓬萊島)라는 섬에 사는 성인(聖人)들이
데려다 도술을 가르친 것이라 하며, 황금부채를 준
노인도 바로 이 형제들을 가르친 도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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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9일 부안군(군수 김종규)은
문화재청 고시 제2017-127호 부안 변산면에
있는 부안군 죽막동 유적(扶安 竹幕洞 遺蹟)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고 밝혔다.
부안군 변산면 적벽강 해안절벽
죽막동 유적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해상교류의 중요한 길목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뱃길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해양제사가 행해져 오고 있다.
지난 1992년 발굴조사에서
백제, 가야, 통일신라부터
조선, 중국, 일본에서 만들어진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 유물
(제사용 토기, 금속유물, 토제·석제
모제품, 중국 도자기 등)이 출토돼
동아시아 최대 해양제사유적으로
인정받았다.
현재에도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
개양할미와 그의 여덟 딸을 모신
수성당이 위치하고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해양제사유적 성격을 간직.
부안군 관계자는
“이번 사적 지정이
세계유산 등재로
가는 첫걸음”이라며
“죽막동 유적 일대는
채석강‧적벽강 일원(명승 제13호),
후박나무 군락지(천기 123호),
수성당(전북유형 58호)등
우리나라 최대 문화재
밀집지역으로 체계적인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해
정비하겠다. -황인봉 기자 -
.


백제 제사 유적지



.
부안 수성당(扶安 水城堂)은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건축물.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옛부터 해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회
풍습이 전해왔다는 수성당.
서해 뱃길은 예나 지금이나
풍랑이 잦아 해상사고가 잦은 편.
심청 설화는.,인신공회 풍습을 대변.



......당신도.......
당신도(堂神圖)는
마을의 신당에 봉안된
神의 화상(畵像)을 말한다.
해안 도서 지역의 당신도는
풍어 및 안전항해와 관련된 것,
변산반도는 서해 교통의 요충지.
뱃길 따라 사신이 오가고 문물교역
변산반도에는 백제가 중국 및
일본과 해상 교류를 하였음을
죽막동 제사 유적이 대변한다.
죽막동 해양 제사 유물은
'백제~ 조선' 유물이 출토.
海神에게 제사를 지낸 祭器 등.
부안 위도의 경우,
당제는 원당제와 용왕굿.
원당제는 항해보호신들 중심.
당제는 항해신에게 먼저 제사지낸 뒤에
용왕에게 풍어제를 지내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해신당에는 다양한 해신들을 배향.
변산반도 해신당은
격포 수성당, 위도 대리 원당,
식도리 원당, 진리 영신당 등.
이들 신당에는 항해안전과 관련하는
당신도가 봉안되어 있고, 女神들이 많다.
여신이 당신으로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은
중국 동해안의 해신당에 봉안된 항해신과
해안지역 관음도량의 영향을 받은듯 보인다.
변산반도의 당신도는
주로 중국 절강지역에서
사단항로를 타고 올라오는
항해자들과 산동반도에서
횡단항로를 항해하던 사람들의
자취가 스며있는 당신도가 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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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수성당 개양할미 당신제(석포리 당신제)









적벽강
![[화보]바다가 보이는 유채꽃길..부안 수성당 유채꽃 절정](https://t1.daumcdn.net/news/201704/23/NEWS1/20170423130646129tpqw.jpg)



부안 수성당 유채꽃


곰소만

젓갈


염전

............곰소만..........
서해안의 전라북도 부안군과
고창군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만.
만의 대부분에 갯벌이 잘 발달.
서해안 만 가운데 원지형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
웅연만이라고도 한다.
부안군 진서면·줄포면·보안면과
고창군 흥덕면·부안면·심원면에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 열려 있다.
옛날에는 줄포만이라고 하였으나
곰처럼 생긴 2개 만과 그 섬 앞바다에
깊은 소(沼)가 있어 곰소만이라 하였다.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급경사의 산록으로 이루어진
남북 양안은 수심이 깊어
어항으로 발달하였다.
만 내에 있는 줄포는
19세기말부터 전라북도
남부 일대의 상권과 생활권의 중
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위도·군산·목포
등지를 잇는 항로와 부안·고창·정읍
등지로 연결되는 육로 등 교통의 중심지.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호남지방의 산물을 나르는
수탈거점이기도 했으며,
경찰서·어업조합·통운창고
등이 들어서 있었고, 전국의
말 집산지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1930년 무렵부터는
토사가 밀려와 수심이
점차 얕아져 폐항이 되자
1936년에 동쪽의 곰섬과 연동,
서쪽의 까치섬 작도리를 잇는
제방을 쌓아 곰소항을 만들었다.
이로써 줄포가 어항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교통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지금도 여전하다.
1990년 현재 조기를 비롯
새우·민어 등이 어획되며,
양식업이 행해지고 있다.
진서면 진서리에 위치한 곰소항은
현재 도내에서 군산항 다음 큰 어항,
서해안 어업의 전진기지이다.
갈치·병어·아구·조기·꽃게
등의 어획이 많으며,
김양식이 활발하다.
곰소염전은
1938년 조성된 염전으로
1946년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
현재 약 0.1㎢의 면적에서
연간 9,000t의 소금생산.
곰소항과 위도 사이에 여객선이 운항되며,
남·북쪽 해안을 따라서는 국도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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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동호해수욕장

...........동호해수욕장..........
부안 변산반도와 고창군 사이
곰소만 남쪽에 자리한 해수욕장.
드넓은 백사장을 따라
수백년 해송숲이 장관.
이 숲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가 아름답다.
길이 1km 가양의 백사장은 경사가 완만하며,
수심 0.5~1.5m라 어린이들도 안심하고 물놀이.
특히 이곳은 염도가 높아
피부병, 신경통 환자들의
해수욕, 모래찜질의 명소.
해송숲 위의 언덕에는
이 고장 유일의 해신당인
수성당이 있어서, 해마다 어민들이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동호해수욕장 앞 바다인 칠산바다는
어종이 풍부하여 바다낚시터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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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산도 & 칠산바다.



영광 칠산도에서 번식한.,저어새.

칠산도.,저어새

칠산도 괭이갈매기.,날개짓.













칠산도 갈매기

영광 계마항.

.......계마항(桂馬港)......
굴비의 본고장 법성포에서
북서쪽 해안으로 9km 달리면
계마항과 가마미해변에 닿는다.
해안도로에서 내려다보이는 계마항은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그리고 고깃배들이
그림엽서처럼 아름답게 바라다 보이는 항구이고
바로 옆 가마미 해변은 굴캐기를 즐길 수 있는 겨울바다.
가마미로 가려면 법성포를 지나야 한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굴비가게 앞에는
줄줄이 엮인 굴비들을 볼 수 있다.
굴비를 구입하기 전,
진짜 굴비와 이와 비슷한
부세 구별법을 미리 알면 좋다.
굴비 이마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다이아몬드형 굴곡이 생겨야 조기.
부세는 꼬리지느러미와 몸통을 잇는
부분에 살이 적은 반면 조기는 살이 많다.
법성포 지나 계마항에서
남서쪽 방향을 바라보면
작은 섬 여섯개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작은 섬들을 일산도,
이산도, 삼산도, 사산도,
오산도, 육산도, 그리고
육산도 앞의 아주 작은여를
합해 모두 칠산도라고 부른다.
칠산 앞바다의 칠산은
이 일곱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제 때는 여기서 잡히는 고급어종을
법성포를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날랐던 황금어장.
법성포에서 가마미해수욕장.
해안길은 드라이브코스로 인기.
계마항은 가마미 해수욕장으로
가기 전 5백m 거리에 있다.
가마미와 계마 라는 지명은
예전 이 곳에 유배왔던 선비들과
연관이 있는데 가마미의 '가'는
멍에 '가'자라고 한다.' 마'는
말을 뜻하며 '미'는 꼬리이다.
이곳 해수욕장과 포구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산의 지형이
꼭 멍에를 쓴 말의 꼬리처럼 생겼다
는데서 가마미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계마항에서는 인근 송이도, 안마도
여객선이 오가고, 50척 고깃배가 기항.
긴 방파제는 칠산 앞바다와 동중국해로
고기잡이 나가는 큰 배들 접안을 위해 건설.
계마항이
사람들로
북적거릴때는
3월부터 10월 사이로,
인근의 섬들이 모두
바다낚시 하기에 좋은 곳이라
많은 낚시꾼들이 몰린다.
계마항 방파제와 계마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은 낙조를 감상하기에 더 없이 좋다.
쥐섬, 괭이섬을 걸고 바라보는
석양 낙조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여름철이면 해수욕장으로
각광받는 가마미해변에,
겨울철에는 남쪽 바위지대에서
마을 사람들이 굴을 캐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썰물에 맞춰
삼삼오오 모여 들고
일반여행자들도 재미삼아
굴 캐기에 나선다.
굴을 캐기 위한 도구는
주변에서 팔지 않으므로
미리 준비해야 한다.
가마미해변
주차장 옆에는
노송 군락지가 있어
여름철에는 텐트촌.
해변 앞에는
자그마한 돌섬이
떠 있고 북쪽에는
방파제도 들어서 있어
해변의 물결은 늘 잔잔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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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3대 피서지.,가마미해변

가마미해변

부안반도 채석강
![[부안 변산반도 코스] 채석강과 카페베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blogthumb1.phinf.naver.net%2F20161005_167%2Fpetitmary_1475674829887BfXAX_JPEG%2FIMG_4604.JPG%3Ftype%3Dw2)

부안삼절.,'직소폭포 유희경 & 매창'




매창의 연인은
천민 출신 시인
부안삼절.,유희경.
매창에게
.............
매창에게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밝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고
비취색 치마엔 아직
향내가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무렵
누가 설도의 무덤
곁을 찾아오려나. - 허균
허균은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던 부안기생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균이 남긴
'계랑(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시(詩).
조선 중기 문신이며 소설가
교산 허균(許筠, 1569~1618)
사회모순을 비판한.,홍길동전.
허균은 매창을 사랑했지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고
정신적 교감만 나누었다 한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
시에 밝고 글을 알며,
노래와 거문고를 잘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허물없이 친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여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않았다."
비록 기생이지만 매창의 재주와
인간적 향기를 아껴 우정을 나눈 허균
광해 10년(1618) 8월 24일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안타깝게 능지처참.
하지만, 그의 사람 향기는
오늘날까지 세인들이 기억.
.......................부안군............................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군의 동진강 하구 해안단구 취락지에서 민무늬토기
파편과 함께 깬돌칼·돌도끼·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서 초기 농경문화 형성을 입증.
고인돌이 부안을 비롯해 고창지방에 밀집되어 있고
동진강·만경강을 거쳐 내륙지방에 산재해 청동기문화가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전파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소국 중
지반국(支半國)이 부안지역에 있었다.
백제시대에는 개화현(皆火縣)이라 칭했으며,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뒤 신라 땅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부령현(扶寧縣) 혹은
계발(戒發)이라 하여 고부군(古阜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에 감무를 두었는데 보안현(保安縣)이 이에 예속.
보안현은 본래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개칭되어 고부군에 이속되었다.
고려 때 보안으로 고쳐졌으며
한때 낭주(浪州)라 불리다가
보안감무가 겸임하게 되었다.
이 지방은 해안선을 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염창산성을 비롯한 13개의
크고 작은 성과 계화도봉수대·
격포리봉수대, 그리고 진(鎭)과
포(浦)가 많이 산재해 있다.
또,
제안포(濟安浦,
옛이름 撫浦)에는
고려시대의 12조창 중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어
임피현의 진성창과 함께
전라도 지방의 세미를
경창까지 운송하는 일을 담당.
보안면 유천리 도요지는
고려청자의 산지로 유명.
고려 말 우왕대에 이르러서는
보안과 부령현에 각각 감무 설치.
경상도와 전라도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1355년(공민왕 4) 7월에
검모포(黔毛浦)에 침입하여 조운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 사람 장인보(張仁甫) 등
6명을 도강(都綱)으로 삼아 각각 당선(唐船) 1척과
전졸 150명을 주어 전라도 조세를 운반하게 했으나,
왜구와 싸우다 크게 패하여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1376년(우왕 2) 왜선 50여 척이 웅연(熊淵)에 내박하여
적현을 넘어 침입, 동진교를 부수어 조운이 중단되었으나
상원수 나세(羅世)와 변안열(邊安烈)이
적병 1천여 명을 행안산(幸安山)에서 격파하였다.
1414년(태종 14)보안현을 부령현에 병합했다가
1415·1416년에 통합, 분리되어
두 현의 이름을 따서 부안현이라 개칭하였다.
1417년흥덕진(興德鎭)을 폐하고
부안에 이속시켜 부안진이라고 개칭했으며,
병마사를 두어 판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1423년(세종 5) 첨절제사로
바꾸었다가 곧 다시 현감을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부안현의 호수는 323호,
인구는 1,662명이었다.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 채홍국(蔡弘國) 등이
동지를 규합, 정유이창동맹(丁酉吏倡同盟)을 맺고
호벌치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유(李瑜)의 부인 김씨도 남편의 전사를 보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가 순절했고,
이 밖에 많은 의병이 활약하였다.
1608년(선조 41)에 정유재란 당시
불타 버린 부안향교를 지금의
서외리에 재건하였다.
이 고장은 실학의 대가인 유형원(柳馨遠)이
태어난 곳으로 보안면 우동리에 유적지가 있다.
1862년(철종 13)에 전라도 각지의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호남선무사(湖南宣撫使) 조구하(趙龜夏)의 행렬을
부안농민들이 가로막고 관리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농민들은 백산(白山)에서
봉기하여 관군에 대항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지방관제 개편으로 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부군에 속했던
백산·거마·덕림 등이 부안으로 이속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곳에서는 3월 30일부안읍 장날을 이용해
은희송(殷熙松) 등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4월 18일에는 줄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1943년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1읍 10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1905년 을사오적을
처단해야 한다고 상소하고 계화도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쓴 전우(田愚)와 전생애를
항일투쟁과 육영사업에 바친 이영일(李永日),
한국의 대표적인 전원시인 신석정(辛夕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고제신(高濟臣)과 김환(金桓) 등이 있다.
1963년부터 시작된 계화도 간척지공사 마무리
1978년부터 계화도에서 쌀 추수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간척공사로 수몰된 임실군 주민 집단이주.
1983년 2월 15일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진서출장소가 진서면으로 각각 승격했으며,
1987년 1월 1일산내면이 변산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94년 12월 1일에 동진면 당산리 일부를
계화면 북창리로 이관하는 면간 경계를 조정하였다.
또한 1997년 8월 1일에는 정읍시와,
1998년 8월 1일에는 김제시 및
정읍시와의 시군간 경계조정이 있었다.
선사시대유적으로는
변산면의 대항리패총
(전라북도 기념물 제50호)과
하서면 석상리의 부안구암리지석묘군
(사적 제103호)을 비롯해 보안면 영전리,
상서면 감교리, 하서면 백련리 등지에 고인돌군
보안면 상입석리에는 보안입석(전라북도 민속자료 제6호).
성곽으로는 조선 태종 때
축성된 부안진성(扶安鎭城)과
상서면 감교리의 우금산성(禹金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등이 남아 있다.
성지로는 백산면 용계리의 백산성지
(白山城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31호),
주산면의 사산리토성지·소산리산성,
고려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계화면 창북리의 염창산성(廉倉山城)·
수문산성, 동진면 당상리의 구지산토성지,
행안면의 역리산성 등 13개의 산성이 있다.
이 군은 예부터 해안선을 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제안포·검모포진(黔毛浦鎭)·
격포진(格浦鎭)·여섭포(勵涉浦)·
위도진(蝟島鎭) 등 진과 포가 많다.
또, 북쪽의 만경지역과
남쪽의 점방산(占方山)을 연결하는
계화도봉수대·월고리봉수대·점방산봉수대 등도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진서면 석포리에
내소사(來蘇寺, 옛이름 蘇來寺)를 비롯해
692년(신라 신문왕 12)부설선사(浮雪禪師)가
창건한 월명암(月明庵), 상서면 감교리에 개암사(開巖寺)·
개암사대웅전(보물 제292호) 등이 현존한다.
절터로는
변산면 중계리의 부안실상사지
(扶安實相寺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와
등운사지(登雲寺址)·영은사지(靈隱寺址)·
백운사지(白雲寺址) 등이 있다.
특히, 내소사일원(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은
경관이 빼어나며, 경내에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동종인 내소사고려동종(보물 제277호)이 있다.
그 밖에 상서면에 있는 청림리석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과
내소사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내소사설선당과 요사(來蘇寺說禪堂─寮舍,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등이 유명하다.
유교문화재로는
부안읍 서외리에
부안향교대성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서원으로는
부안읍 연곡리의 도동서원(道東書院)과
옹중리의 옹정서원(甕井書院),
상서면 가오리의 동림서원(東林書院)과
감교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보안면 영전리의 유천서원(柳川書院)이 있고,
사우로는 부안읍의 노휴재(老休齋),
계화면의 계화재(繼華齋),
하서면의 효충사(效忠祠)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위도면 진리에는
위도관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01호)가 있다.
도요지로는
고려백자의 요지로 알려진
보안면의 부안유천리도요지(사적 제69호)와
주산면의 사산리와요지(전라북도기념물 제40호),
소산면의 백자요지,
진서면의 부안진서리도요지(사적 제70호),
보안면의 우동리분청사기도요지,
상서면의 감교리분청사기도요지 등이 있다.
고가옥으로는
줄포면 줄포리에
부안김상만가옥(金相万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50호)이 있다.
하서면 청호리에 고희외문중유물
(高曦外門中遺物, 보물 제739호),
보안면 우동리에 부안김씨종중고문서
(扶安金氏宗中古文書, 보물 제 900호)가
보관되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위도면 대리의 풍어제
(위도띠뱃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가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도청리호랑가시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2호),
격포리후박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3호),
중계리꽝꽝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4호),
중계리미선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370호)이
변산면에 집중되어 있고, 이 군에서만 볼 수 있는
변란(邊蘭) 등이 자생하고 있다.
또한 변산면 격포리의 채석강
(彩石江, 전라북도 기념물 제28호)·
적벽강(전라북도 기념물 제29호) 등지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부안읍 서외리의 부안서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8호),
동중리의 부안동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9호)·
남문안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8호),
내요리의 돌모산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9호),
계화면 궁안리의 쌍조석간(雙鳥石竿,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7호),
백산면의 죽림리석장승(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0호),
변산면 격포리에 수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8호)
등 민간신앙과 관련된 문화재가 있다.
이 외에도 보안면 남포리에는
채홍국 등이 중심이 되어 정유이창동맹을 맺고
왜병을 맞아 싸운 사실을 기리는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가 있다. 그리고 하서면 백련리에
왜몰치(倭歿峙), 보안면 우동리에 반계선생유적지
(磻溪先生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계화면 계화리에 간재선생유적지
(艮齋先生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하서면 청호리에 고홍건신도비(高弘建神道碑,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부안읍 봉덕리에 이매창묘
(李梅窓墓,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등의 유적이 있다.
........................
![[ 위도의 문화] 칠산(七山)바다 / 위도의 전설](https://t1.daumcdn.net/cfile/cafe/2434633C58EDC9B115)
![[ 위도의 문화] 칠산(七山)바다 / 위도의 전설](https://t1.daumcdn.net/cfile/cafe/243D534959428FF708)
위도
![[변산여행]초록길 따라 내변산 산행, 부안삼절 직소폭포](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blogthumb2.phinf.naver.net%2F20140521_72%2Fdrm21c_1400645586440nCfiT_JPEG%2F1.jpg%3Ftype%3Dw2)
조기




고군산군도.,선유봉 & 칠산어장

2015.05.24 법성포.,칠산어장 조난 위령제

법성포.,칠산어장 조난 위령제


.....................칠산어장 놀이........................
조기잡이 유명한 칠산어장은 밑으로 안마도로부터
위로는 비안도에 이르고 위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특히 위도 아래쪽 형제도 일대가 칠산어장의 중심지.
칠산어장놀이는 조기잡이와 관련된다.
조기어군은 동중국해에서 서해로 올라오는
회유어종으로 흑산도 및 홍도 어장을 거쳐서
전북 부안 앞바다인 칠산어장에 이르게 되며,
연평도로 올라가는데 여기서 잡은 조기들은
인근 법성포로 실려가 진상품 영광굴비가 된다.
따라서 칠산어장놀이에는 중선배에서
조기그물을 놓아 끌어올리고 고기를 퍼서
배에 실어내고 만선의 깃발을 올리면서
배치기와 함께 즐기는 노동과정이 모두 포함된다.
〈배치기소리〉
"칠산바다 다 벌어먹고/
어룡도 바다와 농장만친다/
배임자네 아주머니/
술동이 국동이 뒤집어 이고/
발판머리서 아기작거린다"
이와 함께 진행되는
배치기는 소리와 춤으로
어민들의 신명을 이끌어낸다.
칠산어장의 가장 큰 어항인 위도에서는
풍어를 기원하면서 매년 정초에 마을당산인
원당에서 지내는 당제와 더불어 풍어의 염원을
배에 실어보내는 띠뱃놀이도 전승되고 있다
..........................................................
.

법성포 물돌이





2017.05.02



![[영광법성포단오제]](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076%2F2004%2F06%2F09%2F46j80002_2.jpg)
![[전라남도/영광군] 법성포단오제 / 굴비축제(2011.6.3 ~ 2011.6.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blogthumb1.phinf.naver.net%2F20110602_163%2Fcswwins1_13069808318025zDtE_JPEG%2F1.jpg%3Ftype%3Dw2)


..........영광 법성포 단오제...........
법성포 단오제의 유래는 대표적으로
파시난장설(波市亂場說), 조창난장설
(漕倉亂場說) 등으로 압축된다.
법성포의 파시(波市)는
영광군 칠산바다, 즉 칠산도(七山島)와
위도(蝟島)에서 잡히는 조기어장 때문에
열리는 임시적인 난장(亂場)을 말한다.
난장은 조기의 상업적 거래뿐만 아니라
음식과 술, 윷놀이, 도박놀이류, 투전,
약장사, 고전무용경연대회, 국악경연대회 등
유흥과 놀이, 또는 공연예술을 모두
포괄하는 복합적 개념의 시장을 말한다.
법성포의 조창(漕倉)은
992년(성종 11년) 설치되는데,
인근 군현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저장했던 창고를 말한다. 이때 거둬들인
세곡을 물길로 운반하는 것이 조운(漕運).
조운선이 돌아오는 시점에
숲쟁이에서 열린 대규모의 장 때문에
단오제가 생겼다는 것이 조창난장설의 핵심이다.
또한, 『세종실록』 영광군 기사에 의하면,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어선들이
이곳에서 그물로 조기를 잡는다고 하면서
동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조기가 산출된다고 한다.
단오제가 열리는 음력 5월 5일은
칠산탄의 조기어장이 끝나는 시점이고,
조운(漕運)의 세곡 운반이 마무리 되는 시기이며,
구암천(龜岩川)과 와탄천(瓦灘川)
주변 평야의 파종도 끝나는 때이다.
이 시기 지역주민들은
생산과 유통에 대한 감사와 축하를
기념하기 위해 단오제를 거행해 왔다.
시기별로 볼 때,
법성포단오제는
1637년부터 지역축제로
시행되어 오다가
1907년 중단되었고,
1946년 다시 거행되었다.
그 이후에도
그네타기 행사 중
발생한 인명사고로 인해
1976년 중단되었다가
10년 후인
1986년 복원되었다.
이후
1989년 제1회 법성포단오제가 열려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201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주요 연행종목은
난장트기, 용왕제, 선유놀이,
전국숲쟁이국악경연대회 등이다.
『법성향지(法聖鄕誌)』에 의하면,
세습무계 출신인 김앵순(金櫻順, 1919~1995)
무녀와 그의 남편 김성락 등이 용왕굿을 맡았다고 한다.
그 이후 최정옥 무녀가 그 뒤를 이었고,
그녀의 사망 이후 김명자·최용 일행이 맡았다.
현재는
광주의 세습무계 출신인
이장단·박영태 부부가
굿을 맡고 있다.
한편,
진내리 출생 신명희(申明禧, 1907년생)의
『법호견문기(法湖見聞記)』에 의하면,
구한말 이후 매년 5월 5일이 되면
수정(藪亭, 숲쟁이)에서 판소리,
입창, 좌창, 시조, 땅재주, 줄타기,
그네 등의 경연대회를 열어
명인명창을 뽑는 행사를
거행했다고 한다.
법성포단오제에는
인의산에서 지내는 ‘산신제’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서 지내는 ‘당산제’,
그리고 ‘용왕제’와 ‘무속수륙재’ 등 네 가지 의식이 있다.
‘산신제’는
인의산(仁義山)에서
매년 축제가 시작되는 날,
마을 수호신인 산신에게
재앙과 환난을 예방하고
풍요를 빌기 위한 제사이다.
‘당산제’는
할아버지당산에서
유교식 제사로 먼저 모시고 나서
할머니당산으로 가서 간단하게 마친다.
이 의식에는 농악대와 광대재인들과
지역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당산제는 원래 정초 지내오던 동제였지만,
현재는 법성단오제에 한 행사로 차용되었다.
‘용왕제’는
제관들에 의한 선상에서의
유교적 의례가 끝나면 무당들이 굿을
주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의례의 목적은
용왕신에게 풍어와 안전한 조업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굿의 형식은
호남의 전통적
무계 출신이 진행하는
씻김굿의 형식이다.
용왕제의 절차는
안당, 초가망석, 용신굿,
용왕고풀이, 선왕굿, 제석,
용선 띄우기 등이다.
‘한제’는
한스럽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으로,
거행했으나 2008년부터
전금순의 주도 하에
‘무속수륙재’로
대체되었다.
‘무속수륙재’ 역시
한제와 마찬가지로
한스럽게 죽은 영혼을 위해
연행되는 의식이다.
법성포단오제가
위와 같은 의식적인
행사인 동시에 줄타기,
판소리, 민요, 농악, 전통무용
등의 전통예술이나 기예의 공연이나
경연대회로서의 성격과 그네뛰기, 널뛰기,
씨름, 줄다리기 등의 대동놀이나
경기대회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 이외에도 놀이와 체험행사,
그리고 다양한 부대행사도 마련된다.
선유놀이, 그네뛰기와 씨름,
창포머리감기체험, 쑥떡메치기,
공옥진창무극공연,
법성굴비아가씨선발대회
등의 행사가 그것이며,
윷놀이를 하는
야바위꾼 등도
참여한다.
선유놀이는
계원인 유지 부인들이
‘걸래’라고 부르던 땔감 운반용
나룻배를 타고 법성진에서 은선암 주변을
돌거나 바닷가를 돌며 음식과 함께 가무를 즐겼던
놀이이고, ‘칠산어장놀이’는 조기잡이를 할 때에 불렀던
배치기, 뱃노래를 근거로 근래에 공연화한 놀이다.
‘국악경연대회’
역시 법성포 단오제
기간 중에 열리는 중요한
행사의 하나로서, 전국적
규모로 성대히 치러지고 있다.
법성단오제의
후원조직으로는
백목전계(白木廛契)와
보부상단을 들 수 있다.
법성포의 난장기에 걸리는
패랭이와 짚신, 백목 등을 보면,
후원조직의 표상을 알 수 있다.
행사기간은
난장기를 세우는
시점으로부터 대략
한 달여 동안 진행되지만,
주요 행사기간은 주로 4~5일 정도다.
2006년도에는
5월 28일(일)부터
5월 31(수)까지
4일 동안 치러졌다.
주관단체는
영광군,
영광법성포단오제보존회,
영광문화원 등이다. 그 밖에도
지역주민회와 영광농악보존회 등
다양한 지역단체들이 행사에 참여한다.
2006년 행사의 종류는
전국영광굴비골마라톤대회,
굴비시식회, 학생굴비체험학습,
산신제(인의제), 길놀이, 당산제,
용왕제, 선유놀이, 연등행진, 한제,
전국국악경연대회, 창포머리감기체험,
쑥체험, 그네뛰기대회, 씨름대회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행사들이 개최되었고,
행사장소로는 숲쟁이공원, 법성포구, 기타 영광군 일대.
법성포 단오제의
성격을 세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대동놀이적 행사로서
파시난장·단오난장·줄다리기,
해양축제적 행사로서 선유놀이·칠산어장놀이·용왕제,
예능축제적인 행사로서 농악·무당굿 등이 그것이다.
법성포단오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
다산, 치병, 등의 마을수호와
화합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가지면서
마을 공동체 문화로서 역할을 담보하고 있다.
단오제 기간에 거행되는 의식 중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된 제의는 용왕제뿐이다.
용왕제는
선상에서
유교식 제사와
무교식 굿으로
이루어지고,
선유놀이와도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그렇지만,
‘당산제’나
‘산신제’는
시기적으로
단오제 기간과
맞지 않은 제의였고
‘무속수륙재’ 역시
그 연원을 밝힐 수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단오제의 규모와 성격에
부합하기 때문에 단오제
의식으로 거행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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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굴비..................
동중국해 부근에 서식하는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에서 겨울을 보내고
난류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온다.
추자군도 근해를 거쳐
4월에 영광의 칠산 어장에 이른 조기는
6월에 연평도를 지나, 7월에는 평안 북도
해안으로 올라가 여름을 지낸 다음 다시 남하한다.

그런데 4월 무렵에
칠산 어장에서 잡힌 조기는
알을 낳기 직전의 것으로,
금빛 몸에 기름기까지
자르르 흐른다.
조기를 소금에 약간 절여
말린 것을 굴비라 하는데,
영광 굴비는 예로부터 임금에게
바칠 정도로 맛과 영양이 뛰어나다.
근래에는 어획 기술이 발달하여
조기가 칠산 어장에 오기 전에 잡아
영광 굴비의 수효가 많이 줄었다.
조선시대의 지리책 <동국여지승람>에는
조기가 영광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영광 굴비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 인종 때부터였다. 인종의 외조부며
장인 이자겸은 왕위를 빼앗으려다가 실패,
영광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자겸은
영광에서 조기의 맛을 보고
감탄하여 인종에게도 바쳤다.
그 후 영광 굴비는 해마다
임금 에게 바치는 진상품이 되었고,
단번에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또한 조정에서는
영광 굴비를 멸리
중국에까지 공물로
보냈다고 전한다.
.......................

법성포

법성포









.
......법성포 & 칠산바다......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포구
법성포는 조기로 유명하다.
칠산 바다와 법성포구의 조기 파시는
말 그대로 돈이 넘치는 어물시장이었다.
법성포는
서해에서 가장 품질 좋은
조기가 잡히는 칠산 앞바다에서 들어오는
조기배로 파시를 이루었기 때문에
“영광 법성으로 돈 실러 가세”
라는 말이 〈뱃노래〉로 불릴
정도로 많은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매우 번창했던 포구다.
법성포는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본과의 해상 교통로에 위치했던
우리나라 서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에 위요되어
아늑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법성포는
매우 특이한 경관을 보여주는 해안마을.
법성포의 포구에서 마을 뒤편을 두르고 있는
능선을 바라보면 지평선에 가로로 길게
조성되어 있는 수림대를 볼 수 있다.
영광의 명소
‘법성진 숲쟁이’.
고려시대 이래
전라도에서 가장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인의산 자락의
잘록한 능선과 법성진성(法聖鎭城)
위에 조성된 숲이다.
‘숲쟁이’란 숲정이의 사투리로
마을이나 도시 근처에 특별한 목적으로
조성된 숲을 의미하는 용어다. 또한 ‘쟁이’란 재,
즉 성(城)을 의미하는 어휘로도 쓰여 ‘숲쟁이’는
숲으로 된 성을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도시의 허파와도 같은 도시녹지,
혹은 도시공원과 비교되는 공원녹지로서
전통마을의 시설로 친다면., 곧 마을숲.
본래 마을숲은
대부분 마을이나
도시의 입구,
혹은 물이 흘러
나가는 곳에 수구막이로
조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법성진 숲쟁이는
특별한 위치에 아주
특별한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 숲은 법성포 마을에서
홍농 방향으로 연결된 도로의
고갯마루 부분에 좌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법성리와 진내리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법성포의 후면을 두르고 있는 산세는
인의산을 시작으로 좌측 능선이
대덕산 방향으로 이어지고 우측 능선은
진내리 방향으로 뻗어 내린다.
서쪽의 진내리 방향으로
인의산의 자연림이 끝나는
남쪽 부분에서 시작되는
숲쟁이는 차도가 가로지르는
부분까지 완만한 하향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다.
또한 다시 도로 건너편으로
연결되어 오르막 경사로 이루어진
산 능선을 따라 길게 선형으로
마치 두 개의 산을 연결하듯이
숲이 형성되어 있다.
산 능선을 따라
형성된 마을숲으로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다.
이 숲은 본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데
지방도로가 개설되면서 두 개로 나뉘어져 현재는
도로 위에 놓인 부용교가 숲을 연결하고 있다.
진내리 능선 위에 식재된 숲쟁이는
특이하게도 법성진성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데
1514년(중종 9) 이 성을 축조할 때
함께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법성진성의 윗부분에
줄지어 서 있는 수림대는
성이 끝나는 산 아래까지 심겨져 있고
전체 길이가 300m에 달한다.
수종은 느티나무가 가장 많고
그밖에 팽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다소 섞여 있다. 그러나 진내리 능선의
법성진성을 따라 심겨진 나무는 곰솔이 대부분.
아마도
느티나무, 팽나무
등의 활엽수를 대체해
근래에 새로 심겨진 것으로 보인다.
마을숲은
일반적으로 휴양 위락의 기능을
수행하는 마을공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을숲에는
공원 시설이 형성되는데 법성진 숲쟁이에도
와우정과 부용교를 비롯해 다양한 시설이 조성되었다.
진내리 방향의 숲에도 야외무대, 그네,
씨름장과 같은 시설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숲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과도한 시설들은 철거되었다.
일반적으로 마을숲은 마을의 고유한
문화 활동의 장소로서 기능한다.
그중 가장 많이 행해지는 것이
마을제사인데 보통 공동 의례로 행해진다.
그래서 마을숲에는 성황목, 제각, 장승, 솟대,
돌탑처럼 마을의 문화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시설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다. 법성진 숲쟁이에도
이처럼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문화 요소가 존재하고
마을제의 또한 행해지고 있다.
이 숲에는
진내리 방향에 당산이 있고,
숲 내에서는 매년 음력 5월에
유명한 법성포 단오제가 거행된다.
법성포 단오제는
400년을 이어온
서해안 최대의 단오절 행사로
강릉 단오제와 함께
동서 단오제로 쌍벽을 이루는
전통제의이자 축제다.
조선 중기부터
매년 시행된
전국 규모 행사.
법성포 단오제가
이토록 규모가 큰 행사로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법성포에
호남 지방 전역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조창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봄이면 서해안 최대의 조기 파시가 열려
수많은 상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법성진 숲쟁이는 방풍의 기능도 하고 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아울러 마을의 경관을
아늑하게 만드는 풍수적 장치와 아름다운 경관을 위한
풍치 목적으로도 조성되었다. 또한 거대한 노거수의 숲을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놀이와 휴식,
문화행위를 수용하는 장소가 되었다.
숲쟁이를 주무대로 한 단오제는
오랜 세월 동안 법성포의 축제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장구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1907년경
일제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어
그 맥이 끊어졌었다.
조창이 있던 법성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가 자주 발발하여
취해진 일본의 강압 때문이었다.
거의 40여 년간
단절되었던 단오제는
광복 후 1946년에 다시 부활했다.
단오제는
용왕제, 인의제,
당산제 등의 제의행사로
먼저 시작된다.
제의를 드리는 절차가 끝난 후에는
선유놀이, 공연, 투호, 그네뛰기, 씨름,
제기차기 등 다양한 행사가 이어진다.
선유놀이는
조세를 실어 나르던
수십 척의 배가 동원되어
선상에서 풍악을 울리며 즐기는 뱃놀이로
조선시대부터 법성포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놀이다.
법성은
불교 전래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백제시대 불교가 처음 전해질 때
법성포구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 존자가
실크로드와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해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한 곳이 바로 법성포다.
법성포의
백제시대 지명은
아무포(阿無浦)였다.
이것은
마라난타가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래한 포구라는 것에서
연유했으며, 그 후 성인이
성스러운 법을 전한 포구라는
뜻의 법성포(法聖浦)로 다시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는
법성진성과 마을숲이
어우러진 전통문화 경관.
다양한 문화적 의미가 깃들어 있는 숲쟁이는
법성포와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영광의 단오제가 행해지고
조선시대 수군진의 모습을 보여주며
파시로 번창했던 포구의 영광을
전해주는 의미 깊은 장소다.
이러한
영광의 지역문화를
잘 보여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가꾸어야 할
소중한 역사 · 문화
명승인 것이다.
.....................


부안군


부안군.,쭈꾸미산란 서식장.




2011.9.21 위도 해수욕장., 백건우 피아노 콘서트
![[길따라 멋따라] '홍길동이 꿈꾼 그 섬'..전북 부안 위도](https://t1.daumcdn.net/news/201707/29/yonhap/20170729070113500dgxt.jpg)
![[길따라 멋따라] '홍길동이 꿈꾼 그 섬'..전북 부안 위도](https://t1.daumcdn.net/news/201707/29/yonhap/20170729070112887pcwf.jpg)


밤새 걷기 축제.,'달빛 속 상사화 꽃길을..'











부안 위도 망월봉 상사화





2015.8.29 '달빛 속 꽃길 걷기 축제'(부안 연합뉴스)
위도상사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늦여름 밤 파도 소리를
벗 삼아 달빛 속 오솔길을 걷는 감성축제가 위도에서 열린다











.....................위도(蝟島).....................
고슴도치 모양이라 하여 위(蝟)자를 붙여.,위도(蝟島).
실제 모델로 알려질만큼 풍요롭고 아름다운 섬.
위도 근해는 서해 고기떼들이 집결하는 황금어장.
찾아와 파장금항에 파시(波市) 형성.
경관이 아름다운 사실은 덜 알려졌다.
등 수려한 해안 절경이 섬 곳곳에 산재해 있다.
차를 싣고 들어가면 섬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옛 관아가 지금도 남아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를 한다.
대통령상을 받고 널리 알려졌다.
* 위도해수욕장 - 부안군 유일한 해수욕장
1km에 달하는 모래사장과 멀리 보이는 왕등도.
아치형 해수욕장은 마치 소쿠리안처럼 아늑한 느낌.
여름철 가족단위 피서에., 안성맞춤.
바다낚시, 해수욕장 일몰 풍경도 일품.
* 내원암 -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추정.
아들 낳기를 기원했다는 소지부인의 설화.
기원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미영금해변 - 전막리에서
넓은 모래사장이 있는 미영금해변.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
인근 갯바위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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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팔경.........................
①內院慕鍾(내원모종) - 내원암 은은한 저녁 종소리
②井金炊煙(정금취연) - 정금 저녁밥 지을때 솟는 연기
③食島魚歌(식도어가) - 식도 뒤 두멍골 그물올릴때 노래.
④望峰霽月(망봉제월) - 망월봉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 모습
⑤鳳山出雲(봉산출운) - 진리 앞바다 아름답게 출렁이는 물결
⑥船所歸帆(선소귀범) - 벌금 돌아오는 조기잡이 돛단배 모습
⑦旺燈落照(왕등낙조) - 왕등도로 지는 붉게 타는 저녁노을
⑧龍淵漲潮(용연창조) - 진리 앞바다에 출렁거리는 물결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서쪽으로 14㎞.
격포항에서 정기여객선으로 50분 거리.
서해안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중요 요충지.
조선시대 해군무관 첨사 수군첨절제사 주재.
중요한 해상 군사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제일 먼저 닿는 곳이다.
한때 대규모 '조기 파시'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다.
위도 남쪽바다가 조기잡이 보물창고였던 칠산어장.
황해를 거슬러 올라 산란길에 오른다.
4월은 영광과 위도 근해의 칠산어장.
연평도와 황해도 장산곶에 이르러 알을 낳는다.
휴식을 취하면서 배와 그물, 어구를 손질했다.
일대가 불야성을 이뤘다고 한다.
파장금에 몰려 들었다.
한국인이 경영한 음식점이 35개나 됐다.
위도의 파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변했다.
문을 열었고 파장금항은 소도시를 이뤘다.
1100척 고깃배가 건져 올린 조기는 4000만 마리.
염장 가공돼 '영광굴비' 브랜드로 전국에 판매.
그러나 이는 40년전의 일로 다 꿈같은 이야기다.
파시가 사라진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조기가 많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된 것도 한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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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막리 마을에서 바로 언덕만 넘으면
위도 띠뱃놀이로 유명한 대리 마을이다.
약 6㎞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큰 마을로 발전.
폐교가 됐다.
마을 안쪽에 보면 전수관이 두 채.
다목적 전수관'이다.
기원하는 굿으로, 대리 마을에서 매년 1월초에 열린다.
많이 잡히는 마을 앞바다에 띄워 보내는 풍어제다.
원당제라고도 한다.
안전을 기원하는 어민들의 신앙심이 담겨져 있다.
어부와 선원들이 탄다.
등 뱃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신명나는 굿판을 벌인다.
손꼽아 기다린다.
하나 되는 대동화합의 축제 한마당을 연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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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의 치도리 마을 앞에는
'딴치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그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진리에 있는 '서해훼리호참사위령탑'이 그것이다.
수장된 해난사고.
대형 풍랑사고였다.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
위도-곰소간 여객선 사고다.
임수도와 격포 근해에서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두 명만 생존했다.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청천벽력 같은 사고는 또 일어났다.
큰 인명피해를 낸 1993년 서해훼리호 사건이다.
그날 배에 승선한 인원은 무려 362명.
정원보다 141명을 초과했다. 그 중에서
생존자는 70명, 사망자는 292명이었다.
사건이었다.
모진 슬픔을 당한 통한의 현장이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직전까지만 해도
고기잡이도 번성해 살 만한 섬이었다. 그러나
사고후 위도는 한동안 '비극의 섬'으로 추락했다.
위도 사람들에게 아직도 사고 상처가 깊다.
서해훼리호 위령탑이 상처처럼 서있다.
새겨져 있다.
혼자 막다가 여러 번 참사를 당했다.
바다가 풍요로움을 주기도 한다.
여행자를 감탄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해변이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주민들이 정답기만 하다.
사실을 모를 것이다.
여기를 거쳐 가는 수많은 여행자들은….
거듭나길 기대하며 섬을 떠난다.
덧 말.
‘파시의 전설’ 위도의 한 단면을 놓치고 갈 수 없다.
마치, 1950/60년대 영화 세트장을 옮겨다 놓은 듯한 거리.
황금기를 구가했던 파시시절 위도 뒷골목 미로.
폭 1~2 m 양쪽으로 요릿집, 여관, 술집, 상점 등.
조기를 가득 싣고온 각지 배에서 내린 어부.선원들.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돈을 뿌렸다.
전국에서 모여든 술집 색시만 4~5백명.
서울보다 땅값, 건물 임대료가 비쌌단다.
흘린 돈다발이 동네 녀석들에겐 요긴한 용돈이 된 것.
이곳에서는 1950년대 있었다고 한다.
'흑산도, 연평도, 위도'였다고도 전한다.
....4대 파시.....
위도 조기파시.
...................
삼치파시.
이는 근래에 생긴 것.
파장금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위도에 관한 최초 기록.
“위도 주위 30리 어량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시 위도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習俗例多如蛋子 습속예다여단자
縣封誰信自蠶叢 현봉유신자잠총
‘풍습은 옛 단자족(베트남 등 남쪽 해상 민족)과
오래임을 누가 믿으랴’. 그 옛날, 근래처럼 전국적인
‘개경 사람’ 이규보의 눈에는 특별했을 것이다.
위도가 ‘야생’ 어촌에서
조선 숙종 8년, 1682년.
위도 관아가 들어선 해.
해상 경비와 치안을 맡았다.
민간까지 다스리는 3권을 담당.
집합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동헌만 남아 있는 상태.
그나마 옛 위도 관아는 남아있다.
오히려 보존될 수 있었던게 아니냐는 의견 제시.
고창이나 흥덕만 가도 관아 건물이 다수 남아있다.
반면, 부안의 관아 유적이 이곳 하나 밖에 없다.
부안읍 지도를 포함해 세 곳이 빠졌다.
그 앞에 전선들이 정박.
칠산, 그리고 식도.
자세히 기록한 지도를 만들게 한.,부안위도진지도(鎭地圖).
당시로는 비교적 정교한 군사지도.
위도 관아를 비롯해 각 지역이 정확히 표기.
군사 250명, 전선 2척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거륜도, 내원암 등 현재의 위도 각 지명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않았다는 점이다.
연관성은 없겠지만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