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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며,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사도행전의 말씀 5,27-33>
그 무렵
27 경비병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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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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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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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진리는 자신의 아름다운 나신(裸身)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각별한 애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대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진리는 자신의 아름다운 나신(裸身)을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드러냅니다.”
참으로 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돼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진주의 가치를 파악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신이 지닌 에너지 100%를 온통 세속적인 것, 육적인 것에만 퍼붓는 사람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영적인 것의 가치, 신앙의 진리를 깨우칠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신앙의 진리를 온몸으로 깨우쳤던 몇몇 성인들께서 지닌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들의 생애에서 하느님은 멀고도 먼 당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관계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잠시라도 못 보면 죽고 못하는 연인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과 하느님 사이에 오갔던 사랑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이 강렬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절실했던지 사람들이 약간 맛이 간 사람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그들이었기에 하느님에 대한 표현도 절절합니다.
저의 살레시오회 안에서 거의 살아있는 성인(聖人)으로 칭송받고 있는 원선오 신부님께서는
미사를 집전하실 때 얼마나 미사에 몰입하셨던지 가끔씩 황홀경에 빠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한 동안 미사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 가운데 몇몇 사람은
큰 감흥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미사로 인해 신앙을 되찾거나 개과천선하기도 했습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성체성사는 그저 마지못해 해치워야 하는 의무적인 과제일 뿐입니다.
이런 분들,
미사 시간이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미사에서 오는 감동도 전혀 없습니다.
삶의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 성사의 소중한 가치를 터득한 사람에게 있어
미사는 행복의 원천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미사는 이 세상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들은 미사를 통해서 매일 생명의 에너지를 부여받습니다.
이런 분들 미사 때 얼굴빛이 다릅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입니다.
신앙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참사람,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일부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존재 전체를 사랑합니다.
그의 잘생긴 코와 입, 큰 키만 골라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성공, 건강, 좋은 학벌, 잘나가던 탄탄대로의 시절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실패와 좌절, 방황, 건강이 악화된 그의 모습,
하루 하루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죽어가는 그의 모습조차 사랑합니다.
그의 존재 전체, 인생 전체를 사랑합니다.
그가 변해도 상관없이 그를 사랑합니다.
그가 끔찍한 화상을 입어도 그를 사랑합니다.
그가 꼬부랑노인이 되어도 그를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떠나가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배신자의 길을 걸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볼품없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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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그러니까 2박3일간 여행을 떠났습니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비롯해서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하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20일 아침, 설레는 마음을 갖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비행기가 바람 때문에 결항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급하게 제주도 가는 것을 포기하고 강원도로 장소를 바꾸었지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여행을 위해서 제가 많은 것을 준비했거든요.
인터넷과 서적 등을 통해서 제주도 여행 정보도 많이 알아두었고,
또한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제주도에 사는 신부님께도 특별히 부탁을 했거든요.
그런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강원도로 장소를 바꾸게 되었으니 왜 아쉬움이 없겠습니까?
더욱이 강원도에 급하게 잡은 숙소에서는 인터넷을 할 수가 없어서
새벽 묵상 글은 물론 아침문자를 발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하고, 또한 계획한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지요.
그런데 제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디를 가든 무슨 상관이니?
지금 우리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원래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더 좋겠지만,
가족이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원래의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 하나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득 부차적인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지금 내 삶 안에서 이루어야 하는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 한 분이 되어야 하고,
그분께 기준을 맞추어 살아가면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의 것들이 없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시기에,
주님을 따라 그리고 주님처럼 사는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끝나지 않는 생명,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따라 어떤 생명을 얻게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선택을 위해서는 어떤 것을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요?
세상의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입니까?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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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
저는 어렸을 때 매우 시골에 살았습니다.
시골인데다 비행장이 가로막혀 있어서 전기까지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덕분에 제 나이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때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예로, 텔레비전을 보려 해도 그 전에는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하여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배터리를 자전거에 싣고 배터리 충전하는 곳에 가서 얼마의 돈을 주고 충전하여 다시 가져옵니다.
한 일주일 정도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양 옆에서부터 시작하여 화면이 조금씩 검어집니다.
배터리가 다 됐다는 증거입니다.
조금 더 있으면 화면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배터리를 싣고 충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꼭 재밌는 프로가 시작되려할 때 그렇게 배터리가 다 되어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충전한 만큼만 불을 켜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자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온 가족이 전기밥솥 앞에 앉아 밥이 저절로 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습니다.
배터리를 충전하러 갈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끔 전기가 나가면 암흑으로 바뀌고 다시 초를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가 연료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에너지를 충전한 만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연료가 없는 자동차는 아무리 고급차라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에너지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에너지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고
그 에너지를 부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라.”
즉,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성령의 에너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전기 끊어진 집처럼, 연료 없는 자동차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도 나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사랑해야 행복한 것은 알지만
사랑하기 위해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우리 마음은 마치 기름통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사랑 없는 죽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한 신부님께 이렇게 고해했다고 합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다 싫은데, 그 중에서 특히 몇몇은 더 싫어요.”
그 자매는 단 한 명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 안에 사랑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없으니 사랑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에너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아들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그만큼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 즉 성령님을 부어주셨고
그 성령님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를 아무리 해도 사람이 용서되지도 않고 사랑하기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보다도 나의 마음이 상처 나서 깨져 있지는 않은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악습으로 인해 나의 마음의 그릇이 깨져있지는 않은지 먼저 돌아보고
깨끗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만큼의 성령님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내 힘으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내가 하느님이 되는 교만함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고 그만큼 행복하기 위해서
먼저 나를 깨끗이 해주시기를 그리고 성령님을 충만히 보내 주시기를 청합시다.
- 로마 유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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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의 묵상글 *
<위에서 오시는 분>
인간을 소우주라 한다.
즉 인간은 신비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인간을 논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일 뿐일 것이다.
소우주인 인간은 육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 그리고 영적인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차원 중에서 육적인 차원이 가장 하위 단계요,
정신적인 단계가 그 다음 단계이며
영적인 차원이 가장 높은 단계이다.
육적인 차원은 정신적인 차원을 지향하고 있고
정신적인 단계는 영적인 차원을 지향하고 있다.
즉 육적인 차원은 정신적인 단계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고
정신적인 단계는 영적인 차원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지향하고 있듯이
하위 단계는 그 상위 단계를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즉 인간은 육체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지향하는 목표이며 삶의 방향이다.
이런 상향 지향적인 삶을 살지 않고
하향 지향, 즉 가장 낮은 단계인 육체적인 만족을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는 삶을 살아갈 때
스스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가 정신적인 것을 지향하고
이성과 정신이 영적인 것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의 질서이며 균형이며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성가가 있듯이
인간은 늘 높은 곳, 즉 하느님을 향한 삶을 살아갈 때
인간다워지고 영적으로 발전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을 닮아간다.
반대로 상위 단계의 것이 하위 단계를 위해서 사용되어질 때
그것은 역행하는 일로서 잘못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정신적인 수양은 쌓지 않고 매일 먹고 마시는 일에만 모든 시간을 낭비한다면
점점 더 메말라가고 황폐해져 몸은 몸대로 병들어가고 정신은 공허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삶은 상위 단계에 있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들이
모두 육적인 차원을 위해 희생당하는 것이고 육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로서
이는 인간이 총체적으로 병들어 가는 것이다.
정신적인 차원은 영적인 것을 지향해야 한다.
즉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지성은 단순히 자신의 어떤 지식이나 학문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차원, 즉 영적인 차원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지성을 주신 것은
당신을 알고 당신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지성은 하느님을 지향해야 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사용되어져야 한다.
하느님을 외면한 단순한 지적인 욕망은
자칫 잘못하면 바벨탑을 쌓는 것처럼 하느님을 배제하기 쉬우며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이런 오만함과 교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며 지식의 남용이다.
영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는 그 어떤 정신적인 차원의 사용은
인간을 병들게 만들며 또 다른 우상을 만들 수 있다.
하느님은 세례성사 때에 우리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주셨다.
우리는 성령이 거처하시는 성전이다.
성령, 즉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하느님이 계신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은 모두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눈동자가 당신을 찾고 있나이다,
오, 주님이여." (시편 104)
라고 노래한대로 하느님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성바오로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로마 10,31)
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세상에서 난 사람은 세상에 속하고 세상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는 말씀에서 "세상에서 난 사람"이란 육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세상일에만 매여 있는 사람으로서 하향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는 말씀은 가장 높은 차원인 영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에서 난 사람"과 "위에서 오시는 분"과는 분명히 다르다.
마치 기차 레일이 평행으로 달리지만 한번도 하나로 맞닿지 않듯이
세상에서 난 사람의 삶과 위에서 오시는 분과의 삶은 서로 일치하지 않고 늘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따라서 세상에서 난 사람이 영적인 차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육적인 차원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로 상위 단계로 진입할 수 없으며 하느님을 닮을 수 없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만이
육적인 차원의 삶을 포기할 수 있고 하느님을 닮을 수 있다.
즉 영성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 것에서 헤어날 수 없으며
상위 단계로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없다.
한평생을 살면서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며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록 육적으로 조금 덜 먹고 가난하게 살다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행복을 맛보며 사는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 것에 맛들인 사람은 세상 것을 포기하기가 어렵지만
영적인 맛을 본 사람은 세상 것을 포기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살려고 하고
세상 것보다는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세상 것을 얻는다는 것은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반대로 영적인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무엇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 오히려 가진 것을 버리고 빈 가슴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도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이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마태 5,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위에서 주시는 은혜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즉 인간은 세상 것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시는 은혜 즉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
즉 빈 가슴을 가득 채워 질 수 있고,
가난한 마음을 부유하게 될 수 있고,
공허한 마음을 넉넉한 마음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말씀은
아드님, 즉 예수님과 일치한다는 것이며
예수님과 일치한다는 말은 말씀 안에 거처한다는 말이며 말씀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말씀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위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되새김하며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나와 세상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말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받아들일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위에서 오시는 분이 내려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 전 성바오로수도회 관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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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믿음의 열매>
믿음의 열매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본능적으로 위를, 하늘을 향합니다.
미사 중 감사송 서두 대목이 생각납니다.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립니다.”
주님께 부단히 우리 마음을 드높이는, 업그레이드시키는
은총의 미사 시간입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나,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
땅에서 났으나 세례를 통해 위에서 난 우리들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을 찾습니다.
위의 하늘에서 오시는 그분을 향하여
부단히 업그레이드해가는 우리의 영성 생활입니다.
우리의 모든 공동전례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 분 손에 내 주셨습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받으신 아드님이십니다.
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께 한량없는 성령을 받으시는 아드님이십니다.
요한 사도가 증언하는 아드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입니다.
바로 이 아드님이 우리 구원의 열쇠입니다.
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아드님을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깊은 결속 관계의 현실적 믿음입니다.
이 아드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믿음, 희망, 사랑도 깊어져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자유로운 삶입니다.
바로 이게 영원한 생명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참으로 자유로워진 제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입니다.
대사제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사도들은 참 자유롭고 당당합니다.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듯 오히려 대사제가 사도들의 심문을 받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힘찬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우리의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얼마나 확신에 넘치는 성령 충만한 말씀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영원한 생명의 체험에서 터져 나오는 힘찬 말씀입니다.
매일의 이 복된 미사 시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어
오늘 하루도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시편 34,2ㄴ).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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