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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주일설교 고린도전서8:1-13
본문: 고린도전서8:1-13
제목: 자유에 대하여
오늘은 고린도전서8:1-13의 말씀을 가지고
“자유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자유에 대하여”
저에게는 단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어느 날 아내와 용인에 가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니 보기가 참 좋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곧바로 뭔 소리야
지금 눈이 오고 있는데!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하 하고 웃었을까요?
아주 엄청 깨졌습니다.
지적질 했다고 아내는 삐져서
나에게 화를 냈던 것입니다.
아 그래하고 지나갔으면 되는데
사실을 밝혀서 전혀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지나치지 못해서 지적질하여
아내를 속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 주었더라면
내가 지적질을 안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아내의 마음이 상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으로 믿고 인정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와 나의 생명으로 믿고 사는 자라면
마찬가지로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는
마음까지 하나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교회에 모여서 다투고
시험 들고 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대표적인 그런 교회였습니다.
어떤 것을 가지고 옳고 그르다고 다투고
그것 때문에 파가 갈라지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민낯을 보는 것 같은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정말 생명으로 믿지 안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성도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는 문제로 교인들끼리 싸우는
문제에 대하여 사도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장입니다.
고린도에는 고기를 시장에서 사 먹게 되는데
그 고기 중에 상당 부분이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그런 고기가 시장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고기를 먹으려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
고기를 먹는 꺼림직한 마음이 성도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들 중 이것은 우상의 제물이니까
먹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이 무슨 상관이야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으면 되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격렬하게 논쟁하고
다툼과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교회 생활하다 보면 논쟁이 되거나
다투는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기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우상에게 받친 재물에 관련한 성경적 지식을
4-6절까지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산이고 들이고 많은 우상들이 있지만
그래서 이것도 신이고 저것도 신이라도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은 사실은 거짓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해서 고기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게 성경적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올바른 지식만 가지고서는
교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기는 했는데
예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 지식 때문에 교만해지고
그 지식 때문에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사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이런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라는 도시가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곳이기에
어려서부터 우상숭배를 보고 자란 사람은
우상은 분명히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우상의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 꺼림직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에게 있어서는
고기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중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올바른 지식을
과시하려고 했는지 신전에 가서
거기서 고기를 먹는 일까지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교회 지도자급에
해당 되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지도자들이 먹는 그 모습을 보고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고기를 따라 먹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 마음은 이건 귀신에게 속한 고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우상숭배에 죄를 짓는 것과 같은
그런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0-11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식이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로마서14장에서도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믿음이 약한 사람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하였습니다.
예전에 믿는 분들 중에 제사 음식을 먹으면
체하고 속이 안 좋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꺼림직한 마음으로 먹으니
정상적으로 소화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롬14:2 모든 것을 먹을 만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 고기를 먹으니까
따라서 먹기는 하는데 마음에는 ‘아 이게 우상에게
속한 고기인데’이렇게 생각하면서 먹는 경우에는
그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롬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한 것은 다 죄니라”
올바른 지식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도 있고
또 아직까지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까지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논란이 많이 있다.
술 담배의 문제, 정치적인 문제 등
논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보다
그로 인해서 시험 들고 실족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관심사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단문제 교리 문제로
논란을 벌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올바른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특히 믿음이 약한 사람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영적으로 교만하지 않고
그 사람을 따듯하게 배려해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예수를 믿었다면 그게 정말이라면
분명히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야 합니다.
염소는 몸이 뜨거운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더운 여름이면
다른 염소와 붙어 있다고 합니다.
뜨거운 염소끼리 붙어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부사이도 여름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뜨거운 염소끼리 떨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름에는 붙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겨울에는 어떻습니까? 겨울이면 추우니 붙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반대로 할까요?
어떤 사람은 염소는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고 합니다.
더울 때 더 시원하게 있는 것을 못 보기에 덥게 해야 하고
추울 때 더 따뜻한 꼴을 못 보기에 춥게 해야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붙어 있고
겨울에는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나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염소는 저주를 받고 심판 받는 편이라고 하시고
양은 칭찬을 듣고 상급을 받는 자의 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염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끔찍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 속에 염소같은 마음이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엡4:15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오직 사랑안에서 자라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안에서 자라려면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만이 오직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오히려 망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올바른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은밀한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을 것이고 사람들과 불화하고 다툼이 있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악용한다면 그는 올바른 교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 올바른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준은 그 마음의 중심이
정말 예수님의 생명 주님의 사랑인가 다른 형제
다른 교인들에게 대한 배려 따뜻한 마음이 있는가입니다.
우리 교회 목적 중 하나는 사랑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
소문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소문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으로 소문난 우리가 될 수 있습니까?
서로 설득하고 설교하고 강조하고 구제하고 가르치면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지쳐서 할 수 없습니다.
구제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것 때문에
스스로 교만해지고 자랑하고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래 가지도 못합니다.
오직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길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하나가 되는 믿음이 분명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면
사랑으로 소문만 사람이 되고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와 같은 것이 됩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자유를 잃어 버리면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1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5:13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자유를 얻었다고 해놓고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런 모순되는 말씀과 같은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롬6:18에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에게 이제는 종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의에게 종노릇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와 마귀의 종으로
다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우리를 완전히 순종하기 위한 것은
우리를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제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우리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유를 얻은 것은
마음대로 살려고 자유를 얻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어기고 내 욕심대로 행하고
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그러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최상의 것을
얻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자유입니다.
우리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하는 자유!
내가 손해 보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주는 것을 위하여
내가 기꺼이 행할 수 있는 자유
용서하고 사랑하는 고난을 당할지라도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물고기는 바닷속에서만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을 부자유하게
얽어매는 것이 아닙니다.
물고기는 바닷속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물고기는 바다를 벗어나면 죽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것은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 즉시 모든 자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죄와 저주에서 자유를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이 시험 들지 않고
그가 환난 혼란에 빠지 않기 위하여
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 그분에게 죄를 짓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8:13절에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를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유를 얻었다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도 바울이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얽매이는 고백을 스스로 했습니다.
다른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시험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얼마든지 무슨 고기든지 다 먹을 수 있지만
영원히 나는 고기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으면서 어떤 느낌입니까?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구나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구나
그가 진짜 하나님의 성전인 사람이구나
예수님이 사도 바울의 마음에 계시고 그의 왕이 되셨구나 하는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놀라운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올바른 교리의 지식을 갖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교인이 되게 하려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온전히 친밀히 동행하고
마음에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그렇게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생활 중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정말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어서
가정도 교회도 우리가 경험하는
천국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주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을
정말 왕으로 모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가족을 바라보고
성도들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부어 주십시오!
정말 따듯한 마음으로
가족을 향하여! 교인들을 향하여!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눈으로 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귀로 바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기성목사님의 설교를 많이 가져왔습니다.)