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윤심덕 / 출생 : 1897년 / 사망 : 1926년 8월 4일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경력 :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유학, 1925년 토월회 배우
특이사항 : 극작가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투신 자살
작품 : 발매앨범 '사의찬미'
여성개척자 윤심덕
윤심덕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이었고, 최초의 여류성악가였으며,
최초의 대중가수, 당대 최다 음반판매량 보유가수, 방송국 사회자, 그 시대의 최신 패션모델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는 대중의 관심속에 있었고 가장 성공적인 신여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 윤심덕이 1926년 서른살의 나이로 자살한다. 정확하게 그녀가 왜 죽었는 지를 기술하고 있는 자료는 없다.
심지어 그녀가 정말로 자살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살을 가장하고서 다른 곳으로 도피했는 지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확실하다고 말해질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녀는 극작가 수산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진 것으로 알려진 얼마 후에 그들이 이태리에서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신문과
잡지등에 소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윤심덕이 왜 자살을 했던지 간에, 그리고 그녀가 정말 자살을 했던 지 안했던 지 간에, 윤심덕의 좌절 은 그 시대를 살면서
자기 정체성 확립에 실패했던 우리나라 신여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윤심덕은 1897년 1월 26일 평양에서 기독교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윤심덕 위로는 언니 윤심성이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윤성덕, 남동생 윤기성이 있었다. 윤성덕은 나중에 소프라노로서 이화학당과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후, 1932년부터 1937년까지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에 귀화하여 1970년에 작고 하였다고
한다.
윤기성은 연전 문과를 나와 도쿄 음악학교와 미국 오하이오대 성악과에서 바리톤으로 공부한 후 해방 직후 미군정 체신부에서
근무하다가, 1950년 6.25 발발 직후 중앙청에서 차를 나오는 길에 인민군의 사격을 받고 즉사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가족 성원들이 줄줄이 이 땅에서 고종명하지는 못했으니, 사연 많은 집안이라고 아니 할 수 없겠다. 언뜻 보기에 평탄한 삶을
살았던 것 같은 윤성덕조차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1930년대 후반의 어느 친일단체에 이광수, 최남선, 방응모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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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은 1907년에 진남포 사립여학교에 들어가서 서양식 학교교육을 시작 한 후, 평양 사립 숭의 여학교, 평양 여자고등
보통학교를 다녔고, 나중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서 거기서 사범과를 우등으로 1918년에 졸업한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녀는 공부에만 능했던 것이 아니라, 찬송가와 창가 독창자로 주변을 압도하였고, 한편으로는 요리에도
능하고, 편물과 자수 등에도 능한 다재다능함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윤심덕은 키가 크고 목이 긴 매력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잡지에 의하면 그녀는 "스타일은 그야말로
동양여자로서는 구할수없는 맵시좋은 스타일의 소유자이다"라고 기술되고 있다.
미모와 다재다능함에 덧붙여 윤심덕은 성격마저도 쾌활하였던 모양인데, 아마 그녀의 지나치게 적극적이며 강한 성격이 자신의 인생을 통해 약도 되고 독도 되지 않았나 싶다.
잡지 신여성 1923년 10월호는 윤심덕이 "누구를 만나도 존경어를 쓰는 일이 별로 드물다"고 전하고 있다. 또, 조선일보 1926년 12월 26일자에는 그녀의 성격을 짐작케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언제인가 그야말로 육척이나 되어 보이는 몸에 옥색치마를 발 뒤축까지 끌고 평안도 수건을 맵시있게 눌러쓰고 평양 천지를 횡행하다가 종로 네거리에서 어떤 청년 남자를 만나서 평안도 사투리로 '야 오랍아 너 잘 있댔니'하고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았다"
이런 그녀의 성격은 "흐믈거리고 껑충"댄다고 평가되기도 했고, "다만 넘쳐흐르는 젊음을 어찌하지 못하여 그것을 써버리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고, 과잉한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면 참지 못한다"고 기록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마디로 그녀는 "왈패"라는 별명을 그 시대에 가지고 있었다.
1918년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서, 그녀는 강원도 원주로 발령이 났다가 석달 뒤에는 또 다시 횡성 벽지로
이동 발령을 받았는데, 평양여자고보 동창회 모임때 특별 내빈으로 참석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항의를 해서 춘천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니, 그녀의 당돌했던 성격을 짐작할 만 하다.
그녀는 한 때 연극배우로도 활약을 했었는데, 연극계로 투신하는 방식도 당돌했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어느날 극단 토월회 대표가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나는 평소에 연극에 관심이 많았고,
연극을 하고 싶으니 나를 만나서 판단해 보고 써주시오"라고 부탁하는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극단 관계자가 약속장소로 가 보니 그 편지의 주인공은 뜻 밖에 당대의 음악스타 윤심덕이었다고 한다. 윤심덕은 극단에
들어가면서 세 가지 조건을 걸었었는데, 그 중에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에 맞춰줄 것을 요구하는, 지금 우리 생각에는
기가 막히게 오만한 조건조차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대에 여자가 그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회 생활"이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을 것임은 누구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우진의 생애
김우진(1897∼1926)은 1920년대 대표적인 비평가이자 극작가로 평가받아 왔다.
안동 김씨 성규의 장남으로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김우진의 호는 초성(焦星) 또는 수산 (水山)이며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초등학교) 졸업에 이어 일본 구마모또농업학교를 거쳐 19세에 곡성출신
정점효(鄭點孝)와 결혼, 1924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1926년 8월4일 동갑나기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정사,
당시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졌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씨와 1남(방한, 2살), 1녀(진호, 8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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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후 목포로 귀향해 영농사업체인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창작활동에 몰두, 시(50편), 희곡(5편), 소설(3편), 평론(20편) 등 총 78편의 작품을 남겼다.
희곡분야는 그의 문학적 근대성을 작품으로써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장르라 할 수 있다.
「正午」,「이영녀」,「두더지시인의 환멸」,「난파)」,「산돼지」가 창작희곡이고
번역작품으로「위렌부인의 직업」이 있다. 특히「이영녀」는 3막극으로 목포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1926년에 쓴「난파」는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의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산돼지」는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하는 모습과 함께 그의 사상인 사회개혁을 역설하고 있다.
또 평론분야는 김우진이 이론으로 가장 탄탄한 근대성을 과시했던 분야다.
그 중「소위 근대 극에 대하여」,「자유극장 이야기」,「사옹의 생활」,「구미」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고,「창작을 권합네다」는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한데 이어 전통적인 인습타파를 작품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잡법이라는 논지를 폈다.
아울러「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아관 계급문학과 비평가」라는 논문을 통해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밖에도「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함」에서는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문전의 제정과 사전의 필요성, 구비전설과 민요, 동요 수집을 촉구한데 이어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 번역, 신문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이처럼 자기가 겪은 시대적 고통을 희곡 속에 적절히 투영함으로써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뛰어 넘은 표현주의작품으로 실험한 우리나라 유일의 극작가로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도 평가받고 있다.
목포시 김성규·김우진 박물관 추진
김우진의 유족들은 2002년 7월 김성규·김우진의 유품 모두를 목포시에 기증했다.
총 141점(김성규 초상화 3점 제외)인 유품 속에는 김우진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사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겠다고 기증을 요구했지만 유족들은 고향인 목포에 기증을 결정, 이에 따라 목포시는 현재 구 동양척칙회사 건물에 8억원의 예산을 들여 개보수 중이며 빠르면 금년 중에 개관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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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오사카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윤심덕이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노래를 취입하기로 되었을 때 피아노 반주는 동생
성덕이 맡기로 하였다. 성덕은 언니 노래가 취입되면 곧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이바노비치곡인 '다뉴브강의 물결'에 '사의 찬미' 가사를 붙여 레코드 취입]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 아느냐. ...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오사카 오카하루 여관에 집을 푼 윤심덕과 성덕 자매는 닛토 레코드 회사 다우치와 교섭 끝에 10여 곡의 취입을 끝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윤심덕 자매는 그 길로 요코하마에 가서 이별을 하였다.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 성덕은 윤심덕이 1921년 귀국했을 때 이화여전을 나왔고, 뒷날 梨專 끌리 클럽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윤심덕은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 곁으로 달려갔다.
죽음--.
그들의 만남에서 죽음 은 비롯되었고, 사랑의 밀어에서 죽음은 구체화되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의 영원함이란
곧 죽음 그 자체였으므로 죽음을 피한 사랑이 영원이란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길. 아, 그 길인가. 그 길이란 곧 신파조의 연극 대사만은 아니었다.
아니, 죽음 이전에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밀월 여행이었다.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레코드 취입료는 죽음행 열차와 배표를 사는 요금이 되었다.
"목포 오빠..... 도쿄서 시모노세키까지 해안선을 따라가며 해수욕도 하고 온천도 즐겨요.
이 돈이 바닥날 때까지........" 윤심덕이 속삭이면,
"조선으로 가는 배표는 사야잖아?" 하고 김우진은 부산행 배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 배표! 그건 배표가 아니에요."
"배표가 아니라며?"
"우리가 저 세상으로 떠나는 데 필요한 여행비예요."
" 여행비......"
그들은 30세의 젊음을 즐기고, 뉘우치고, 방황하면서, 시모노세키에 닿았다. 1926년 9월 3일. 부산으로 떠나는 연락선 도쿠슈마루 선객 명부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2목정 173번지 윤수선.
배가 떠나는 시각은 11시.
"생각나?..... 서울 수은동 60번지 오전 사진관 뒷방에서 밥을 사먹던 일......."
김우진이 갑판 위에서 어둠 속의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진관 뒷방에서 그들은 윤심덕의 라디오 출연료와 노래 부른 사례비로 겨우 살았다.
8 월 4일 새벽 4시. 죽음은 무릎 아래에까지 밀려와 있었다.
목포 갑부의 아들 김우진은 사진관 뒷방을 얻어 가지고 윤심덕이 벌어 온 돈으로 밥을 사먹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저 세상에도 그렇게 초라한 사진관 뒷방이 있을지 몰라. 우리 그런 방을 세 얻어서 한 천 년쯤 살아 보자."
어느새 한몸이 된 두 남녀는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밀어내고 있었다. 새롭게 열리는 두 사람만의 세계,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몸을 날렸다. "풍덩!" 하고 현해탄 검은 바다가 두 사람을 안아 들였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긴 돈은 총액 145원이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나이 30세. 두 사람의 정사는 신극사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